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24

시네마-에이돌론: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입문, 혹은 논쟁을 위한 서설

(※ 아래 글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회고전"(2014.10.29~11.23)과 관련해 쓴 글로 서울아트시네마 소식지(2014년 11월호)에 실릴 예정이다. 올리베이라의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쓴 글이라 혹시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이곳에 올려 둔다.) 


시네마-에이돌론
: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입문, 혹은 논쟁을 위한 서설


한국의 올리베이라 수용 약사(略史)

오랜 준비 끝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마련한 이번 회고전은 올리베이라의 작품 대부분이 한꺼번에 상영된다는 점에서 아주 귀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보고 그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할 기회가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때 지난 15년 동안 한국에서 올리베이라의 영화가 어떻게 소개되었는지 그 역사를 간략히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본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1993년 작품인 <아브라함 계곡>이다. 용케도 NHK 위성방송 BS2 채널까지 서비스하는 지역유선방송에 가입해 두었던 덕분인데, 2000년 초에 방영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작품 외에도 <상자>(1994)와 <수도원>(1995)이 함께 방영되었는데,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나는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의 스토리에 의존해서 일본어 자막 중 한자(漢字) 부분만을 띄엄띄엄 읽어 가며 그나마 따라갈 수 있었던 <아브라함 계곡>만을 끝까지 보았다. 

사실 올리베이라의 나이가 90세가 되었던 1998년까지만 해도 - 이때까지 그는 자신의 사후에 공개하도록 한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1982)을 포함해 총 19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 한국에서 그의 이름은 시네필들의 영화적 지도 어디에도 기입되어 있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그의 영화가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 그보다 한참 전인 1970년대였고, 1990년대는 한국에서 이른바 시네필 문화가 싹튼 시기 - 실은 영화 자체에 대한 열광보다는 어렵사리 구해 본 영화에 대한 자부심이나 쉽게 볼 수 없는 영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가득한 시기였다 - 로 간주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꽤 기이한 일이다. 해외 영화제를 방문할 수 있었던 극소수의 프로그래머나 기자 혹은 평론가들이 그의 영화를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어떤 영문인지 그들은 올리베이라를 국내의 관객들에게 직접 보여주는 일에는 그닥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에 대한 언급이 일부 있었다 해도, 그것은 영화와 직접 대면하는 것을 유예시키면서 ‘저 바깥에는 이러이러한 근사한 것들이 있다’고 자랑하는 ‘교도관의 비평’ 수준을 넘지 못했다. 

그의 영화가 극장에서 처음 상영된 것은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1999년)에서였는데, 초청된 작품은 라파예트 부인의 『클레브 공작부인』(1678)의 무대를 현재로 옮겨 각색한 <편지>였다. 아마 이 영화가 같은 해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올리베이라의 영화가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폐간된) 영화잡지 『필름 컬처』의 주간이자 (지금은 사라진) 서울시네마테크 대표였고 (이제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광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였던 임재철 평론가 덕택이었다. (광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시절(2001~2004), 그는 페드로 코스타, 루크레시아 마르텔, 알랭 기로디 등 이제는 국제적인 감독이 된 이들의 초기작을 국내에 처음 소개했고,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 그리고 존 포드의 회고전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는 2005년에 <불안>(1998)을 자신이 설립한 영화사인 이모션픽처스를 통해 수입, 개봉한 바 있다. 이 영화는 현재까지 한국에서 정식으로 극장 개봉된 유일한 올리베이라 영화다.) 2001년 7월 5일부터 10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는 (그전에 오즈 야스지로, 오손 웰즈, 알랭 레네 회고전을 선보였던) 서울시네마테크 주최로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걸작선 및 포르투갈 영화특집」이라는 행사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올리베이라의 영화 다섯 편 - <프란시스카>(1981), <아니오, 혹은 지배의 공허한 영광>(1990), <아브라함 계곡>, <세계의 시초로의 여행>(1997), <불안> - 이 한꺼번에 상영되었다. 같은 해 광주국제영화제에서는 <나는 집으로 간다>(2001)가, 이듬해에는 <포르토에서의 어린 시절>(2001)이 상영되었다. 또한 2002년 포르투갈대사관과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주최로 열린 제2회 포르투갈 현대영화제 - 2001년의 제1회 영화제는 당시 서초동에 자리하고 있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렸는데 한심한 영화들뿐이었다 - 에서는 <언어와 유토피아>(2000)가 상영되었다.

스크린에서 비로소 올리베이라의 영화를 접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 뜻밖에도 두 편의 올리베이라 영화가 국내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방영되었는데, 하나는 2001년 10월 KBS 위성 2TV를 통해 방영된 <수도원>이고, 다른 하나는 2002년부터 방송을 시작한 스카이라이프 MGM 채널을 통해 방영된 <새틴 슬리퍼>(1985)이다. 당시로선 해외의 올리베이라 마니아들 가운데서도 실제로 본 사람이 거의 없었던 <새틴 슬리퍼>가 ‘나의 사랑, 나의 기사’라는 제목으로 방송될 예정이라는 걸 MGM 편성표에서 확인하고 영화가 시작되기 1시간 전부터 텔레비전 앞에 붙어 앉아 있던 기억이 나는데, 실망스럽게도 방송판은 400분에 달하는 오리지널이 아니라 해외용으로 제작된 130분짜리 축약판이었으며 게다가 조악하게 영어로 더빙된 것이었다. (나는 2012년에야 <새틴 슬리퍼> 오리지널 버전을 볼 수 있었다. 이전에 찾은 기록에 따르면, 이 영화는 역시 ‘나의 사랑, 나의 기사’라는 제목으로 1990년에 KBS를 통해 방영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미심쩍은 것이라 확인이 필요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좀 어렵다.) 

