2015-05-06

비평에 관한 두 개의 글




※ 사십대 초반이 되어 이십대에 쓴 글을 다시 읽는 건 당혹스러운 일이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렇다. 갓 마흔이 되었을 때, 이십대 시절 이런저런 잡지나 신문에 기고했던 글들을 "20대에 쓴 영화비평 원고들"이라는 이름의 폴더에 모아 두기는 했다. 언젠가는 보다 강한 마음가짐으로 돌이켜 볼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며칠 전, 이십대의 끝자락에 한 계간지에 기고했던 글이 아직도 온라인에서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적이 놀랐다. 계간 『영화언어』 2003년 겨울호에 실린 「영화비평의 '장소'에 관하여」가 그것인데, 이 잡지는 온라인으로 이 글을 공개한 적이 없는데도 대체 누가 일일히 타이핑해 올린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 분이 수고해주신 덕에 이 글이 아직도 읽히고 있는 셈이니 감사할 따름이다. 이 글은 몇몇 블로그와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데 최초 게시자의 것을 퍼 온 것으로 보이지만 그 최초의 게시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컴퓨터에서 해당 원고 파일을 찾아보니 마지막으로 열어 본 것이 2004년 1월 6일이라고 되어 있다. 기왕 다시 열어본 김에 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히 글을 다시 읽어 보았다. 짐작했던 대로 지금은 생각을 달리하는 부분도 있고 더 나쁘게는 오류도 군데군데 눈에 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얼마 간 기분좋은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었을 담대한 어조 탓인지) 이 글을 읽는 동안 이십대의 나에게 훈계를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는 점이다. 

서울아트시네마 '낙원동 시기'를 마무리하는 「아듀, 파라다이스」 상영전(2015.3.17~3.29) 당시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용철 영화평론가와 함께 '비평의 욕망'이라는 제목으로 좌담을 가졌었다. 지난 3월 22일 장-뤽 고다르의 <경멸> 상영이 끝난 직후였다. 그때 꺼낸 이야기 가운데 유독 "[영화]평론이 흥했던 적이 없는데 [영화]평론이 어떻게 몰락할 수가 있는가?"라는 말이 트위터(@ssuerm 3월 22일)를 통해 돌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즉흥적인 대담 자리에서 맵시있게 논리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내가 당시에 적절히 이 발언의 문맥을 밝히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이 발언은 8년 전인 2007년 『교수신문』에 기고한 「'침묵'은 적극적인 비평적 제스처다: 영화비평 쇠퇴론 비판」의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Fantasy'라는 필명의 네이버 블로거가 쓴 「비평에 대한 단상이라는 제목의 글과 그 아래 달린 댓글들을 읽고 나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 발언 전후에 덧붙였어야 했던 말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흔히 1990년대가 영화비평의 전성기였다고들 말한다. (분명 1990년대에 영화에 관한 글이 많이 읽히긴 했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그때를 영화비평의 전성기였다고 말하는 것은 <명량>이 천팔백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는가 하면 급기야 부산국제영화제가 "한국영화제작의 현실과 전망"을 짚어내기 위해 '천만영화 제작자 포럼'(!)을 마련하기까지 한 2014년을 한국영화의 최전성기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주장이 (심지어 내가 대학시절을 보낸 1990년대 당시에조차) 항상 미심쩍기 짝이 없었다. 어떤 예술 비평이 진정 전성기를 누렸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당대의 예술과 관련해 담론의 장에 기입한 '토픽'(topic)이 있어야 하고 그 토픽과 관련한 주장과 논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1970년대 문학계에서의 리얼리즘 논쟁(그리고 민족문학, 민중문학 등등), 그리고 최근 출간된 흥미로운 책 『90년대 한국 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 동시대 미술의 기원을 찾아서』(문혜진 저, 현실문화, 2015)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미술계에서 모더니즘/민중미술 분파 간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과 실천을 둘러싼 논쟁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나는 - 여기서는 굳이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식의 뻔한 겸손을 가장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 1990년대 한국의 영화비평이 어떤 토픽을 당대의 영화들(꼭 당시에 제작된 영화만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건 그 당시에 소개되었던 영화들) 안에 기입했다고 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여기서 어떤 '학술적인' 논쟁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다만, 당대의 '순수영화'(pure cinema)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영화의 위치를 재고한 앙드레 바쟁의 「비순수영화를 위하여: 각색의 옹호」(1952)나 '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열망이 바야흐로 국제적으로 폭발할 무렵 (로렐과 하디의 예를 들며) "문화라는 허식을 향한 아무런 야심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곳곳에서 목적도 없이 하염없이 산재시키는 비버와 같은 노력에 몰두"하는 '흰개미 같은'(termite-like) 영화(인)의 비인칭적 무의식을 강조한 마니 파버의 「흰코끼리 예술 vs. 흰개미 예술」(1962) 같은 저널리즘 '비평'의 진수들을 떠올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분명 한국에도, (안타깝게도 영화학계 바깥에서는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임화의 「조선영화론」(1941)과 같은 '문제적'인 글이 나오던 시기가 있었다. 이러한 글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널리 읽혔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영화비평의 '장소'에 관하여」를 쓸 당시, 한국의 영화비평과 관련해 나는 바로 위와 같은 불만에 사로잡혀 있었다. 영화비평에 토픽을 가능케 할 '사이트'(site)가 아닌 '토포스'(topos)는 어디인가 혹은 무엇인가? 그런데 그 불만은 사실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이기도 했다. 공식적인 매체에 영화글을 기고한 지 2년 쯤 되었을 때였는데, 아무래도 내가 비평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이 글을 쓰고 나서야 정말이지 비평가가 되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 생각을 비로소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2011년에 『인문예술잡지 F』 편집진에 합류하게 되면서부터다. 이 잡지 덕택에 나는 「뤼미에르 은하의 가장자리에서」처럼 어떤 영화잡지도 용납하지 않았을 형식의 연재글을 자유롭게, 하지만 어느 정도는 망명자의 심정으로 쓸 수 있었다. 이 잡지에 실린 글을 읽었다는 작가나 미술비평가, 큐레이터는 가끔 만난 적이 있지만 영화감독이나 영화비평가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아래는 계간 『영화언어』 2003년 겨울호에 수록되었던 「영화비평의 '장소'에 관하여」를 옮긴 것이다. 이제는 눈에 너무 선명히 띄는 오류들이 있고 수정하고 싶은 부분도 많지만, 비평에 대한 나의 입장 자체는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하지 않은 만큼, 일단 원래의 글 그대로를 옮겼다.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버전에는 일부 오타와 누락이 있고 원문의 각주도 빠져 있다.) 그 뒤에 2007년 『교수신문』 에 실렸던 「'침묵'은 적극적인 비평적 제스처다: 영화비평 쇠퇴론 비판」을 옮겨 두었는데, 다만 글의 제목은 원래 내가 붙인 제목이었던  암살과 자살: 영화비평 쇠퇴론 비판」으로 바꾸었다. 둘 모두 발표된 지 꽤 지난 것들이지만 다시 읽어 보니 2015년 현재의 상황에 비춰 보아도 어느 정도는 유효한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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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의 '장소'에 관하여 (2003)


