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0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
: 세기의 아이들을 위한 반영화입문』(2021)


2018년에 비평집 『유령과 파수꾼들: 영화의 가장자리에서 본 풍경』을 낸 이후 3년 만에 두 번째 책을 내게 되었다.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 세기의 아이들을 위한 반영화입문』(보스토크프레스, 2021)은 기존의 평론글을 모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를 단행본 형태로 풀어볼 생각으로 새로 쓴 것이다. 표지와 서문을 올려둔다.



펴낸곳 보스토크프레스
지은이 유운성
편    집 이기원, 김현호
디자인 동신사 (김동신)
판   형 142mm x 255mm
페이지 248쪽


서문


서문을 쓴다는 것은 책의 불완전성을 자인하는 행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왕 쓰기 시작하면 역설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모든 서문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게 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서문은 기왕 쓴 것이니 그대로 둔다고 하면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미 써먹은 말이기도 하고 말이다. 한편,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서문은 무척이나 귀찮은 존재다. 제법 볼만한 것들이 보관되어 있다는 어떤 방으로 손님을 안내하면서 “들어가시기 전에 알아두실 게 있는데요. 그게 뭐냐면…”하고 자꾸 말꼬리를 흐리며 사람을 감질나게 만드는 천박한 주인과 같은 존재가 바로 서문이다.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이 책에는 서문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 이유는 어디까지나 제목에 ‘입문’이라는 단어를 썼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띄어쓰기 없이 쓴 ‘반영화입문’이 ‘반영화에 대한 입문’이라는 뜻인지 ‘영화에 대한 반입문’이라는 뜻인지 그도 아니면 ‘영화입문에 반하여’라는 뜻인지 굳이 밝힐 생각은 없다. 더불어, ‘반反’이라는 한자어를 ‘anti-’의 뜻으로 쓴 것인지 ‘counter-’의 뜻으로 쓴 것인지도 밝히고 싶지 않다. 사실 이 책은 의미의 그러한 불확정성 가운데서 진동하고 있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라는 식의 하나 마나 한 안이한 말로 책임을 떠넘길 생각은 전혀 없다. 이미 본문의 집필을 마치고 난 지금도, 나 또한 확정적으로 판단을 내릴 처지가 아님을 솔직히 밝혀두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진정한 입문서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꽤 명확한 상을 지니고 있다. 물론, 내가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입문서는 특정 분야에 학문적으로 접근하려 하는 이들보다는 교양 독자 일반을 대상으로 구성된 책이다. 즉, 교과서보다는 교양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 책이다. 문제는 후자의 책이 종종 전자의 책을 ‘쉽게 풀어서’, 바꿔 말하면 수식이나 전문 용어를 빼고 추론의 과정은 생략하면서 흥미를 돋우는 결과만을 요약해 제시하는 식으로 씌어진다는 데 있다. 여기에 최신 동향에 대한 정보를 더하고 약간의 잡기雜記를 곁들이면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쓴 수필 같은 것이 된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와 관련해 이런 종류의 책을 접하게 되면 개인적으로는 한 명의 독자로서 상당한 모욕감을 느끼곤 한다.

어떤 분야를 대상으로 한 것이든 독자의 지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미래에 대한 믿음과 일맥상통한다)으로부터 출발하는 입문서라면 핵심적 물음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방법적 모색의 과정들 자체를 독자가 오롯이 체험할 수 있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입문서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은 로저 펜로즈가 쓴 『황제의 새 마음: 컴퓨터, 마음, 물리법칙에 관하여』이다. 펜로즈는 블랙홀에 대한 특이점 정리를 통해 2020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학자이고, 에셔의 기묘한 판화 그림과 관련해 종종 언급되는 펜로즈 삼각형 (또는 펜로즈 계단) 등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일찌감치 1996년에 국내에 두 권으로 번역서가 나온 『황제의 새 마음』은 “컴퓨터로 마음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접근하고자 할 때 유용한 방법적 도구로 고려해봄 직한 여러 현대적 이론들(알고리즘과 튜링 기계의 원리,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비재귀적 수학, 그리고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이르는)의 한복판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하지만 펜로즈는 결코 결과만을 요약해 제시하는 법이 없다. 그의 책은 각각의 이론적 도구를 떠받치는 정리들로 향하는 추론 과정 자체에 독자를 깊숙이 끌어들이는 한편, 핵심적 물음을 둘러싼 논쟁과도 끊임없이 대면하게끔 하는 구조로 서술되어 있다.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예술 전공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양 강좌의 교재로 삼아 한 학기 동안 강의해본 적도 있다.

그런데 영화와 관련해서는 양자역학만큼 강한 이론은 말할 것도 없고 유력한 이론이랄 것조차 없다시피 하다. 그저 다른 것보다 조금 널리 읽히는 문헌들이 있는 정도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이론을 갖춘 ‘영화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와 관련된 기존의 문헌들을 읽고 또 문헌들을 생산하는 분과로서의 ‘영화 연구’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교양서 성격의 입문서를 쓰는데 활용할 이론적 도구 또한 전무하다. 이런 사정은 영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흔히 예술이라 불리는 모든 영역에서 마찬가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다른 예술들은 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역사적 두터움을 지니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이론적・역사적 취약함은 생산자와 수용자 각각으로 하여금 영화를 대하는 방법의 문제를 두고 끊임없이 스스로 고민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 어떤 절대적인 이론적 접근도 허용하지 않고 역사적 사례에 호소하는 일도 무력하게 만드는 영화의 강고한 모호함이야말로 그 주변에서 온갖 쟁론들이 펼쳐지게끔 하는 역동적 동인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나는 영화와 관련된 핵심적 물음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영화하는가?’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들을 둘러싸고 흥미로운 제안을 내놓은 세 명의 영화인을 주요 등장인물로 내세워 일종의 비평적인 사변 소설을 써 보고자 했다. 앙드레 바쟁, 장뤽 고다르, 그리고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바로 그들이다. 나는 이들이 쓴 글이나 이들이 만든 영화 작품 자체를 교과서적으로 해설하려 들기보다는, 그들의 글과 작품을 매개로 삼아 오늘날의 저널리즘에서, 학계에서, 그리고 일상적 담화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는 동시대적 쟁론들을 검토해보고자 했다.