이후 사정은 바뀌어 지난 10여 년 동안 올리베이라의 신작은 국내 영화제를 통해 꾸준히 소개되어 왔다. 2011년에는 그의 ‘좌절된 사랑의 4부작’ - <과거와 현재>(1971), <베닐드 혹은 성모>(1975), <불운의 사랑>(1978), <프란시스카> - 이 부산과 전주영화제에서 (구성을 달리하며) 각각 마련한 포르투갈 영화특집 프로그램을 통해 모두 상영되었는가 하면, 같은 해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열린 포르투갈영화주간에서는 올리베이라의 장편 데뷔작인 <아니키 보보>(1942)와 그가 배우로 출연한 작품이자 포르투갈 최초의 유성영화인 <리스본의 노래>(코티넬리 텔무 감독, 1933)가 상영되었다. 올리베이라 탄생 100주년을 맞아 <나의 경우>(1986)부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2007)까지 21편의 장편을 모은 DVD 박스세트가 포르투갈에서 출시된 이후로는 온갖 ‘어둠의 경로’로 그의 영화가 ‘유통’되고 있으며, 심지어 <포르토에서의 어린 시절>은 ‘나의 어린 시절 뽀르또’라는 제목으로, <나의 경우>는 감독의 이름이 ‘올리비에라’로 바뀐 채 의심스러운 리핑판 DVD로 국내 출시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바뀐 것일까? 냉정히 말하자면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가까스로, 즉 특별전이나 영화제 같은 임시변통의 창구를 통해, 혹은 접근성이 떨어지는 케이블 혹은 위성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혹은 각종 어둠의 경로를 통해 산발적으로 접할 수 있었을 뿐이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 않은가? 2014년 현재까지 올리베이라는 총 32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고 그 가운데 25편이 지난 15년 동안 국내에서 상영, 방영 혹은 DVD로 출시되었지만, 흡사 고다르처럼,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보이기는 하되 알려지지 않은 감독이다. 빠른 기간 내에 시네필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었지만 논쟁의 대상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 어떤 이들은 그가 100세가 넘어서도 왕성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숭배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겐 올리베이라에 대한 담론이라는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두 개의 물음

“영화는 비(非)물질적이야. 그것은 유령이지.”
- 파울루 로샤의 <건축가 올리베이라>(1993) 중에서 올리베이라의 말  


논쟁을 자극하기 위해, 다소 도발적인 두 개의 ‘불경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 올리베이라는 포르투갈적인 감독인가? 그의 영화는 진정 ‘시네마틱’(cinematic)한가? 물론 이 물음에 모두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견해가 궁금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모두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축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미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1998년에 발표한 짧은 글에서 <신곡>(1991)과 <수도원>에 대해 논하면서 “위대한 올리베이라 안에는 독일적인 구석이 있다”고 쓴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올리베이라는 독일이 지난 2백여 년 동안 하나의 국가로서의 그 자신에게 품은 불확실성을 (오히려) 매혹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활용한 신화와 우화들을 통해 포르투갈적 카톨리시즘을 구조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바디우는, 테오도르 폰타네처럼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이후 모든 독일 예술은 어느 정도 이념(Idea)의 교훈주의 및 교육적 목적 - 이는 서사적 혹은 심리적 요소들과 이러한 요소들의 상징적 역할에 대한 강조 사이의 간극에 자리하고 있다 - 에 의해 오염되어 왔는데, 올리베이라 영화의 알레고리적 구조에서는 그러한 독일적 특성이 느껴진다고 본다. 올리베이라에 대한 장문의 통찰력 있는 비평을 남긴 포르투갈 평론가 고(故) 주앙 베나르드 다 코스타는 의미심장하게도 그의 영화에서의 ‘영원한 여성성’(eternal feminine)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물론 이는 괴테의 『파우스트』의 유명한 마지막 문장(“영원한 여성성이 우리를 고양시킨다.”)과의 관련을 떠나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올리베이라 영화에서 이 모티프는 때로 아주 직접적으로 시각화된다. 예컨대, <아니키 보보>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소년과 소녀가 작은 인형의 양쪽 팔을 하나씩 잡은 채 - 그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 이후 올리베이라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될 (로베르 브레송적인) ‘접촉에 대한 망설임 혹은 두려움’이라는 주제를 감지하게 된다 - 건물 사이로 난 오르막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진 1) 잠시 후, 이들의 모습 위로 상승(고양)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구름의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사진 2) 올리베이라가 자신의 실제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 1952년에 구상했지만 반세기가 넘어서야 실제로 스크린에 옮긴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례>(2010)에서 샤갈의 회화를 연상케 하는 ‘승천’(사진 3) 장면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진 1]

