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08

출항을 앞둔 방주의 주인에게 보내는 편지 :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1982/2015)


※ 아래 글은 계간 『인문예술잡지 F』 제21호(2016년 6월 30일 발행)에 기고한 글이다.



오랜 준비 끝에, 당신이 출항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작년 봄이었습니다. 건강 문제로 부득이 당신의 포르투 자택 근처에서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 <벨렘의 노인 The Old Man of Belem>(2014)을 보고 나서 마음이 어지러웠던 무렵이지요. 그러니까 당신의 출항 소식은 갑작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조금씩 비축해 둔 체념을 한숨과 함께 토해내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애도의 물결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영화잡지 두 군데에서 당신의 출항에 관한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이 왔을 때도 주저 없이 거절했지요. 그저 조용히 책상에 앉아, 두 해 전 포르투를 방문했을 때 보았던, 도우루강이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곳에 자리한 저 작은 등대를 홀로 떠올려 보았을 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숙소의 창문을 열었을 때 그 등대가 앞에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당신의 데뷔작 <도우루강의 노동자들 Labor on the Douro River>(1931)에서 한 도시의 삶의 주기를 알리는 지표로 처음 등장했던 그 등대를 말입니다. <포르투에서의 어린 시절 Porto of My Childhood>(2001)에서, 우리는 성마른 시대에 가냘프게 숨 쉬는 문명의 육신으로 화한 그 등대와 다시 조우했었지요. 




문득,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이는 그것을 떠올린 이로 하여금 돌연 부도덕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당신의 출항 소식을 듣고 저와 동일한 이유로 자괴감에 빠져든 이가 적지 않으리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되 그것에 대해 언급하는 일만은 삼가 왔던 저 봉인된 기록을 마침내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는 사실에 흥분하면서, 한편으론 봉인의 해제가 당신의 출항을 조건으로 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에 차마 기대하지는 못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수줍은 탐욕의 눈빛을 교환하던 배덕자들을 저는 알고 있으며 저 또한 그 무리 가운데 하나임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의 나이 일흔 셋이었던 1981년에 만들었지만 당신이 출항을 결심한 이후에만 공개할 수 있다고 못 박았던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 Visit, or Memories and Confessions>이 아니었다면, 이런 불편한 상황을 감내할 이유는 전혀 없었을 겁니다. 

이것은 당신이 카메라로 쓴 유언장일 거라고 추측해 온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엔 어떤 유언도 없다는 것을, 포르투갈토비스(Tobis Portuguesa) 사(社) 스튜디오의 세트장을 배경으로 당신이 “픽션이란 영화의 진정한 현실”이라 읊조릴 때 이미 당신은 방주의 제작에 착수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1942년부터 당신의 가족이 거주해 왔으나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을 촬영할 무렵에는 빚을 갚기 위해 경매에 넘겨야 했던, 건축가 주제 포르투가 설계한 저택을 영화적 픽션으로 건조(建造)하는 작업을 통해 그 방주를 완성하려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영화에 등장하는 보이지 않는 방문객의 말처럼, 이 저택 자체가, 그리고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방주에요. 다만 그 방주에 실을 또 다른 방주들—픽션들을 건조하기 위해, 당신은 삼십사 년을 기다려 온 것이었어요. 그것들이 채 준비되기도 전에 방주를 둘러보는 일은 결코 허락될 수 없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고도 이를 심술궂게 창고에 유폐시켜 버린 괴벽의 인간이라는 비난 따위는 무시해도 좋은 것이지요.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에는 두 명의 방문객이 등장합니다. 한 명은 여성이고 다른 한 명은 남성이지요. 영화 말미에 어둠 속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그림자 같은 형체를 제외하고는 당신은 우리에게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아직 당신의 시간에 속하지 않는 이들이기 때문이겠지요. 여자가 저택 내부의 기둥에 대해 말할 때, 남자는 그것은 기둥이 아니라 돛대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배의 돛대야. 그것은 인간을 그의 내밀한 존재에, 그의 수평선에 연결시키지. 보라고, 이 집은 하나의 배야. 베란다와 테라스는 다리와 갑판이지. 하얀 객실들이 통로를 따라 늘어서 있어. 저 아래 가지달린 촛대 같은 소나무가 바다를 나타내지. 오월이면 거기서 뜰 수 있는 잔디의 만(灣)이 빛나고 있어.” 그런가 하면 집안 곳곳에 비치되어 있는 선박 모형들은 당신이 오래도록 신중하고 용의주도하게 방주의 건조를 준비해 왔음을 일러줍니다. 