이 책의 구도를 미심쩍게 바라보며 이런 물음을 던지는 이도 있을 수 있다. 당신은 왜 정전의 자리에 오른 글이나 작품을 남긴 영화 작가나 평론가를 내세우고 있는가? 바쟁, 고다르, 에이젠슈테인은 물론이고 이 책에서 당신이 언급하는 사례들은 지나치게 유럽 중심적이지 않은가? 사실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업을 중요하게 고려해보고는 있지만, 실제로 이 책에서 나는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중동, 중남미 그리고 아프리카의 영화인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입문서라면 핵심적 물음 주위를 집요하게 맴돌면서 사유의 연습을 수행해야 할 터인데,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중동, 중남미 그리고 아프리카의 사례를 선택하는 일은 자칫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게 여겨질 수 있다. 나는 유럽 중심적이지 않은 사례를 선택했다는 것만으로 뭔가 문제를 돌파했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얼마간의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20세기의 영화 담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서구적 사유들과 제대로 대결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나는 인도의 리트윅 가탁, 일본의 마츠모토 토시오, 그리고 필리핀의 롤란도 B. 톨렌티노 같은 아시아 영화인들이 전개한 논의들에 대단히 흥미를 느끼고 있지만, 이들에 대해 자세히 논하는 일은 이 책과는 성격을 달리할 후속 작업으로 미뤄 두기로 했다. 그러한 논의들에 나 자신이 끌리게 된 과정에서 실제로 상당한 역할을 한 서구적 사유들을 건너뛰고 입문서를 쓴다는 것은 자칫 사다리를 걷어차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다시 생각해보니, 영화에 대해 사유하는 일에 위계나 단계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하므로, 사다리를 걷어찬다는 표현보다는 다리와 길을 끊는다는 표현이 더 낫겠다.)

이 책에는 적지 않은 주석이 포함되어 있지만, 인명이나 용어를 해설하기 위해 쓴 경우는 거의 없다. 간혹 있다고 해도 해당 용어와 얽혀 있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 국한되어 있다. 즉, ‘프리츠 랑(Fritz Lang, 1890~1976): 독일의 영화감독. <M>과 <메트로폴리스>가 대표작. 나치의 압력을 피해 할리우드로 망명해 범죄 영화와 서부극 등을 연출.’ 또는 ‘누벨바그(Nouvelle Vague): 1960년을 전후해서 프랑스에서 일어난 새로운 영화 운동.’ 식의 주석이 이 책에는 없다. 사실상 아무것도 설명하고 있지 않은 이런 식의 주석은 출판계에서 여전히 관행적으로 존속되고 있는 적폐 가운데 하나다. 이런 주석은 무언가를 찾는 기쁨을 누릴 권리를 독자에게서 박탈하고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독자를 언제나 참고서에 매달리는 수험생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쾌감을 준다.

다만 ‘시네마’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의 쓰임새를 미리 밝혀 두는 편이 좋겠다. 외국에서 출간된 영화 관련 문헌들을 읽다 보면 ‘film’은 개개의 영화 작품을 가리킬 때, 그리고 ‘cinema’는 영화 일반을 가리킬 때 사용되곤 한다. 한편으로는 ‘movie’나 ‘motion picture’ 같은 말도 있다. 그러나 한국어로는 모두 ‘영화’다. 홍상수가 만든 한 편의 영화(‘A Film by Hong Sang-Soo’)도 ’영화‘고 한국영화(’Korean Cinema’)도 ‘영화’다. 나는 그야말로 ‘영화답게’ 모호하고 개별과 일반을 넘나드는 ‘영화’라는 한자어가 마음에 든다. 그래서 책 전체에 걸쳐 특별한 표기 없이 ‘영화’라고 썼고 외국 문헌을 번역해 인용할 때도 가급적 ‘cinema’와 ‘film’을 모두 ‘영화’로 옮겼다. 하지만 일부러 독자를 혼란스럽게 할 뜻은 없으므로, 어떤 보편적 이념(형)으로서의 영화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싶을 때는 ‘시네마’라고 명기했다. ‘필름’은 사진 이미지가 각인되는 물질적 매체를 가리키는 경우에 국한해 사용했다.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라는 제목은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에서 따온 것이다. 정확히는 이 책에 수록된 단편 가운데 하나인 「한밤의 조우」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말에서 따왔다. 이 단편은 각기 다른 시간대에 속해 있어 서로 대화는 가능하지만 접촉이 불가능한 존재들 간의 일시적인 만남을 다루고 있다. 나는 이 매혹적인 단편에서 발췌한 구절들을 박민하 작가의 영상 작업에 대해 논한 글 「영화, 혹은 소통 불가능한 감각의 사막을 찾아서」에서도 인용한 바 있다. (몇몇 사정으로 아직 출판되지 않은 이 글은 본서의 주제와도 느슨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철학테제’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자신의 세대를 가리키며 ‘세기의 아이들’이라는 멋진 표현을 썼다. 원래의 문맥에서 떼어내 이 책의 부제를 위해 활용하는 일이 과연 온당한 짓인가도 싶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이 함축적인 표현에 담긴 벤야민의 희망을 어떻게든 우리 세기의 것으로 삼고 싶었다.