1. 돌이켜보기 : 참고할 만한 말들


내가 비평가들을 미워하는 이유를 말하겠다. 내가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실패한 창작가(그들이 창작가로 실패한 경우는 드물다. 실패한 비평가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라든지, 그들이 천성적으로 흠잡기 좋아하고, 질투심 많고, 허영심이 강하다(그들은 대개 이렇지 않다. 오히려 지나치게 관대해서, 이류를 격상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식별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기질 때문에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는 평범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 (중략) … 완전한 독자, 절대적인 독자가 이 세상에 존재할까? 스타키 박사의 <마담 보바리> 독서는 내가 그 책을 읽을 때 갖게 되는 모든 반응을 다 포함하고, 나아가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어서 나의 독서 따위는 어느 면에서 무의미한 것이 되는가? 나는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독서는 문학비평사의 관점에서 보면 초점을 잃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즐거움의 관점에서 보면 의미가 없지도 않다. 평범한 독자가 전문비평가보다 책을 더욱 즐겁게 읽는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자가 후자보다 한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음을 나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잊을 수 있다. 스타키 박사와 같은 이들은 기억력의 저주를 받고 있다. 
- 줄리안 반즈, <플로베르의 앵무새>

따라서 비평에 의의가 있다면, 그것은 영화가 보유분, 즉 아직은 잠재적인 대중과의 간격 같은 것이 있어서, 
시간을 벌어 기다리며 흔적을 보존할 필요가 있을 경우입니다. 
질 들뢰즈, <낙관, 비관, 그리고 여행>

비평은 이론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 사이의 거리, 사유와 존재 사이의 거리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다. 
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비평의 기술이 소비의 규칙들만을 제시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철저한 인식은 그와 반대로 생산의 법칙들을 우선 완성해야 할 것이다. 
피에르 마슈레,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



