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21

Le départ


4. RIP. Chris Marker (2012.7.30)


크리스 마르케(1921~2012)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 문득 내가 본 마르케의 마지막 영화가 어떤 것이었는지 떠올려 본다. 그가 아끼던 프랑스 감독 이실드 드 베스코(Isild Le Besco) - 배우로서 더 잘 알려져 있다 - 의 두 번째 장편 <샤를리 Charley>(2006)를 위해 만든 1분짜리 단편 <레일라의 공격 Leila Attacks>이었던 것 같다. 고양이를 위협하는 쥐(레일라)의 모습을 담은 이 트레일러 영상에서 마르케는 스스로를 "가장 유명한 미지의 영화작가"(The Best-Known Author of Unknown Movies)라고 지칭한다. 


전주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동안, 크리스 마르케에게 연락해 <디지털 삼인삼색>에 참여해 줄 것을 부탁한 적이 있다. 그는 선뜻 제안을 받아들였고 나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데 얼마 후 참여가 어렵겠다는 연락이 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그가 제안을 받아들여 <디지털 삼인삼색>에 참여했다면 그것이 그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편지 정리해 둔 것들을 찾아보니 2006년 8월 23일에 마르케에게서 받은 편지가 있다. (이 편지는 예전에 내 네이버블로그에도 올린 적이 있다.)

"친구들에게,

부디 내가 당신들의 친절한 제안을 잊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길 바랍니다. 나는 앞으로 몇 달 간 나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내겐 이미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이 빌어먹을 세상이 너무도 어처구니 없이 돌아가고 있어서 새로운 작품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던 것 뿐입니다. 단지 예산문제 때문만은 아니었지요. 여러분이 내게 5만 달러의 돈 대신에 차라리 5만 분의 시간을 더 줄 수 있다면 혹시 또 모르겠지만... 지금 내게 가장 시급한 일은 이 세상에서 그리고 (특히) 저 세상에서 일어날 일에 대비해 준비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한데 묶어보려 하고 있는 서로 다른 몇 개의 프로젝트들 때문에 새로운 작업에 착수하는 것은 무리이기도 하고요. 고양이들은 아홉 개의 목숨을 가지고 있다고들 말하지요. 하지만 그건 충분치 않아요. 최소한 열 두 개의 목숨은 있어야 할 텐데.

여러분의 2007년 영화제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크리스"  

3. 또 하나의 편지 (2012.7.30)


뒤늦게 내 해임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내 온 이들 가운데 존 지안비토 감독(<페르난다 후세인의 미친 노래>, <이윤동기와 속삭이는 바람>, <비행운> 등 연출)이 있다. 지안비토 자신도 예전에 하버드필름아카이브의 관장으로 재직하다 해임된 경험이 있어서인지, 동병상련의 마음이 담긴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 말미엔 그가 해임되었을 당시 고(故) 아모스 포겔(지난 4월에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에게서 받은 편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우리의 삶의 길은 평탄하지도 않고, 곧고 똑바로 나 있는 것도 아니라네. 언제라도 뒤바뀔 수 있는 거지. 나 또한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적지 않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네. 하지만 난 자네에게 싸움을 포기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바이네. 삶은 우리를 위해 수많은 놀라운 것들을 예비하고 있다네. 잊지 말게나. 자네나 나처럼 미친 인간들은, 영화를 만들면서 큐레이터로, 작가로, 교육자로 동시에 활동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게다가 파트너를 위한 시간과 기회도 가질 수 있지 않은가. 홀로 있는 것보다 함께 있는 것이 낫지. 내게 마르샤가 없었다면 난 지금껏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을 거야. 사랑, 섹스, 동지애 그리고 우정은 삶을 이루는 필수불가결한 것들이지. 10년의 세월이 또 지나고 나면, 그때 자네는 스스로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게 될 걸세. 나는 확신하는 바이네."

2. <인문예술잡지 F> 제6호 발간 (2012.7.30)


<인문예술잡지 F> 여름호(제6호)가 발간되었다. 이번 호 특집은 '예술가의 프로그램'이라는 주제로 꾸며졌다. 새로 편집위원에 합류하게 되신 조효원 선생이 특집기획을 맡았다. "<인문예술잡지 F> 6호의 특집, '예술가의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출발했다. 예술적 상상력과 인문적 상상력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먼저 연극, 무용, 음악, 미술에서 주목받는 예술가 4명에게 앞으로 어떤 프로그램으로 작업을 해 나갈 것인지를 물었다. 그들의 글을 다양한 분야에서 공부하고 글을 쓰는 8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만화가, 소설가, 음악가, 시인, 큐레이터, 문학평론가, 학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주어진 예술가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경우도 있고 잘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노린 것은 예술가들의 상상력이 글을 쓰는 사람들을 자극해서 새로운 상상을 펼치도록 하는 것이었으니까." 아래는 이번 호의 목차. 

