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6

프린시프 레알 공원

 

※ 이 글은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사진잡지 《보스토크》 35호(2022년 9월 발행)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리스본을 방문했을 때 굳이 이곳을 찾았던 것은 순전히 주앙 때문이었다. 오해가 없도록 정확히 말하자면, 두 명의 주앙 때문이었다. 하나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매일같이 이곳으로 산책을 나오곤 했던 주앙이고, 다른 하나는 리스본 여행 내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 주었던 주앙이다. 간단히 늙은 주앙과 젊은 주앙이라고 해 두자. 깡마른 주앙과 똥똥한 주앙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어쩐지 나이로 구분하는 편이 더 담백한 느낌을 준다. 늙은 주앙은 영화에서 보았을 뿐이지만 젊은 주앙은 오랜 친구다. 늙은 주앙은 영화감독이고 젊은 주앙은 비디오 아티스트다. 젊은 주앙의 성에는 딱히 뜻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늙은 주앙의 성에는 ‘사냥꾼’ 또는 ‘산림관’이라는 뜻이 있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역대와 현역을 막론하고 포르투갈 대통령들을 싫어하고 자신들이 만든 영화나 비디오 작품에 종종 직접 출연한다는 것이다. 리스본에는 영화를 만드는 주앙이라는 이름의 친구들이 두 명 더 있지만, 한집에서 사는 그들은 좀처럼 자신들의 영화에 얼굴을 비추는 일이 없다.

늙은 주앙의 영화를 보면 프린시프 레알 공원 근처에는 분명 버스 정류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떤 영문인지 젊은 주앙은 이렇게 말했다. 카몽이스 광장 근처에서 내려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 한참 올라가다 보면 네가 주앙의 영화에서 보았던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공원이 나올 거야. 나중에 거기 도착해서 확인해 보니 실제로 프린시프 레알 공원 바로 앞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대체 왜 저 아래서부터 걸어 올라오라고 한 거지? 구글맵 같은 것으로 경로를 미리 확인한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고 고리타분하게 지도 하나만 들고 돌아다니던 때라, 당시엔 여하간 젊은 주앙의 조언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종종 지도가 무용지물이 되는 알파마 지구의 한 카페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버스를 타러 가기 직전, 젊은 주앙에게 물었다. 혹시 그 나무 이름이 뭔지 알아? 리스본에 관한 것이라면 온갖 잡스러운 것들까지 꿰고 있는 그는 주저 없이 답한다. 멕시칸 사이프러스야. 하지만 학명을 알면 그 나무가 왜 거기 있는지 더 수긍이 되지. 학명이 뭔데? 쿠프레수스 루시타니카야. 너도 알다시피 루시타니아는 포르투갈을 가리키는 말이잖아? 그래서 포르투갈 사이프러스라고도 불러. 그러면서 늙은 주앙이 앉아 있던 나무 아래의 벤치에서 찍은 자기 사진을 보여준다(사진 1). 사진을 잠깐 들여다보고 인사를 한 뒤 버스를 탔다. 그리고 주앙의 조언대로 카몽이스 광장에서 내려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진 1


언덕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며 천천히 둘러보던 그때의 프린시프 레알 지구는 아직 관광객으로 붐비기 전이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이 영화화되어 전 세계적으로 개봉된 지 일 년쯤 지난 무렵이라, 분명 리스본을 찾는 관광객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던 때이기는 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 제로니무스 수도원 인근의 파스텔드나타 가게가 소개되면서 그 앞에 한국 관광객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기 시작한 것도 대략 이 무렵이다. 프린시프 레알 지구 초입에 자리한, 도시를 내려다보며 확 트여 있는 상 페드루 드 알칸타라 전망대에 드문드문 관광객들이 눈에 띄기는 했다. 하지만 프린시프 레알 공원을 찾는 관광객은 거의 없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5월의 태양을 피하기 안성맞춤인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로,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노인들이나 낮잠을 즐기는 청년들이 간간이 눈에 띄는 정도였다. 

