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26

2014년 8월 넷째 주




안나 Anna (1975)
(dir. 알베르토 그리피 & 마시모 사르키엘리 / 이탈리아 / 1975년 / 225분 / 1.33:1)


1972년 2월의 어느 날, 배우 마시모 사르키엘리(Massimo Sarchielli)는 로마 나보나 광장의 한 카페에서 안나라는 이름의 소녀를 만난다.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그녀는 임신 8개월 째였고 보호시설에서 도망쳐 나와 머무를 곳도 없이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그녀를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와 보살피던 사르키엘리는 친구 알베르토 그리피(Alberto Grifi)에게 연락해 그녀에 관한 영화를 함께 만들어 보자고 제안한다. 파운드푸티지 영화 <불확실한 검증 La verifica incerta>(1964, 영화보기)으로 이탈리아 실험영화계에서 주목받고 있던 그리피는 당시 여러 예술가들이 그 미학적 가능성을 실험 중이었던 비디오를 활용해 그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오픈릴 방식의 비디오레코더로 촬영된 최초의 이탈리아 영화 - 이는 다시 그리피가 직접 개발한 ‘비디그라포’(vidigrafo)라는 장비를 통해 16mm로 전환되었다 - 이자 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베리테의 유산을 계승하며 그것을 한계에까지 밀어붙인 걸작 <안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들은 우선 사르키엘리가 나보나 광장의 카페에서 안나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재연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이는 <안나>의 도입부를 이룬다. 이후 영화는 안나가 머물게 된 사르키엘리의 집과 나보나 광장을 오가며 전개되는데, 사르키엘리의 아파트에서는 비디오라는 기록매체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앤디 워홀의 영화를 방불케 할 만큼의 냉담한 집요함으로 안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 - 특히 이가 들끓는 안나가 사르키엘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샤워하는 모습을 거의 외설적으로 느껴질 만큼 적나라하게 기록한 악명 높은 장면은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보는 이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 하고 있는 반면, 나보나 광장에서는 그곳을 배회하는 사람들과의 인터뷰, 이들이 정치사회적 현안 혹은 안나와 관련된 문제를 두고 벌이는 논쟁, 가정주부의 인권을 부르짖는 여성주의 단체의 집회 등 당대 이탈리아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여러 광경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이탈리아 1977년 운동을 가능케 한 분위기를 포착한(혹은 예견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프랑스 68혁명에 앞서 만들어진 장 루슈와 에드가 모랭의 <여름의 연대기>(1961)나 크리스 마르케의 <아름다운 오월>(1963) 같은 영화들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안나>의 ‘정치적 미학’은 워홀의 <블루 무비>(1969) - 비바와 루이스 월든이 무좀과 임질에서부터 베트남전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섹스하고 샤워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 -, 하라 가즈오의 <극사적 에로스>(1974) 그리고 1960년대와 70년대 미국 좌파의 인류학적 보고서라 할 로버트 크레이머와 존 더글러스의 <마일스톤즈>(1975) 사이에서 진동하고 또 표류한다고 보아야 할 옳을 것이다. <안나>는 정치의 가능성을 다시 발견하기 위해 ‘극사적’(極私的) 영역을 포괄하는 ‘일상생활의 실천’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세사(細査)로 향하지만, 이는 돌발적인 사건(안나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며 불현듯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빈첸조라는 이름의 스태프)에 의해 굴절되는가 하면 주인공의 반발(출산장면의 촬영을 거부하는 안나)에 의해 가로막힌다. <안나>는 제도에 반발하거나 거기서 일탈한 이들(안나와 나보나 광장의 청년들) 주변을 집요하게 맴도는 영화이고 영화의 제작 방식 또한 사뭇 반제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피와 사르키엘리가 안나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끌어들인 조건들(사르키엘리의 아파트, 장시간촬영이 가능한 비디오, 사실의 기록과 분리불가능한 구성적 요소로서 재연의 활용)은 이미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제도로 기능한다. 감독들이 염두에 두거나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빈첸조와 안나에 의한 영화의 굴절과 중단은 (아무리 대안적인 방식이라 할지라도) 영화 제작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제도적 특성들에 대한 인간적 저항으로서, 1970년대 이탈리아의 정치적 지형에 상응하는 진정한 영화적 특이점들이 된다. 보다 간명하게 말하자면, <안나>는 그 실패를 통해 저항을 증거하는 영화다. 소설가 레이첼 커쉬너가 『아트포럼 Artforum』에 기고한 글("Woman in Revolt". 원문보기)에서 적절히 지적했듯, 그리피와 사르키엘리의 영화에서 안나라는 인물은 1970년대 “노동계급의 물질적 조건에서 히피, 학생, 비정규직 노동자, 마약중독자 그리고 여타 소외된 자들의 세계로의, 이탈리아 좌파의 구성상의 변화를 나타내는 징후”로서 읽힐 수 있다. 


