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26

봄 (3)

1. 국제영화제 평가 (3.26)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관하다 작년부터 영화진흥위원회 주관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국제영화제평가(Evaluation of International Film Festivals)라는 게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생소하고 또 그다지 관심 둘 이유도 없는 것이겠지만, 매년 초마다 평가의 대상이 되는 영화제 관계자들의 촉각을 곤두서게 만들곤 한다. 결과에 따라 영화제별 정부지원(영화발전기금) 금액이 달라지기도 하는 탓이다. 2012년 현재, 영화발전기금이 지원되는 국제영화제는 (개최시기별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천국제영화음악제, 부산국제영화제 총 6곳이다. 총 5인의 평가위원이 각 영화제를 돌며 여러 항목에 대해 평가를 하고 기타 설문조사를 통한 통계자료 - 통계에 관한 한 문외한에 가까운 내가 봐도, 항목분류나 자료처리에 있어 좀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들도 간혹 있다 - 등을 수집해 <국제영화제 평가보고서>를 작성, 발간하곤 하는데, 당연히 정독하기에 좋은 책은 아니지만 읽다보면 차기 영화제 준비에 있어 도움되는 지적들을 적잖이 발견할 수 있어 꽤 유용하다. 다만 평가위원 5인을 선정하는 기준이 항상 궁금한데, 도무지 영화적 안목이라곤 없어 보이는 이가 매년 한두명 포함되곤 하기 때문이다.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나는 종종 국제영화제평가제도를 개선하기 위해선 평가위원에 대한 평가제도부터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올해 나를 가장 웃겨준 이는 이 보고서에 '평가위원 3'이라 기재된 분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떤 영화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평가의 기준이 이 '평가위원 3'과 같은 식이라면 용납하기 힘들어진다. 가령 이분은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마련한 포르투갈영화 특별전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 이유인즉 이 섹션이 영화제 전체 프로그램 가운데 관객설문으로 집계된 "5대 인기섹션과 10개 인기작에 한 작품도 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11편의 숨은 보석들이라는 영화제측 과장과 달리 수작(<갇힌 여인>)과 태작(<녹색의 해>)이 공존했다"고 짐짓 전문가 흉내를 낸다. (아무리 취향의 차이를 존중한다 해도, 파울루 로샤의 <녹색의 해> 같은 영화를 감히 태작이라 단정내리는 이를 '영화전문가'로 인정하는 건 나로선 불가능한 일이다.) 한편 로컬시네마 부문에서 상영된 한국장편영화 <위도>를 "로컬시네마의 가능성을 보여준" 영화라 상찬하면서 그 이유를 (지역에서 제작된 영화임에도) "영화배우 정찬과 이두일을 캐스팅할 정도의 규모를 과시"했다는 데서 찾고 있다. (이 부분을 읽다가,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마시던 음료수를 그만 내뿜고 말았다.) 그리고 보고서 말미에 가선 전주영화제에 마지막 충고를 던진다. "영화제 프로그램의 일부 지나친 혁신성 및 대안성 지향은 조율되어야 하며 - 몹시 '지루한' 작품 편수의 축소 - 상영장 주변의 즐길 거리 부족과 음식 값 앙등의 문제도 개선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지나친 혁신성을 지양하고자 한다면 '적당한' 혁신성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할 것인데 나는 이 형용모순의 요구에 대답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평가위원 3'의 논리대로라면 지나치게 혁신적이고 대안적인 영화는 몹시 지루한 영화들이라는 말도 안되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한 영화가 관객 앞에 보여지기도 전에 그것이 '지루한' 것이 될지 아닐지를 - 게다가 모든 관객에게 - 알기 위해선 프로그래머가 아니라 예언가가 필요할 것이다.


