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2

반딧불의 시간
: 제2기 인디포럼, 그리고 한국 독립영화에 대한 관견(管見)


(※ 아래 글은 문학실험실에서 발간하는 문예지 『쓺』 제6호(2018년 상권)에 발표했던 것이다. 2019년 3월, 인디포럼작가회의는 올해엔 영화제를 개최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인디포럼 작가회의의 입장문: http://www.indieforum.org/xe/517621) 아래 글은 작년 인디포럼에서 성추행 파문이 있기 전에 집필해 발표했던 것이지만, 해당 사건 소식을 접하고 난 이후에는 이 글을 온라인에 올리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동안 이 글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지난 일요일(2019년 6월 9일), 종로의 인디스페이스에서 "느리게 배우는 사람의 교훈: 행동에서 담론으로"라는 제목으로 <수리세>(홍기선, 1984)와 <명성, 그 6일의 기록>(김동원, 1997) 상영 후 두 시간 정도 강연을 했다. 그리고 나서 문득 이 글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는데, 지금쯤이라면 오해 없이 읽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글 후반부에서 언급하고 있는 장산곶매의 <파업전야>(1990)가 최근 정식 극장개봉하게 된 것도 온라인 게시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2017년 11월 30일부터 12월 8일까지 열린 서울독립영화제의 경쟁부문 심사위원을 맡아 한 해의 주요 독립영화들을 한 자리에서 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영화제의 원래 취지대로라면 이 행사는 공식적 영화산업의 주변 혹은 바깥에서 제작된 영화들을 모아 ‘대안적’ 공간에서 상영하는 자리가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그렇게만 운영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까 독립영화에 대한 ‘순수주의’—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를 결연히 마음에 품은 누군가가 이런 뜻 깊은 행사가 왜 CGV 영화관 체인의 아트하우스를 주요 상영관으로 삼아 열려야 하는가라는 식의 의문을 제기한다면 이는 사정을 모르고 내뱉는 극히 비현실적인 투정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서울독립영화제와 더불어 중요한 독립영화 축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인디포럼 20주년을 맞아 2015년에 『씨네21』(1005호)이 마련한 좌담에서 “독립영화의 축제인 영화제들을 독립영화전용관에서 하는 게 맞는데 안타깝게도 극장 환경이 안 따라준다”고 토로한 이송희일 감독의 말은 결코 엄살이 아니다. 인디포럼이 20주년을 맞은 당시, 영화제는 종로의 롯데시네마 피카디리에서 열렸다. 2017년 서울독립영화제의 상영관 가운데는 종로의 서울극장 내에 함께 자리하고 있는 서울아트시네마와 인디스페이스 같은 대안적 공간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2017년 인디포럼 또한 서울아트시네마와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렸다. 그런데 개봉이라는 과정에서 배제된 고전영화와 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서울아트시네마의 경우 문제가 덜하지만, 독립영화전용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인디스페이스를 영화제 상영관으로 사용하다 보면 그 기간 동안 개봉 중인 독립영화 몇 편의 상영이 부득이 축소되거나 중단될 수밖에 없다. 같은 좌담에서 독립영화 배급사 시네마달의 김일권 프로듀서는 이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독립영화]전용관에서 영화제를 열면 그 기간에 개봉하는 다른 독립영화들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영화제는 개봉 전 독립영화가 관객과 미리 만나는 자리이고 향후 개봉했을 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시너지 효과가 생길 수 있어야 한다. 근데 그게 전혀 안 되는 구조다. 소규모 영화들은 ‘왜 우리가 영화제 기간에 개봉을 했지’ 이렇게 한탄하게 돼버리니까.” 