<안나>는 1975년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이듬해에는 칸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후로 무려 40여 년 동안 이 영화는 이탈리아 영화계의 몇몇 이들에게는 전설처럼 떠도는 영화가 되었고 이탈리아 바깥에서는 거의 완전히 망각 속에 파묻혔다. (<안나>가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디지털 복원판이 2011년 베니스영화제 및 2012년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상영되면서부터다.) 이 영화에 얽힌 불운은 이것만이 아니다. 영화를 공동연출한 그리피와 사르키엘리는 크레딧 문제 - 사람들은 이 영화를 전적으로 그리피의 것으로 간주하곤 했다 - 로 갈라섰고, 안나는 빈첸조에게 아이를 떠넘기고 사라진 뒤 결국 로마의 정신병동에 입원했으며 그 이후 소식은 (지금까지도)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빈첸조는 한 싸움에 말려들었다 살해되었다. 두 명의 감독은 이 영화가 다시 빛을 보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피는 2007년에, 사르키엘리는 2010년에 사망했다.) 마치 흡혈귀처럼, <안나>는 그와 연루된 이들의 생을 박탈함으로써 육신을 얻었고, 오랜 기간 어둠 속에 잠들어 있다가, 홀연히 깨어나 우리 앞에 나타났다.

(* <안나> 복원판은 오스트리아 비엔나국제영화제(Viennale: Vienna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 의해 2013년에 DVD로 출시되었다. 비엔나영화제는 2012년에 알베르토 그리피 특별전을 마련한 바 있는데, 이 DVD는 그 특별전과 연계되어 기획, 출시된 것이다. 비엔나영화제 홈페이지(www.viennale.at)의 온라인 숍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었는데, 8월 25일 현재 확인해 보니 올해 영화제 준비로 잠시 온라인 숍을 폐쇄중이다. 이 영화는 다가오는 9월 DMZ 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될 예정이라 한다.)


키들랏 타히믹 Kidlat Tahimik

지난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필리핀 독립영화의 '아버지'(tatay) 키들랏 타히믹 특별전이 열렸다. 2011년 한국에서의 타히믹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감독에게서 받은 DVD로 이미 본 영화들이긴 했지만, 이처럼 한 자리에서 원래의 16mm 필름으로 볼 수 있어 행복했다. 당대의 다른 아시아영화들과 타히믹의 영화들을 나란히 놓고 생각해 보면, <향기어린 악몽 Perfumed Nightmare>(1977)은 오가와 신스케의 <산리츠카: 헤타 부락 Sanrizuka: Heta Village>(1973), 리트윅 가탁(Ritwik Ghatak)의 <티타쉬라 불리는 강 A River Called Titash>(1973), 소흐랍 샤히드 살레스(Sohrab Shahid Saless)의 <단순한 사건 A Simple Event>(1974)과 더불어 1970년대 아시아영화에 '지정학적 미학'(geopolitical aesthetics)의 새로운 대지로 향하는 창을 열어 보인 작품이고(하지만 창은 서둘러 닫혔다), <무지개 가운데는 왜 노란색일까? Why is Yellow the Middle of Rainbow?>(1994)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다카미네 고의 <운타마기루 Untamagiru>(1989),  허우샤오시엔의 <희몽인생 The Puppetmaster>(1993) 그리고 배용균의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1995)과 함께 대안적/대항적 역사 기술 - 공적 역사의 창백함에 맞서, 이야기들(신화, 일기, 개인적 기억은 물론이고 허구에 이르기까지)의 재구성을 통해 역사적 '인상과 경험'을 복원시키는 것 - 의 방법론을 한층 정교화한 영화라 할 수 있다(이들의 시도는 계승되지 못했다). 