2. 비평적 침묵을 감추는 세 가지 방법 


앞 절에 인용한 말들 가운데, 줄리안 반즈의 소설에서 따온 것은 최근 한국 저널리즘 영화비평을 접하는 독자들이 종종 토로하곤 하는 반감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보다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은 그 뒤에 이어진 세 개의 인용문이다. 이어지는 인용문들은 대략 비평의 의의, 위치, 그리고 임무에 관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혹은 그것들을 각각의 필자들이 나름대로 제시한 비평에 대한 우회적인 정의라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현재 동시대 한국의 저널리즘 비평은 이와 같은 비평의 속성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먼저 비평의 의의를 “시간을 벌어 기다리며, 흔적을 보존”하는 데서 찾고 있는 견해를 검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이는 비평이란 눈앞의 현재, 동시대의 관객이나 독자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미래의 - 그것도 다소간 멀리 떨어진 미래의 - 독자들을 향한 것이라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이때 비평은 미래와의 대화이자 무엇보다 앞으로 도래할 관객들을 향한 웅변이다. 또한 그것은 현재의 대중들로 하여금 해석의 지평 저 너머를 향한 갈망을 품게끔 만드는 유혹적인 속삭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비평이 미래를 향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보다 ‘비관’이라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다. 아예 인지되지 못하거나, 오해되고, 결국 점점 깊숙이 망각의 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는 영화들을 지켜보면서 느끼게 되는 애통함이 있다. 이러한 비관적인 인식에 사로잡힌 채 기어이 망각에 저항해가며 영화(적인 것)의 ‘흔적’들을 보존하려 하는 노력을 우리는 비평이라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대중을 상대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염두에 두었을 법한 것일 게다. 비평적 글쓰기의 의의에 관한 신념은 미래를 믿는 것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매혹적인 주장을 그 누군들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문제는 이와 같은 견해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일단 받아들인 후에 무척이나 ‘세속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방식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비평적 글쓰기에서 상투적으로 남용되기 시작한, 하지만 지금은 주로 인터넷 글쓰기에서 사용되곤 하는 몇 가지 말들을 떠올려 보자. 그 가운데 특히 두드러진 것은 ‘저주받은 걸작’과 ‘발견’이라고 하는 표현일 것이다. 특히 이들이 동시대에 만들어진 어떤 영화를 상찬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 이는 어느 정도 미래를 향한 발화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저주’는 그 속성상 지난한 노력을 통해서나 풀릴 수 있는 것일 터이며, ‘발견’이 전파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저주받은 걸작’과 ‘발견’의 수사학 내지는 전략은 결국 그 스스로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영화에 거는 강력한 저주의 주문이 된다. 동시에 이것은 미래를 향한 발화가 아니라, 대상에 대해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가치판단만을 내린 채 모든 해석의 몫을 미래에 떠넘기기 위한 침묵에 다름 아니다. 또한 이러한 수사학에는 스스로의 감식안을 과장하고자 하는 욕망(“이류를 격상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식별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기질”)이 깃들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에 관한 예를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아마 2003년 한국영화계 특히 저널리즘 비평계에서 이루어진 최고의 해프닝이라면, 단연 <4인용 식탁>과 <거울 속으로> - 모두가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두 편의 영화는 거의 같은 시기에 개봉되었다 - 에 관해 <씨네 21>과 <필름 2.0>이 각각 게재한 기획특집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다른 글에서 두 잡지가 보여준 이러한 기이한 열광을 “새로운 재능의 ‘발견’에 무리하게 집착하는 영화 저널리즘의 폐단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 지적한 바 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굳이 덧붙이자면, 이 기획특집들은 인터넷으로 서비스되는 ‘패러디 신문’ <딴지일보>에서 ‘2003 토룡영화제’(?) ‘혹세무민상’ 후보에 나란히 오르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참고로 수상작은 <씨네 21>의 “한국공포의 새로운 발견 - <4인용 식탁>의 탈(脫) 공포적 긴장에 주목한다”였다. 그리고 <딴지일보>는 <필름 2.0>의 기획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덧붙였다. “그러나 물경 20페이지에 달하는 <필름 2.0>의 "매혹의 공포영화 <거울속으로>"의 블록버스터급 물량똥꼬애무공세는 <씨네21>의 아성을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흠집을 낼만큼 위협적인 것이었다. 내년에는 과연 <필름 2.0>의 혹세무민이 <씨네21>의 혹세무민을 넘어설지 귀두가 주목되는 바이다”). 

사실 우리는 비단 ‘저주받는 걸작’과 ‘발견’의 영화들을 상찬하기 위한 비평들만이 아니라 보다 폭넓은 영역에서 비평적 침묵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때 언제나 침묵은 위장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침묵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보다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위장을 위해 동원되는 전술은 크게 세 가지이다. 하나는 비평적 대상으로서의 영화가 참조하고 있는, 혹은 환기시키는 여타 예술장르나 사상에 관한 지식을 끌어들여 비평적 글쓰기를 일종의 사상과 예술에 관한 해설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영화는 이때 적절한 보조교재로서 간주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식의 글쓰기가 옳지 않다거나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영화계 ‘바깥’의 지식인들이 종종 영화를 빌려 우리에게 던져주는 통찰들은 아주 흥미롭고 때로는 짜릿한 깨달음의 순간을 가져오기도 한다. 문제는 영화비평에 종사하는 이들이 그들의 접근방식을 고스란히, 더 나쁘게는 이류의 영화를 상찬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빌려올 때 생겨난다. 