2021년 9월

유운성


 원래의 독일어 단어는 현세주의자를 뜻하는 ‘Weltkind’이지만 벤야민은 직접 프랑스어본을 만들면서 이를 ‘세기의 아이들(les enfants du siècle)’이라고 옮겼다. 이를 고려하면 ‘Weltkind‘는 ’세계(Welt)의 아이(Kind)‘라는 뜻을 염두에 두고 쓴 표현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겠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책을 참고. 미카엘 뢰비, 『발터 벤야민: 화재경보』,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난장, 2017, 134~139쪽. 1983년에 초판이 나온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에서, 역자인 반성완은 ‘Weltkind’를 ‘현세주의자’로 옮겼다. 발터 벤야민 선집 가운데 하나로 2008년에 출간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도서출판 길)에서 역자인 최성만은 이를 ‘평범한 사람들’이라 옮겼다. 『발터 벤야민: 화재경보』의 뒷부분에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프랑스어판의 한국어 번역본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양창렬의 번역으로 해당 부분을 읽어 보면 의미가 훨씬 선명하게 다가온다. ”여기서 우리가 제시하는 성찰들 (…) 파시즘의 반대자들이 희망을 걸었던 정치가들이 무릎을 꿇고 좀 전까지 자신들의 것이었던 대의를 배신하면서 패배를 시인하는 와중에, 이 성찰들은 선의의 인간들이 남발했던 약속들에 농락당한 세기의 아이들에게 보내진다.“(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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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토크프레스의 제안과 격려가 없었더라면 정말이지 나는 이런 책을 쓸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집필에 착수했다 해도 끝까지 마무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책을 내기까지 원고를 세밀히 살피고 의견을 준 김현호 발행인, 박지수 편집장, 이기원 평론가 세 분께 우선 감사드리고 싶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서울아트시네마, 대전아트시네마, 아트선재센터, 그리고 아르코미술관에서 진행한 다음의 강연들은 이 책을 집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강연에서 제시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집필에 활용하기도 했고, 책의 초고를 바탕으로 강연하면서 귀중한 피드백을 얻기도 했다. ‘역량과 유령: 영화에 대한 두 개의 가설’(서울아트시네마, 2017년 9월 12일), ‘스크린으로서의 세계: 키아로스타미의 버추얼리티’(서울아트시네마, 2021년 5월 16일), ‘독신과 불신’(대전아트시네마, 2019년 11월 17일부터 12월 29일까지 매주 일요일), ‘에이젠슈테인을 다시 읽는다’(대전아트시네마, 2021년 7월 8일부터 8월 12일까지 매주 목요일), ‘반영화입문: 연명하지 않는 영화의 삶’(아트선재센터, 2020년 8월 3일부터 8월 23일까지 매주 월요일), ‘파편들 사이에서 말하기: 불확정적 영상 작품을 대하는 비평의 자세’(아르코미술관, 2019년 10월 3일) 등이 그것이다. 이와 더불어, 《보스토크》, 《오큘로》, 《기획회의》 등 잡지에 기고했던 글들도 상당한 수정을 거쳐 몇몇 부분에 활용되었다. 본서 1장의 내용을 절반 정도로 축약한 글은 《씨네21》 창간 26주년 특집호(1300호)에 ‘시네마, 역량과 유령 사이에서’라는 제목으로 실리기도 했다. 영화에 대해 강연하고 글을 쓸 기회를 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2021-09-23

구르는 공의 감촉: 박솔뫼의 『우리의 사람들』(창비, 2021)


※ 아래는 계간 《문학과사회》 2021년 여름호(134호)에 실렸던 것이다.




박솔뫼의 인물들도 무언가를 하기는 한다. 주로 먹고 마시고 자고 걷고 보고, 종종 생각한다. 다만 그가 “뭔가를 했던 사람들”(p. 219)이라고 부르는 ‘어른들’에게 이러한 ‘함’은 행위보다는 무위에 가까운 것으로 비치겠지만 말이다. 어정버정하는 자식을 향해 “넌 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러고 사니!”라고 말하는 부모의 시선이 꼭 그런 것이겠다. 그럼 박솔뫼의 인물이라면 슬쩍 몸을 뒤틀고 꼼지락대며 잠시 “무얼 하나 무얼 하나 벽에 대고 혼잣말을 하”(p. 17)다가는 “실제 해도 좋지만 상상으로 더 좋은 [……] 여행과 자전거와 수영”(p. 158) 같은 것을 떠올리다가 이내 잠들어 버릴 것 같다. 그러다 잠에서 깨면 “학교들을 다니고 회사를 다니고 돈을 벌고 세금을 내고 할 것들을 다한 내가 어딘가 어느 순간을 눌러놓고 빼먹은 것처럼 아직 덜 자란 사람처럼 느껴”(p. 186)지는 이유를 생각하다가 또 잠들어 버릴 것만 같다.

