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2

도래할 사진을 위한 에스키스 : 김규식의 사진


※ 이 글은 2021년 6월 5일부터 7월 4일까지 아트스페이스 언주라운드에서 열린 김규식 개인전 《사진에 관한 실험》에 맞춰 발간된 동명의 도록(보스토크프레스, 2021)에 실린 것이다. 아래의 글 외에도 김규식의 사진들과 작가와의 인터뷰 등이 수록된 이 도록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 보스토크프레스 홈페이지를 참고. http://vostokpress.net/publication/119 




시각적인 추상이란 없으며 가능하지도 않다. 2016년부터 지속해 온 일련의 사진 실험들을 통해 김규식이 우리에게 거듭 강조하고 있는 바는 이처럼 단순한 상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상식이란 우리가 알고는 있어도 일부러 무시하거나 무심결에 흘리는 지식이다. 정의상 사변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추상을 어떤 식으로든 시각화한 작업임을 뜻하는 시각적인 추상이라는 말 자체가 형용 모순이기는 하지만, 여하간 미술에는 추상 미술이라는 영역이 엄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사진작가로서의 김규식에게 깊은 의혹의 대상이 되었던 볼프강 틸만스의 추상 사진 같은 작업도 있다. 이른바 추상 작업은 아무리 극단적인 경우라 해도 그것이 시각적인 이상 엄밀히 말하자면 추상적이 아니라 비구상적non-figurative이거나 탈구상적de-figurative일 뿐이다. 추상을 보여주는 시각 예술이란 없으며 가능하지도 않다. 추상 미술이나 추상 사진이라는 용어 자체가 기만적이다. 

이런 진단에 입각해 있는 김규식의 작업은 그야말로 어떤 타협도 없이 철저하게 개념과 작업의 메타프라시스metephrasis를 추구한다. 김규식이 틸만스의 작업을 비판하면서도 굳이 추상 사진이라는 용어를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삼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이런 용어는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보다는 개념으로서의 추상과 작업으로서의 사진 사이에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가 있음을 대단히 실증적인 방식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반증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김규식이 자신의 작업과 관련해 떠올린 생각을 적어둔 쪽지 하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그럼 이것이 추상 사진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런 것은 없으며 의미 없는 거라고…”

추상이란 무엇인가? 김규식의 작품에 보이(고 있다고 우리가 경솔하게 생각하)는 점・선・면 같은 기하학적 추상에 대한 유클리드적 정의를 떠올려 보자. 점이란 부분이 없이 위치만 있는 것이고, 선이란 폭이 없는 길이이며, 면은 길이와 폭만을 갖는 것이다. 철저히 개념적인 이런 대상은 물리적으로 지각할 수 없고, 따라서 묘사할 수도 없고 재현할 수도 없다. 찍거나 그리거나 칠해서 얻은 점・선・면은 그저 인지적 편의를 위한 대체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김규식의 작업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염두에 두고 있는 대상은 정확히 유클리드적 의미에서의 기하학적 추상이다. 김규식의 작업은 이런 추상을 시각화할 수 있다는 식으로 행세하는 뻔뻔하고 무신경한 오랜 관행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지만, 언제나 그러한 추상을 작업의 중요한 지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작업의 지침으로서의 추상과 작업의 목표로서의 추상은 서로 다른 방법론을 요청하는 것이지만 둘은 종종 외관상으로 유사한 결과를 낳곤 한다. 그동안 김규식의 작업이 종종 오해되거나 그 중요성이 간과되었다면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 같다. 추상을 작업의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김규식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모더니즘적 전통에서 낯설지 않다. 이때 작품은 추상을 의미하는 기호로 기능하게 된다. 기호학자 퍼스의 분류를 빌려 생각해 보자면, 이런 작품이 추상과 관계 맺는 방식은 도상적일 수도 있고(기하학적 추상과 닮은 형태를 구사하는 몬드리안), 지표적일 수도 있고(액션 페인팅), 상징적일 수도 있다(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그런데 김규식의 작품이 추상과 맺는 관계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거듭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추상은 작품이라는 기호의 도상적・지표적・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작업을 구조화하는 지침, 즉 가이드라인이다. 이는 원의 중심이란 원의 의미가 아니며 그저 원을 그릴 때 기준이 되는 점이라는 뜻에서 그러하다.