우리의 임무는 영화계 ‘바깥’의 지식인들의 논의를 확장하는데 있는 것도, 또는 그것을 또 다른 개별적인 사례에 적용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대신 그들을 빌려 다시 영화로 돌아가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매트릭스>의 철학’을 펼치는 것으로 원고지를 채우는 대신 <매트릭스>라는 텍스트 자체가 그러한 철학이 다시 제기한 질문에 응답하고 또 다른 미학적 물음들을 만들어내는가를, 또 무엇보다 ‘어떻게’ 그리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미학의 수수께끼로의 접근을 통해 세계의 수수께끼에 접근하는 것, 또는 그 둘을 점근선의 형태로 파악하는 것 - 가장 중요하고도 일차적인 비평적 태도라 할 만하다. 왜냐하면 전자는 비평이라기보다는 이론의 몫이며, 후자는 철학의 몫이기 때문이다 - 이 우리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앙드레 바쟁의 오래된 금언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볼 만도 하다.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은, 또한 말하자면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침묵을 위장하기 위해 동원되는 다른 전술은 (최근 꽤 널리 퍼져 있는 것이기도 한데)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정치적 올바름’에 호소하는 것이다. 영화를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간주하는 오래된 믿음이 있다. 하지만 영화는 사실 창이 없는 모나드이다. 대신 영화가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규칙을 다시 짜고 배열하는 움직임을 극대화하는 유희적 태도에 입각할 때 기이하게도 영화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기도 한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본다고 하는 상투적인 주장은 이제 다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영화가 하나의 창이라는 걸 뜻하지도, 영화가 우리의 세상을 향해 어떤 메시지를 던진다는 걸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영화가 온전한 세계에 가까운 형상을 창조해 낼 때, 우리가 그 형상과 우리의 세상 사이의 유비가 아닌 중첩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의미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의심어린 눈길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지 못한 ‘빈곤한’ 영화와 우리의 세상 사이에 유비를 만들어내려 하는 태도들이다. 예컨대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실미도>에 대해 ‘영화적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역사적 사건을 다시 우리에게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영화’라는 식으로 의미부여하는 태도는 엄밀히 말해 ‘비평적 언어’로 말해진 것이라고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한 편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보고 강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역사교사의 태도일 것이다(그러니까 위와 같이 말하는 영화비평가가 있다면 그는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더불어 영화의 불완전한 구조를 상상적으로 봉합함으로써 ‘메시지’를 강조하려는 시도 역시 의심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영화가 직접적으로 발화하고 있는 내용의 도덕적, 정치적 타당성이 아니라 영화적 구조, 미장센,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카메라의 윤리학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비평가는 영화감독의 대변자나 복화술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대신해 말해야 할 이유는 없다. 

세 번째 전술은 아마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일 게다. 바로 영화에 관해 말하는 대신 순문학적인 에세이 쓰기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평이 아름다운 문체와 만나는 건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비평적 태도를 버리면서까지 문체에 몰두하는 것은 비평가라기보다는 리뷰어(reviewer) 또는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이런저런 칼럼니스트들의 몫이다. [1] 또한 영화와 감독에 관한 개인적인 기억으로 채워진 사담(私談)은 자신만의 일기장에 적어두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물론 영화에 관한 글을 읽는 대중들에게 이와 같은 글들이 보다 친숙하고 편안하게 여겨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당연히 ‘대중주의적’ 비평가들은 그 길을 따른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후 샤오시엔은 예술로서의 영화란 대중들을 거절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식의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좀 멀게는 보들레르 같은 시인도 그와 유사한 태도를 취한 바 있다), 아마 우리는 비평에 관해서도 그와 유사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진정한 비평은 대중들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비평이 당대의 대중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그것의 존재의의는 현재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당혹스러움과 불편함은 현학으로 위장된 비논리적인 문장들, 미지의 영화에 대한 달뜬 열광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영화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작업을 통해 유도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순문학적인 에세이를 통해서는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작업임이 분명하다. 결국 ‘편안하게 읽히는’ 글이라는 상찬은 비평가에겐 결코 득이 될 수 없다. 


3. 영화비평의 ‘장소’