한동안 다시 찾지 못했지만 여기저기서 들은 대로라면 지금의 프린시프 레알 공원은 그때와는 꽤 달라진 모양이다. 영화에서의 식물이라는 주제로 온라인에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는 파트릭 홀차펠이 2021년 4월에 쓴 글을 보면 이곳의 현재 모습은 예전과 적잖이 다르다. 그는 요즘 포르투갈의 수도를 방문하는 그 누구도 늙은 주앙이 140살 넘게 먹은 이 나무 아래 앉아 그토록 생생하고 부드럽게 포착해냈던 것과 같은 느낌을 찾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거지들, 연인들, 마약상들, 사기꾼들, 그리고 시네필들에게 인기 있는 만남의 장소였던 이 공원을 관광객들이 점령했다.” 이 문장이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은, 생전의 늙은 주앙은 자신의 영화 속에서 거지, 연인, 마약상, 사기꾼 같은 존재였으며 그의 영화는 이러한 불량한 존재를 생생하고 부드럽게 감싸는 진정한 시네필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홀차펠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쓴다. “하지만 당신이 일찌감치 그곳에 가서 잠시 앉아 눈을 감고 있으면, 진한 사이프러스 향기가, 우산 모양으로 드리워져 눈길을 끄는 수관(樹冠)에 스미는 시원한 산들바람이, 빛과 그림자의 유희가, 그 나뭇잎들의 속삭임이, 내세의 것인 만큼이나 현세의 것이기도 한 비밀들을 여전히 드러내보일 것이다.” 


사진 2


홀차펠의 글과 함께 수록된 이바나 밀로스의 그림(사진 2)은 흥미롭다. 밀로스의 그림 제목은 ‘부부 루시타니카’다. ‘부부’는 생전의 주앙이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성이다. 언제부턴가 그는 알파마 지구 테주강 인근의 허름한 하숙집에 기거하던 시절부터 사용하던 불경하기 짝이 없는 (포르투갈어로 신을 뜻하는) ‘데우스’라는 성은 더이상 쓰지 않았다. 이런저런 범죄와 결부된 과거를 감추고 살아가기엔 그렇게 하는 편이 나았을 터다. 또한, 자신이 노스페라투를 닮았다는 점에 착안해 그 흡혈귀를 연기했던 배우의 이름을 따서 자신을 막스라고 부르는 것도 언제부턴가 그만두었다. 여하간 밀로스를 통해 주앙은 그 스스로가 부부 루시타니카라는 하나의 나무가 되었다. 

사실 시네필에게 있어서라면 프린시프 레알 공원은 곧 늙은 주앙의 공원이다. 그의 유작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가 하나의 공원을 이토록 완벽하게 하나의 천국처럼 그려낸 적이 또 있었던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일찍이 페르난두 페소아도 이곳을 리스본 최고의 공원 가운데 하나로 꼽은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페소아는 이곳을 프린시프 레알 공원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리우데자네이루 광장에 있는 또 다른 공원”이라고 썼을 뿐이다. (그런데 2017년에 출간된 한국어 번역판 『페소아의 리스본』에서는 ‘또 다른 공원’을 프린시프 레알 공원으로 아예 풀어서 옮겨 놓았다.) 이 공원의 공식적 이름은 유명한 언론인 프란사 보르제스를 기려 붙여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리우데자네이루 광장은 오늘날 프린시프 레알 광장이라 불리고, 프란사 보르제스 공원은 프린시프 레알 공원이라고 불린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에겐 주앙의 공원과 페소아의 공원을 별개의 것으로 간주할 명분이 있는 셈이다. 이름의 마력 덕분이다.


사진 3


젊은 주앙이 일러준 대로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서 본 프린시프 레알 공원은 늙은 주앙의 영화에서 보고 상상했던 것만큼 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놀라거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의 영화가 공간감을 교란하는 일은 아주 흔하기 때문이다. 다만 영화를 볼 때 이 공원을 실제보다 크게 느낀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주앙의 유작에는 산책을 나간 그가 나무를 등지고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이 거듭 나온다(사진 3). 이 영화에 보이는 프린시프 레알 공원의 모습은 이처럼 나무줄기를 화면의 중심에 두고 각도와 크기를 달리해 가며 찍은 쇼트들을 통해 제시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따금 우리는 그가 아이들의 놀이 상대가 되어 주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같은 자리를 맴도는 소녀를 쫓아 달려가기도 하는 모습을 본다. 하지만 언제나 나무 아래서다. 우리는 프레임 바깥의 풍경은 어떠한지, 즉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주앙이 보고 있는 풍경은 어떠한지 전혀 알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나무 쪽을 보게 될 뿐 나무 쪽에서는 볼 수 없다. 우리는 주앙이 등지고 있는 나무 저편으로 멀리 보이는 배경을 통해 매우 제한적으로만 공원의 경계와 모양새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 모호함이 오히려 공원의 규모를 상상적으로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그리고 보이는 것을 대신해 생생하게 바깥의 감각을 전달하는 소리의 농밀함에 힘입어 공원은 어엿한 하나의 세계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까지 확장된다.