<Perspective View I>


추상을 작업의 목표가 아닌 지침으로 삼는 김규식의 방법론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원근법 실험이다. <Perspective View I>와 <Perspective View II>가 특히 그러한데, 전자는 1점 투시법에, 그리고 후자는 2점 투시법에 활용되는 그리드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굳이 ‘일부’라는 표현을 쓴 것은 프레임 내부에 소실점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소실점이란 작품의 원근법적 구성을 관장하는 기하학적 추상일 뿐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김규식은 이러한 소실점을 실제로 프레임 바깥에 두는 식으로 그것의 추상성을 환기시킨다. 

그런데 언제나 세부를 통해 말하는 김규식의 사진을 볼 때 우리는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이들 사진을 전체적으로 일별하기를 멈추고 세부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리드를 이루는 검은 선들이 실제로는 매우 울퉁불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진에 보이는 그리드는 종이 위에 그려진 선이 아니라 양 끝을 팽팽하게 묶은 검은 펠트실을 찍은 것이기 때문이다. <Perspective View I>을 만드는 데 사용된 장치의 구성을 보여주는 <The Practice of Vanishing Point I>을 보면, 사진 바깥에 있는 소실점 위치에는 세 가닥의 펠트실이 한데 묶여 있다. 갑작스레 그 추상적인 외관을 벗어던지고 물질적 기원을 고스란히 노출해 버리는 이 사진들은 분명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온갖 물질적 번잡함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소실점과 그리드라는 추상의 추상성을 환기시키려는 노력의 부수적 결과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The Practice of Vanishing Point I>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 발짝만 넘어가면, 그의 작업을 모더니즘적 추상 예술의 계보 속에 두는 오류를 범할 위험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보람도 없이, 김규식이 매체의 물질성을 탐구하는 작가라고 오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추상이란 결코 시각적 형식으로 포착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추상 자체를 작품 구성의 지침으로 삼는 그의 작업은 역설적으로 물질적인 것의 범람을 초래한다. 그러니까 물질성은 그가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김규식 스스로가 각각 추상 사진 그리고 논픽처non-picture라고 부르는 계열의 작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사진들의 제작 과정은 사진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조차 놀라게 할 만큼 번잡하고 물질적이다. 실제로 김규식은 자신의 “작업의 절반은 (…) 도구의 설계와 제작에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소실점과 그리드가 원근법 실험의 지침이 되는 추상이라면, 김규식의 추상 사진에서 지침이 되는 추상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투명과 어둠이다. 그런데 음화를 통해 양화를 만들어내는 사진적 기제를 고려하면 이 둘은 맞닿아 있는 개념이다. 사진에 있어서 완전한 어둠이란 원리상으로는 어떤 빛에도 노출되지 않은 필름에 해당한다. 이처럼 감광되지 않은 필름을 현상하면 필름 표면의 은염이 정착액을 통해 제거되어 투명해 보이는 필름을 얻게 되고, 암실에서 이 투명 필름을 확대기에 걸고 빛을 쪼여 인화지에 비추면 모든 부분이 검은 사진이 나오게 된다. 그렇다면 이 검은 사진은 완전한 어둠에 상응하는 (비)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는 <Black on White> 같은 작품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질문이다. 외견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과 전연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제목은 분명 말레비치의 <White on White>를 염두에 둔 것이겠지만 어디까지나 절대주의적 추상에 의문을 표하는 한에서만 그러하다. 

현상 과정에서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 해도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투명한 필름을 만들 수는 없다. 이는 곧 인화지를 완벽하게 검은 상태로 만들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작업의 지침 역할을 하는 투명과 어둠이라는 추상에 집요하게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즉 완벽하게 검은 사각형을 만들기 위해 인화지의 노광 시간을 늘리면 늘릴수록, 우리는 하얀 반점들이 사진에 점점 더 뚜렷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들은 추상 사진 작업에서 김규식이 사용한 ISO 6400의 고감도 필름이 투명해진 표면에 남은 물질적 흔적의 역상들reverse images이다. 다만, <Black on White>의 검은 사각형은 추상을 지침으로 삼는 일이 초래한 물질적인 것의 범람을 증언할 뿐, 필름이나 인화지의 물질성 자체를 드러내기 위한 기호나 오브제로서 제시되고 있지는 않다.

김규식의 추상 사진 계열에 속하는 작품 대부분은 작가가 그 위에 이런저런 형태를 그리고 오려서 파낸 종이판을 인화지 위에 겹쳐 놓은 상태에서 확대기에 투명 필름을 장착하고 노광해 얻어낸 것이다. 전통적인 조합 인화 방식을 응용해,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종이판을 활용하되 하나씩 따로따로 노광하고, 각각의 노광 시간을 조절함으로써 다양한 패턴의 추상 사진을 얻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 추상 사진 위의 추상적 형태들(점・선・면)은 작업에 활용된 투명 필름 자체의 추상적 불완전성으로 인해 언제나 크고 작은 하얀 반점들로 얼룩지게 된다.