이제야 많은 것들이 비교적 환히 보입니다. 그래요, 당신은 마치 우연처럼 가장해 모든 것을 준비해 왔던 거였어요. 포르투갈토비스가 설립된 것은 당신이 첫 영화를 선보이고 나서 일 년 뒤인 1932년이었고, 이듬해 이 스튜디오는 포르투갈에서 제작된 최초의 유성영화이자 당신이 배우로 출연한 <리스본의 노래 A Song of Lisbon>를 내놓았지요. 당신이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 이후 발표한 첫 영화이자 세 번째 장편인 <베닐드 혹은 성모 Benilde or the Virgin Mother>(1975)를 비롯해, 방주 계획을 처음으로 공공연히 드러낸 일곱 시간짜리 대작 <비단구두 The Satin Slipper>(1985)를 촬영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지요. 이 스튜디오는 당신의 마지막 장편영화 <제보와 그림자 Gebo and the Shadow>가 발표된 2012년에 문을 닫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에서 당신이 보여주는 삼십여 년 전의 포르투갈토비스 스튜디오는 이미 온갖 삭구(索具)로 가득한 방주처럼 보였어요. 




그뿐이 아닙니다. 당신이 주제 포르투가 설계한 저택으로 이사한 것은 첫 장편영화인 <아니키 보보 Aniki-Bobo>가 개봉한 1942년이었고, 이 저택이 경매에 넘어간 1981년은 <봄의 제전 Acto da Primavera>(1963) 이후 오랜 휴지기 끝에 장편영화 작업으로 복귀한 당신이 <과거와 현재 Past and Present>(1971)에서 시작된 ‘좌절된 사랑의 사부작’을 마감하는 <프란시스카 Francisca>를 발표한 해이기도 했지요. 비로소 저택을 방주—픽션으로, 진정한 현실로 전화시킬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당신은 그 방주—픽션에 실을 또 다른 방주들—픽션들을 건조하기 위해 새로운 동료들을 찾아 나섰어요.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에서 방문객들의 대화를 쓰기도 한 소설가 아구스티나 베사루이스와 <프란시스카>에서 <제5제국 The Fifth Empire: Yesterday as Today>(2004)까지 줄곧 당신과 함께 한 프로듀서 파울로 브랑쿠가 바로 그들이지요. 