[사진 2]

[사진 3]

하지만 바디우의 지적은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올리베이라 안에는 분명 독일적인 구석이 있지만, 그만큼이나 프랑스적인 구석 및 이탈리아적인 구석도 있으며, 유대적인 구석 - 포르투갈에서 올리베이라(올리브나무)나 페레이라(배나무)처럼 나무와 연관된 성은 유대계로 추정되곤 한다 - 도 있고, 심지어 북구적인 구석도 있다. 분명 올리베이라는 주제 레지우,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 아구스티나 베사-루이스 등의 포르투갈 문학에서도 그의 영화를 떠받치는 언어적 자양을 취해 왔다. 한편으로 포르투갈 바깥의 관객들이 그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포르투갈 작가들의 작품이 거의 번역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영화가 비단 독일만이 아니라 다양한 범유럽적 작품들(문학, 미술, 연극, 음악 그리고 영화)의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올리베이라의 ‘멀티미디어’ 걸작 <나의 경우>인데, 여기서는 피란델로의 『작가를 찾는 여섯 명의 등장인물』을 연상시키는 주제 레지우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공연과 사무엘 베케트의 텍스트가 겹쳐지고, 돌연 무대 위에 뉴스릴 영화가 영사되고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내걸리는가 하면(사진 4와 5),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이상적인 도시>를 모델로 한 세트에 욥기의 인물들이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함께 등장하고(사진 6), 이 모든 과정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한 촬영팀의 모습 또한 보여진다. 한 인터뷰에서 올리베이라는 <신곡>과 관련해 어떻게 다양한 문화에서 나온 텍스트들을 한데 묶는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냐는 질문에 대해, 그것들은 다양한 문화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모두 “우리의 서구적 시각 혹은 교육에 따른 원죄의 문제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원천을 가진다고 답하기도 한다. 

[사진 4]

[사진 5]

[사진 6]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포르투갈 영화에 있어 지배적인 장르는 바로 포르투갈 영화 자체”(주앙 베나르드 다 코스타)라고까지 말해지는 포르투갈 영화의 기벽(奇癖)의 전형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포르투갈을 잠깐이라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그곳의 공간과 사람들에게서 느낀 인상에 가장 가까운 올리베이라 영화는 <아니키 보보>나 <상자>처럼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이례적인 경우에만 국한됨을 깨달을 만큼, 그의 영화는 ‘포르투갈 영화적’이되 ‘포르투갈적’이지는 않다. 올리베이라의 ‘포르투갈 영화’는 종종 포르투갈이라는 한 국가의 영역을 넘어 유럽, 보다 크게는 레이몽 벨루가 지적한 바대로 문명(civilization) 혹은 세계의 운명에 대한 몰두로 나아가곤 한다. 포르투갈이 위기에 닥친 시기에 부활해 제국을 지배하리라 믿어졌던 16세기의 전설적인 왕에 관한 주제 레지우의 희곡 『세바스티앙 왕』을 영화화한 <제5제국>(2004)처럼 일견 지극히 지역적인 소재를 다룬 것처럼 보이는 작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앙골라에서 식민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병사의 구술을 통해 포르투갈 국가의 흥망성쇠를 삽화적 형식의 영화적 프레스코화로 담아낸 가공할 걸작 <아니오, 혹은 지배의 공허한 영광>은 또 어떤가. (벨루는 올리베이라야말로 한 편의 영화 안에 조국의 역사를 담아내면서 그 설립에서부터 제국의 몰락에 이르는 역사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아는 유일한 영화감독이라고 썼다.) 올리베이라의 고향 포르토를 가로지르는 도우루 강이 대서양과 만나는 곳에 있는 작은 등대마저도, 이 작은 도시의 하루를 열고 닫는 제의적 사물(<도우루강의 노동>(1931))로 출발해 문명의 메타포(<포르토에서의 어린 시절>)로까지 전화된다.  