2. 필립 가렐의 <더 이상 기타 소리를 들을 수 없어> (4.9)




필립 가렐의 영화는 그 영화를 제작할 당시의 그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서 볼 때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본 가렐의 영화는 20대 후반 한 출판사 사무실에서 비디오로 본 <계시자 Le révélateur>(1968)였는데, 그 이후로도 한동안 그의 후기작보다는 그가 20대 무렵에 연출한 실험적인 영화들 - <추억의 마리 Marie pour memoire>(1967), <처녀의 침대 Le lit de la vierge>(1969), <내부의 상처 La cicatrice intérieure>(1972) - 에 더 끌리곤 했던 것 같다. (<평범한 연인들 Regular Lovers>(2005)같은 예외가 있기는 하다.) 그러니까 <더 이상 기타 소리를 들을 수 없어 J'entends plus la guitare>(1991)를 2004년 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보았을 때 - 당시 나는 아직 프로그래머로 일하기 전이었다 - 영화의 독특한 형식이나 무드를 인지하긴 어렵지 않았지만 감정적으로 다가가기는 요령부득이었던 것이다. 비로소 나이 마흔이 되어서 <더 이상 기타 소리를 들을 수 없어>를 다시 보다가, 마음을 깊이 울리는 장면들이 적지 않음을 뒤늦게 깨닫곤 적이 놀라는 중이다. 특히 1) 제라르를 떠났던 마리안느가 다시 돌아와 그의 집 앞에서 재회하는 장면, 2)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는 마리안느와 그 옆에 앉은 제라르가 키스를 나누는 모습을 담은 롱숏, 3) 제라르 앞에서 헤로인을 꺼내드는 마리안느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차례로 이어지는 부분에선, 가렐 특유의 과감하게 생략적인 편집이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치가 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환희, 세속성 그리고 내재하는 파국을 동시에 품고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모호한 감정으로서의 사랑. 그리고 불행히도 사랑이란 이런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언제나 파국이 이미 도래한 다음이라는 것 (아마 이것이야말로 가렐의 많은 영화가 플래시백이 없이 작동하는 추억의 영화, 혹은 영화적 추억처럼 느껴지는 이유이리라). 


3. 총선 (4.12)


총선 개표방송을 보다 잠이 들었다. 남한 중동부 전역이 벌겋게 뒤덮여 있는 그래픽을 보다가 이번 총선의 의의라면 많은 이들이 레드컴플렉스로부터 마침내 벗어났다는 사실이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2주 후에 개막할 영화제가 저 시뻘건 지역 어디에선가 열리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또 하나의 실없는 생각과 함께. 물론 저 노란 녀석들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밀려 오기는 마찬가지다. 아내가 이민 가고 싶다고 말하기에, 남극으로 갈 게 아니라면 어디에든 저 붉은 재킷의 당원들을 이끄는 아줌마 같은 이들이 있을 거라고 했다. 하여간 싸워야 할 곳은 여기이며, 무엇보다 가증스러운 공경에 맞서 무례함의 가치를 옹호해야 한다. 



2012-03-10

봄 (2)

1. 웨스 앤더슨의 <문라이즈 킹덤>(2012)


웨스 앤더슨의 신작 <문라이즈 킹덤 Moonrise Kingdom>이 65회 칸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다. 데뷔작 <바틀 로켓 Bottle Rocket>(1996)을 우연히 비디오로 보고 - 이 영화는 한국에서 개봉되지 않고 비디오로 직행했었다 - 기묘한 감성의 신인이 등장했다 생각한 게 벌써 14년 전의 일이라니. 그 사이에 앤더슨은 걸작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 The Life Aquatic with Steve Zissou>(2004) - 이 영화 역시 개봉되지 못하고 DVD로만 출시되었다 - 을 비롯한 일련의 영화들을 통해 명실공히 동시대 미국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이 되었다. 하드디스크를 뒤져 보니 20대의 마지막 해에 쓴 <로열 테넌바움 The Royal Tenenbaums>(2001) 리뷰(<씨네 21>에 기고했던 글)가 남아 있다. 다시 읽어 보니 민망하기 짝이 없는 글이지만  이 글에서 인용했던 <바틀 로켓>의 한 대사는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오빠는 어른이야. 돌아갈 집이 없는 거야."(주인공 안소니가 여동생 그레이스에게 한 말)


아래는 <문라이즈 킹덤>의 트레일러 영상과 포스터다.