독립영화의 ‘경계’에 대한 질문은 21세기로 접어든 직후에 독립영화계 내부에서 첨예하게 제기된 바 있다. 한국에서 독립영화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의 양상을 간략하게만 소묘하려 해도 별도의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위에 언급한 좌담에 참여한 이들(김일권ㆍ부지영ㆍ이송희일ㆍ조영각)이 인디포럼의 역사를 회고하는 가운데 은연중 언급을 피하거나 부정적으로만 언급하는 시기가 있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그 시기란 2002년에서 2006년에 이르는 5년간이다. 인디포럼 “1기[의 운영주체]가 감독 중심이었다면 2기는 폭을 좀더 넓혀보자는 뜻에서 평론가나 PD까지도 합세”하게 되었다는 김일권의 말에, 조영각 전(前)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은 “그 분류가 좀 애매한 것 같다. 초창기부터 내가 [인디포럼 프로그래머로] 있던 2001년까지가 1기였고 그 다음 5년이 2기, 그리고 지금까지가 3기”라고 수정을 제안한다. 인디포럼의 역사에 기여한 여러 이름들이 호명되곤 하는 이 대담에서, 조영각이 2기라 부른 시기를 이끌었던 이들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물론 좌담을 지면에 옮기는 과정에서 삭제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이건 이 누락은 의미심장하다. 조영각의 분류를 따르자면 1기의 마지막 해에 해당하는 2001년에 ‘영토확장’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독립영화의 대중화를 꾀했던 인디포럼은 이듬해 ‘꽃순이 칼을 들다’라는 정반대의 슬로건을 내세우며 독립영화의 경계를 재설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향 전환에 대한 조영각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그때[2001년 인디포럼] 흥행 성적이 좋아서 2천만원 정도 흑자가 났다. 우리는 입이 찢어졌다. 그 후 곧바로 인디포럼 2002[년]의 슬로건이 ‘꽃순이 칼을 들다’였다. 독립영화가 진정 추구해야 할 새로움과 지향이 무엇인가를 놓고 독립영화 내부로 칼을 겨눠 성찰을 해나갔다. 일종의 영화미학을 놓고 논쟁하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서사는 홀대받았고 관객과는 점점 멀어지고 영화제는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이송희일 또한 “그때는 정말 인디포럼이 게토화되는 수준이었다”고 증언한다. 이른바 ‘2기 인디포럼’ 시기에 객원 프로그래머로 참여하기도 했던 이상용은 2005년 인디포럼이 끝난 직후 『참세상』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인디포럼은 최근 독립영화 진영의 뜨거운 감자였다. 2002년 ‘꽃순이 칼을 들다’라는 슬로건은 인디포럼의 변화를 선포하는 몸부림이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작품의 선정과 프로그래머의 자질을 둘러싸고 게시판은 조용해 질 줄을 몰랐다.” 

작게는 인디포럼이라는 영화제, 조금 크게는 독립영화계에서 벌어진 하나의 분쟁 혹은 불화의 현장을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흐른 지금 복기해 보려는 것은, 새삼 독립영화의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다시 따져 보기 위함이 아니다. 그보다는 음지에 유폐된 영화를 발견하고, 도래할 영화의 배아를 위한 배양액을 마련하고, 무엇보다 서로 떨어져 제각기 빛을 발하는 영화들을 일시적으로나마 연결하며 성좌(constellation)를 만드는 영화제의 비평적 기능을 재고해 보기 위해서다. 비평과 그 대상이 되는 작품 모두가 언어라는 장소를 공유하는 문학의 경우 이러한 비평적 기능은 무엇보다 문예지를 통해 수행되는 것이었다면, 영화의 경우 그러한 기능은 시네클럽, 시네마테크, 그리고 영화제처럼 개봉이라는 산업적ㆍ상업적 절차에 아나크로니즘을 도입하는 대안적 제도를 반드시 필요로 했던 것이다. 새로운 작품을 소개하는 일과 비평적 진단이 공통의 장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문예지와 같은 포맷을 영화제도에 도입하는 일은 디지털 기술에 힘입어 온라인 기반의 무빙 이미지 플랫폼이 자리 잡고 나서 비교적 최근에야 시도되고 있는 중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스타에 대한 가십이나 개봉작 소개에 치중하기보다는 비평적 측면을 강화한 영화잡지의 발흥은 대안적 상영 제도의 존재를 반드시 필요로 했으며 그 역 또한 마찬가지다. 내 생각에 영화제의 비평적 기능이라는 문제를 두고 씨름했던 2기 인디포럼의 고민은 앞서 소개한 『씨네21』 좌담 참여자들의 회고에만 의존해 폄훼되어도 좋을 만큼 사소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영화가 미학적으로 거의 파국에 다다른 것은 아닌가하는 어쩌면 조금 이른 근심을 하게 만들었던 2017년의 마지막 달, 도래할 영화의 배아가 아닌 정체된 영화의 클론에 불과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영화들이 서울독립영화제 경쟁부문을 채우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시기 인디포럼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다행히도, 출처가 불분명한 풍문이나 부정확할 수도 있는 나의 개인적인 기억 말고 당시 인디포럼을 둘러싼 정황들을 추측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 존재한다. 우선 2006년 9월에 발간된 『독립영화』(28ㆍ29 합본호)에 실린 ‘이슈—11회를 맞은 인디포럼’ 특집의 글들이 있다. 잡지 편집진은 “철저한 기획이 부족하여 일관성 없는 글들이 모이게 되었지만” “언젠가는 이 원고들이 누군가에 의해 유용한 것으로 쓰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이 원고들을 모두 싣기로 결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참여한 필자들은 두 명의 인디포럼 프로그래머(이상용ㆍ이선화), 인디포럼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두 명의 독립영화 감독(윤성호ㆍ이송희일), 그리고 한 명의 관객(김유리)이다. 여기서 이들의 글을 일일이 검토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송희일의 기고문 「인디포럼은 죽었다」를 살펴보자면, 2002년 이후 그때까지의 2기 인디포럼에 대해 “나는 독립영화, 너는 물 탄 독립영화, 너는 상업영화에 한 발 담근 독립영화 등등의 구별짓기는 결국 많은 사람들을 떠나게 했고, 결국 인디포럼의 단말마를 목도하기 직전에까지 오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패인”이라고 지적하면서 “꽃순이가 칼을 든 이후” “인디포럼은 죽었다”고 단언하는 그의 입장은 9년 후 인디포럼 20주년 좌담에서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2006년의 인디포럼은 ‘기획’과 ‘포럼’ 부문으로 이분화된 프로그램 하에 29편의 상영작(장편 3편ㆍ단편 26편)만으로 단출하게 치러졌고, 영화제 기간은 나흘로 축소되었으며, 상영작 가운데 2005~2006년에 제작된 신작은 많지 않았다. 이 점에서 “인디포럼이 그간 주력해왔던 ‘현장성’, 즉 한 해 동안 제작되었던 독립영화들을 응모하고 그것들의 경향을 살펴보려는 노력 자체가 빠져” 있었다는 이송희일의 지적은 틀리지 않다. 