논픽처 계열의 작품들은 작업 과정이 추상 사진과 거의 동일하지만 투명 필름만이 아니라 아크릴 스프레이 분사액이 점착된 유리판을 함께 활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유리판을 투명 필름의 경우처럼 확대기에 걸어 사용하면 인화지에 하얀 반점이 지나치게 크게 나타날 수 있어, 종종 김규식은 인화지와 종이판과 유리판을 밀착시켜 삼중으로 함께 겹쳐 노광하는 방식을 취했다. 논픽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작가가 직접 고안한 작업대는 흡사 등사기와 셀 애니메이션 작업대를 합해 놓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추상 사진과 논픽처 간의 (의도된) 유사성 혹은 판별 불가능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정육면체에서 삼면이 만나는 모서리 부분을 구현하고 있는 사진들이다. [추상 사진 가운데 <Grain and Line to Plane>과 논픽처 시리즈 가운데 22~24번 사진을 보라. 김규식의 작업에서 정육면체는 원근법 실험, 추상 사진과 논픽처, 그리고 소형 프로젝터를 활용한 매핑(mapping) 작업까지를 모두 가로지르는 특권적 형상이다. 이 형상의 의미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지면이 필요하겠다.] 둘 가운데 어느 것이 투명 필름을 활용해 구현한 것이고 어느 것이 유리판을 활용해 구현한 것인지를 순전히 육안으로만 판별해 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Grain and Line to Plane>


어느덧 김규식은 사진과 관련해 진정 래디컬하다고 할 수 있는 지점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사진이란 촬영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성립”하는 것이다. 인화지는 단지 그 표면을 비추는 빛이 전달하는 데이터에 입각해 우직하게 형상을 나타낼 뿐 그 데이터의 기원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인화지는 자신을 비추는 빛이 투명 필름을 투과한 것인지 아크릴 스프레이가 점착된 유리판을 투과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인화지는 자신을 비추는 빛이 실제의 정육면체에 반사되어 나온 것인지 그저 종이판 위에 뚫린 평행사변형을 통과해 온 것인지 묻지 않는다. 따라서, 다시 한번 김규식 자신의 말을 인용하자면, “인화지를 속이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물론 김규식은 필름이나 인화지의 물질성 자체에만 천착하는 매체 탐구자가 아니다. 데이터의 기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면서 그것이 전달하는 형상을 그저 우직하게 시각화하는 매체이기만 하면 무엇이건 상관없다. 그는 기꺼이 그것을 “속이는 일”에 착수할 것이다. 그가 손수 제작한 소형 프로젝터 장치를 통해 정육면체 형상을 거울에 투사하는 매핑 작업은, 원근법 실험에서 탐구했던 사영 기하학의 원리와 추상 사진 및 논픽처 작업에서 밀고 나간 촬영 없이 이루어지는 조합 인화 과정을 결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사실, 김규식의 사진 실험 작업 전체가 이론적인 함의를 띠고 있다. 

이는 2016년에 공식적으로 첫선을 보인 진자운동 실험에서 이미 분명하게 감지된다. 이 실험을 통해 일찌감치 표명된 김규식의 사진론은 크게 세 가지로 각각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첫째는, 사진적 과정의 핵심이 촬영이 아니라 인화(나 매핑 작업의 경우 디스플레이)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진자운동 실험의 결과물을 흔하고 시시한 펜듈럼 사진과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펜듈럼 사진은 광원이 달린 추를 높은 곳에 매달아 이리저리 움직이게 하면서 어두운 방에서 장시간 노출로 찍은 사진을 가리킨다. 반면, 진자운동 실험에서 김규식이 사용한 하모노그래프harmonograph는 복수의 진동자를 조합해 리사주 곡선Lissajous Curve이라 불리는 도형을 그리는 장치다. [리사주 도형의 생성 원리에 대해서는 필자가 만든 다음의 동영상을 참고하기 바란다. vimeo.com/404925874 이 영상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 오프닝 크레딧에 활용된 리사주 도형에 관한 것으로, 영상의 전반부에 이 도형의 원리에 대한 설명이 있다.] 김규식이 제작한 하모노그래프의 진동자 말단에는 그린 레이저가 장착되어 있어 이것이 직접 인화지 위에 도형을 그리게 된다. 따라서 진자운동 실험의 결과물은 추상 사진이나 논픽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복제가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사진이 된다. 김규식의 하모노그래프는 진동자 2개를 조합한 가장 단순한 것인데 인화지를 장착한 판 또한 좌우로 진동하게 함으로써 진동자 3개짜리 하모노그래프를 통해서만 가능한 복잡한 패턴을 얻어내고 있다. 이러한 패턴은 우리가 작도를 통해서는 아예 그릴 수 없는 것이란 점에서 지극히 비인격적이다.