앞에서 말한 것들이 저널리즘 비평에 대한 요구로서는 지나치게 과도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비평적 글쓰기란, 새로이 개봉되는 영화를 소개하는 리뷰어들이나 영화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전달하는 리포터들의 글쓰기와는 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이에게 이러한 요구는 절대 과도한 것으로 여겨지진 않을 것이다. 또한 간혹 어떤 이들은 지극히 한정된 지면이나 저널의 성격을 핑계로 삼아 비평가로서의 의무를 방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단 한 줄의 글조차도 낭비되어서는 안 된다. 비평적 글쓰기는 주어진 지면의 많고 적음, 글이 게재되는 저널의 취향과 무관하게 행해질 수 있다. 동시에 비평적 글쓰기는 영화학자나 이론가들의 글쓰기와도 성격을 달리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영화에 대해 비평적 글쓰기를 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물음은 결국 영화비평의 ‘장소’는 어디인가  - 나는 여기서 물리적인 장소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라는 물음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충분히 짐작했겠지만, 불행히도 그 장소는 너무 협소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이론적 패러다임을 짜는 것,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철학적인, 또는 개인적인 사유 속으로 즐겁게 빠져드는 것, 그리고 한 영화를 정치사회적으로 자리매김하는 것, 이들은 영화를 둘러싸고 이루어질 수 있는 여러 가능한 행위들이긴 하지만 우리가 거기서 영화비평의 장소를 찾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비평의 장소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은 유효하다. 비평과 대중 사이의 괴리에 관한 고민은 도처에서 들려오고,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물음들과 나름의 답변들도 존재한다. 예컨대 ‘새로운 형태의 관객들이 도래했다’는 식의 답변들 말이다. 이때 비평은 그들을 따라잡기엔 너무 ‘늙은’, 혹은 그들과 다른 언어로 말하는 시대착오적, 외부자적, 그리고 심하게는 기생충적 존재처럼 간주된다. 하지만 이런 식의 답변은 별로 만족스러운 것이 못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들로 하여금 현재의 당혹감에 대한 원인을 깨닫도록 만들기에는 그것이 지나치게 우회적인 답변이거나 잘못 제기된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 때문이다. 나는 앞서 비평과 대중 사이의 거리야말로 비평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라면 우리는 비평과 대중 사이의 괴리가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라는 식의 질문을 던져서는 안 된다. 대신 물음의 전환이 필요하다(물음에 답변하기 이전에 그 물음이 올바르게 제기된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필수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물음을 영화비평의 장소에 관한 물음으로 전환시키는 순간, ‘비평과 대중 사이의 괴리’라는 식의 표현이 지니고 있는 모호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만일 ‘괴리’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정확히 말해 비평가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영화비평의 장소와 대중들이 생각하는 영화비평의 장소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몇 편의 한국코미디 영화들이 지니고 있는 사회학적 함의를 진지하게 논하는 것에서 자신의 비평적 장소를 찾고 있는 비평가를 가정해 보자. 그의 글을 읽은 한 독자가 불평하기 시작한다. “○○○님께서는 이 영화가 전혀 웃기지 않으셨던가요?” 혹은 정교한 반전구조를 갖춘 영화에서 그 반전이 지니는 의미에 관해 논한 글을 두고 “이거 완전히 스포일러 아닙니까?”라고 불평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이건 실제로도 종종 있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독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비평적 장소는 어떤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이 독자들은 리뷰의 수준을 넘어서는 모든 글이나 말들을 무의미한 것, 혹은 월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그는 한 영화를 ‘소비하는 법’에 관한 ‘전문가적’ 식견이 발화되는 곳이야말로 비평적 장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은 독자들의 불만을 전적으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동시대의 비평이 엉뚱한 장소에 가 있는 것일 수도 있음을 일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독자들 또한 ‘리뷰의 장소’와 비평적 장소가 전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장소를 잘못 찾으신 것 같은데요’라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장소를 잘못 찾은 것은 우리들(의 비평)이지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요리법에 관한 실용서적을 펼쳤다가 별안간 음식문화의 발달을 정치사회적 맥락과 관련지어 서술한 논문이 거기 실린 것을 보고 아연실색해 있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의 독자들에게 ‘장소를 잘못 찾으신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기보다는 ‘실례지만, 잠시 장소 좀 빌렸습니다. 저 쪽에 가면 찾으시는 게 있을 텐데요’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비평이 자꾸만 장소를 잘못 찾게 되는 것은 왜일까? 일차적으로는 우리에게 전문적인 비평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약간의 이론지들과 영화주간지들, 그리고 많은 수의 영화웹진들이 존재하지만 엄밀히 말해 비평지라고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평의 언어들은 그들 사이에서 말 그대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더 나쁜 것은 그들의 언어를 모방하는 것이다. 마침내 이러한 담론적 상황은 비평의 장소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영화에 관한 글을 읽는 사람들은 양분된다. 좀 도식적으로 말해보자면, 영화를 이론적, 학문적으로 ‘연구’하려는 사람들과 영화를 소비하기 위한 ‘지침’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로 말이다. 그리고 비평은 수신인을 찾지 못하고 되풀이되어 반송되는 메시지가 되었다.