그런데 2006년 인디포럼의 포맷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웹상에 올라와 있던 영화제 게시물을 보아서는 얼른 드러나지 않지만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면 포맷이 한눈에 보일 것이다. 포맷에 집중해 볼 수 있도록 감독 이름과 작품 제목만을 표기하고 제작연도와 상영시간 등은 표기하지 않았다. 포럼 부문 프로그램의 경우, 토론 주제와 관련된 1990년대의 단편영화 9편과 이하 감독의 영화 3편이 매 토론에 앞서 상영되었는데 아래 따로 표기하지는 않았다.  


기획: 독립영화—디지털 프롤로그

[시간성] ※ 디지털의 기동성과 시간적 연속성을 활용한 다큐멘터리 작품들 
김경만 <골리앗의 구조>
김경만 <하지 말아야 될 것들>
김동원 <송환>
김영석 <대우자동차투쟁속보>
태준식 <우리 모두가 구본주다>

[직접성] ※ 필름보다 직접적인 디지털의 호흡과 리듬을 살린 작품들
김곡ㆍ김선 <정당정치의 원리>
김곡ㆍ김선 <정당정치의 역습>
윤성호 <이렇게는 계속 할 수 없어요>
이정수 <자급자족하는 비디오>

[대체성] ※ 필름을 대체하는 디지털의 경제적ㆍ기술적 편의성을 살린 작품들
김은희 <세 개의 멜로>
신연식 <좋은 배우>
이지선 <yellow3>
채  기 <목록 1: 묻어있는>
채  기 <목록 2: 너의 눈 속에 나의 신념이 남아있다>
채  기 <목록 4: 홍학 사이버네틱스>
허기정 <Taipei-Durée>
허기정 <첫 번째 외출을 다루는 두 번째 장>

포럼 1: 독립영화, 이중성의 모험—90년대 말을 중심으로
(토론자: 이상용ㆍ유운성ㆍ조영각)

포럼 2: 영화문화와 비평—이하의 영화를 중심으로
(토론자: 이상용ㆍ이선화ㆍ김영진)