‘포르투갈 영화적’이되 ‘포르투갈적’이지는 않은 영화, 어쩌면 이는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 주앙 보텔료, 페드로 코스타, 주앙 페드로 로드리게스, 미겔 고메스 등 여타 포르투갈 감독들의 영화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일 수 있다. 올리베이라가 특별한 것은, 영화를 사유함에 있어서 ‘시네마틱’이라고 하는 정의가 불가능한 모호한 개념에 집착하기보다는, 영화를 하나의 예술이나 미디어가 아닌 일종의 기능(function)으로서, 다른 예술 혹은 미디어들이 서로 만나고 교차하며 작동하기 위한 장(場)을 조절하는 기능으로서 받아들이길 주저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건 아주 새롭다기보다는 초기영화 혹은 원시영화 시기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한데, 올리베이라가 그 시기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의 영화관(觀)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나의 가정으로 남겨두기로 하자.) 여기서 그의 ‘유령’(fantasma)으로서의 영화론(“영화란 항상 현실의 유령이다”)이 나온다. 영화는 실체 없는 비물질적인 것이지만, 다른 실체적인 것들 사이의 간극에 유령처럼 거하며 기능한다. 스페인 영화감독 빅토르 에리세는 올리베이라의 이러한 영화관에서 ‘영화의 불확정적 본성’을 본다. 이는 공인된 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들로 인해 순수영화의 힘이 약화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영화에게 남겨진 일은 자신의 강둑에 물을 대는 것, 그토록 빠른 시간에 그것이 협곡들을 내며 가로질렀던 예술들 사이로 파고드는 것, 교묘하게 예술들을 포위하는 것, 보이지 않는 지하수로를 내기 위해 심층의 토양으로 스며드는 것”이라 지적하며 영토(실체)없는 영화, 곧 ‘불순한 영화’(cinéma impur)를 옹호했던 앙드레 바쟁의 견해와도 일맥상통한다. 또한 올리베이라는 (복수로서의) 세계는 물론이고 문학, 미술, 연극, 음악 그리고 영화 모두를 동등한 층위의 현실로 간주한다는 점 - 영화 자체 또한 영화가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현실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은 포르투갈 북부 트라스-우스-몽트스 지방의 전통적 그리스도 수난극 재현 행사를 담은 올리베이라의 두 번째 장편 <봄의 제전>(1963)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났다 - 에서도 지독히 바쟁적이다. 영화장치는 그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시청각적 기록 혹은 보존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럼으로써 그것들이 같은 층위에서 조우하게끔, 즉 비교되고, 교차하고, 충돌하게끔 만든다. 영화를 매체적으로, 혹은 그것에 고유한 특성(‘시네마틱’)이 있다는 가정 하에 사유하기보다는 일종의 기능으로 사유하는 올리베이라의 이러한 영화관을 여러 비디오 작업들과 <필름 소셜리즘>(2010)이나 <언어와의 작별>(2014) 같은 디지털 작업에서 전면화된 고다르의 영화관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한때 올리베이라는 “영화는 연극을 넘어설 수 없고 다만 그로부터 떠날 수 있을 뿐”이라거나 “영화는 연극을 시청각적인 방식으로 고정시키는 과정”이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는데, 영화란 ‘촬영된 연극’과는 다른 무엇이어야 한다고 믿는 순수주의자들에게 이런 주장은 경악스러운 것으로 비칠 것이다. 또한 그는 “나는 음성적 이미지, 문학적 이미지를 영화적으로 번역하려는 시도는 전적으로 쓸모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 것은 시도할 필요조차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문학적인 구절을 스크린에 등재(register)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유성영화의 커다란 장점이다.”라고도 단언한다. 올리베이라를 따라, 이미지라는 단어를 비단 가시적인 것에만 결부시키지 않고 시각적 이미지, 문자적 이미지, 음성적 이미지, 음향적 이미지 모두를 포괄하는 것으로 고려한다면, 유성영화의 영화-기능은 이러한 이미지의 힘을 빌려 앞서 언급한 상이한 현실들을 일시적으로 공통의 공간에 자리하게 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 올리베이라와 고다르는 다르지 않다.) 이때 이미지들 간에는 차이는 있지만 위계는 없다. 그리고 위계가 없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그것들은 다시 공통의 공간에서 상호 비교, 교차, 충돌될 수 있다. 비교, 교차, 충돌의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지의 간극들 뿐 아니라 그 간극에서 방사되는 여러 유령들과 마주치게 된다. 올리베이라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각인시킨 ‘좌절된 사랑의 4부작’은 비센트 산체스와 주제 레지우의 희곡, 혹은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와 아구스티나 베사-루이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아 연극적 공간과 제스처, 그리고 문학적 언어의 힘을 영화로 다시 끌어안으면서 이 간극들과 유령들을 한껏 풀어놓고 있다. (평자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겠지만 4부작 가운데 가장 강렬한 체험을 선사하는 걸작이자 올리베이라 최고의 작품이라 할 <불운의 사랑>은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1968)에서 부분적으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작품이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스트라우브-위예의 영화 가운데 원작이 없이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유일한 작품이다.) 