<Test of Harmonograph, #19402-05>


김규식이 수행하는 사진 실험의 두 번째 이론적 함의는 한층 근원적인 것이다. 글머리에서 나는 그가 어떤 타협도 없이 철저하게 개념과 작업의 메타프라시스를 추구하는 작가라고 단언했다. 즉, 김규식의 입장에서, ‘포토그래프’란 문자 그대로 빛photo이 기록graph한 것을 가리킨다. 그의 결벽은 ‘빛’과 ‘기록’ 사이에 어떤 매개물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다. 따라서 포토그래프는 빛이 직접, 말 그대로 무매개적으로im-mediately 기록한 것이어야 한다. 그린 레이저를 통해 인화지 위에 직접 패턴을 그리는 김규식의 하모노그래프는 바로 이런 점에서 포토그래프의 메타프라시스가 된다. 한편, 하모노그래프 장치가 고안되고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친 시기인데, 이 점에서 그것은 19세기에 발명되고 급속히 개량되어 대중 속으로 파고든 포토그래프와 역사적・계보적으로 인접해 있기도 하다. 또한, 하모노그래프는 복수의 진동자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물리적으로 복수의 파동(전자기파)으로 구성된 빛과 은유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1826년에 니엡스가 8시간 동안의 노광을 거쳐 얻어낸 최초의 사진, 태양helios이 기록한 것이라는 뜻에서 헬리오그래프라 불리는 이 사진은 어떤 면에서는 지구의 주기 운동(으로 인한 태양의 일주 운동)의 기록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러 비인격적 기록 장치들 가운데 김규식이 굳이 하모노그래프를 작업 도구로 삼은 것은 이상의 사실들과 무관하지만은 않다.

마지막으로, 김규식의 사진 실험은 도래할 미래의 사진과 그러한 사진을 둘러싸고 펼쳐질 이론적・비평적 담론을 예비하면서 우리에게 일종의 숙제와도 같은 물음을 던지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사진의 장치적 기원이라고 하면 사진기를 가리키는 말의 어원이 된 카메라 옵스큐라를 곧바로 떠올린다. 그런데 김규식의 작업은 포토그래프로서의 사진이 카메라 옵스큐라와 조우하고 그 장치적 구성을 빌린 것은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 수행되는 것 같다. 사진을 카메라 옵스큐라와 연관 짓게 되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기록 과정을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비인격적 장치들의 계보에서 사진을 파악하는 일이 어렵게 된다고 충고하면서 말이다. 이로써 김규식의 하모노그래프는 통념을 깨고 사고하게 만드는 교육적 가치를 함께 지니게 되는데, 이유인즉 포토그래프를 비인격적 기록 장치의 계보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카메라 옵스큐라보다는 포노그래프phonograph(축음기)나 사이즈모그래프seismograph(지진계)에 더 가까운 매체로 파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근본적인 물음이 우리에게 던져지는 것은 이쯤에서다. 이러한 비인격적 기록 장치들을 통해 얻은 결과물들에 위계를 매기고 평가하고 그 가치를 판단하는 일이 가능할까? 하모노그래프는 그저 무심하게 움직이며 매번 다른 패턴을 인화지 위에 새길 뿐이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인간적 시선에 좀 더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미란 속성으로서 사진에 결부되어 있지 않다. 말하자면, 작품으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사진이라 해도 하나의 절대적인 사진이란 없는 것이다. 사실 이는 니엡스의 사진에 이미 잠복해 있는 문제였고, 회화적 전통을 구성에 끌어들인 19세기의 사진가들이 어떻게든 벗어나려 한 문제였으며, 그 이후로 현재까지는 대수롭지 않은 듯 우리가 애써 무시해 온 문제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는, 김규식의 작업을 전시해야 하는 큐레이터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집요하게 사진의 과거를 거듭 돌아보며 그 개념을 탈구축하는 김규식의 작업은 그런 방식으로 언제나 우리의 시선을 도래할 사진 쪽으로 인도하는 엄정한 지침이자 겸허한 추상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