이렇게 보면 2006년 인디포럼의 포맷이 무엇을 모델로 삼고 있는지가 바로 보인다. 바로 작품과 비평이 공존하는 잡지이다. 의도된 것이었건 아니었건 간에 이 해 인디포럼은 기계적이라 여겨질 만큼 비평적 잡지의 포맷을 그대로 영화제로 옮겨온 것처럼 보인다. 혹은 작은 규모의 영상작품 전시에 어울릴 구성을 영화제에 곧바로 이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현장성’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프로그래밍한 기획 부문의 상영작 선정이 적절했는가, 그리고 포럼 부문에서 내건 주제에 대한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답하기 어렵다. 내가 토론자로 참석했던 첫 번째 포럼에서는 독립영화의 정체성과 여타 영화제들과의 경쟁 속에서 인디포럼을 운영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산만하게 뻗어 나갔다. 두 번째 포럼의 경우에도 ‘이하의 영화를 중심으로’ 영화문화와 비평의 역할에 대해 논의한다는 기획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해서 이선화 프로그래머 스스로 “텍스트에 대한 한층 정교한 논의가 수반되었다면 (……) 현재의 영화 지형에 있어 그와 같은 영화가 점하는 포지션에 대해 전체를 조망하는 시각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이번 포럼의 문제제기가 더욱 설득력 있게 전달될 수 있었을 (……) 가능성이 적지 않을 것 같다”고 인정한 바 있다(「초조함 혹은 구기방심(求其放心)의 마음」). 

그렇다면 이토록 과격하게 영화제의 규모를 축소해 가면서까지 무리하게 비평적 잡지의 포맷을 도입하려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것을 그저 ‘칼을 들고 설친’ 결과라는 식으로 냉소적으로 호도해서는 안 된다. 인디포럼 2기가 시작되던 무렵은 한국 최초의 연례 독립영화제로서의 인디포럼—연례적으로 열린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 최초의 독립영화제는 1984년 7월 7일과 8일 이틀간 국립극장 실험무대에서 열린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행사였다—의 위상과 기능이 바야흐로 위협받기 시작한 때였다. 영화진흥위원회 주최로 열리던 한국독립단편영화제는 2001년에 사단법인 한국독립영화협회와 공동주최로 열린 이후 2002년에는 서울독립영화제로 개칭하며 현재의 꼴을 갖추기 시작했고, 2001년에는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주최하는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제인 인디다큐페스티발이 출범했다. 무엇보다 화장품 기업 태평양 미쟝센(현재는 아모레퍼시픽 미쟝센)의 후원을 받아 충무로 영화감독들이 나서 장르영화 중심의 영화제를 표방한 미쟝센단편영화제를 출범시킨 것이 바로 2002년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앞에 두고 인디포럼 프로그래머들은 영화제의 역할과 기능을 재고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디포럼 10주년 직후 2005년 8월에 발간된 『독립영화』(25호)에 기고한 「인디포럼의 10주년 기획전, 또는 영화제의 (불)가능한 역할들」에서, 김노경ㆍ이선화 두 프로그래머는 2002년 인디포럼이 “충무로를 바라보는 포트폴리오적 성격의 단편영화들”을 배제하면서 “방향의 급선회로 당시 많은 논란(주로 부정적인)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한편 “비평적 담론 생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장”으로서의 영화제로의 방향 전환을 재차 강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비평적 잡지의 포맷을 영화제에 거칠게 적용한 그들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음은 상기한 바대로다. 2기 프로그래머들이 물러난 이후 조직을 재정비한 인디포럼은 2007년에 ‘그렇다면 심기일전’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통상적인 영화제 포맷으로 귀환한다. 2017년 미쟝센단편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김현정의 <나만 없는 집> 같은 영화는, 2기 인디포럼 기획자들이라면 포트폴리오적 단편영화의 전형으로 꼽으며 배제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이제는 서울독립영화제는 물론이고 인디포럼에서도 얼마든지 자리를 찾을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제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2기 인디포럼을 비평적 진단과 작품이 공존하는 잡지와 같은 장소로서 영화제를 다시 정의하려 했던 실험적 시도로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 물론 인디포럼의 방향성을 두고 다투었던 독립영화계 내부의 관계자들이라면 사정도 모르면서 과장하는 일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기껏해야 추정에 그칠 수밖에 없는 ‘내부 사정’에 대한 기술을 배제하고 가능한 이 글에서는 공식적으로 발표ㆍ공개된 기록물에 표명된 입장에만 집중해 보려 했다. 이렇게 보면 한때 독립영화계 내부에서 벌어졌던 독립영화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은 사실 영화제의 역할과 기능을 놓고 벌인 논쟁에 다름 아니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나는 “비평적 담론 생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장”으로서의 영화제라는 김노경ㆍ이선화의 주장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 쪽이다. 다만 나는 2기 인디포럼 기획자들이 영화제를 운영하는 가운데 노골적으로나 암암리에 드러내 보인 비평적 실천의 개념에는 동의할 수 없는데, 비평이란 지도그리기와 관련될 수는 있지만 울타리를 세우는 일과는 거의 무관하기 때문이다. 비평은 제도가 아니라 사유다. 혹은 제도 안에서조차 기어이 사유하는 일을, 게다가 오직 그것만을 저항으로 삼는 실천이다. 그런데 2기 인디포럼은 비평적 의식이 사유하는 상상적 성좌를 영화제라는 제도의 경계를 다시 획정하는 작업을 통해 현실화ㆍ영토화하려 했던 것이다. 사실 이 시기 인디포럼은 보리스 그로이스가 지난 세기 초엽의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재고하면서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해 세계를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을 필요로”(『아방가르드와 현대성』)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에 있어선 오히려 거꾸로 되어 2006년 인디포럼 기획 부문을 주로 정치적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 들로 채우는 수세적ㆍ방어적인 프로그래밍으로 나타났지만 말이다. 