무위로서의 행위 또는 행위로서의 무위가 반복되는 박솔뫼의 소설적 세계를 긍정하는 세 가지 익숙한 방식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실체화된 무(無)를 문학적 행위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이들의 견해에 기대는 방식이다. ‘아무것도 안 함(do-nothing)’을 ‘무를 함’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무의 궤적을 그리며 움직이는 언어를 충실히 좇는 일에 문학의 본질이 있다고 본다. 이런 이들이라면 표제작 「우리의 사람들」에서 ‘네시’라는 단어가 “새벽 네시”(p. 27)처럼 시간을 가리키다가 (몇 페이지 건너) “새벽에 네시를 본 이야기”(p. 32)처럼 전설의 괴수를 가리키는 식으로 슬며시 전이되는 것을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않을 터이다. 더불어 “나의 직장 동료 하나”(p. 27)라는 표현에서 ‘하나’가 사람의 이름인지 그저 하나의 기수인지가 불분명해지는 순간도 놓치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박솔뫼는 말라르메가 아니며 『우리의 사람들』은 『이지튀르』가 아니다. 무엇보다 무라고 하는 전혀 촉각적이지 않은 관념은 박솔뫼의 흔들흔들 찰랑이는 언어들 틈에서 기껏해야 그저 어색한 자리밖에는 얻지 못한다. 언제나 “말을 손으로 만져보는 느낌”(p. 78)을 궁금해하며 미래처럼 막연한 시간조차도 “손으로 만지고 반복한 미래는 어떤 것이었을지 다시 생각”(p. 179)하는 작가의 언어들 틈에서 말이다. 대신 우리는 “공을 던지세요”(p. 72)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이 공은 무와 관련된 관념으로서의 공(空)이기 이전에 일단 손에 잡아 쥐고 던질 수 있는 공이어야 한다.

어쩐지 조금 한가한 놀이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공은, 확실히 박솔뫼의 소설적 세계에 잘 어울리는 사물이다. 이는 제목부터 직접 공놀이를 언급하고 있는 「농구하는 사람」 같은 단편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무를 함’이라는 추상적 행위/무위를 감각적으로 대체하는 ‘공놀이하기’는 사실 박솔뫼의 소설을 움직이고 또 그 속에서 움직이는 어떤 보편적인 은유적 형상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원환(圓環)의 유희다. 농구나 야구나 테니스 같은 놀이에 쓰이는 공, 인물이 타기도 하고 그 곁을 스쳐지나기도 하는 자전거의 바퀴, 결국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하는 산책이나 출장이나 휴가의 경로 등이 얼른 떠오르지만, 『우리의 사람들』에서 원환의 유희는 그저 소재적인 수준에 그치지 않으며 구조적인 반복을 촉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늦여름의 부산은 아주 많은 여러번의 수만큼 계속되었으면 좋겠다”(p. 63)는 바람에 걸맞게 부산 연작이라 해도 좋을 단편들로 꾸려진 이 소설집에서는, “숲을 헤매는 사람들은 [……] 여러개의 같은 장면들을 반복하면서”(p. 34) 걷고 또 걸으며, 이미 죽은 열두명의 여자들이 강간 살해범을 거듭 죽이는 등의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여기는 “영원하지 않지만 때때로 놀랄 정도로 반복되는 일”(p. 223)들의 세계다.

이 반복의 원환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박솔뫼의 소설적 세계를 긍정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다. 그의 소설에서는 종종 실재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이 같은 층위에 자리하고, 현실 세계와 가능 세계가 동일한 평면에서 교호하며, “어떤 시간들은 뭉쳐지고 합해지고 늘어나고 누워 있고 미래는 꼭 다음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과거는 꼭 지난 시간은 아니”(pp. 176~177)다. 이러한 문학적 시공을 유토피아적 영원으로 간주하면서 거기서 이루어지는 어쩐지 좀 나른하기도 하고 책임이나 의무로부터 방면된 듯한 영구 운동을 긍정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 세대론적 또는 시대론적 해석을 거칠게 덧붙이면 박솔뫼 소설의 감수성은 돌연 ‘힐링문화’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까지 비치게 된다. 말하자면 이는 그의 소설을 홍상수적 구조와 감각으로 재구성한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상상만으로도 어질어질해지는 꺼림직한 조합이지만─를 보듯 읽는 셈인데, 과연 이런 무시간적 혹은 탈시간적 유토피아가 박솔뫼의 문학적 시공에 부합하는가, 라는 물음은 이미 그가 자신에게 물은 물음이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천국의 시간을 반복해보고” 이내 “그 시간은 미래임에도 미래처럼 여겨지지 않았고 마치 슬픈 과거 같았다”(p. 183)고 토로한다.

반복의 원환이 가로지르는 박솔뫼의 문학적 시공을 굳이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간주하려면, 니콜라 푸생의 그림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의 낙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란 바로 죽음이다. 박솔뫼의 유토피아는 나른한 영원의 시간을 얼룩지게 하는 크고 작은 죽음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이 죽음들 가운데는 만만찮은 역사적 무게를 지닌 것들도 있다. 일본 좌익 진영에서 벌어진 우치게바, 제주 4・3항쟁, 재일조선인 권희로의 야쿠자 살인과 인질극, 나가야마 노리오의 연쇄 살인 행각, 광주민주화운동 및 그와 관련된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등등. 하지만 이러한 죽음들의 무게로 인해 박솔뫼 소설의 시공이 움푹 파이는 법은 결코 없다. 박솔뫼는 이러한 역사적 죽음을 「이미 죽은 열두명의 여자들과」의 권태로운 죽음이나 「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의 여릿한 죽음 같은 허구적 죽음들과 무람없이 같은 평면에 두는 소설가다. 이 죽음들은 「펄럭이는 종이 스기마쓰 성서」의 화자가 떠올리는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세운 집들이 있는 부산 아미동의 비석들처럼 너나없이 비인칭적인 죽음들이 되며 그럼으로써 문학적 ‘산책’의 무대가 된다. 박솔뫼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매일 산책 연습’이라는 문학적 운동을 반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무대가 된다.