사진 4~사진 6


당연한 말이지만, 늙은 주앙의 프린시프 레알 공원은 어디까지나 영화에만 존재하는 그런 곳이다. 하지만 그가 보고 있던 풍경이 여전히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가 앉았던 벤치에 앉아 그가 보았을 법한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사진 4~사진 6). 이렇게 해서, 자신의 영화에서라면 그가 절대 구사하지 않았을 시점 쇼트들을 만들어 본다. 그리고 잠시 생각해 본다. 이런 쇼트들이 영화에 함께 제시되어 버리면 늙은 주앙이 즐겨 찾았던 프린시프 레알 공원이라는 영화적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진정 우리를 전율케 하는 것은 그의 유작이 바로 이러한 세계가 소멸하는 순간을 연출하면서 종결된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앙은 시선을 나무 쪽으로 두고 벤치에 앉아 있다(사진 7). 그의 등 뒤로 쿠프레수스 루시타니카가 보이지 않는 이유다. 그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다프네라는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이 나무 쪽에서 공원을 보게 된다. 밀로스가 그린 부부 루시타니카의 모습은 이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밀로스의 그림에는 공원이 보이지 않는다. 주앙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신의 숨바꼭질: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의 우화와 노년의 희극

 

※ 이 글은 2013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와 그의 친구들"(2013.5.8~5.30)에 맞춰 발간된 동명의 책자에 처음 수록되었으며, 나의 비평집 『유령과 파수꾼들: 영화의 가장자리에서 본 풍경』(2018)에도 수록된 바 있다.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1939~2003)


“난 찬란한 행복을 그려보는 덧없는 시간들을 믿지 않는다.” 

-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야콥 폰 군텐 이야기』 


영화작가가 자신의 노년의 몸, 몸짓, 얼굴을 희극의 소재로 삼는 것은 그다지 드문 일도 아니다.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이 공연한 <라임라이트>(1952)는 그러한 노년의 희극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예에 속한다.) 하지만 노년의 몸을 우수로 감싸인 용기가 아닌 저항의 현신으로 삼는 예는 드물고, 또 드문 만큼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우수에 저항하며 계속해서 움직이(려)는 부지런함과 그 움직임에 저항하는 둔함을 모두 자신의 속성으로 기꺼이 껴안은 노년의 몸, 즉 저항의 이중성을 그 근거로 삼는 몸의 희극은 “난 아직 늙지 않았어!”라고 외치며 돌진하는 자들의 무모함에는 거리를 둔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노년의 희극은 어떤 이유로건 노년을 거부하는 노인(네)들의 통속 희극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노년의 희극이란 노년의 속성 자체를 저항의 표식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희극적 웃음은 서로 길항하는 저항을, 부지런함과 둔함의 뒤얽힘을 바라보는 데서 발생한다.  

우리 시대의 영화작가들 가운데 이중화된 저항을 초점으로 삼은 타원형의 발걸음으로 노년의 희극을 그려내는 데 탁월한 이들로는, 조지아(그루지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해 온 오타르 요셀리아니(1934년 생), 프랑스의 뤽 물레(1937년 생) 그리고 포르투갈의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1939년 생)를 꼽을 수 있다. (미지의 걸작 <작은 푸가>(1979)의 스위스 감독 이브 예르생(1942년 생)이 작품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응당 그의 이름도 여기 나란히 놓였을 것이다. [덧붙임] 예르생은 2018년 11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굳이 이들의 출생연도를 여기 밝힌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이들은 모두 자국요셀리아니의 경우는 구(舊)소비에트 연방내에서 새로운 영화의 물결이 도래하고 난 ‘직후’에 감독으로서 데뷔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로 인해 (영화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물결 초기에 일찌감치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선배들의 그늘에 꽤 오랫동안 가려 있게 되는 불운에 시달려야 했다.[1] 1969년에 첫 단편을 만든 이후 (명프로듀서 파울루 브랑쿠가 제작한) <실베스트르>(1981)로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몬테이로의 경우, <녹색의 해>(1963)의 파울루 로샤나 <벨라르미누>(1964)의 페르난두 로프스 같은 포르투갈 시네마 노부(새로운 영화) 1세대보다 뒤에 데뷔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등장한 1970년대는 <과거와 현재>(1971)[2]로 영화계로 복귀한 60대의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가 <베닐드 혹은 성모>(1975)와 <저주받은 사랑>(1978) 같은 걸작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국내외에서 관심을 받기 시작하고 있던 때였다.[3]