<향기어린 악몽>

나는 키들랏을 2009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보았다. 막 부산에 도착한 나는 해운대의 게스트센터에서 ID카드를 찾고 있었는데 바로 옆에서 한 백발의 노인이 ID카드와 이런저런 게스트패키지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 중이었다. 대학시절(1990년대) 해적판 VHS 테입을 구해서 본 <향기어린 악몽>의 주인공과 너무나도 흡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보고 '키들랏 타히믹인가?'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 무렵, 30년이라는 시간이 인간의 얼굴에 응당 가하게 마련인 변화의 폭을 가늠하며 망설이고 있을 무렵, 어느새 그 백발의 노인은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그는 정말 빨리 걷는다.) 내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한 건 같은 날 오후, <향기어린 악몽>을 보러 간 영화관에서였다. 당시 이 영화는 닉 데오캄포의 16mm 중편 <올리버 Oliver>(1983)와 함께 상영되었는데, 16mm로 촬영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주제적으로나 형식적으로 전혀 연관이 없는 두 영화를 묶어 상영한 건 지나치게 운영상의 편의만을 고려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관객과의 대화 진행을 맡은 프로그래머는 두 편의 영화를 아예 보지 않았거나 그저 건성으로 보고 온 게 분명했다.) 

같은 해 12월, 나는 필리핀의 시네마닐라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아 마닐라에 가게 되었다. 키들랏과 처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도 그 때다. 영화제 폐막식 자리에서, <점성사와 빨치산 The Woven Stories of the Other>(2006)과 <하수구 Imburnal>(2008)의 감독 셰라드 안토니 산체스(Sherad Anthony Sanchez)와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한국에서 키들랏의 전작을 모아 상영하는 회고전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셰라드는 그가 마침 이곳에 와 있다고 하며 - "아, 타타이(아버지)! 저기 와 계신데?"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폐막식장 한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름 그대로 '조용한 번개' - 타갈로그어 '키들랏 타히믹'을 직역하면 이런 뜻이 된다 - 처럼, 그렇게 그가 거기 있었다. 일군의 젊은 필리핀 감독들과 환담을 나누면서. 그 이후, 2010년 12월 마닐라에서 그를 다시 만났고, 2011년에는 그의 장단편 전작이 마침내 한국에서 상영되었다. (한편, 2013년에는 크리스토퍼 파브섹(Christopher Pavsek)이 저술한 『영화의 유토피아: 고다르, 클루게, 타히믹에 있어서 영화와 그 미래 The Utopia of Film: Cinema and its Future in Godard, Kluge and Tahimik』가 출간되기도 했다.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일시적이나마 어떤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종종 이 공동체는 영화가 완성되고 나면 사라진다. 이와 관련해,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감독이 있다. 첫째,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이들을 매번 찾아나서는 이들이 있다. 둘째, 자신과 뜻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함께 있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있다. (본디 예외적이었지만 점점 늘어가는 유형으로, 전적으로 홀로 영화를 만드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 이렇게 해서 영화는 '오디오비주얼 아트'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슬기롭게도, 영화의 신은 둘 가운데 어느 쪽을 특별히 편애하지는 않는다. 이 두 가지 유형 사이에는 차이만 있을 뿐 위계는 없다. (위계를 가정하는 건 인간적인 바람일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알베르토 그리피와 마시모 사르키엘리의 <안나>만 해도, 이 영화의 연출자들이 '영화로 만들기에 좋은 소재'로서 안나라는 소녀를 '발견'했음은 분명하며 이들이 그녀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만든 일시적 공동체는 촬영이 끝난 후 완전히 파탄나 버렸다. 