너무 비관적인 판단인가? 어쨌거나 어디를 둘러보아도 비평의 장소란 이제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비평가들은 장소에 관한 물음에 매달리기보다는 차라리 나름의 ‘전공’과 ‘장기’를 마련해 자신을 특화시키려 든다. 여러 국가의 내셔널 시네마(national cinema)에 관한 이런저런 전문가들(일본영화전문가, 중국영화전문가, 라틴아메리카영화전문가 등등), 호러영화전문가, B급영화전문가로부터 페미니스트 영화비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문’비평가들이 존재하지만(최근에는 ‘DVD 칼럼니스트’들까지 생겨났다), 엄밀히 말해 그들이 비평의 장소를 제대로 찾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학제적 구분을 모방하고 있을 뿐이거나, 장르적 취향과 영화적 취향을 혼동하고 있으며 - 개인적으로 장르적 취향을 극복하지 못한 영화애호가는 결코 영화적 감식안을 지닐 수 없다고 본다 -, 정치적 견해와 비평적 판단을 뒤섞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이제는 너무 진부해져 버린 ‘작가주의’(auteurism)라는 말을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때 동시대에도 ‘작가’라는 개념이 유효한 것인가 아닌가하는 (이젠 좀 낡아 보이는) 물음은 잠시 제쳐두기로 하자. [2] ‘새로운’ 작가주의 운운하는 현혹적인 수사학 또한 배격해야 한다. 대신 우리는 ‘작가주의’가 사실상 그 출발 - 프랑스의 <카이에 뒤 시네마> - 에 있어서는 비평의 장소에 관한 고민으로부터 나온 ‘정책’(politique)이었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은 본디 어떤 ‘~이즘’이 아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로 인해 그것은 비평의 장소에 관한 선언이 될 수 있었다. 작가정책의 초기 주창자들은 작가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삼아 ‘영화적인 것’에 관한 담론들이 산포되어 나가는 비평적 장소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작가정책은 점점 우상숭배가 되었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작가‘주의’로 변모하게 된다. 장 뤽 고다르 - 우리시대 가장 중요한 영화‘비평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 가 지적한 대로 본디 중요한 것은 ‘작가’가 아니라 ‘정책’이었는데 ‘정책’은 간과되고 ‘작가’만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고다르의 말을 좀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제까지 영화비평의 장소는 어디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고민해왔다. 그런데 그는 사실상 영화비평의 장소는 어디인가라는 물음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그의 말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책’, 바꿔 말하면 특정한 맥락에 의거해 선택한 장소에서 수행하는 비평적 기술이지 장소 그 자체가 아니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작가’는 그와 동료들이 비평적 글쓰기를 행하던 시기에 유효하게 끌어들일 수 있었던 - 그리고 영화(사)의 혁신을 위해 당시로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했다 - 개념이었던 것이다(물론 고다르와 그의 동료들이 당대에 이러한 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현재의 고다르가 과거의 행위를 이와 같이 재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들은 작가의 이름으로 ‘영화란 무엇인가/무엇이어야 하는가’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비평이 하나의 ‘정책’이라면, 그리고 비평을 위한 고착된 장소란 (비록 과거에는 존재했을지라도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나아가 비평을 움직임으로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별히 영화에 관한 진지한 글쓰기가 수행되는 여러 장소들 간의, 그리고 다시 그 장소들과 영화들 간의 ‘교통’을 만들어내는 움직임으로, 또한 점점 정주(定住)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히게 마련인 그 장소들, 관객들, 영화들을 충격을 통해 다른 곳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불편한’ 움직임으로 말이다. 모두가 중력에 사로잡혀 있을 때조차도 비평만큼은 임페투스(impetus)를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비평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 영화에 관한 이론과 리뷰의 독자들을 그들이 대하고 있는 텍스트의 바깥으로 이끌 수 있다. 이와 같은 바깥으로의 운동은 오직 비평적 담론의 충격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예컨대 뤼미에르와 니엡스에 의해 원근법이라는 서양회화의 원죄를 속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하는 식의 진술(다시 한 번 고다르. 그의 <영화사(들)>)은 비평적 언어의 좋은 예라고 여겨진다. 이런 진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것이냐 마느냐는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지에 대한 윤리적 접근을 통해 영화사와 회화사를 동시에 가로지르며 이로써 영화적 담론의 새로운 공간을 열어놓고 있다. 또한 이 진술은 다양한 장소들 - 이론의 장소, 관객의 장소, 그리고 영화작품의 장소 등등 - 이 한꺼번에 교통하게 만듦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각각의 장소들의 배열에 관해 (벤야민 식으로 말하자면) 섬광의 번쩍임 같은 인식을 가능케 한다. 현재의 고다르의 비평적 정책은 과거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이제 작가의 이름 대신 역사의 여신 클리오(Clio)의 이름을 빌려 ‘영화란 무엇이어야 했는가’ - 이것은 이제 존재론적인 물음이 아니라 윤리적인 물음이다 - 를 반추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장소가 아니라 교통, 움직임이자 정책으로서의 영화비평을 받아들이고 그 정책의 핵 - 작가, 역사 등과 같은 -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물론 이것은 일개 비유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설령 비유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라도 나는 우리의 비평이 이런 비유를 실천을 통해 구체화시키는 작업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비평가는 어디든 정주할 자리를 찾아 자신만의 집을 짓고 거기 안일하게 머물며 거짓 열광으로 들뜬 발화만을 내뱉는 대신, 장소들 사이를 오가며 먼 곳의 소식을 전하는 배달부가, 장소들을 움직이고 교통하게 만들고 중첩시키는 비평적 몽타주의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우리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린 그저 또 다른 장소를 찾아 총총히 길을 떠날 뿐이다. ■  



[1] 지나치게 도식적인 감이 없진 않지만 오즈 야스지로에 관한 글을 쓰면서 로빈 우드가 제시한 다음과 같은 구분은 참고해볼 만 하다. “예술에 관해 진지한 글을 쓰는 사람들을 우리는 서로 상호작용하는 동시에 구분된 기능을 수행하는 세 개의 범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론가, 학자, 비평가 - 네 번째 범주인 리뷰어는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상의 셋 모두와 구분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개 세 번째 범주인 것으로 가장한다. 이론가는 이론을 발전시키고, 학자는 정보를 수집하고, 비평가는 열정적으로 특수한 작업에 몰두하며 가치판단에 도달한다. 나는 이러한 기능들 가운데 비평가를 최상의 것으로 간주하는데, 난 이것이 지난 몇  십년 간 이루어져 온 영화에 관한 진지한 작업들의 흐름 - 이론 내지는 이론과 학문의 혼합물에 강하게 경도되어 비평가들을 저널리즘이라고 하는 외적 영역으로 추방하려 시도해왔던 - 에 반하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며, 이렇게 말하는 데 나의 개인적 성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여하간 나는 거의 상실된 것처럼 보이는 비평가의 자리를 열망한다. 어떤 면에서 비평가는 이론은 이론가에게 의존하고 정보는 학자에게 의존하는 기생충이다. 이 때문에 그녀/그는 으레 이론이나 학문에 무지한 리뷰어들과 구분될 수 있다.” Robin Wood, Sexual Politics and Narrative Film: Hollywood and Beyond,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p.106