방주의 출항을 결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무리되어야 하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때로 당신은 이것이야말로 가장 어렵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당신이 해결책을 모색하는 동안, 영화인들 몇몇은 그들 나름의 방주 계획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페데리코 펠리니는 당신이 <비단구두>를 발표하기에 앞서 <그리고 항해는 계속된다 And the Ship Sails on>(1983)를 발표했고, 알렉산드르 소쿠로프는 어쩐지 생기 없어 보이는 <러시아 방주 The Russian Ark>(2002)에 서둘러 몸을 싣고 떠났으며, <필름 소셜리즘 Film Socialisme>(2010)의 장-뤽 고다르는 소쿠로프 식의 ‘디지털 방주’를 미심쩍게 바라보면서 그것의 좌초와 표류를 증언하는 데서 자신의 자리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픽션이란 영화의 진정한 현실”이라는 당신의 주장에 호응하는 “상상력이 없는 이들은 현실로 도피한다.”는 문장으로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2014)을 시작하고 있는 고다르는, 한편으론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델로리에의 말(“그래, 그때가 우리가 누린 최고의 시간이었어.”) 속에서 당대와 불화하는 반어를 찾습니다. 이런 와중에, 아직은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이 공개되기 전이었던 터라, 우리는 <아니오, 혹은 지배의 공허한 영광 No, or the Vain Glory of Command>(1990)과 <토킹 픽처 A Talking Picture>(2003)가 보여주는 몰락과 재앙과 파국의 픽션이 당신의 방주에 실릴 작은 방주들이 아니라 방주 자체라고 성급히 믿어버리는 우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당신의 방주는 대립물과 부정성마저도 모두 포괄해 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검과 대지, 남성과 여성, 사랑과 소유, 권력과 좌절”을 차례로 언급하는 당신의 말을 직접 듣기 전까지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시아인인 제가 방주와 문명을 연결하는 서구적 사고를 납득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타이타닉>(1997)이나 <인터스텔라>(2014) 등의 영화를 보면 미국인들도 그다지 잘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 같으니 차라리 유럽적 사고라고 부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을 마무리하면서 당신이 다음과 같이 토로할 때 다소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것은? “영토상으로 볼 때, 포르투갈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도 마치 우리에게 책임이 주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세계의 운명을 간파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왜인가?”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당신이 세계의 운명을 당신의 집의 운명과 나란히 놓으면서, 영화를 통한 세계와 집의 동시적 방주화—픽션화에서 묵시록적 구원의 비전을 가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야 당신이 미셸 피콜리의 입을 빌려 ‘나는 집으로 간다’(I'm Going Home)고 말했던 바의 뜻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은 부인이 아니라 긍정이었어요. 거처 없이 배회하는 형상들(페드로 코스타의 형상들, 홍상수의 형상들, 차이밍량의 형상들, 리산드로 알론소의 형상들 등등)이야말로 오늘날 영화의 픽션이라면,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의 당신은 집이라는 것을 영화가 자신의 픽션으로 삼을 수 있었던 시대를 증언하는 형상인 것이지요. 오월의 해변가에서 당신의 이 영화가 공개되고 나서 몇 달 후, 스위스 소도시의 호반에서는 샹탈 애커만의 <노 홈 무비 No Home Movie>(2015)가 상영되었어요. ‘집이 없는 영화’의 시대가 열리던 때에 경력을 시작했던 그녀는, 이런저런 영화에서 거듭 집으로 돌아가려 시도하면서도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I Don't Belong Anywhere)라며 짐짓 호기를 부렸던 오늘날의 감독이지요. 당신이 방주를 타고 바다를 가로지를 때 고물에서 내려다보면 그녀가 구명보트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 방주의 출항을 결심하기 위해 마무리해야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잊고 있었네요. 그건 당신으로 하여금 사진적 이미지란 비단 환영이 아니라 극도의 현실이라는 점을 깨닫게 만든 한 사건을 영화화하는 것이었어요. 사진 속 죽은 여인의 미소에 매혹되어 그녀에게 한없이 빠져들게 되는 이삭이라는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앙젤리카의 이상한 사례 The Strange Case of Angelica>(2010)가 바로 그 영화이지요. 당신의 방주—픽션에 실을 이 마지막 방주—픽션을 마련하기까지 무려 반세기가 걸렸습니다.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에서 당신은 당신 자신과 아내를 제외하고는 —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림자 같은 형체로 잠깐 모습을 보일 뿐인 방문객들을 제외하고는 — 그 누구도 카메라 앞에 세우지 않았습니다. 대신 당신과 아내의 가족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하나하나 가리키거나 그들을 촬영한 오래된 필름들을 영사기에 돌려가며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지요. 사진적인 것에 대한 이 강고한 믿음은 바로 저 앙젤리카에게서 기원한 것일 터지요. 이 믿음은 더 이상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저는 당신의 믿음을 존중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통해 당신은 스스로가 속해 있던 시대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증언자로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신은 사진적 이미지에 생을 부여하는 것은 기억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나는 나의 부모님, 나의 아내, 나의 아이들을 기억한다. 시간은 흐르고 미래는 언젠가 과거가 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기억한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미미하기 짝이 없는 나의 존재… 그리고 나는 사라진다.” 스스로를 기억하는 기억, 영화라고 부르는 것.   
        
저는 당신이 방주에 오르기 전에 딱 한 번 당신을 만났습니다. 저는 당신 앞에 서 있었지만 차마 말을 건넬 엄두는 내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친구였던 작가 주제 레지우의 시로 작업한 두 편의 시네포엠 단편 <빌라두콘드 이야기 Romance de Vila do Conde>와 <색유리창과 죽은 성녀 O Vitral e a Santa Morta>가 상영되었던 2008년 베니스영화제에서였습니다. 1965년에 촬영해 둔 것이었지만 뒤늦게 완성한 것이었지요. 그래요, 당신은 미래가 언젠가 과거가 될 것임을 항상 염두에 두며 작업하는 영화감독이었습니다. 동시에 과거를 언젠가 도래할 미래로 밀어 넣곤 했지요.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을 보고 나서 오래도록 귓가에 감도는 것은 그 오래된 필름 릴들이, 아직 펼쳐지지 않은 과거가 영사기에 감겨 맹렬히 돌아가는 소리입니다. 이미 출항한 당신이 아니라 출항을 앞둔 당신에게 이 편지를 띄우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Sleep Furiously!