2. 마지막 원고 (3.11)


이번 주를 끝으로 지난 1년 간 <씨네 21>에 연재해오던 "시네마나우" 칼럼을 중단하기로 했다. 2주에 한 번 원고지 8.5매 분량의 글을 쓰는 정도인데도, 점점 분량이 정확히 정해진 원고를 쓰는 일이 힘들어지고 있다. (특히 이 블로그에 이런저런 글을 쓰면서부터, 그리고 최근 관여하고 있는 <인문예술잡지 F>에 전적으로 자유롭게 글을 쓰게 되면서부터 더욱 그렇게 되었다.) 이번 주 <씨네 21>에 송고한 마지막 원고는 작년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지만 큰 주목은 끌지 못했던 아벨 페라라의 불운한 영화 <4:44 라스트 데이 온 어스>에 관한 것이다. 


<4:44 라스트 데이 온 어스 4:44 Last Day on Earth>(2011)


영화가 종말의 광경을 상상하는 여러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의 종말이란 말 그대로 세상의 끝, 인간이 사라지고 역사가 중단되는 순간이다.) 중요한 건 대체 그 종말의 광경을 영화로 불러들이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인류 멸망의 위기를 소재로 삼은 영화들의 목록을 굳이 꼽아보지 않더라도 - 만약 그리한다면 제법 긴 목록이 될 것이다 - 종말은 대개의 경우 지금/이곳의 풍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범용한 감각을 문제 삼기 위해 스크린에 호출된다는 걸 깨닫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즉 ‘종말영화’를 지탱하는 건 무엇보다 현재에 대한 감각의 문제인데 - 이런 영화들이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곧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 오히려 이런 영화를 보는 이들은 그 영화가 경이의 스펙터클로 그려내는 대상(외계인의 침공, 소행성, 환경 재해)이나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인간관계의 드라마나 그도 아니면 정치사회적 암시(냉전, 포스트 9.11)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이는 관객의 탓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종말영화’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한데, 종종 이들 영화는 범용한 감각을 문제 삼기 위해 불러 온 일련의 특별한 사건들을 영화의 중심에 두고 너무 특별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임박한 종말에 너무 호들갑스럽게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한심한 사례는 임박한 종말에서 인류를 구원하겠다며 달려드는 영웅들이 등장할 때다. 최근 영국영화에 풍성함을 더하고 있는 재기 넘치는 장르영화들 가운데 조 코니쉬의 <어택 더 블록>(2011)은 그런 식의 종말영화를 통렬하게 풍자한다.)





작년에 베니스영화제에서 첫 공개되었지만 여태 미국에서조차 개봉되지 않은 아벨 페라라의 신작 <4:44 라스트 데이 온 어스>는, 임박한 종말을 지금/이곳의 광경을 반추하기 위한 가설적 조건으로 적절히 활용하면서 오늘날의 각종 전자적 스크린의 풍경에 대한 담담한 사색을 가미한 특별한 작품이다. 페라라의 또 다른 SF영화 <바디 에일리언>(1993)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주요 무대는 주인공 연인(윌렘 데포와 페라라의 실제 연인인 섀닌 리)이 거주하는 뉴욕 이스트사이드의 옥탑방에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오존층 파괴로 인해 이튿날 새벽 4시44분이 되면 지구에 종말이 닥칠 것이 예고된 가운데, 영화 속 두 연인은 그 어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들의 외부와의 소통은 거의 전적으로 여러 전자적 스크린에 의해 매개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경이로운 장치들인 것은 아니고 저명인사들의 인터뷰나 뉴스가 방영되고 있는 텔레비전, 아이패드의 유튜브(Youtube) 동영상, 웹캠이 장착된 노트북의 스카이프(Skype)를 통한 화상통화 등 일상적인 것들이다. 페라라가 이 고요한 종말의 풍경을 관찰하면서 특별히 과거의 영화에 대한 향수나 전자적 스크린의 시대에 대한 혐오를 내비치진 않는 것 같다. 다만 세상에 임박한 종말이라는 가설적 상황의 힘을 빌려 오되 그것을 철저히 이야기의 배경으로만 삼음으로써 오히려 너무나도 평범하기에 눈에 띄지 않을 법한 지금/이곳의 풍경 - 예컨대 여기서 뉴욕은 페라라의 어떤 영화에서보다 더욱 생생한 일상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 에 윤곽과 색채를 더하고 관객에게 그것을 감각하게 만드는 식이다. <4:44 라스트 데이 온 어스>는 페라라가 여전히 자신의 영화적 뿌리를 인디영화에 두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자 현재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소중히 여기는 진정 시네마토그래픽한 종말영화의 드문 사례 가운데 하나다.