특집 : 예술가의 프로그램

미디어아티스트 장재호의 프로그램 (장재호)
조용하고 요란한 축제, 태싯 그룹과 장재호 (김태권)
도약 (정소연)

연극연출가 윤한솔의 프로그램 (윤한솔)
세 가지 불가능성 : 윤한솔과 그린피그에 반(反)하여 (조효원)
동시대인과 퍼즐 조각들 : 윤한솔의 글에 부쳐 (오은)

개념미술가 김소라의 프로그램 : Future Plan (김소라)
픽션들 : 김소라 작가의 '미래의 계획'에 의거한 단상 (김해주)
유리 역과 나무 놀이터 : 김소라의 <실패 프로젝트>에 겹쳐 놓은 두 장면 (윤경희)

안무가 정영두의 프로그램 : 무용의 나, 나의 무용 (정영두)
무용과 음악을 위한 '시대착오적' 형이상학 시론 (최정우)
움직임의 예술, 우리들의 무용 (김지윤)

CRITIC

[다원예술비평] 일본에서 본 한국의 다원예술 (이승효)
[정신분석과 예술] 어떤 위험한 방법에 관하여 : 크로넨버그의 <데인저러스 메소드> (맹정현)
[영화비평] 페이지를 넘겨라 : 미장센에서 디스포지티프로 (1) (에이드리언 마틴 / 유운성 역)

1. 출발 (2012.7.21)


Regency, San Francisco (Hiroshi Sugimoto, 1992)


스티븐 소더버그의 <헤이와이어 Haywire>(2011)나 프랑수아 트뤼포의 <나처럼 예쁜 여자 A Gorgeous Girl Like Me>(1972)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감정이 북받치는 요즘이다. 어떤 영화를 봐도 지난 한 달 반 동안 개인적으로 겪은 일들이 기이하게 중첩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이 트뤼포 영화의 후반부 반전조차, 예전에 본 터라 이미 알고 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게는 정말이지 '리얼'하게 다가온다. 지난 열흘 동안, 문득 울화가 치밀 때마다 거듭 바라보곤 했던 스기모토 히로시의 사진 한 장. 이상하게도 이 사진을 한참 보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곤 했다. 아니, 그런 느낌이 들곤 했다고 말해야 옳겠다. 이 한 장의 사진에는 한 편의 장편영화가 상영될 동안의 시간이, 무인(無人)의 공간에 각인된 익명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바로 저 백색의 스크린에 그 익명의 기억이 물화되어 있는 것이다. (스기모토 히로시는 한 편의 장편영화가 상영될 동안 사진을 고스란히 노출된 채로 둠으로써 위와 같은 결과를 얻어냈다.) 한편으론 이 사진을 바라보면서 <인문예술잡지 F>에 연재하다 잠시 중단한 글("뤼미에르 은하의 가장자리에서")의 두 번째 장을 위해 메모해 두었던 하나의 아이디어를 계속 떠올리곤 했다. 영화적 이미지는 그것이 사진적 이미지의 연속이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로 인해 중대한 패러독스에 빠지게 된다는 점을, 그리고 영화비평/이론사의 각종 도그마(예컨대 리얼리즘, 브레히트적 모더니즘, 기 드보르의 상황주의 시네마, 포스트모더니즘 등)는 이러한 패러독스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었다는 점을,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기초적인 논의들을 빌려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 스기모토의 사진과 더불어 내게 위안을 주는 또 하나는, 크라이테리온에서 출시된 홀리스 프램튼(Hollis Frampton) 블루레이에 담긴 작품들을 (라이프니츠를 읽으며) 틈틈히 다시 보는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부천영화제에 다녀오려 한다. 최근 <발할라 라이징 Valhalla Rising>(2009)과 <드라이브 Drive>(2011)를 보면서 관심을 갖게 된 니콜라스 윈딩 레픈(Nicholas Winding Refn)의 초기영화들을 영화관에서 다시 보고 싶다. 다음 주에는 또 하나의 반가운 특별전이 마련되어 있는데, 바로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www.nemaf.net)에서 마련한 존 토레스(John Torres) 전작전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작전이라고는 할 수 없고 장편전작과 주요단편 대부분이 상영될 예정이다.) 필리핀에서 미완성버전으로 공개되어 이미 몇몇 평자들에게서 좋은 평가를 얻은 신작 <마팡아킷 Mapang-Akit>(2011)도 국내 첫 공개될 예정이다. 7월 27일(금) 오후 8시에는 존 토레스 감독의 마스터클래스가 마련되어 있고 나는 패널로 참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