 

<노란 집의 추억>


영화가 바야흐로 급변하며 어떤 현대예술보다도 더 현대적이 되어가던 시기에 새로운 세대에 속한 감독으로 출발했으나 꽤 오랫동안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이들이, 정작 자신들과 더불어 나이든 영화의 나이(듦) 자체를 고유하게 양식화한 제스처의 희극으로 조금씩 알려지게 된 건 그 자체로 희극적인 일이다. 한동안 조명 바깥에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타원 주위를 거듭 맴도는 발걸음으로 특징지어지는 순환과 반복과 변주의 희극의 대가가 되었는데, 이를 우리는 (요셀리아니의 표현대로) 영화적 론도 혹은 (예르생의 영화 제목을 따서) 영화적 푸가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몬테이로는 1960~70년대 유럽 예술영화의 급진성을 계승하면서 여기에 무성영화의 농밀한 공기와 미국영화의 견고함을 더한달리 말하자면 무르나우, 드레이어, 브레송, 스트라우브와 위예, 존 포드, 하워드 혹스가 섞이지 않은 채 ‘공존’하는독특한 영화들로 주목을 끌었다. 몬테이로 자신이 연기한 주인공의 이름의 따서 ‘데우스(Deus: 포르투갈어로 ‘신’을 뜻한다) 3부작’으로도 알려진 <노란 집의 추억>(1989), <신의 코미디>(1995), <신의 결혼식>(1999)이 바로 그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명명한 ‘말년의 양식’이란 (생물학적으로) 노년 혹은 말년의 시기에 이른 개인의 ‘원숙함’을 보여주는 양식이 아니라, 예술적 모더니즘 혹은 아방가르드의 어떤 이상을 대변하는 탈(脫)개인적이고 초(超)시대적인 무차별적 (부)조화의 양식이라고 이해한다면, 몬테이로의 영화만큼이나 영화의 ‘말년의 양식’을 육화시킨 사례도 없을 것이다. 이로써 그는 페드로 코스타, 주앙 페드로 로드리게스, 미구엘 고메스, 주앙 니콜라우 등, 포스트-시네마의 시대에 영화의 ‘불순성’이라는 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포르투갈 감독들을 위한 하나의 영화적 모델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그에겐 영화와 다른 미디어의 관계를 고민하기에 앞서 일단 영화 내에서의 백가쟁명의 상황을 돌파하는 것이것은 그처럼 ‘조금 늦게’ 도착한 세대에 속한 이들에게 남겨진 숙제였다이 급선무였겠지만 말이다. 


<신의 코미디>


그가 감독으로서 첫 발을 내딛었던 1970년대로 돌아가 보자. 파울루 필리프 몬테이로는, 우수의 전통에서 발을 빼내려 노력하는 포르투갈 영화작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전무하다시피 한 가운데 “소피아 드 멜루 브라이너 같은 시인들이 시의 세계에서 창조하고 싶어 했던 혹은 창조해 낼 수 있었던 [...] 빛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이가 있다면 그것은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다”[4]라고 주장한다. (1969년에 발표된 몬테이로의 첫 단편은 바로 소피아 드 멜루 브라이너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빛으로 향하는 것은 다만 “굴욕을 감내하는 연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5], 즉 길고 긴 어둠의 통로를 가로지르는 과정을 감내하는 인내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몬테이로의 영화들을 가로지르는 주요 모티프 가운데 하나는 바로 ‘여정’이다몬테이로는 잘 알고 있었다. “생을 즐기는 사람(bon vivant)의 반대로 죽음을 즐기는 사람(bon mourant)을 생각해 본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몬테이로야말로 그에 속하는 이일 것이다. [...] 그는 천박한 일상을 행복하게 누리는 데서 얻는 거짓된 기쁨을 [...] 거부하고, 어둠을 응시하고, 고양이처럼 그 안에서 보는 법을 배우고, 대담한 사랑을 추구하는 새로운 인물형을 사진의 음화처럼 어둠 속에서 발견해내려 했다.”[6] 필리프 몬테이로는 이러한 관점에서 세자르 몬테이로의 <여정>(1977), <실베스트르> 그리고 <바다의 꽃>(1986)을 다시 읽어내고 있다.