2기 인디포럼의 실험들은 이제 대부분 폐기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인디포럼이 여전히 운영하고 있는 ‘월례비행’처럼 일부 잔존하고 있는 것도 있다. 영화제 기간 이외에도 독립영화 한 편 씩을 영화관에서 매달 상영하고 토론과 비평 작업을 병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사실 2기 인디포럼 기획자들이 영화제의 이벤트적인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2003년 2월부터 시작해 2004년 3월까지 지속했던 ‘월례포럼’을 이어받아 변형한 것이다. 또한 신작 중심의 프로그래밍에만 집착하지 않고 특정한 주제 하에 상영과 포럼이 결합된 프로그램을 마련한 2006년 인디포럼의 포맷은 현재의 인디포럼 뿐 아니라 인디다큐페스티발 같은 다른 독립영화제에도 흔적—의미심장하게도 양쪽 모두 ‘포럼기획’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 부문에—을 남기고 있다. 2기 인디포럼이 파국을 맞고 나서 꼬박 10년이 지난 2016년, 이 해 인디포럼 포럼기획전의 주제는 ‘디지털, 눈을 뜨다’였는데 이것이 2006년 기획 부문 주제였던 ‘독립영화—디지털 프롤로그’의 변주임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게다가 ‘디지털, 눈을 뜨다’ 포럼기획전 부문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로는 2기 인디포럼 첫 해에 <반변증법>(2001)과 <시간의식>(2002)이 초청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29편의 극소수 영화만이 ‘간택’되었던 2006년에도 두 편이나 초청을 받은 ‘비타협영화집단’ 곡사(김곡ㆍ김선)가 올라 있다. 그런가 하면 2016년 인디포럼 카탈로그에는 “독립 장편 극영화가 상업영화로 가는 징검다리가 아니라 주류영화의 문법을 거부하는 새로운 대안이 될 때에만 한국영화의 미래는 더욱 비옥해질 것”이라는, 흡사 2기 인디포럼 기획자들의 다짐을 떠올리게 하는 문구가 실려 있기도 하다. 이 해에 인디포럼은 의장과 사무국장을 교체하며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이전 시기의 성과를 이어받고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시기(4기?)로 자리매김 될 지는 지켜볼 일이다.  