2016년 6월 9일

※ 추신: 두 해 전 포르투의 그 작은 등대를 찾았을 때, 등대 입구의 빨간 문에는 누군가 붙여 놓고 간 스티커가 한 장 붙어 있었습니다. 출항을 준비하시기 전에 이 귀여운 야만의 표식을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2016-02-20

샹탈 아커만의 <노 홈 무비 No Home Movie>(2015)


※ 아래 올리는 두 편의 글 가운데 첫 번째 글([1])은 계간 『문학과 사회』 2015년 겨울호(2015년 11월 27일 발행)에 기고한 「밀수꾼의 노래 ― 「영화 비평의 '장소'에 관하여」 이후, 다시 움직이는 비평을 위한 몽타주」 중에서 <노 홈 무비>에 관한 부분만을 발췌한 것이고, 두 번째 글([2])은 「2016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카탈로그용으로 쓴 것이다. 



집이 없는 영화
No Home Movie

[1]

[...] 지난 10월 5일, 벨기에 출신의 영화감독 샹탈 아커만이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은 같은 달 1일부터 10일까지 열린 부산영화제 기간에 전해졌지만, 올해 부산의 숱한 상영작 가운데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작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집이 없는 영화 No Home Movie>(물론 ‘홈 무비 아님’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라는 이 작품은 그녀가 죽기 두 달 전, 홍상수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로 황금표범상을 받은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상영되었다. 부산에서 돌아온 바로 그날 밤, 나는 이 영화를 페스티벌스코프(www.festivalscope.com) 사이트를 통해 보았다. 이것은 전 세계 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들의 배급사나 제작사와 정식 계약을 맺은 후 연간 가입비를 받고 영화전문가들에게 주문형 비디오(VOD)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이트다. 영화수입업자들이나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국내 관객들에게 보여주기를 거부하거나, 무시했거나, 간과한 영화들을 아쉬운 대로나마 그때그때 가정용 HD 모니터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사이트 덕택이다. 편리하긴 하지만 되감기가 불가능하고 딱 한 번 밖에 볼 수 없어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영화를 봐야 하는데, 이 때문에 페스티벌스코프를 통해 영화를 보다 보면 자신은 종종 긴장을 못 이기고 졸게 된다고 내게 토로한 크리스 후지와라의 말에 공감한 적도 있다. 




<집이 없는 영화>는 아커만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인 그녀의 어머니(2014년에 세상을 떠났다)와 스카이프(Skype)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 벨기에의 집에서 두 모녀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 혹은 그들이 말없이 쉬거나 집안을 거니는 광경 등을 DV 카메라로 기록한 영상들의 모음집이다. 이런 영상들과 일견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사막의 풍경들이 난데없이 끼어들기도 하는데, 이는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아커만 자신의 휴대폰으로 찍은 것으로, 전적으로 실내에서만 머무는 이 영화가 야외로 향하는 것은 이처럼 사막을 보여줄 때나 탁한 물 위에 비친 아커만 자신의 그림자를 보여줄 때 정도다. 그 가운데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영화의 첫 번째 숏이다. 한 사막을 배경으로 화면 왼편에 자리한 나무 하나가 바람에 세차게 흔들리는 모습이 꽤 오래 지속된다. 이 숏은 거의 끝나지 않을 듯 지속되는 것이어서 바람에 나뭇잎은 다 떨어지고 나무마저도 풍화되어 이내 모두가 사막의 한 부분으로 화해 버릴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 불길함은 이 영화를 보기 한 달 전에 발표한 어느 글에서 “현대영화의 작가들이 사막의 형상으로 화면이 뒤덮인 작품을 꺼림칙한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은 그들의 미학적 모험이 정점에 달하거나 그 반대로 위기에 처한 순간인 경우가 적지 않아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이후 행보를 기대와 불안감이 섞인 마음으로 지켜보게 만든다.”라고 쓰면서 느낀 바로 그 불길함, 그리고 얼마 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안토니우 레이스의 유작 <사막의 장미 Rosa de Areia>(1989)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소름끼치게 느꼈던 그 불길함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아커만이 <집이 없는 영화>에 사막의 풍경을 왜 집어넣었는지 이유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영화를 통해서는 직접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 사막에서 촬영된 것이라는 사실을 들먹이면서 그녀의 유태계 정체성을 끌어들이려 하는 시도는 더더욱 부질없는 짓이다. 그보다는, 그녀에게 어머니‒집이 있었던 것처럼 한때 영화에겐 자신의 집이 있었고, 영화는 집을 찍거나(<잔느 딜망, 코메르스가 23번지, 1080 브뤼셀>(1975)) 그곳으로부터 온 소식을 듣거나(<집에서 온 소식>(1977)) 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녀의 어머니도, 영화의 집도, 그녀 자신도 더 이상 여기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자. 아커만이 스카이프 화면에 떠오른 어머니의 얼굴을 DV 카메라로 포착해 보여줄 때, 그것은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잔다르크의 수난>(1928)의 팔코네티의 얼굴에 비해 덜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스크린을 응시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라고들 하는 영화적 경험과 디스플레이 화면을 흘깃거리는 경험은 진정 이질적이어서 서로 교통할 수 없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아커만의 영화는, 일견 소품의 ‘일기 영화’(diary film)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영화라고 불러 왔던 집의 벽이 온통 다공성(多孔性)의 재질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은가, 혹은 벽이라 알고 있던 것이 실은 문이며 영화는 벽이라고는 없이 온통 문들로만 가득한 것은 아닌가라는 중요한 비평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 한 편의 영화에 대해 다소 길게 적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관객들로 하여금 아커만의 영화 없이 그녀의 부고만을 듣게 만들었던 부산영화제에 대한 항의의 뜻도 있다. 이것은 글쓰기에 작은 밀수를 기입하는 제스처라고 해 두자.) 이런 비평적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비단 아커만의 영화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오늘날 디지털 이미지 생산의 기제들을 총동원해 그것들을 충돌시키고 각각의 차이와 부조화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온갖 문이 한꺼번에 열릴 때의 소음을 과연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묻는 장-뤽 고다르의 3D ‘홈 무비’ <언어와의 작별>(2014)도 여기 불러올 수 있었을 것이다. [...]