몬테이로의 출세작인 <여정>은 그의 경력의 한 축을 이루는 우화(fable)적 영화의 형식을 처음으로 온전히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이것은 포르투갈 북동부의 트라스-우스-몽트스[7]에서 대서양 연안으로 향하는 두 남녀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여정의 영화’이지만, 다큐멘터리적으로 지역의 풍습을 기록한 영상들 그리고 포르투갈 전통설화와 아이스킬로스의 희곡 『에우메니데스』에서 발췌한 삽화 등으로 서사 자체가 자꾸만 단속되는 탓에 통상적인 로드무비의 구조는 거의 무너지고 만다. 포르투갈이라는 유럽의 변방 내의 변방인 트라스-우스-몽트스의 민속지적 이미지는, 한 번은 포르투갈 전통설화라는 지역적인 (동시에 매우 보편적인 모티프들로 채워진) 텍스트와, 다른 한 번은 유럽 정신의 근원이라 할 그리스 비극의 텍스트와 결합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로지르는 서사적 여정 속에 몬테이로 자신과 마리아 벨류 다 코스타가 쓴 대사들이 촘촘히 채워진다. 지금에 와서 보면 <여정>은 포르투갈적인 것과 유럽적인 것 사이에서 진동하면서 1974년 혁명 이후 포르투갈(영화)의 가능성을 묻는 대담한 실험이 영화를 정치적이라 부를 수 있다면 바로 이 때문이다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론 몬테이로 자신의 영화의 가능성을 묻기 위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영화의 가능성은 무엇보다 자신에게 걸맞은 우화를 발견하는 데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특히 동화 혹은 설화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커서 1978년에는 <여정>의 브랑카 플로르에 관한 이야기에 소재를 제공했던 『포르투갈 전통설화』(카를로스 드 올리베이라와 주제 고메스 페헤이라 편집, 1958)에서 선택한 이야기들로 3편의 16mm 연작 단편(<두 병사>, <세 개의 석류의 사랑>, <어머니>)을 만들기도 했다. <실베스트르> 역시 15세기 포르투갈 설화와 푸른 수염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며, 몬테이로의 가장 과격한 영화로 알려진 <백설공주>(2000)이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아주 약간의 사진과 영상을 제외하면) 검은 화면뿐이다는 그림형제의 동화를 재구성한 로베르트 발저의 텍스트를 활용한 작품이다. 