이 산책을 다시 역사적으로 의미화함으로써 박솔뫼의 소설적 세계를 긍정하는 방식도 있다. 즉 이러한 산책은 무언가를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기에 현재에 (증언)할 수도 없고 미래에 (약속)할 수도 없는 세대의 ‘그나마’ 윤리적인 행위/무위라고 보는 것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는 “뭔가를 했던”, 아니 그보다는 무언가를 했다고 자부하는 어른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덜 자란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과거에 관심을 두고 부지런히 익혀 불완전하나마 증언의 말들을 미래에 전해주기를 바란다. 어른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박솔뫼는 정지돈이 아니며 『우리의 사람들』은 『모든 것은 영원했다』가 아니다. 정지돈이 무엇보다 읽고 듣는 일에 몰두하는 작가라면, 박솔뫼는 무엇보다 보고 만지는 일에 끌리는 작가다. (물론, 둘은 모두 작가답게 부지런히 쓴다.) 정지돈의 소설이 작가가 읽고 들은 전설들을 엮어 세운 일종의 문학적 비석이라면, 박솔뫼의 소설은 주인 모를 비석들이 누운 자리를 배회하며 그것들을 보고 만지는 행위/무위를 반복하는 문학적 발라드(balade)─산책이자 유람이라는 뜻에서, 혹은 들뢰즈적 용법으로─이다. 하지만 박솔뫼는 자신의 산책이 불완전하고 파편적인 방식으로 역사적인 것과 만나는 움직임이라는 해석에는 분명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광주에 가면 “1980년 5월의 기억을 길을 걷는 중간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흔적이라는 말과 증거, 자취라는 말을 생각해보았지만 모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p. 205)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박솔뫼다운 공놀이란 어떤 것일까? 이러한 공놀이가 곧 역사이자 이야기가 되고 “농구하는 사람과도 최인훈의 이야기는 할 수 있”(p. 77)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광장으로 표상된 역사라는 “공을 더듬기만 하면 되는 건가. 더듬으며 이런 감촉이라고 이런 크기라고 생각해보면 될까”(p. 72)? 

이쯤에서 우리는 박솔뫼의 네번째 소설집 『우리의 사람들』이 그의 두번째 소설집 『겨울의 눈빛』 말미에 수록된 「9월 도쿄에서」라는 작가 노트를 은밀히 서문으로 삼고 있는 책이라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 박솔뫼가 이 작가 노트를 쓴 것은 2015년 후반이고 『겨울의 눈빛』이 출간된 것은 2017년 9월이다. 이상하게도 그 2년 사이에 발표한 단편들은 『겨울의 눈빛』에 하나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한편으로, 『우리의 사람들』에 수록된 단편들은 모두 「9월 도쿄에서」를 쓰고 나서 2016년 이후에 발표한 것들이다. 「9월 도쿄에서」는 1970년대에 우치게바로 동료들을 잃은 뒤 텐트 연극 운동을 지속해온 연극인 사쿠라이 다이조와의 만남, 그리고 영화인이자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합류한 ‘테러리스트’였던 아다치 마사오와의 조우를 서술하고 있는 에세이다. 『우리의 사람들』에 실린 단편들 가운데 「우리의 사람들」과 「농구하는 사람」은 이 에세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이 가운데 「우리의 사람들」은 2016년에 발표한 것인데도 『겨울의 눈빛』에는 수록되지 않았으며 대신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이 되고 있다.

소설집에 한데 모을 단편들을 고를 때 박솔뫼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을지를 추정하는 일은 삼가기로 하자. 아마 그건 박솔뫼 자신도 모르는 것이거나 우리에게 말해준다 해도 이미 그건 사실이 아닐 것이다. 2015년 도쿄에서의 만남과 조우가 작가로서의 그에게 어떤 계기 혹은 위기가 되었으리라는 추정은 더더욱 삼가기로 하자. 그건 심리적 전기의 영역에 속하는 것일 뿐 박솔뫼 소설의 비평적 이해와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9월 도쿄에서」가 중요한 텍스트인 이유는 공의 감촉이 곧 역사이자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리라는 대담하고 상쾌한 문학적 믿음이 거기서 처음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세간의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한 일을 한 어른임에도 “‘나는 이런 것을 했다’라는 식의 느낌이 거의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아다치 마사오 같은 이를 보며 떠올린 믿음일 수도 있다. 여기서 박솔뫼는 아직 공을 떠올리고 있지는 않다. 게다가 여전히 어른들의 표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그것을 “죽은 자들만이 본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정신적인 것 막연한 것이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은 [……] 눈에 보이고 우리가 잡고 던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때 이미 그는 공을 떠올리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우리의 사람들』은 단지 공을 보고 잡고 만지고 던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공의 감촉은 그것을 굴리고 주고받기도 하는 가운데 느껴야 함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그런데 구르는 공의 감촉을 느끼려면 공을 따라 부지런히 함께 움직이거나 공을 부지런히 주고받는 수밖에 없다. 즉 “일백년 전 국경에 있던 사람들은 왜 그곳에 있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아무런 어색함이 없도록 흐르듯이 흘러가는 골짜기에 화장실용 휴지를 굴리는 것처럼 그게 통통통 소리를 내며 흰 길을 만드는 것처럼 하는 것”(p. 25)이고 “야구공을 주고받으며 야구공의 감촉을 처음으로 배우며 이런 것이었다고 익히며 농구공 이야기를 하”(p. 77)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박솔뫼의 역사-이야기가 문학적 발라드의 형태를 띠게 되는 이유다. 물론 박솔뫼의 소설 쓰기는 결코 일방향적이지 않아서 산책의 소설과 더불어 진행 중인 잠의 소설─세번째 소설집 『사랑하는 개』에 실린 「여름의 끝으로」처럼─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절대적 무위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 잠이 행위가 될 수 있을까? 지금은 이에 대한 생각은 잠시 미뤄두고 『우리의 사람들』과 2개월 간격을 두고 출간된 박솔뫼의 일곱번째 장편소설을 들고 입으로 “미래 산책 연습”이라는 제목을 웅얼대며 구르고 싶다.