‘시네마틱’이란 결코 하나의 기원을 갖지 않는 데다 언제나 일시적일 뿐인 간극들과 유령들이 흡사 모종의 실체에 수렴될 수 있는 것인 양 우리를 미혹시키는 허위 개념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각각이 조작(operation)하는 영화-기능과 그 조작의 수준이 다른 무수한 영화감독들이 존재하고 분명 우리는 그들을 어떤 위계에 따라 배치할 수 있지만, 자신이 시네마틱하다고 ‘믿는’ 사례들을 쌓아올리거나 ‘~은 시네마틱하지 않다’는 식의 부정신학적 논법에 의존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가 다른 누구보다 더 ‘시네마틱’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영화란 실체가 아닌 기능이기 때문에 그와 결부된 형용사를 가질 수 없다. 반면, 문학적인 것, 음악적인 것, 회화적인 것, 연극적인 것은 존재한다. 영화의 이와 같은 특성에 대한 가장 빼어난 메타포는 히치콕의 <현기증>(1958)의 마들렌이다. 그녀는 - 그런데 과연 ‘그녀’라고 지시해도 되는 것일까? - 주인공 친구의 아내와 그녀인 양 행세하는 여자, 그리고 그림 속의 여자 가운데 어디에도 정확하게 귀속되지 않지만 이 세 개의 실체 혹은 이미지를 관장하는 기능이고 또한 그것들 사이에서만 활동하는 유령적 형상이다. 올리베이라 인물들의 ‘좌절된 사랑’은 종종 그들이 이러한 유령적 형상(만)을 실체라 믿고 정작 실체를 거부하는 데서 기인한다. 스카티가 끝내 주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올리베이라는 그의 세 번째 장편 <과거와 현재>에서 이러한 <현기증>적인 주제를 완벽하게 자기 식으로 번안해 냈다. 네크로필리아에 사로잡힌 주인공, 죽은 자의 ‘부활’, 끝내 주인공의 열정의 대상이 되지 못한 자의 자살 등이 묘사된 것은 히치콕의 영화와 유사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현기증>의 남성적 환상을 여성적으로 뒤집은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완다라는 여성의 열정은 죽은 첫째 남편(의 초상), 그의 쌍둥이 동생, 그리고 그녀의 두 번째 남편 어디에도 정확하게 귀속되지 않는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모든 것들은 실체적인 것, 그만의 형용사를 지닐 수 있는 것들의 에이돌론(eidolon)이다. 그리스어로 에이돌론은 분신, 유령 그리고 이미지의 뜻을 모두 지닌다. 놀랍게도 영화는 이러한 분신들의, 유령들의, 이미지들의 간극에서 더할 나위 없이 실재적인 감각을 산출해낸다. 하지만 이 감각을 설명하기 위해 ‘시네마틱’의 신학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무염시태(無染始胎)했다고 믿는 <베닐드 혹은 성모>의 베닐드나 죽은 여인이 사진 속에서 미소 짓는 모습을 보았다고 믿는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례>의 이삭처럼, 시네필리아는 감각의 절대성을 믿는 것(영화는 곧 세계다)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올리베이라의 에피쿠로스적인 - 이미지들에서 기인하는 감각의 진실성을 믿었던 그는 역사상 최초의 시네필, 하지만 아직 영화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의 시네필이었다 - 면모가 있다고 본다. 




2014-10-21

2014년 10월 셋째 주: "Deep Red?"


한 주 동안, 공산주의 국가 혹은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영화들 몇 편을 나란히 보게 되었다.


사막의 태양 White Sun of the Desert (1969)
(dir. 블라디미르 모틸 / 소련(USSR) / 1969년 / 84분)
* 2014년 10월 25일(토) 13:00 상영예정 (서울아트시네마)



2011년 로테르담영화제에서 마련한 여러 특별전 가운데 하나는 "레드 웨스턴: 아메리칸 웨스턴에 대한 공산주의의 응답"(Red Westerns: The Communist Answer to the American Western)이었다. 레프 쿨레쇼프의 <볼셰비키의 땅에서 웨스트 씨의 기묘한 모험 The Extraordinary Adventures of Mr. West in the Land of the Bolsheviks>(1924)에서부터 미르치아 베로이우의 <여배우, 달러 그리고 트랜실바니아인 The Actress, the Dollars and the Transylvanians>(1979)에 이르기까지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동독, 불가리아, 루마니아에서 만들어진 '레드 웨스턴' 16편이 상영되었다. 당시 나는 영화제 일로 출장 중이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 전체를 볼 수는 없었고 간간히 짬을 내어 3편만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마침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고 있는 "모스필름 90주년 특별전"(2014.10.10~26) 프로그램에, 로테르담에서 놓쳤던 작품 가운데 한 편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블라디미르 모틸의 <사막의 태양>이다. (이 작품은 모스필름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전편을 감상[이곳을 클릭]할 수 있으며 영어자막도 제공된다. 하지만 이 시기 소련영화 특유의 색감을 만끽하려면 역시 영화관에서 복원판으로 보거나 러시아에서 출시된 블루레이로 봐야 한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10월 25일 토요일 오후 1시에 다시 상영될 예정이다.) 나는 이 영화를 지난 10월 17일에 관람했는데, 10월 12일 상영 시에는 '레드 웨스턴' 프로그램의 기획자였던 세르게이 라브렌티에프의 강연이 있었으나 (다음달 소식지에 실을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원고를 마무리하느라) 놓치고 말았다. 아쉬운 대로 2011년 로테르담 특별전 당시 발간된 소책자에 실린 글들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있는 중이다. 