[2] 잠시 비평적 장소라고 하는 이 글의 주제를 떠나 말해보자면, 영화연구의 영역에서 작가라는 개념은 동시대에도 유효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일례로 영화학자 요시모토 미츠히로는 구로자와 아키라에 관한 자신의 저서에서 (다분히 ‘저자-기능’에 관한 미셸 푸코의 논의를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구로자와 영화에 관한 우리의 연구에서 요구되는 것은 작가 개념의 완전한 폐기도, 그의 작가성(authorship)을 우리가 그의 영화 각각을 검토할 때 떠올리게 되는 다양한 해석적 질문들에 대한 최종적 답변으로 간주하는 것도 아니다. 대신에, 우리는 하나의 물음 내지는 협상의 장소로서 그의 작가성을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구로자와’라고 하는 작가는 담론적 산물이자 비평적 의미인 동시에 사회적 기능이다. 그것들은 구로자와, 비평가, 그리고 관객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협상되는 것들이다. 그의 영화들에 대한 수용과 해석은 작가로서의 구로자와라고 하는 특정한 구성물에 의해 영향 받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그의 영화들에 대한 섬세한 분석은 그의 작가성에 관한 보다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모델을 생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Mitsuhiro Yoshimoto, Kurosawa : Film Studies and Japanese Cinema, Duke University Press, 2000,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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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과 자살 (2007)
: 영화비평 쇠퇴론 비판



동시대 영화비평이 점점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들 말한다. 영화비평이라는 것이 (예컨대 한때의 문학비평에 맞먹을 만큼의) 대단한 영향력을 지녀본 적도 없는 이곳에서, 벌써 그것의 쇠퇴에 관한 소문이 떠도는 건 좀 이상하게 느껴진다. 나는 여기서 영화비평의 쇠퇴 운운하는 이들이 과연 어떤 이들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그들이 짐짓 취하는 애도의 제스처는 사실 그 이면의 음험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은폐하기 위한 가장(假裝)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정작 쇠퇴한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쇠퇴를 애석해하는 것은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망자(亡者) 없는 장례식장에서 목 놓아 곡을 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곡이란 슬픔의 전염을 위한 감상적인 의식에 불과하며 슬픔의 최면술을 위해서라면 장시간 곡을 대신해 줄 이를 돈을 주고 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한국 영화비평의 쇠퇴에 대해 말한다는 건 가짜 장례식장의 텅 빈 관에 눕힐 만한 시신을 찾아 헤매는 우스꽝스러운 작업이 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다시 물어보자. 장례식을 마련해 두고 시신을 찾아다니는 암살자들은 과연 누구인가를. 