하지만 이 영화는 걸작으로 남았다. 여기에 영화 고유의 잔혹성이 있다.) 물론 타히믹은 이 가운데 후자에 속하며 그것도 아주 극단적인 축에 속한다. 그의 영화적 공동체는 바로 그의 (실제) 가족이다. 우리는 <향기어린 악몽>의 주인공 타히믹이 극중 독일에서 만난 임신부가 그의 실제 아내 카트린(Katrin)이며 그녀 뱃속의 아이는 그의 첫째 아들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그 아이와 어머니를 <누가 요요를 만들었나? 누가 월면차를 만들었나? Who Invented Yo-Yo? Who Invented the Moon Buggy?>(1979)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무지개 가운데는 왜 노란색일까?>는 자신의 아이와 함께 기록해나간 그림책이자, 일기이며, 또한 1980~90년대 필리핀의 현실에 대한 풍자적 코멘트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 8월 15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키들랏이 마침내 '완성'(!)한 <과잉개발의 기억 Memories of Over-development>(1980~2014)을 보다 그만 말문이 막혔다. 키들랏이 20년 넘게 진행해 온 마젤란의 필리핀인 노예에 관한 이 이야기는 - 그사이 촬영은 여러차례 중단되었고 키들랏은 더 이상 마젤란의 노예 역할을 할 수 없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 작년에 촬영이 재개되어, 예전의 16mm 촬영분과 비디오 촬영분이 뒤섞인 형태로 완성되었다. 키들랏의 아내 카트린은 물론이고, 그의 세 명의 아들 그리고 손자들이 모두 등장하는데 - 거칠게 정리하자면 둘째 아들이 연기한 주인공이 한 노인(키들랏)을 찾아 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짜여져 있다  - 극중에서 묘사된 이들의 직업 또한 (키들랏의 경우를 제외하면) 실제 그대로이다. 사실, '완성'된 <과잉개발의 기억>은 원래의 역사적 에세이 프로젝트가 이리저리 굴절된 끝에 온전히 키들랏 가족의 '홈비디오'로 소박하게 정리된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미학적으로 실패한 영화이다. 하지만 그 실패를 통해, 가족이라는 형태로 지속되어 온 하나의 영화적 공동체의 성공을 증거하는 영화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2년 전 한국에서의 전작 회고전 당시 함께 마련되었던 키들랏 전시의 제목은 "패밀리-트리, 필름-매트릭스"(Family-Tree, Film-Matrix)였다. 

(*<과잉개발의 기억>은 9월에 개막하는 「미디어시티 서울 2014」 (2014.9.2~11.23) 기간 중에 다시 상영될 예정이라 한다.) 


  

2014-08-05

장-뤽 고다르의 <칸 칸느 Khan Khanne>(2014)


" I Don't Have My Heart in My Mouth"
: 장-뤽 고다르의 비디오 편지


올해 첫 공개되었지만 아직 보지 못한 영화들 가운데 조만간 꼭 보고 싶은 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장-뤽 고다르의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이다. 지난 5월 초, 신작 촬영 중이던 페드로 코스타를 리스본에서 만났을 때 그는 고다르의 신작을 운좋게 미리 보았다고 했다. "정말 아름다운 영화"였다고 하기에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거기서 고다르가 영화란 정말 단순한(simple)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거라는 걸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처럼, 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최근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한 감독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는 복잡한(complicated) 영화를 만들지만 그것은 너무 쉬운(easy) 방식의 영화만들기라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돌연 식당 테이블에 놓여 있던 받침용 세팅지를 뒤집어 포르투갈과 스페인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여백을 가리키며) 장-뤽 고다르는 롤에...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는 포르토에... 빅토르 에리세는 산세바스티안에...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포르투갈 북부의] 기마랑이스에... 그리고 나는 리스본에 있다. 모두 고독하고, 단순하게 영화를 찍는 이들이다." (짐작했겠지만, 이 다섯 명의 감독들은 옴니버스 영화 <센트로 히스토리코 Centro Histórico>(2012)에 참여했거나 참여가 약속되어 있었던 - 고다르의 경우 - 이들이다.) 