내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2017년 서울독립영화제에 대한 잠시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경쟁부문 초청작들 대부분이 실망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시 칼을 계속 들었어야 했어’ 따위의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갓 21세기를 맞이했을 때 한국의 독립영화계가 외연의 확장이나 경계의 획정을 두고 다투는 일 대신 영화적 방법의 문제라는 것을 탐문하고 토론하고 실천하는 일에 전념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예술에 있어서 방법이란 형식(form)ㆍ양식(mode)ㆍ스타일과는 다른 것이다. 영화를 하나의 ‘예술’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저항감을 느끼는 이들이 영화계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겸손인지, 허세인지, 그도 아니면 비하로 위장된 자부심(“예술입네 하지만 우리한텐 영화는 그냥 일이지”)인지는 분명치 않다. 여하간 영화에 있어서도 방법의 문제는 중요하며 그것이 형식ㆍ양식ㆍ스타일과는 다른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예술에 있어서 형식ㆍ양식ㆍ스타일은 감각이나 감수성과 관련된 것이고 따라서 비평의 문제가 될 수 있다. 반면에 방법은 예술을 통해 보고 또 드러내고자 하는 대상의 특성에 대한 예측에 따라 구성되는 인식론적 틀과 관련되며 따라서 이론의 문제가 된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방법이 비가시적 알고리즘이라면 형식ㆍ양식ㆍ스타일은 가시적 디스플레이라 생각해도 좋다. 무엇보다 주의해야 할 것은 방법이 형식ㆍ양식ㆍ스타일을 규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 쪽이건 종종 명칭에 있어 ‘~주의(~ism)’의 형태를 띤다는 데 현혹되어 방법을 형식ㆍ양식ㆍ스타일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를 무시하고 특정한 방법을 특정한 형식ㆍ양식ㆍ스타일과 결부시키려 들 때 결과적으로 방법은 관습 내지는 상투구의 집적으로 전락—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물론이고, 애초에 방법으로 출발했으나 형식ㆍ양식ㆍ스타일로 귀착되어버린 모더니즘, 음렬주의, 시네마베리테 등등—하고 만다. ‘방법을 산출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을 초현실주의의 경우를 떠올려 보면, 자동기술법이나 우아한 시체 놀이나 데페이즈망은 특별히 초현실주의적 형식ㆍ양식ㆍ스타일—사실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과 결부된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식ㆍ양식ㆍ스타일과도 결합할 수 있는 방법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초현실주의가 상업적 광고의 전략과 결합되곤 하는 것도 이상하기보다는 당연한 일이다. 광고의 목표는 그것이 드러내고자 하는 대상(상품)과 그것의 인식 주체(소비자)가 맺는 우연적 관계를 필수불가결한 관계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있고, 이때 우연과 깊숙이 연관된 초현실주의의 방법들이 유용하게 활용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오늘날의 광고 PD들은 마그리트의 후예이고 광고 카피라이터들은 한도 끝도 없이 『자기장(Les Champs magnétiques)』(1920)을 계속 쓰고 있는 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방법과 형식ㆍ양식ㆍ스타일의 불편한 만남을 다루기 위해 비평적 사유가 요청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방법이 꺼림칙한 형식ㆍ양식ㆍ스타일과 결합되었다 해서 방법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의 독립영화는 바로 한국영화에 방법의 문제를 제기하는 일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는 독립영화가 ‘주류영화의 문법’을 거부하는 데서 출발했다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일단 언어의 문법에 상응하는 문법이 영화에도 있으리라는 가정은 지탱되기 힘들다는 것은 이론적으론 상식에 속하기도 하고, 그보다 ‘주류영화의 문법’이라 할 때 여기서의 문법이란 형식ㆍ양식ㆍ스타일을 가리키는 부주의한 용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법이라는 용어 때문에 오도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주류영화란 방법을 공유하는 영화들이 아니라 특정한 시기 및 장소에서 유용한 일련의 형식ㆍ양식ㆍ스타일을 취한 영화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것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 말에 담긴 함의는 다음과 같다. 독립영화의 임무란 영화에 있어서 방법의 필요성ㆍ유효성이란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해서 주류영화의 ‘문법’(형식ㆍ양식ㆍ스타일)을 거부할 것을 요청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문법’은 독립영화가 제안한 방법과 결합될 수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이란 과연 무엇일까.