2021-09-15

아카이브, 혹은 자기기술 시대의 미학

 

※ 아래는 방혜진 평론가가 기획한 포럼 《시체이거나 영광이거나 : 내러티브×픽션×아카이브》(2020년 11월 15일 15:00~19:30 라이브 중계)에서 발표했던 원고를 정리한 것이다.


<Timeline>(Lev Manovich, 2009)


이번 포럼의 화제로 제시된 내러티브, 픽션, 그리고 아카이브는 동시대의 예술 실천 일반을 가로지르는 핵심적인 개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개념들과 관련해 사람들이 서로 견해를 달리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 개념들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은 단순히 예술적 취향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동시대 예술에 대해 어떤 입장을 표명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평론가가 저의 본업이기는 합니다만 오늘 이 자리에서는 영화나 무빙 이미지에 국한하지 않고 좀 더 일반적인 수준에서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저의 생각을 간략히나마 정리해 밝히고자 합니다. 이는 내러티브, 픽션, 그리고 아카이브가 동시대 예술과 관련해 실제로 기능하고 있는 방식에 대한 비판적인 논평의 성격을 띠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할 내용은 이 포럼을 기획하고 준비하신 방혜진 평론가로부터 발표를 요청받았을 당시부터 머리에 떠올리고 있던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번 포럼이 대중적 문화 산업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활동들을 염두에 두고 기획된 것이 아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영역에서라면 내러티브, 픽션, 그리고 아카이브는 굳이 비평적으로 문제 삼을 필요가 없는 실용적 규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사정을 조금 단순화해서 묘사하자면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러티브는 탄탄할수록 좋고, 관람자가 몰입하게 하는 픽션이야말로 이상적인 것이며, 성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 해도 실패의 확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관습들의 아카이브를 적절히 참고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식이죠. 이런 규준이 혐오스럽다고 생각할 사람도 분명 있을 겁니다. 하지만 문화산업의 영역에서 이러한 규준이 그 지위를 위협받은 사례는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물론 규준이 그 지위를 위협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 곧 문화 산업의 여러 실천들이 실제로 그러한 규준을 따라 운용되고 있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가히 무반성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문화 산업의 행위자들이 저 규준에 이처럼 집착하는 이유는 오히려 그러한 규준을 따르는 일의 불가능성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점은 지적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영화의 경우를 살펴보면, 극단적으로 주변부에 있는 작품을 제외하고는 아무리 독립영화라 해도 대부분 얼마간 이러한 규준을 따르려 한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따르려 한다’는 것이 실제로 잘 ‘따르고 있다’거나 ‘따를 능력이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유효성이 얼마간 검증된 관습들을 탄탄한 내러티브로 직조하여 관람자를 몰입시키는 픽션을 만든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한국영화 가운데 이처럼 이상적인(?) 과업에 성공한 작품은 매우 드물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없다고 해야 옳을 겁니다. 문화 산업과는 얼마간 거리를 두고 있는 독립영화 제작자라 해도 내러티브, 픽션, 그리고 아카이브의 유효성을 그 자체로 문제 삼는 일이 거의 없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번에 제시된 바와 같은 주제로 포럼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내러티브, 픽션, 그리고 아카이브가 대단히 문제시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러 줍니다. 그것을 문화 산업이라는 측면에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예술의 영역이라고 해 둡시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술의 영역은 어떤 것인가요? 다소 냉소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스스로 생존할 능력은 거의 없지만 다행히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나 예술경영지원센터 같은 기관의 지원사업 덕택에 ‘연명’하는 예술의 영역이라고 말이죠. 이미 밝힌 대로 냉소적으로 들릴 위험을 감수하고 말한 것이지만 저는 그런 예술을 경멸하는 뜻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오늘날 이러한 예술들의 존재 조건을 솔직하게 짚고 넘어가려 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예술들의 가능성의 조건을 따져보고자 하면 선험적이고 아프리오리한 수준으로의 접근은 아예 차단되어 있고 오직 현실적인 수준에서만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겁니다. 사회에 대한 예술의 임무보다는 예술에 대한 사회의 임무가 강조되는 영역이라고요. 사회적 ‘돌봄’의 대상이 된 예술의 영역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오늘 발표를 요청받았을 때부터 떠올린 하나의 진단은 주로 이런 영역에서 생산되는 작품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실은 문화 산업의 영역에서 생산되는 작품들도 예외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것들은 전통적 규준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방식으로 불안을 감추려 하는 탓에 겉보기에는 문제가 문제로서 잘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여하간 내러티브, 픽션, 그리고 아카이브라는 개념과 관련해 최근 제가 느끼는 바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미학을 대체한 것은 아카이브이고, 내러티브를 대체한 것은 링크이며, 픽션을 대체한 것은 자기기술self-description이라고 말이죠.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이 진단에서는 오늘날의 예술이 아카이브에 할당하고 있는 가치는 내러티브와 픽션에 할당하고 있는 가치와 성격이 다르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진단대로라면 내러티브와 픽션은 무언가 꺼림칙하고 처치 곤란한 유물처럼 치부되고 있지만 아카이브는 그렇지 않으니 말이죠. 달리 말하자면, 내러티브와 픽션과는 달리 아카이브는 무언가에 의해 수동적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대체한 것으로서 긍정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오늘날 아카이브가 대체한 것은 바로 미학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주장 자체는 여러분 대부분이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미학이 그 근거를 상실한 지는 오래되었고, 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란 그것을 어떤 의미작용의 네트워크에 두고 고찰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상식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식가나 감정가 같은 태도로 예술을 대하는 이가 아닌 다음에야 말이죠. 사실 오늘날에는 미식가나 감정가의 경우 자격증 제도가 존재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들이 내리는 평가의 무근거성을 은폐하기 위해 도입된 다소 우스꽝스러운 제도적 광기로 보입니다. 언젠가 예술이나 영화 분야에서도 평론가 자격증 제도가 시행되는 날이 온다면 정말이지 그건 이들 분야에서 비평적 판단의 근거가 완전히 소멸되었음을 가리키는 지표가 될 겁니다. 한 번 두고 볼 일입니다. 