<여정>


이때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왜 우화인가? 영화적 우화(la fable cinématographique)에 관한 자크 랑시에르의 견해[8]를 참조하며 몬테이로의 영화를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언급한 몬테이로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세속적 우화를 기묘하게 비틀고 있다. 교훈은 삭제되어 있고, 이미지는 이야기를 불충분하게만 전달할 뿐이며(<백설공주>의 경우, 이야기를 전달하는 이미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때론 별안간 이야기가 중단되거나 다른 이야기로 전환되기도 한다. 또한 말(言)은 이야기를 전진시킨다기보다 종종 그것을 지연시킨다. 엄정해 보이는 화면으로 광폭한 사건이 막 일어난 현장을 무심히 담아냄으로써이런 순간에 몬테이로는 지극히 브레송적[9]이다보는 이를 당혹케 하는 경우도 있다. 세속적 우화가 어떤 여정을 이끄는 힘(작용)이라면 몬테이로 영화의 시청각적 요소들은 그에 저항하는 힘(반작용)이다. (“[영화적] 우화는 일반적으로 정지의 순간들/현실의 순간들과 행동의 시퀀스들을 번갈아 보여준다.”[10]) 그리고 이 둘의 길항으로부터 시네마틱한 순간을 발생시키는 것이 몬테이로의 영화적 우화인 것이다. 이 우화가 그의 후기의 노년의 희극과 구조적으로 상동관계에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나아가 그의 우화적 형식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노년의 몸과 그것의 이중화된 저항이 발생시키는 몸짓우수에 저항하며 계속해서 움직이(려)는 부지런함과 그 움직임에 저항하는 둔함이 꼭 필요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의 유작 <오고 가며>(2003)의 경우, 반복되는 움직임(100번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도는 것, 새로운 가정부를 맞아들여 그들을 유혹하고 또 그들에게 유혹당하는 것) 속에 빛나는 정지의 순간/현실의 순간들(버스 승객들의 합창 장면, 주앙이 노래「벨라 차우」에 맞춰 바닥에 걸레질하는 장면, 경찰 바바라에게 들려주는 주앙의 리라 연주 장면)이 하도 촘촘히 박혀 있어, 결국 그 둘의 경계가 무화되다시피 한다. 부지런함과 둔함을 동시에 표현해내는 절묘한 몸짓들로 점철된 <오고 가며>는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원형(圓形)에 가까운 노년의 희극이자, 몬테이로의 우화적 형식의 원형(原型)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몬테이로의 후기작들에 익숙한 이들에게, 그의 초기작들은 꽤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경력 초기의 우화적 영화가 그의 노년의 희극의 구조와 맞닿아 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대로다. <노란 집의 추억>은 그가 만 50세가 되었을 때 발표된 영화로, 여기서부터 몬테이로는 (내가 글머리에서 언급한) 이중화된 저항을 초점으로 삼은 타원형의 발걸음으로 아예 자기만의 ‘신화’(myth)를 쓰기 시작한다. 데우스 3부작과 <존 웨인의 히프>(1997), <오고 가며>(2003)는 승화된 우화이자 추락한 신화이다. 아니면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그는 인간들이 신화 쓰기를 중단한 시대에 스스로 자신의 신화를 쓰기로 마음먹고 지상으로 내려왔다가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신(Deus)의 역할을 떠맡기로 했다고. 이 신은 음탕하기 그지없으며 여인의 음모(陰毛)에 한없이 미혹된 존재이다. (<신의 코미디>에 나오는 그의 『사색의 서(書)』는 다름 아닌 여인들의 음모를 모은 수집책이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그의 영화에서 음모 페티시즘은 우리를 세계의 관능성(sensuality)으로 인도하는 실마리이지 일개 수집가의 도착적이고 변태적인 성벽(性癖)이 아니다. 이것은 브레송의 장세니즘과 스트라우브와 위예의 좌파 정치학이 결국 우리를 세계의 관능성으로 인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르주 다네는 “스트라우브와 위예의 영화에서, 우리는 관능주의는 간직하고 공산주의는 버려야 한다”[11]고 단언한 바 있다.)[12]

명백히 브레송의 <소매치기>(1959)의 결말을 패러디한 <신의 결혼식>의 결말부의 감옥 면회 장면에서, 주앙은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주아나에게 음모를 하나 뽑아 달라고 말한다. 거기서 그는 음모를 ‘아리아드네의 실’이라고 부른다. 아리아드네의 실, 미궁을 빠져 나오기 위해 테세우스가 간직했던 가냘프지만 강력한 수단. 여인의 음모는 그런 것이다. 하지만 너무 짧다(!). 그래서 그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직접 잣기로 마음먹는다. 수집가로서의 데우스, <신의 코미디>의 주인공은 이렇게 탄생한다. 하지만 모든 여인이 아리아드네가 될 수는 없다. 사실 단 한 명의 아리아드네가 있을 뿐이다.  