한국에서도 언론을 통해 짧게 보도된 바 있지만, 올해 고다르는 칸영화제에 불참하는 대신 집행위원장 질 자콥과 예술감독 티에리 프레모 앞으로 한 통의 비디오 편지("Letter in Motion to Gilles Jacob and Thierry Fremaux")를 보냈다. 이 영상은 온라인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래 참조). 


9분 정도 되는 이 짧은 영상은 사실 한 편의 빼어난 단편 에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국내 언론에서는 올해 칸영화제의 작은 스캔들 정도로 다루었을 뿐 제대로 소개된 바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워낙 짧은 영상이라 혹시라도 누군가 나서 번역을 해 올리는 이가 없을까 기대해 보았지만 감감 무소식이어서, 결국 (형편 없는) 프랑스어 독해력과 (영어권 필자들이 올려둔) 부분적인 영문 번역 - 내가 보기에도 원래의 프랑스어를 너무 단순화하거나 의역한 경우가 많았다 - 을 토대로 내가 직접 번역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한글로 번역한 자막파일(smi 파일)을 여기 올려 두었다. (프랑스어에 익숙한 분들이 조금 더 근사하게 수정하거나 수정할 부분을 댓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 

이 비디오 편지에는 프랑스의 과학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장 카바이에스(Jean Cavaillès, 1903~1944)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아주 짧은 언급인데 함축이 짙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Hannah Arendt"라는 이름이 떠오를 때, 고다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나는 종종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 집에서 위안을 찾는다네. 장 카바이예스가 게슈타포에게 저항했던 곳이지." 한나 아렌트 - (그녀의 저서 제목인) 전체주의의 기원 - 나치즘 - 게슈타포 - 레지스탕스 - (그 일원이었던)  장 카바이에스,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연상적 사유, 반-실증주의적(anti-positivist) 역사 기술, 혹은 역사적 몽타주는 고다르의 숱한 작품에서 익히 봐 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 집"이란 대체 무엇일까? 거기서 위안을 찾는다는 건? 그리고 왜 카바이에스인가? 이에 대한 단서는 조금 뒤에 나온다.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어둠에 묻힌 텅 빈 극장의 무대 위에 선 고다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체주의의 지도자들이 활용한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내용이 아니라 법의 근거가 되며 법에 한결같은 확실성을 제공하는 논리와 같은 종류의 논리다."(This is not the content of ideologies, but the same logic which totalitarian leaders use which produces this familiar ground and the certainty of the Law without exception.)

먼저, 이 장면은 (고다르의 동반자인) 안느-마리 미에빌이 1997년에 만든 <우린 모두 아직 여기에 있다 Nous sommes tous encore ici>에서 따 온 것이다. (비디오 편지에 발췌, 삽입된 미에빌 영화의 해당 부분은 이곳에서 조금 더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고다르는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1951)이 아니라 그보다 뒤에 집필된) 논문 「전체주의의 본성에 대하여 On the Nature of Totalitarianism」(1954)를 낭독하고 있는 중이다. 전체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논리에 의해, "관심과 무관한 순수한 추론"에 의해 지탱되었다는 아렌트의 주장 - 이는 전체주의가 감정을 자극하는 선동과 결부되어 있다는 통념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 을 되새기면서, 고다르는 불현듯 (그다운 비약을 통해) 그러한 '논리'를 다루는 일에 종사했던, 그리고 레지스탕스였던 한 수학자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고다르가 보기에, 장 카바이에스의 저항(resistance)은 두 가지 층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는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서 나치즘(전체주의)에 정치적으로 저항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 집"으로서의 논리의 기초를 다시 묻는 형식적이고 이론적인 것이었다.  