라브렌티에프에 따르면, 흐루시초프가 미국을 방문했던 1962년, 소련에서는 존 스터지스의 <황야의 7인 The Magnificent Seven>(1960)이 개봉되어 입장권을 구하기가 힘들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1960년대에 자라난 소련의 아이들은 '선량한 공산주의의 개척자들'에 대해선 깡그리 잊어버리고 스터지스 영화의 주인공인 율 브리너의 제스처, 걸음걸이, 카우보이 복장 등을 따라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 차원에서 자국의 신문과 잡지 등을 동원하여 이 영화에 대한 비판운동을 전개했는데 박스오피스 결과를 실제보다 적게 조작하는 일도 포함되었다. 결국 정부는 <황야의 7인>의 상영을 중단시켰고 이 영화에 대한 '공산주의적' 응답이 될 영화들을 직접 제작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나온 '레드 웨스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리투아니아 출신) 비타우타스 잘라키아비추스의 <죽기를 바란 자는 없다 No One Wanted to Die>(1966), 에드몬 케오사얀의 <도피한 복수자 The Elusive Avengers>(1967) 그리고 블라디미르 모틸의 <사막의 태양>이다. 모틸의 이 작품은 소련 내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흥미로운 것은, 아직 소련 내 연방국가들 간의 형제애가 여전히 강조되고 있던 시절에 제작된 이 영화가 "소련과 중앙아시아 문화의 양립불가능성은 물론이고 동방에서의 연방정책의 실패를 강조하고 있음이 분명"(에밀리 힐하우스)해 보인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제작되기 일 년 전, 소련은 체코의 프라하를 침공해 강압적인 방식으로 공산주의 개혁의 움직임을 잠재웠다.)

1960년대 소련영화들 가운데 연방정책 - 특히 중앙아시아의 통합 - 과 관련된 함의가 담긴 것으로 (이 시기의 소련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내게 얼른 떠오르는 것은 보리스 바르넷의 활기와 냉소, 멜랑콜리가 뒤섞인 스피디한 걸작 <알룐카 Alyonka>(1961)와 (이번 "모스필름 90주년 특별전"에도 포함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진중한 예술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다. 전자는 일견 낙관적인 전망을 내비치는 듯하면서 실은 통합의 불가능성을 암시하는 반면, 후자는 예술가 영화의 외견을 빌려 문제에 우회적으로 접근하면서 - 시간적 배경 또한 몽골-타타르족의 침입이 있던 15세기다 - '러시아적인 것'을 보편과 통합의 가능성으로 재발견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사진 1] <사막의 태양>. 내전 참전 후 귀향 중인 군인의 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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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타르코프스키의 <거울 The Mirror>(1975). 전쟁에 나간 남편의 귀향을 기다리는 여인

<사막의 태양>에서, 게릴라 압둘라의 아홉 명의 아내들을 호송하는 임무를 졸지에 떠맡게 된 주인공 슈호프는 여정 도중 고향에 두고 온 자신의 아내와 이 아홉 여인들에 행복하게 둘러싸이는 몽상에 잠긴다. (각각이 '러시아적인 것'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상징하는 것임은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사진 1] 혹은 모스필름 유튜브 채널 <사막의 태양> 영상의 45:24~46:32를 볼 것.) 통합 혹은 연방(제국)이란 사실 형제애나 우애가 아니라 일부다처의 하렘 - 공산당의 '본처'인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라는 '첩들'을 관리하는 - 이 아니고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인데, 이 짖궃은 농담의 강도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슈호프의 아내의 자리에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러시아적 모성의 이미지([사진 2])를 슬쩍 겹쳐놓고 생각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실, <사막의 태양>의 그 꿈 장면이 아주 효과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영화 초반부터 슈호프의 아내 카테리나를 과도하게 성적으로 이미지화한 탓이 크다. 영상의 00:22~01:30을 볼 것.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장면은 거의 부뉴엘적인 뉘앙스를 띠게 되었을 것이다.) 


[사진 3]

+ Parallel

[사진 4]

아홉 명의 중앙 아시아 여인들에 둘러싸인 슈호프의 모습([사진 3])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우애를 강조하는 선전용 포스터의 스탈린([사진 4])과 비교해 보라. 슈호프는 자신의 몽상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것임을 안다. 그런데 이 몽상은 기묘하게도 스탈린의 몽상을 닮아 있지 않은가? 그것은 도착적인 것의 이상화이며 금지된 것의 프로파간다이다.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정신분열증. 이러한 정신분열증이 낳은 긴장의 텍스트인 <사막의 태양>은 당대 소비에트의 이상과 그와 관련된 도상들을 일그러뜨리고 얼룩지게 한다. 



액트 오브 킬링 The Act of Killing (2012)
(dir. 조슈아 오펜하이머 / 덴마크, 노르웨이, 영국 / 2012년 / 159분 *director's cut)
* 2014년 11월 국내 개봉 예정

이 역겹기 짝이 없는 다큐멘터리는 "미디어시티서울 2014"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되었다.  『뉴 스테이츠맨 New Statesman』 에 기고한 글(2013.7.12)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각 개인들의 가차없는 이기주의를 공적 부의 원천으로 삼는 자본주의 - "개인들이 협소한 사적 이익을 희생하고 직접적으로 공공의 선을 위해 일하려 할 때 [오히려] 공공의 선이 위축되는 패러독스" - 에 대한 언급을 거쳐, 이러한 자본주의가 초래한 공적 공간의 사유화(privatising the public space)가 <액트 오브 킬링>의 인도네시아 학살자들의 행위 - 자신들이 50여 년 전에 저지른 학살의 광경을 거리낌 없이 '영화화'하려 드는 - 와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액트 오브 킬링>의 감독이 이들을 데리고 영화를 위해 벌인 일들을 여기 시시콜콜 옮기고 싶지 않다. 궁금한 이들은 인터넷에 넘쳐나는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참조하면 될 것이다.) 