<오고 가며>


몬테이로의 영화에서 순환, 반복, 변주되는 모티프들이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순환, 반복, 변주는 노년의 희극을 결정짓는 특징이다.) 원형의 공간(<노란 집의 추억>과 <신의 결혼식>에서 주앙이 수용되는 정신병원의 원형 정원, <오고 가며>의 공원), 같은 자리를 맴돌거나 반복되는 움직임 그리고 특정한 악절이 반복되는 음악 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여러 ‘가능세계’들 사이를 넘나들며 순환, 반복, 음운변화되는 고유명들이 있다는 점이다. 데우스 3부작과 <존 웨인의 히프>와 <오고 가며>를 일종의 연작처럼 간주하려다 보면, 문득 우리는 이 영화들이 일견 연속적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실은 서사적으로 딱 아귀가 맞게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그 세계들은 같은 타임라인 내에 자리할 수는 없지만, 동일한 배우, 동일한 고유명 그리고 유사한 모티프들로 구성 가능한 세계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고유명들은 배우들과 더불어 서로가 서로를 속이며 숨바꼭질하기 일쑤다. 먼 길을 돌아 ‘주앙’은 ‘주아나’를 다시 찾지만(<신의 결혼식>) 아마 주아나는 다시 그를 떠난 것 같다. <오고 가며>의 주앙여기서 그의 성은 드 데우스가 아니라 ‘부부’(Vuvu)이다의 집에 걸린 <소매치기> 포스터가 이를 암시한다. <존 웨인의 히프>에서는 ‘주앙 드 데우스’와 ‘장 드 디외’(Jean de Dieu)두 이름 모두 ‘신의 요한’을 뜻한다가 숨바꼭질을 벌인다. <노란 집의 추억>과 <신의 결혼식>에서 현자 혹은 신의 사자임을 자처하는 정신병자 리비우는 사실 몬테이로가 1970년에 발표한 단편 <망자의 구두를 기다리다 맨발로 죽다>[13]의 주인공으로 모두 포르투갈 명배우 루이스 미구엘 신트라가 연기했다. <오고 가며>는 <망자의 구두를 기다리다 맨발로 죽다>에서 리비우가 친구와 앉아 있던 리스본의 한 공원 벤치에 주앙이 홀로 앉아 있다 사라지는 광경으로 끝난다. 

고유명과 관련해 가장 고약한 예는 아마 <오고 가며>의 주앙의 집에 맨 처음 찾아온 가정부 아드리아나일 것이다. ‘아드리아나’(Adriana)는 결국 ‘아리아드네’(Ariadne)로는 조합되지 않는 기만적 애너그램(anagram)이다. 게다가 후반부에 가면 아드리아나는 거의 수염처럼 길고 수북한 음모를 지닌 우라카라는 이름의 가정부로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와의 재회는 주앙을 결국 죽음으로 이끌 뿐이다. 아니, 이것은 확신할 수 없다.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는 이제 세상을 떠났지만, 다른 ‘주앙(들)’은, 신-테세우스-노스페라투의 형상을 모두 지닌 이 그로테스크한 존재는 자신의 아리아드네를 찾아 영원히 이승을 배회할 것이다. 또한 그는 이름과 존재가 끝없이 만나고 또 어긋나는 과정을 어떻게든 따라잡으려는 노년의 발걸음, (타)원형의 발걸음으로 배회할 것이다. 그리고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라는 이름과 그 이름이 지칭하는 모든 것들은 세상의 숱한 기만적 영화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창문 밖으로 셔츠를 내던지며 주앙 부부가 던진 말처럼, “바람과 함께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바람을 탄 안티고네”(Anti-Gone with the Wind).


[1] 뤽 물레의 <죽음의 힘 Le prestige de la mort>(2006)은 이와 관련해 꽤 흥미롭게 읽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차기작 장소 물색을 위해 여행 중이던 극중 영화감독 뤽 물레(그 자신이 연기했다)는 어느 날 자신과 꼭 닮은 시체 한 구를 발견하고는 옷을 바꿔 입은 뒤 시체를 사람들 눈에 쉬이 뜨일 만한 곳에 옮겨 둔다. 자신이 죽었다고 알려지면 애도와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명성이 솟구칠 것을 기대하면서, 물레는 어딘가에서 사후 추모 프로그램 연락이 오면 어떤 영화들 위주로 상영토록 유도할 것인지 - 단편보다는 장편 위주로 할 것 - 따위의 계획까지 세워 둔다. 그런데 별안간 장-뤽 고다르가 사망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고다르 사망 소식에 자신의 사망 소식이 묻힐 것을 염려한 그는 서둘러 시체를 다시 감추려 하지만 이미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다. 이후 영화는 물레가 겪게 되는 곤경과 환상적인 일들을 그려낸다.