[2]

스물다섯의 나이에 만든 걸작 <잔느 딜망>(1975)으로 삽시간에 당대를 대표하는 감독의 자리에 오른 샹탈 아커만은 그에 뒤이어 <집에서 온 소식>(1977)이라는 제목의, 당대 미국 구조영화의 영향이 짙게 드러나는 실험적인 에세이영화를 내놓았다. 촬영감독 바베트 망골트와 함께 16mm 카메라를 들고 뉴욕 맨해튼 이곳저곳을 누비며 촬영한 롱테이크 영상 위로, 벨기에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편지를 낭독하는 아커만 자신의 목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오는 작품이다. 편지와 영화는 그것을 쓰는/만드는 자와 읽는/보는 자 사이에 시차(時差), 즉 시간적인 거리가 존재할 때만 정당화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닮은 구석이 있다. 편지와 영화는 미래에 말을 걸고 과거를 불러오는 현재형의 에크리튀르이다. 따라서 편지와 영화라는 사이―존재는 그러한 시차가 만들어내는 간극 이외에는 머물 곳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편지와 영화의 가능성의 조건이 되는 시차가 점점 소멸되어 가는 시대 ― 텔레커뮤니케이션의 시대, 뷰파인더와 모니터와 스크린이 한 몸으로 결합되는 시대 ― 에 편지와 영화는 어떻게 (여전히) 가능한가? 작년에 돌연 세상을 떠난 아커만의 유작으로 <집에서 온 소식>의 속편이라고 해도 좋을 <노 홈 무비>를 은밀히 감싸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물음이다. 여기서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스카이프 프로그램을 통해 실시간 화상대화를 나눈다. 집으로 돌아온 아커만이 어머니와 주방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눌 때, 이들의 모습을 무심히 응시하는 DV 카메라는 의미심장하게도 삼각대가 아닌 탁자 위에 놓여 있다. 일견 단순한 ‘홈 무비’ 기록물처럼 보이는 영상들 사이로 아커만이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블랙베리 휴대폰 내장 카메라로 찍은 사막의 풍경이 이따금씩 삽입되곤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인 아커만의 어머니는 이 영화가 완성되기 전인 2014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아커만은 어머니야말로 자신의 “모든 작품의 중심”이라 할 만큼 중요한 존재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은 상투적인 헌사가 아니라 그녀에게 있어서 어머니―집은 영화를 가능케 하는 시차의 조건이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영화는 자신의 집을 잃었다(‘no home’). 그렇다면 이제 시차의 새로운 조건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물음을 남기고 아커만 또한 우리 곁을 떠났다.