지젝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데, (1) 지젝의 '자본주의적 개인' 개념은 기껏해야 신고전주의 경제학파의 개인 개념을 현실적인 것으로 단정지은 것에 불과하고 (2) 오늘날 점점 범람하는 '퍼블릭 섹스 비디오' - 공공장소에서의 섹스 포르노 비디오, 개인들이 웹상에 올리는 누드나 포르노 이미지 - 들과 같은 방식으로 공적 공간을 (뻔뻔스럽게!) 사유화하고 있는 것은 지젝이 지목한 인도네시아 학살자들이 아니라 <액트 오브 킬링>의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이기 때문이다. (글의 말미에 지젝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출증자들은 공적 공간에 침입하는 반면, 웹상에 자신들의 누드 이미지를 게시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사적 공간에 머물면서 다른 공간들을 포괄하기 위해 그것을 확장시키고 있다  <액트 오브 킬링>의 안와르와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공적 공간을 사유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 학살자들은 '공적 공간을 사유화'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지젝이 그에 대비시켜 말한 '공적 공간에 침입하는 노출증자들'에 가깝다. <액트 오브 킬링>의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작업은 야외섹스를 즐기는 한 커플의 비디오를 '합의 하에' 촬영해 주기로 한 뒤, 이런 행태에 대한 고발이랍시고 촬영 영상을 정리해 웹상에 게시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정리하자면, 여기서 지젝의 논의는 이론적 구성물('자본주의적 개인')의 자명성과 영화적 구성물(다큐멘터리의 '캐릭터')의 투명성을 가정함으로써만 성립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가장 간명하고 솔직하며 적확한 언급은 조너선 로젠봄의 그것이다. "기본적으로 <액트 오브 킬링>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 하는 것이 인도네시아 암살단의 잔학행위라고 하는 단순한 사실이라면, 나는 이러한 정보를 얻기 위한 보다 효과적이고 유용한 다른 방식이 있을 거라고 본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가 제공하는 것이 그러한 정보에 대한 시적, 심리적 혹은 정치적 통찰 같은 거라면, 그러한 통찰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를 내게 제공할 평론가들이 있는지 보고 싶다. 이 영화에 그런 게 있지만 내가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지금으로서는) 여기에 덧붙일 말이 별로 없다. 다만 약간의 치유제가 필요할 뿐이다. 일요일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본 리티 판의 <잃어버린 사진 The Missing Picture>(2013)처럼. 이 작품 역시 '미디어시티서울 2014'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다. 혹시 올해 '미디어시티서울'의 주제는 '파르마콘'(pharmakon)이었던가? 


 [사진 5] <액트 오브 킬링>. 50여 년 전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영화화하는 가해자 [Shooting]
(카메라 뒤의 인물은 '빨갱이 학살'의 주범이었던 안와르 콩고)

[사진 6] <잃어버린 사진>. 40여 년 전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피해자의 기억 [Projection]
(수용소에서 크메르 루즈의 선전영화를 보았던 기억을 클레이 인형과 모형을 통해 재현한 장면) 


(2014.10.22 추가) 위의 글을 포스팅한 후, 페이스북 코멘트를 통해 정승훈 교수가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적어 보내주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 격식 없이 편하게 쓰신 거라는 걸 감안하고 읽어주길 바란다.) 

"난 지젝 의견에 좀 공감했는데, 이때 사유화되는 공적 공간은 사회적으로 준수되는 어떤 윤리적 문턱 위에 자리잡는 정치적 공공역과 같다고 봤습니다. 킬러들은 그 문턱을 넘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노출하려는 듯하지만 실은 그런 문턱은 아랑곳 않고, 그걸 파괴하듯, 문턱 밑으로 관람자들을 끌어내려 자신들의 안방으로 초대해놓고 왕년의 업적을 떠벌립니다. 회사에서 하지 못하는 성희롱을 술자리에선 재미로 하듯 학살을 정당화하는 거죠. 정치적 커밍아웃 같은 진지함이 아니라 과시적 퍼포먼스 같은 뻐김이 그래서 가능한 거고, 그게 더 섬뜩한 거고. TV 토크쇼 장면은 이 사적 비공식적 뒷담화가 공적 영역을 잠식하는 과정을 시사하는데, 그 범위가 점점 넓어질 때 공공의 윤리적 문턱은 어디 있는가 하는 게 이 영화의 질문이라고 봅니다. (가령 5.18 조롱 같은 걸 온라인이 지들 안방인 양 배설하고 공유하는 일베 무리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고, 그래서 공공역의 사유화는 정치든 섹스든 가장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이 별 저항 없이 우발적으로 도처에서 유통 소비 심지어 향유되는 글로벌한 경향과 닿아있는 듯합니다.) 오펜하이머는 이 점을 문제적으로 드러내려 했지, 자신의 비윤리적 욕망으로 공공역을 사유화하는 걸로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후속작인 <침묵의 시선>은 희생자 편에서 계속 질문을 이어가고 있고.."