한국의 독립영화가 한국영화에 방법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출현했다고 할 때 그 방법이란 주지하다시피 바로 액티비즘이었다. 한국에서 ‘독립영화’란 주류영화와는 다른 제작양식을 취하는 영화들—바꿔 말하면 ‘틈새시장’을 겨냥한 영화들—을 가리키는 산업적 용어가 아니라 방법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이론적 용어라는 특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울올림픽을 맞아 이루어진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강제 철거된 상계동 지역 주민들의 삶과 투쟁을 기록한 김동원의 <상계동 올림픽>(1988)은 액티비즘 독립 다큐멘터리의 효시로 꼽힌다. 액티비즘이란 작품의 경계를 그것이 제작되고 상영되는 상황—당연히 가변적이고 유동적일 수밖에 없는—으로까지 넓히면서 작품과 상황 간의 상호적인 피드백을 최대화하려는 방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김동원이 <상계동 올림픽>에서 취하고 있는 양식이 주류 다큐멘터리의 그것과 차별화된 대안적 양식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과장일 수밖에 없다. 상계동 주민들이라는 집단을 ‘우리’라는 1인칭 대명사로 대변하며 설명적 내레이션으로 이끌고 가는 <상계동 올림픽>의 양식은 이 영화가 제작되던 시기까지 한국의 개봉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관제 ‘문화영화’의 그것과 거의 차별화되지 않는다.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기원’에 놓인 이 불편함이 그동안 적지 않은 평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상계동 올림픽>에서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의 양식이지 액티비즘이라는 방법 자체가 아니라는 데는 누구라도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상계동 올림픽>에 앞서 제작된 작품 하나를 망각에서 끄집어 낼 필요가 있다. 1983년에 전남 구례군 광의면에서 있었던 수세(농지개량조합비) 현물납부 투쟁을 다룬 서울영화집단의 8mm 영화 <수리세>(1984)가 그것이다. 김동원은 본격적으로 다큐멘터리 운동에 뛰어들기 전 서울영화집단의 다큐멘터리들을 인상 깊게 보았다고 술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판놀이 아리랑>과 <수리세>가 영화적으로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형식적으로 봐서 선전선동 면에서 영화적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었거든. 그러한 전통이 이어지지는 않았거든.”(『매혹의 기억, 독립영화』) 서울대학교 영화동아리 얄라셩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서울영화집단이 표방한 소형영화 운동의 방법론을 구체화한 최초의 작품”(『변방에서 중심으로: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이라 알려져 왔던 <수리세>는 2017년에 디지털 복원되어 고(故) 홍기선 감독 추모전의 일환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상황이 진행되는 동안 촬영된 <상계동 올림픽>의 경우와 달리 <수리세>를 제작할 당시 수세 현물납부 투쟁은 이미 종료된 상태였다. 연출을 맡았던 홍기선은 “싸울 때 내려가지 못하고 다 끝난 다음에 재현다큐멘터리를 한” 것이라 “현장에 없어서 작품이 좀 그렇지”라고 아쉬움을 토로한 바 있지만(『매혹의 기억, 독립영화』), 오히려 그런 사정 때문에 이 영화는 김동원의 <명성, 그 6일의 기록>(1997)—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명동성당 농성투쟁에 관한 다큐멘터리—을 통해 구현될 양식을 선취하게 되었다. 서울영화집단 제작진은 투쟁에 참여했던 농민들의 인터뷰, 신문 보도 기사, 투쟁 현장 사진, 결의문 및 그것을 읽는 농민의 모습 등을 마을에서 열린 대보름놀이 광경을 기록한 영상과 결합해 투쟁이라는 사건을 사후적으로 재구성하는 양식을 고안했던 것이다. 이로써 마을 주민들이 대보름놀이를 준비하고 수행하는 광경은 직접 카메라에 담지 못했던 수세 현물납부 투쟁의 상징적 재연처럼 비치게 된다. 역시 설명적 내레이션이 활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내레이터나 인터뷰이의 목소리를 그가 진술하는 내용과 은유적으로 관련된 영상과 독특하게 병치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예컨대 수세를 현물로 납부하기로 결정한 사연을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달집태우기를 준비하며 짚단을 쌓아올리는 아이들과 청년들이고, 농민들이 공무원 및 경찰과 대치했던 일을 내레이터가 이야기하는 동안 보게 되는 것은 대보름을 맞아 주민들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광경이다. <수리세>는 <상계동 올림픽>과 액티비즘이라는 방법을 공유하되 그것과는 다른 양식을 지닌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또 다른 기원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한국 독립영화는 과연 어떤 식으로 방법의 문제를 제기해 왔는가. 