3. [Book Review] 너새니얼 도어스키의 <종교적 영화>(2004/2010)


이번 주,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밍을 마무리하는 틈틈이 아방가르드 영화감독 너새니얼 도어스키(Nathaniel Dorsky)의 영화론 <종교적 영화 Devotional Cinema>를 (아주 조금씩) 읽었다. (고작해야 30페이지가 조금 넘는 글이라 '책을 독파했다'고 말하기 좀 멋쩍긴 하다.) 작년에 구입해 둔 것을 미루다 이제야 다 읽게 된 것인데, 시네아스트에 의해 직접 씌어진 영화론 가운데선 로베르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래프에 관한 노트>에 필적할 만한 글이 아닌가 싶다. 




이 글은 원래 2001년 3월 프린스턴대학에서 있었던 종교와 영화에 관한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원고를 정리한 것인데 최초 원고는 2003년에 <숨은 신 : 영화와 신앙 The Hidden God : Film and Faith>(Mary Lea Bandy & Antonio Monda ed.)이라는 책에 실렸고 프랑스어로도 번역되어 영화잡지 <트라픽 Trafic>(2004년 겨울호)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내가 구입한 것은 <종교적 영화>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된 것의 2판(2010)으로 초판(2004)과는 약간 다르다 하나 아직 확인해 보지 못했다.


1960년대에 감독으로서 경력을 시작한 도어스키는 동시대 아방가르드 영화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거의 소개될 기회가 없었던 감독이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그의 <노래와 고독 Song and Solitude>(2006)을 상영한 적이 있지만, 최근 3년 간 그가 발표한 일련의 빼어난 단편들 - <겨울 Winter>(2008), <사라방드 Sarabande>(2008), <저녁기도 Compline>(2009), <새벽의 노래 Aubade>(2010), <목가 Pastourelle>(2010) 등 - 은 한국에서 상영된 바 없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들을 로테르담이나 토론토영화제에서 볼 수 있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들을 상영할 수 없었던 건 순전히 기술적인 이유 때문이었는데, 도어스키의 작품은 18프레임 속도의 16mm로 촬영된 것이지만 영화제 기술팀에서 영사속도 조절이 가능한 16mm 영사기를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같은 규모 해외영화제의 절반(내지는 기껏해야 2/3) 정도에 불과한 전주국제영화제 예산 수준으로 직접 극장용 16mm 영사기를 구입한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고, 서울에 속도조절이 가능한 16mm 영사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절대 대여해 주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현재로선 방법이 없다.