[2] 몬테이로는 1972년에 쓴 「<과거와 현재>: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포르투갈식 네크로필름(necrofilm)」이란 글에서 올리베이라의 영화를 상찬하며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영화사(史)에서 올리베이라의 이 영화만큼이나 극도로 에로틱한 영화가 있었다면, 그건 이보다 더 평가절하되고 몰이해되었던 드레이어의 <게르트루드>일 것이다.” “O Passado e o Presente: um necrofilme português de Manoel de Oliveira” in Diário de Lisboa (Supplemento letterario), 10 Marzo 1972. 몬테이로는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그리고 데뷔한 이후에도 한동안 영화평론가로 활동했는데 (<과거와 현재>에 관한 위의 비평문을 포함해) 『이미지 Imagem』, 『시대와 양식 O Tempo e o Modo』, 『리스본 다이어리 Diário de Lisboa』, 『시네필 Cinéfilo』 등에 기고한 그의 글은 www.joaocesarmonteiro.net에서 찾아볼 수 있다. [덧붙임] 이 웹사이트는 현재는 운영되지 않고 있다.

[3] 1970년대 포르투갈영화의 부흥과 관련해서, 오랜 독재체재를 종식시킨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의 영향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굴벤키안(Gulbenkian) 재단과 포르투갈영화센터(CPC)의 협력을 통한 영화제작 지원 사업을 간과할 수 없다. 올리베이라의 <과거와 현재>는 바로 이 사업의 첫 지원 작품 가운데 하나였다. 1980년대 초에 이르면 포르투갈영화는 칸, 베니스, 베를린영화제 등을 통해 국제적인 주목을 끌게 되고 한편으론 자국 내에서 상업적으로도 적잖이 성공을 거뒀다. 일례로, 올리베이라의 <프란시스카>(1981)처럼 상업적으로 “어렵다”고 여겨지는 작품도 8만 명에 달하는 관객을 동원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포르투갈영화는 적어도 산업적으로는 쇠퇴의 길을 밟게 된다. João Mário Grilo, “A Imagem Subalterna (The Subaltern Image)”, in Nuno Figueiredo & Dinis Guarda (ed.) Portugal: Um Retrato Cinematográfico (Portugal: A Cinematographic Portrait) (Número, 2004) p.149-155.

[4] Paulo Filipe Monteiro, “O Fardo de Uma Nação (The Burden of a Nation)”, 앞의 책, p.51.

[5] 앞의 글, p.51. 

[6] 앞의 글, p.53.

[7] 포르투갈 북동부의 산간지대로 안토니우 레이스와 마르가리다 코르데이루의 걸작 <트라스-우스-몽트스>(1976)의 무대가 된 곳이다.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데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탓에 몬테이로가 <여정>을 촬영할 당시만 해도 1974년 혁명에 대한 반감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8] 자크 랑시에르, 『영화우화』, 유재홍 옮김, 인간사랑, 2012. 

[9] 앞의 책, p.32-34를 참조할 것.

[10] 앞의 책, p.38.

[11] 세르주 다네,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 정락길 옮김, 이모션북스, 2012, p.184. 이 책에서는 ‘감각주의’라 번역한 ‘sensualisme’을 여기선 ‘관능주의’로 바꿨다.  

[12] 몬테이로와 스트라우브-위예에게 있어서 유물론이란 세계의 관능성을 지각하기 위한 영화적 태도다. 연극성(theatricality)을 배척하기보다는 그것을 시네마의 토대로 삼으려 한다는 점도 이들의 공통점이다. 물론 몬테이로의 영화와 스트라우브-위예의 영화 간의 차이를 식별해 내기란 어렵지 않다. 음란한 언어와 저항의 언어, 나지막한 목소리와 확신에 찬 목소리, 아래로 향하는 노쇠한 몸과 꼿꼿이 위로 향하는 강건한 몸, 정면성(frontality)의 화면과 사각의(oblique) 화면 등등. 

[13] 원제 ‘Quem Espera por Sapatos de Defunto Morre Descalço’는 포르투갈 속담에서 따 온 것으로 ‘망자의 구두를 기다리는 이는 맨발로 죽으리라’고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