나는 아직 카바이에스의 저술을 직접 읽어보지 못했다. 다만 그가 저술한 책들의 제목을 살펴보고 이런 추정을 하게 된 것 뿐이다. 제목만으로 거칠게 추정해보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수학계를 휩쓸었던 집합론, 형식주의, 수학기초론 등과 관련된 저술들로 여겨진다. 몇 가지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공리적 방법과 형식주의』, 『추상적 집합론의 형성에 대한 논변』. 그리고 칸토어와 데데킨트 간에 주고받은 서신들을 편집해 간행하기도 했다. 고다르가 카바이에스의 저술을 직접 읽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내 생각에 그는 조르주 캉길렘(George Canguilhem)의 『장 카바이에스의 삶과 죽음 Vie et mort de Jean Cavailles』을 통해 카바이에스에 접근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카바이에스는 프랑스 우표에 얼굴이 실린 인물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아래 사진.) 고다르는 캉길렘, 특히 그가 J. 브랭과 공동으로 저술한 『생명과학의 역사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와 합리성 Ideologie Et Rationalite: Dans L'histoire Des Sciences De La Vie(국내에도 번역되었으나 현재는 절판)이나 『정상과 병리 Le normal et le pathologique』(역시 번역되었으나 절판) 같은 책의 애독자였다. 



확실히, 여기서 고다르는 장 카바이에스의 '저항'과 자신의 '저항'을 오버랩시키고 있다. 그가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 집에서 위안을 찾는다"고 말할 때, 이는 그가 어떤 식으로건 이성, 추론, 논리, 언어의 세계에서 싸우고자 노력해 왔음을 뜻할 - 나는 고다르를 간단하게 '직관적'이고 '감성적'이고 '시적'인 시네아스트라고 말하는 평론가들을 믿지 않는다. 그는 확실히 그만의 방식으로 이론적이다. - 것이다. 그리고 장 카바이에스가 게슈타포(전체주의의 환유)에게 저항한 레지스탕스였던 만큼이나 철학자이자 수학자이기도 했던 것처럼 자신 또한 그와 유사한 자리에서 저항해 왔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다르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 예전에 네이버 블로그에 짧게 정리해 둔 적이 있는데, 이 글 말미에 옮겨 두었다.) 전체주의란 법, 과학 혹은 수학, 그리고 예술과 (간단히 대립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장 위에서 펼쳐지며, 따라서 이 장은 무엇보다 격렬한 투쟁의 무대가 된다.  

하지만,

"[...] 그보다 종종 나는 코델리어와 점심을 함께 하며 그녀와 침묵을 나눈다네." 고다르 자신의 영화 <리어 왕 King Lear>(1987)의 발췌장면과 더불어 그가 읊조리는 말. 이 비디오 편지에서 고다르가 비로소 무언가를 토로하는 순간. (말 그대로 '언어와 작별'하기로 결심한 이유를 밝히는 순간?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언어와의 작별>을 아직 보지 못한 상태에서 판단할 수 없다.) 코델리어는 말한다. "제 마음은 제 입에 담겨 있지 않아요." 고다르는 카메라를 보며 - 실은 우리는 그의 눈 아래 부분만 볼 수 있다. - 코델리어의 말을 똑같이 읊조린다. 왕국을 가진 자는 누구인가? 말로써 진심을 표현하기만 하면 왕국을 분할해 나누어 주겠다고 하는 자는 누구인가? (자, 이 비디오 편지가 이른바 세계 최대, 최고의 영화제라 일컬어지는 칸영화제의 수장들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걸 기억하자.) 말의 거부, 왕국과 그것의 지배에 대한 거부. "그래서 나는 떠나네. 나를 실어나르는 바람과 함께, 여기저기로, 고엽처럼 말이네." 그가 "하나의 단순한 왈츠"라 부른 <언어와의 작별>을 남기고. 

* 고다르가 올해 내놓은 작품은  총 3편이다. 칸영화제 측에 보낸 비디오 편지, <언어와의 작별> 그리고 옴니버스 <사라예보 다리 The Bridges of Sarajevo>에 포함된 "탄식의 다리 The Bridge of Sighs"가 그것이다. 