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그것을 어떤 의미작용의 네트워크에 두고 고찰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 상식에 속한다고 앞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법한 문제는 이런 것이겠죠. 다종다기한 의미작용의 네트워크들 가운데 과연 특권적인 지위를 누릴 만한 것이 있는가? 이러한 물음과 더불어 부상하는 것이 다양한 네트워크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색인 내지는 일람표 역할을 하는 메타적 네트워크의 이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단지 이러한 네트워크를 필요로 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술 작품 자체를 이러한 이념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경향이 오늘날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예술을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요? 포털-아트? 뭐라 부르건 간에 이런 경향이 어느샌가 오늘날의 예술로 빠르게 스며들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비판적 판단은 가능한 삼가면서, 혹은 기껏해야 논쟁적이지 않은 판단을 배경으로 깔고서 박식함을 과시하는 데만 몰두하는 공허한 소설, 영상, 공연, 설치 작품들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가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오늘날의 예술은 점점 비평가보다는 연구자에게 걸맞은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아카이브라 불리는 것은 박식의 충동에 부합하는 색인으로서의 네트워크, 즉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아카이브의 원래 의미로부터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죠. 최근에 번역, 출간된 재미있는 책 『아카이브 취향』에서 아를레트 파르주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미셸 푸코에게 있어서 아카이브란 무엇보다 육체적인 방식으로 그를 강타하는 충격과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비평적 감각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푸코는 정말이지 비평적 감각이 탁월한 이론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미학을 대체한 것은 이처럼 비평적 감각과 맞닿아 있는 아카이브가 아니라 그저 방대한 네트워크들에 대한 색인으로서의 아카이브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아카이브가 미학을 대체했다는 말은 정확히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아카이브는 박식을 증거하는 색인으로 대체되었고 이러한 색인이 미학을 대체했다고 말이죠. 이렇게 보면 아카이브는 내러티브나 픽션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유물의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오늘날의 예술들이 우리 앞에 펼쳐놓고 있는 것은 기실 명목상의 아카이브에 지나지 않거든요. 