1990년대는 한국에서 영화문화가 급부상한 시기로 일컬어진다. 불완전하나마 - 특히 번역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 유용한 영화관련 서적들이 조금씩 출판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영화전문지들이 창간되었고, 비디오 대여점들은 호황을 누렸고, 예술영화관들이 문을 열었으며, 영화학교 및 대학 영화과엔 신입생들이 몰렸고(영화유학을 떠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학생영화 및 독립단편영화 제작의 붐이 일었으며, 지금은 아시아 제일의 영화제로 성장한 부산국제영화제가 출범하였다. 물론 이 시기 이전에 영화문화 혹은 영화광문화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매우 제한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는 바야흐로 영화적 교양이 문화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시기였지만, 정작 그러한 교양의 범위와 역사성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작업은 다소 거추장스러운 일로 여겨진 시기이기도 했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영화형식의 실험가로 추앙받은 반면 존 포드는 오직 서부극, 그것도 <수색자>의 존 포드로만 논의되었다. 이른바 현대영화라는 것이 할리우드 영화로 대표되는 고전영화에 대한 반발에서 유래한 것이라기보다는 고전영화를 다른 시간에 다른 공간에서 영화적으로 ‘번역’하려는 지난한 시도의 산물이었다는 인식 같은 건 전혀 들어설 여지조차 없었다. 19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들이나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이 ‘전복적인’ 작업으로 오해되고, 레오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이 예술영화로 선전되는가 하면, 러시아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구도자적 풍모와 망명의 삶에서 ‘진정한’ 예술가의 모델을 발견하는 등, 지금 보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될 정도의 믿음이 가능했던 것도 1990년대가 영화적 교양의 범위와 역사성에 대해 누구도 자문해보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비평은 크게 두 갈래의 흐름으로 나뉘어졌다. 첫 번째는 교사(敎師)의 비평이라 칭할 만한 것이다. 영화를 ‘읽기’ 위한 고유한 독법이 있으며(시네마 리터러시), 한 편의 영화 이면에는 다양한 숨은 의미들이 있다는(징후와 해독) 주장은 이들 교사들이 즐겨 설파하는 강령이었다. 교사의 비평이 1990년대 영화문화에 적잖이 기여한 것도 사실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학도나 문학청년으로 이전 시기를 보냈던 이들이 영화교사의 길을 택하면서 성립된 것이란 점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영화를 읽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들여다보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점을 간과했던 것 같다. 상황이 반대였더라면 우리는 영화적 서커스에 불과한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엔 볼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교도관(矯導官)의 비평이다. 영화작품과 영화관련 서적의 수입 및 소개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지금 이곳에서 당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며 그것들을 뛰어넘는 빼어난 작업들이 저기 바깥에 얼마든지 있음을 역설하는 전문가들의 존재는 쉬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마련이다. 물론 이는 한국 영화문화라는 특정한 울타리의 경계를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지만 그것이 1990년대의 영화광들을 사로잡았던 왜곡된 교양주의 - 예컨대 “너, 이 영화 봤어? 그럼 이 영화는?”라는 식의 - 와 조우함으로써 초래된 폐해도 적지 않다. 영화적 교양은 영화작품의 내면화와 수용의 과정을 통한 세계의 재인식이 아니라 상상적 라이브러리의 항목을 늘려가는 작업으로 그릇되게 정의되었다. 또한 영화비평의 교도관들에게 중요한 것은 바깥의 존재를 역설하는 것이지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 문이 열린다면 그들은 서둘러 또 다른 울타리를 기어이 만들어내고야 만다. 이 왜곡된 시도는 다음과 같은 신념을 정당화한다. 한 편의 영화는 아직 그것이 소개되지 않았을 때에만 가치 있는 것이라는. 예컨대 타르코프스키 영화예술의 위대함을 역설하던 많은 이들은 정작 <희생>이 극장에서 개봉되고 나자 그에 대해 말하기를 중단했다. (실제로 타르코프스키가 한국에서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영화작가란 점은 차치하고) 확실히 그러한 침묵엔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여하간 이건 다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새로운 세기에 접어든 이후 - 그 사이에 오손 웰스, 로베르 브레송, 오즈 야스지로 등의 영화들이 회고전을 통해 한꺼번에 소개되었으며 1990년대 영화광들의 정전(canon)의 목록은 대대적으로 수정되었다  - 한국의 영화문화는 빠르게 변모해갔다. 영화관련 문헌들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지면서 우리는 영화비평계의 교사들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고 예술영화관 및 시네마테크의 설립과 다운로드를 통한 영화감상이 보편화되면서 교도관들의 울타리 또한 점차 무력해졌다. 영화전문지들은 점점 독자를 잃어갔고, 동네마다 있던 비디오 대여점들은 차례로 문을 닫았으며, 예술영화를 본다는 건 더 이상 유별난 일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반면 영화학교는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으며 각종 영화제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일견 모순적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현상은 잘 들여다보면 1990년대를 특징지은 교사와 교도관 비평의 귀결이라는 점을 알 수 있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지면관계상 생략키로 한다). 

나는 리뷰어와 영화학자 사이에 위치한 영화비평가의 작업은 일차적으로는 통찰, 수사(修辭), 품격 그리고 나아가 취향과 윤리적 입장이 어우러질 때 가장 이상적인 결과물을 낳는다고 본다. 리뷰어가 정보를 전달하는 이라면 영화비평가는 취향에 근거해 판단을 내리는 자이다. 영화학자가 분석과 논리에 기댈 때 영화비평가는 자신의 윤리적 입장을 내세워야 한다. 하지만 취향과 윤리적 입장이 모호했던 교사와 교도관의 비평은 그 변종들에 의해 삽시간에 대체되었다. 점점 암호해독자의 작업에 가까워지던 교사의 비평은 적절히 수사를 구사해가며 ‘제법 품격을 갖춘 보도자료’에 가까운 글을 써내는 영화기자들의 글쓰기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영화전문지의 여성지화). 교도관들의 울타리는 영화제 카탈로그와 예술영화관의 팸플릿, 그리고 국내외 인터넷 사이트의 정보전달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단적으로 말해 영화비평은 광고들에 의해 대체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사이에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비평적 자질을 갖춘 영화비평가들이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너무 늦게 도착했다. 그들의 비평적 글쓰기는 광고성 글쓰기로 가득한 영화전문지 편집자들에게 남은 한 줌의 부채감을 위무하기 위한 것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때, 영화비평의 쇠퇴 운운하는 자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누구인가를 파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비평이 광고로 대체되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비판조차도 광고로 활용될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사실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영화에 영화비평가가 가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은 비판이 아니라 그걸 완전히 무시하고 침묵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조망이 불가능할 정도로 영화에 관한 담론이 넘쳐나는 시대엔, 침묵은 비평적 소임의 방기가 아니라 사실 적극적인 비평적 제스처 가운데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위장된 비판의 게임에 뛰어드는 건 사이비 비평가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비평이 대중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냐는 식의 물음에 답해야 할 것 같다. 발터 벤야민은 비평가에게 있어서 상급심은 대중이 아니라 동료들이라고 쓴 적이 있다. 한국 영화비평이 독자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대중이 비평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 예술로서의 비평은 대중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 이제는 영화비평가들조차 동료들의 비평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특정한 영화에 대한 찬반양론이 영화비평가들 스스로의 세계관과 윤리적 입장을 건 진검승부가 아니라 영화잡지 편집인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기획자의 머리에서 출발하는 이벤트로 전락하고 만 것도 그 때문이다. 이건 암살자들의 추적에 자살로 대응하는 것과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