다큐멘터리의 경우 액티비즘은 형식ㆍ양식ㆍ스타일에 있어서 분기를 거듭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주된 방법이라 할 만하다. 2017년 인디다큐페스티발 포럼기획전의 주제는 ‘액티비즘, 나우(Activism, Now!)’였다. 또한 주류영화의 형식ㆍ양식ㆍ스타일을 방법론적 액티비즘에 수용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어서, 예컨대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가 제작한 용산참사 다큐멘터리 연작—<두 개의 문>(2011)과 <공동정범>(2016)—처럼 액티비즘이라는 방법적 기반 위에 스릴러장르의 ‘문법’을 오늘날의 다큐멘터리와 인터미디어 영상작품들에서 엿보이는 미학적 형식ㆍ양식ㆍ스타일과 맵시 있게 결합한 사례도 있다. 2기 인디포럼, 특히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에 집중한 2006년 인디포럼의 포맷에는 확실히 징후적인 구석이 있다. 방법의 문제를 형식ㆍ양식ㆍ스타일의 문제로 오인한 나머지 수세적ㆍ방어적인 프로그래밍으로 귀결된 것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론 한국 독립영화가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돌파하지 못하고 있는 ‘픽션의 방법’이란 문제와 관련된 고민이 고스란히 배어 있기 때문이다. 2016년 인디포럼 카탈로그에도 드러나 있는 것처럼 독립 장편 극영화가 여전히 주류영화의 ‘문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의혹은 사실 장산곶매의 <파업전야>(1990) 이후부터 줄곧 제기되어 온 것이나, 진정한 문제는 ‘문법’이라는 부주의한 용어가 가리키는 형식ㆍ양식ㆍ스타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법의 부재에 있다는 점은 재차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방법이 명확하다면 주류영화의 ‘문법’을 수용하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앞에서 밝힌 대로다. 한국 다큐멘터리의 역사에서 폭넓게 적용되고 실험되어 온 액티비즘이라는 방법은 극영화에서는 그리 성공적으로 수용되지 못했다. 시작부터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양쪽에 관심을 기울였던 서울영화집단도, 빈궁한 농촌의 현실을 다룬 단편 극영화 <파랑새>(홍기선ㆍ이효인ㆍ이정하, 1986)를 보면 알 수 있듯 액티비즘을 극영화로 수용하는 데 있어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사실 실패했다고 말해도 좋다. 그럼 극영화와 관련해 한국의 독립영화는 방법이라는 문제를 이대로 방기해도 좋은 것인가. 달리 말하자면 한국의 독립영화제는 극영화와 관련해서는 방법의 문제를 방기한 채로 영화산업의 틈새시장을 겨냥하는 저예산영화들을 쇼케이스하는 데 만족해도 좋은 것인가. 이를테면 <족구왕>(2013)과 <범죄의 여왕>(2015)으로 주목을 모은 독립영화집단 광화문시네마의 신작으로 웹드라마 양식을 삽화적 구성을 통해 집적했다고 해도 좋을 <소공녀>(2017) 같은 영화 말이다. 이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이어 서울독립영화제 경쟁부문에도 초청되었는데, 디지털 시대에 문화적 인터페이스들이 넘나드는 현상을 지칭하는 레프 마노비치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트랜스코딩(transcoding)’이야말로 마침내 한국 독립영화(제)가 극영화와 관련해 유의미하게 제기한 방법임을 수긍해야 하는 것일까? 참고로 덧붙이자면 2017년 서울독립영화제 특별전은 ‘홍기선: 새로운 영화운동의 시작’, ‘박종필: 카메라를 든 현장의 활동가’, 그리고 ‘신작 웹드라마 쇼케이스’로 꾸려졌다. 한국 독립영화의 기원, 액티비즘의 다큐멘터리, 그리고 트랜스코딩의 극영화? 

2006년 인디포럼이 끝나고 나서, “여전히 누군가는 좋은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지금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낫다”고 말하며 “비평이 아젠다를 설정할 권리는 있지만 작품의 존재에 앞서 반드시 그래야할 의무는 없다”고 주장한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충고에 대해, 당시 프로그래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이선화는 “다른 이들에게 초조함으로 비칠 수 있을지언정” “비평이 아젠다를 설정하는 것은 권리라기보다는 의무”라고 반박한 바 있다(「초조함 혹은 구기방심의 마음」. 이를 영화제가 아젠다를 설정하는 것은 권리라기보다는 의무라고 고쳐 읽어도 좋을 것이다. 2기 인디포럼을 잠시 망각에서 꺼내어 본 것도 그 때문이다. 다툼 속에 불꽃이, 빛이 있었던 시간이지만, 그 이후가 소멸의 시간인지 잔존의 시간인지는 여전히 분명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