일찍이 19세기 말에 아카이브의 지위가 이렇게 변화되고 있음을 이미 감지했던 플로베르는 그처럼 변화된 아카이브에 한없이 끌리면서도 그것의 헛됨을 투시할 줄 알았던 인물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는 오늘날의 예술가에 대한 훌륭한 모델로 간주될 수 있죠.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백과사전’이라는 부제를 염두에 두고 집필한 『부바르와 페퀴셰』를 보면 박식에 대한 열광과 환멸이 동시에 가로지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한때 이 소설의 부록 형태로 덧붙여지기도 했던 『통상관념사전』에서 플로베르는 박식érudition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편협한 정신의 표시인 것처럼 경멸할 것.” 이 말이 다른 누구도 아닌 플로베르에게서 나올 때 우리는 유명한 크레타인의 역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박식을 증거하는 색인으로서의 아카이브로 미학을 대체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용성은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생계형 평론가라면 응당 이 노선을 따라야 합니다. 이유인즉, 개개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비평적 규준을 재검토하는 수고를 간단히 덜 수 있는 비법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죠. 작품의 가치는 일종의 색인으로서 그것이 지니는 풍부함, 즉 박식함의 농도에 따라 양적으로 결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박식한 작품의 박식함을 감정하는 박식가로서의 평론가라는 식으로 동종성의 관계마저 성립시킬 수 있게 되죠. 이런 상황에서라면, 결국 평론가의 작업은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즉 마스터 네트워크의 지위에 있는 작품을 판별해내고 상찬하는 것으로 귀결될 겁니다. 십수 년 전부터 미술계에서 종종 입에 오르내리곤 했던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 미학’이란 것도 정확히 이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관계 미학이란 색인으로서의 아카이브로 대체된 미학의 자리를 헛되이 더듬는 기만적이고 멜랑콜리한 명명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이쯤에서 예술 작품과 관련해서 아카이브란 그저 내용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론을 제기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논의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이 반론 자체에만 집중하기 위해 여기서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이분법을 일단 받아들이기로 합시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봅시다. 예술 작품의 형식, 그리고 그것이 내용과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세계는 오늘날 어떤 특성을 띠고 있는가? 색인으로서의 아카이브에 어울리는 내러티브의 형식이 링크들을 활용해 네트워크들을 연결하는 것이리라는 점은 누구나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태그와 해시태그와 카테고리 들을 따라 한참을 유영하다 보면 종종 자유도가 높은 내러티브를 체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거든요. 저는 여기서 비단 온라인 공간만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점점 태그와 해시태그와 카테고리 자체가, 혹은 적어도 그 비슷한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작가의 이름은 어느 동네 서점에 비치된 예술 서적과 어느 독립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와 어느 신생 온라인 플랫폼, 그리고 때로는 제법 판매 부수가 높은 패션지의 화보와 웹사이트와 SNS 등을 가로지르며 여행의 환상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결과적으로는 순환 링크에 불과한 것을 일시적으로 감추고 있을 뿐인 복수의 매개변수들일 뿐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을 겁니다. 무수히 많은 점들이 존재하고 그 점들을 가로지르는 무수히 많은 경로들이 존재하지만 그뿐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어떤 세계도 출현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픽션의 종말이죠. 

제가 직접 예문을 하나 만들어 보았습니다. 오늘날 픽션이라 부르는 것은 대략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동시대적 소설 작법이라고 해도 좋고 1인칭 사적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 작법이라고 간주해도 좋습니다. 


나는 10월 10일생이다. 이날이 중화민국의 건국기념일인 쌍십절이고 조선노동당 창건일이라는 것쯤은 어렸을 적부터 익히 알았다. 영화를 좋아하게 되면서부터는 이날이 오슨 웰스가 세상을 뜬 날임을 강조하곤 했다. 그러다 얼마 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올해로 데뷔 10년 차를 맞은 미쓰에이 출신의 수지가 10월 10일생이라는 것이다. 최근 수지는 tvN에서 방영되는 주말드라마 <스타트업>의 주연을 맡았는데 이 드라마와 관련된 뉴스를 살펴보다가 알게 되었다. 이 드라마에 대한 정보를 굳이 찾아본 이유는 아내의 조카가 주요 조역 가운데 하나로 출연하고 있어서다. 녀석은 영화 탄생 100주년이 되는 1995년에 태어났다.

 

10월 10일이라는 날짜를 매개로 몇몇 무관한 사안들을 마구잡이로 엮고 있는 이 짧은 예문이 얼마간 동시대적 픽션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면 이것이 다름 아닌 자기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문에서 언급한 것들 가운데 쌍십절, 조선노동당 창건일, 그리고 수지의 생일처럼 구글 검색으로 간단히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은 물론이고, ‘나’라는 주체와 관련된 것들, 그러니까 ‘나’의 생일, ‘나’의 아내의 조카가 <스타트업>이라는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다는 것 또한 모두 사실입니다. 네, 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렇게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예문의 ‘나’와 관련된 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하지만, 여러분들은 저와 ‘나’ 사이에 어떤 간극이나 불확정성이 있다고 의심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의 기술의 불확정성에 대한 이러한 의심과 더불어, 오늘날 픽션은 바로 그 간극에서, 그리고 오직 거기에서만 출현합니다. 2020년에 다소 이상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논란거리가 되기는 했지만 ‘오토픽션’이란 동시대에 가능한 유일한 픽션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오토픽션은 방법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징후에 가깝다고 해야 옳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아카이브, 내러티브, 그리고 픽션이라는 개념들이 서로 어떤 포함관계에 있는지 한 번 따져볼까 합니다. 일반적으로 아카이브는 내러티브보다, 그리고 내러티브는 픽션보다 상위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카이브가 내러티브를 꼭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어떤 식으로건 아카이브에 기반을 두지 않는 내러티브는 없습니다. 내러티브가 꼭 픽션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내러티브 없는 픽션이란 상상하기 힘들지요. 하지만 이런 논법은 앞으로 더 이상은 통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이미 통하지 않는 건지도 몰라요. 링크가 내러티브를 대체해버린 시대에 아카이브란 오히려 이러한 링크를 통해 생성되고 확장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빅데이터란 바로 그런 것이죠. 자기기술이 픽션을 대체해버린 시대에 내러티브란 자기로부터 출발해 링크를 통해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용어에 다름 아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카이브란 링크를 통해 자기를 기술description하는 기술technology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결론에 대해 누군가는 아연실색할 것이고 누군가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는 태도를 보일 것입니다. 이처럼 멋진 신세계의 미학 가운데 있는 예술은 한없이 화장술에 가까운 것이고 이러한 예술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리는 일은 어디까지나 비평가가 아닌 감정가의 몫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제 어떤 식으로건 블랙박스로서의 예술을 회복해야 할 때는 아닌지 자문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블랙박스 안에 신비의 자리란 없다는 점을 명심하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