* [2014.8.12 추가] <언어와의 작별> 완성 직후 가진 한 인터뷰에서 고다르는 올해 칸영화제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기억하기론, 과거에 나는 칸영화제에 가는 게 행복했는데 어떤 가족... 영화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현실에서는] 가족적 삶이라는 게 없었던 우리가 거기서 다른 종류의 가족을 [...] 찾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점점 이 가족이 다른 가족보다 더 나쁘다는 걸 알게 되자 더 이상은 거기 가고 싶지 않았다." 이 발언이 담긴 인터뷰 전체 영상은 이곳(1부2부)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오늘날의 SMS(Short Message Service)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건 사실 고독한 자들이 내뱉는 "내 영혼을 구해줘"(Save My Soul)라는 신호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3D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전혀 흥미롭지 않다는 점이라고 일갈한다. 또한 그가 현재 살고 있는 스위스의 보(Vaud) 주에서는 "adieu"라는 프랑스어가 문맥에 따라 "farewell"과 "hello"의 상반되는 뜻을 지닌다고 한다. (즉, 한국어에서 "안녕"이라는 말의 용법과 유사하다.) 기억할 만한 말 하나. "많은 언어가 있지만 더 이상 제대로 된 낱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낱말들은 숲 속에서, 혹은 아프리카에서 [...] 길을 잃었다." 

* [2014.8.12 추가] 칸영화제에서 배포된 <언어와의 작별> 프레스북에 실린, 고다르가 직접 작성한 영화 개요와 번역문.




<언어와의 작별>
개요

이야기는 간단하다
유부녀와 독신남이 만난다
그들은 사랑하고, 다투고, 주먹이 오간다
한 마리 개가 읍내와 마을을 배회한다
계절이 지나고
남자와 여자는 재회한다
그들 사이에 개가 있다
하나는 다른 하나 속에
다른 하나는 하나 속에
그리고 그들은 셋이다
전남편이 모든 걸 부숴버린다
두 번째 영화가 시작된다
첫 번째와 같지만
그래도 다른 영화
우리는 인류로부터 메타포로 향한다
이것은 개 짖는 소리와
아이의 울음 소리로 끝난다

장-뤽 고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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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현재는 운영을 중단한 네이버 블로그에 썼던 메모 中 발췌한 것임] 

고다르가 영화사라기보다는 과학사의 영역 내에 자신을 위치지으려 하는 시도는 꽤 집요한 데가 있다. 예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고다르 특별전 소개차 <씨네 21>에 기고한 짧은 글에서 나는 이미 이런 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   

"이미지의 정치학이라고 할 만한 고다르의 이 같은 사유와 더불어 우리 또한 답변이 없는 물음들만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깊은 숙고로 즐겁게 빠져들곤 하는데, 그 과정에서 종종 간과되곤 하는 것이 과학에 관한 고다르의 견해이다. 비평가이자 영화감독으로서의 고다르가 ‘발견’과 ‘발명’의 수사학을 종종 끌어대는 것도 영화(와 스스로)를 예술사뿐 아니라 과학사의 한 부분에 위치시키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는 뤼미에르 스스로가 “미래가 없는 발명품”이라 진술했던 영화의 과학적 기원을 잊지 않는다. 또한 영화와 정치의 몽타주를 근심하는 동시에 영화와 과학, 과학과 정치의 몽타주에 대한 사유를 병행한다. 물론 여기서 고다르가 자신을 위치시키는 곳은 언제나 영화이며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정치와 과학은 ‘여기’(here)의 영화가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다른 곳’(elsewhere)으로서 기능한다. 즉 그는 “여기에 있는 것을 본다. 다른 곳에 있는 것을 찾기 위해.”(<탐정>) 물론 고다르는 정치학자가 아닌 만큼이나 과학자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정치학과 과학의 방법론을 영화적으로 ‘번역’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왔고 또 그러한 번역의 가능성에 대단히 민감한 시네아스트이다. 예컨대 <즐거운 지식>은 화학에서의 물질의 정성적(定性的) 분석방법을 이미지의 분석에 도입하려는 시도이다. 여기서 파트리샤란 인물은 이미지와 사운드를 “요소로 분해하고”, “환원시켜”, “치환기”를 만들고, “재배열한” 뒤에 사운드와 이미지의 올바른 모델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그런가 하면 <잘 돼 갑니까?>는 ‘비트’(bit) 개념과 정보이론의 창시자인 클로드 섀넌의 노이즈(noise) 이론의 영화적, 실천적 적용이다. 고다르는 한 인터뷰에서 “노이즈는 단순히 기술상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고 말하면서, 동시대 유럽인의 삶을 바꿔놓은 ‘사회적’ 노이즈의 실례로서 베트남전을 들었다. 또한 그는 <열정>의 인물들이 “자기장 속을 가로지르는 철심들”로 고려될 수 있으며 이 영화는 그것들의 교차에 관한 이야기이자 비전이라는 식의 괴이한(?)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과학적 방법론의 예술적 전유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괴테의 소설 『친화력』을 떠올리게도 하는 고다르의 모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그를 둘러싼 숱한 비평적 상투구들로부터 벗어나는 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