'devotional'이란 단어를 '종교적'이라 번역해 보긴 했지만, 사실 도어스키의 문맥 내에서 이 단어는 우리에게 (종교적인 경험에 필적하는) 전적으로 시네마틱한 경험을 선사하는 영화들을 지칭하기 위한 것일 뿐 특별히 종교적인 암시를 담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도어스키의 논의는 영화가 모종의 유물론적 완전성에 도달하는 순간, 미리 결정된 상징적 의미에 의해 침해됨이 없이 영화적 요소들이 온전히 그 스스로의 '현재성/지금임'(nowness)으로 빛나는 순간에 특권을 부여하는 작업에 주로 집중되어 있다. 예컨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모든 숏, 모든 컷, 모든 인물, 스토리 상의 모든 상황들은, 내러티브의 문맥 내에서 완벽하게 기능하긴 하지만 각각 그 자체를 제외하곤 그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p.38)는 것이다. 이처럼 상징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영화적 요소들을 도어스키는 (그 자체 이외의 어떤 것도 상징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기-상징'(self-symbol)이라 부른다. 그리하여 조르주 베르나노스(와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짧은 문장, "모든 것은 은총이다"(All is Grace)는 도어스키의 논의에서 "모든 것은 현재적이다"(All is Present)는 문장으로 변형되어 전유된다. (도어스키가 종교에서의 초월적 경험을 언급하는 것은 영화를 통해 삶과 세계를 생생히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일을 강조하기 위한 도구적 예시에 국한된다.) 도어스키는 영화에서의 편집에 관해서는 각각의 컷이 시각적, 시적 그리고 의미론적 수준 - 시각적인 것이 위계의 가장 상위에 있으며 시적인 것과 의미론적인 것이 차례로 그 뒤를 따른다 - 에서 조화를 이룰 때 최상의 결과를 낳는다고 보는데, 이런 주장은 일견 좀 모호하게 (혹은 상투적으로) 느껴지는 구석이 있지만 다음과 같은 다소 구체적인 예를 통해 힘을 얻는다. "존 포드의 영화는 이의 가장 훌륭한 예가 될 수 있다. 그의 숏들은 다가오는 빛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 우리는, 즉 관객과 카메라는, 잠깐 지속될 뿐인 저 빛나는 세계를 응시하며 어둠 속에 있다. 하늘과 땅의 구체성, 꼿꼿이 선 인간의 수직성 등은 포드의 우주적(cosmic) 건축을 구성한다. 각각의 컷들은, 시네마틱한 공기에 불을 붙이는, 확신에 찬 굳건한 시냅스(synapse)다. 이야기는 숏과 컷 자체의 전개를 통해 표현된다."(p.49)


도어스키가 몇몇 고전영화들 - 스스로도 인정하듯 아주 특이한 것들보다는 누구나 알 법한 익숙한 고전들 - 을 사례로 들어 자신의 영화론을 피력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그 영화론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그 자신의 영화들이다. 즉 <종교적 영화>에서 도어스키는 정작 자신의 영화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면서 가장 철저하고 또 명료하게 자신의 영화를 옹호하고 있는 셈이다. (좀 짖궃게 말하자면, <종교적 영화>는 도어스키 자신의 영화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는 관객들을 위해 '문자로 보여주는' 도어스키 영화처럼 여겨진다. 그런 만큼 이 책은 도어스키의 영화를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는 이라도 충분히 접근가능하다.)



4. 장-마리 스트라우브의 신작


장-마리 스트라우브의 신작단편 <위로할 수 없는 것 L'Inconsolable>, <재칼과 아랍인 Schakale und Araber> 그리고 2011년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삼인삼색 가운데 하나로 제작된 <후예 Un Heritier>가 지난 2월 8일 프랑스에서 ("L'Inconsolable : Films de Jean-Marie Straub"이라는 제목으로) 한데 묶여 개봉되었다. (스트라우브 스스로 <후예>의 '자매영화'라 부른 <로트링겐! Lothringen!>도 함께 상영.) 이 가운데 맨 앞에 언급한 2편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한국관객들에게도 소개될 예정이다. 아래는 개봉 당시 제작, 배포된 포스터로, 포스터 상단에는 이 영화들이 상영된(될) 영화제들 - 비엔나, 로카르노 그리고 전주 - 이, 하단에는 영화들의 제목이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