정승훈 교수의 반론에 대한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1) "킬러들은 ~ 관람자들을 끌어내려 자신들의 안방으로 초대해놓고 왕년의 업적을 떠벌립니다. 회사에서 하지 못하는 성희롱을 술자리에선 재미로 하듯 학살을 정당화하는 거죠."

: 비유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액트 오브 킬링>의 킬러들이 과시적인 건 사실이지만, 이 영화는 그들이 마련한 자리에 우리나 감독이 초대받아 간 것으로 생각될 수 없어요. 킬러들에게 안방을 내어주고 술판을 벌이게끔 한 것은 다름아닌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죠.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관객)는 그 안방의 술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펜하이머가 촬영하고 편집하여 영화제에 출품한 영화를 통해 그 안방의 술판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대부분은 킬러들의 퍼포밍(performing)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 물론 인도네시아 판차실라 청년단(Pancasila Youth)의 집회 장면처럼 시네마베리테적 관찰이라 할 수 있는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 - 킬러들의 퍼포밍을 퍼포밍한 기록입니다. 정승훈 교수는 지젝과 마찬가지로 킬러들의 과시성에 놀란 나머지 불현듯 영화라는 매체를 뒤로 물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위에서 "<액트 오브 킬링>의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작업은 야외섹스를 즐기는 한 커플의 비디오를 '합의 하에' 촬영해 주기로 한 뒤, 이런 행태에 대한 고발이랍시고 촬영 영상을 정리해 웹상에 게시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지요. 포르노그래피를 보는 관람자들은 가능한 매체의 존재를 지워버리려 노력하기 마련인데, 그러고 보면 지젝과 정승훈 교수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액트 오브 킬링>이 실은 포르노그래피에 가깝다는 걸 인정하고 있는 셈인데요. 영화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안와르 콩고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카메라 앞에 (때로는 뒤에) 선' 안와르 콩고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2) "TV 토크쇼 장면은 ~ 공공의 윤리적 문턱은 어디 있는가 하는 게 이 영화의 질문이라고 봅니다."

: 저는 <액트 오브 킬링>이라는 다큐멘터리 자체가 이미, 정승훈 교수가 언급한 TV 토크쇼와 마찬가지로 "사적 비공식적 뒷담화가 공적 영역을 잠식하는 과정" 속에 있다고 봅니다. 사실 그 TV 토크쇼와 <액트 오브 킬링>은 다른 영역에 있지 않고 - 제게 이 영화는 그 토크쇼보다도 훨씬 역겨웠습니다 - 나아가 킬러들의 '사적 비공식적[이기 마련인데 과시적으로 떠벌려지는] 뒷담화'가 인도네시아 방송의 국지성을 넘어 보다 광범하게 공적영역을 잠식할 수 있었던 것은 2013년 영화제 서킷(과 웹상의 각종 토렌트사이트들)을 휩쓴 이 영화 덕택이었죠. 그 잠식의 "범위가 점점 넓어질 때 공공의 윤리적 문턱은 어디 있는가 하는" 질문은 이 영화가 (안에서) 제기하고 있는 질문이 아니라 이 영화로 인해 (바깥에서) 우리가 제기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만일 실제로 이 영화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저는 그에 대한 증거를 보고 싶습니다. 

(3) "오펜하이머는 이 점을 문제적으로 드러내려 했지, 자신의 비윤리적 욕망으로 공공역을 사유화하는 걸로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 그 느낌의 이유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액트 오브 킬링>의 후속작인 <침묵의 시선>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다루었다는 이 후속작의 존재가 <액트 오브 킬링>을 위한 '증거'는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액트 오브 킬링>과 유사한 혹은 비교될 수 있는 소재를 다루되, 보다 사려깊은 접근으로 성공을 거둔 것처럼 여겨지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9.11 테러범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진 함부르크 이슬람사원의 이맘(Imam) 모하메드 파자지의 강연 오디오 기록물을 텍스트로 옮긴 후, 이를 단순한 배경 앞에 앉은 배우로 하여금 낭독케 하면서 원래의 강연을 분석적으로 해체해 버린 로무알트 카마카의 <함부르크 강연 Hamburger Lektionen>(2006),  수백 명의 사람들을 납치, 고문, 살해한 멕시코 청부살인업자가 자신의 이력을 구술하는 광경을 담아내되, 어떤 자료 화면이나 재연도 없이, 비좁은 호텔 방에서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냉담하게 포착하는 것으로 비판적 거리를 취하고 있는 지안프랑코 로시의 <엘 시카리오: 164호실 El Sicario: Room 164>(2010) 등이 그것입니다. 위의 글에서 언급한 <잃어버린 사진>의 리티 판이 2003년에 발표한 <S21: 크메르 루즈 킬링 머신 S21: The Khmer Rouge Killing Machine>(2003)도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