고다르와 과학 사이의 관계에 대해 흥미를 갖고 찾아보았던 글들 가운데 지금 기억나는 것은 시네마 저널 Cinema Journal(vol.41, no.2, Winter 2002)에 실렸던 케빈 J. 헤이즈(Kevin J. Hayes)의 고다르의 <잘 돼 갑니까>(1976) : 정보이론에서 유전학까지 Godard's Comment Ca Va (1976) : From Information Theory to Genetics라는 논문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인터뷰집 고다르 X 고다르에서 고다르의 과학에 대한 언급들 가운데 흥미롭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여기 옮겨 보았다. (페이지 표기는 한글번역판의 것임.)

"<결혼한 여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영화를 만들고 있었을 때, 꼭 곤충학자가 벌이나 새를 연구하는 것처럼 이 젊은 여인을 연구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만을 보고 어떤 과학법칙을 찾아내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p.49)

""과학자"라고 말하는 것은 주제넘게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과학학도가 연구실에서 작업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2~3개월 동안 무엇인가를 탐구한 것에 대한 결과일 뿐이다."(p.72~3)

"나에게 과학자와 에세이스트는 동일한 존재이다."(p.74)

"정보에 대한 일반적 관념을 정립한 클로드 섀넌이라는 미국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송신기와 통신로가 있은 다음에 송신기가 하나 더 있고 그 다음에 수신기가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통신로에서 케이블은 소음이 생기는 곳이다. 우리는 이 소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우리처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소음은 단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20년 동안 북베트남에서 나오는 소음은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p.110~111)

"예술가와 과학자는 유사합니다. 나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바라건대 과학자처럼 섞습니다. 과학적인 것의 비밀은 예술적인 것의 비밀과 같습니다. 비참(悲慘)도 서로 같습니다."(p.121)

"진정한 영화잡지가 있다면 그것은 과학자들이 하는 방식으로 상호소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그 때문에 과학이 미국 국방부에 있든, 다른 어디에 있든 그렇게 강력한 것이다. 도쿄의 과학자들은 샌프란시스코의 과학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그들은 편지를 주고받는다."(p.168)

"이미지는 법정의 증거 같은 것이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증거를 제시하는 것과 같다. 그릇된 증거를 제시한다면 그것은 검토될 수 있겠지만 말은 새로운 증거를 수립하기 위해서 이용되어야 한다.이것이 과학자가 일하는 방식이다. 나는 과학자들과 매우 가깝다고 느끼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 사물에 대한 접근방식을 구축하기 때문이다."(p.193~194) 

"영화는 사물을 보고, 식별하고, 연구하기 위하여 발명되었다. 영화는 주로 과학의 도구였다... 생명체를 상이한 방식으로 보기 위한 것이었다. 볼거리는 영화의 5에서 10퍼센트이어야 한다. 나머지 전부는 탐구와 에세이를 의미하는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연구를 위한 다큐멘터리이어야 한다. 나는 반은 소설가이고 반은 에세이스트이다."(p.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