2016-01-19

사막은 보이지 않는다: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4)


※ 아래 글은 계간 『인문예술잡지 F』  제18호(2015년 가을호)에 실렸던 글이다.



1. Witness Me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클라이맥스, 시타델의 지배자 임모탄의 충실한 ‘워보이’ 가운데 하나였으나 맥스 일행에게로 전향한 눅스는 임모탄의 둘째 아들 릭투스와 함께 불길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맥스 일행의 차량이 무사히 협곡을 빠져나가기 무섭게, 그는 자신이 몰던 트럭의 핸들을 급하게 돌려 일부러 차를 전복시켜 추격자들의 길을 막는다. 트럭이 전복되기 직전, 그는 멀어져가는 맥스 일행의 차량에 탄 이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결코 그들에게 가닿을 리 없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Witness Me.”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은 임모탄의 워보이들이 자살공격을 행할 때마다 동료들에게 사무치게 사력을 다해 토하던 말로, 그때마다 ‘나를 기억해 줘!’라는 애처로운 호소이거나 ‘나를 똑똑히 봐!’라는 소름끼치는 명령처럼 들렸지만, 임박한 죽음을 홀로 껴안기로 마음먹은 이 전향한 워보이와 관련해서는 전혀 다른 뜻을 품는다는 것을 말이다. 눅스와 관객인 우리를 제외하고는 등장인물 가운데 누구도 그의 말을 들을 수 없다. 그러니 이 말은 스스로가 스스로의 죽음의 증인이 되리라는 눅스의 다짐인 동시에, 이제부터 벌어질 무언가를 바라보고 그것의 증인이 되어줄 우리에게 영화가 속삭이는 주문(呪文)이기도 하다. 전자의 경우 증인은 이 픽션의 세계에서 곧 사라질 것이며 후자의 경우 증인은 그 세계 바깥에 있다. 모든 워보이들을 특성 없이 닮아 보이게 만드는 짙은 분장 탓에 스타배우로서의 니콜라스 홀트는 일찌감치 ‘지워져’ 버렸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그는 픽션의 등장인물일 뿐 아니라 스크린이라는 표면에 일시적으로 도래하는 영화의 현신(現身)이기도 한 특권적 형상으로 떠올랐다 곧바로 눈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Witness Me.’라는 말은 어떤 사건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것으로 그것이 눅스의 죽음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지만 그의 죽음과 더불어 스크린에 펼쳐지는 광경은 다소 뜻밖의 것이다. 눅스가 몰던 트럭이 전복되자 곧이어 뒤따르던 차량 한 대가 이를 들이받으며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 공중으로 흩뿌려진다. 이때까지 철저하게 ‘(사)실감’을 강화하는 방식으로만 디지털 합성과 컴퓨터 그래픽을 용의주도하게 활용해 왔던 조지 밀러가 돌연 여기서 자제심을 잃기라도 한 것일까? 디지털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처리한 것이 확연한 차량 부품들과 모래먼지가 흩날리는 가운데 눈먼 기타맨의 기타와 눅스가 몰던 차량에서 떨어져 나온 핸들이 차례로 관객의 눈앞까지 날아오는데 3D의 바로크적 돌출효과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거의 우스꽝스럽게 보일 지경이다. 다만 응당 보여야 할 사람(혹은 시체)의 모습은 어디서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순간 조지 밀러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결국 디지털화된 스크린임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다. 디지털적으로 강화된 육감(corporeality)이란 결국 픽셀에 의해 지탱되는 것으로 언제라도 스크린 이곳저곳에 특색 없이 흩어질 수 있는 불안한 것임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유사해 보일 수도 있지만, 예컨대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악당들의 머리가 버스비 버클리 풍으로 터져 나가는 광경을 보면서 느끼는 당혹감은 이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클라이맥스의 폭발 광경이 모종의 단념의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며 그 단념이 ‘Witness Me.’라며 우리에게 속삭인 어떤 영화의 사라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영화란, 다름 아닌 서부극이다. 서부극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장소인 사막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우며 2시간여를 달려온 영화가 이제 서부극은 불가능하다고 중얼거리며 픽셀들의 집합이라는 유사-사막에 제 몸을 온전히 내어주며 불타버린다. 그런데 ‘Witness Me.’라고 나직이 말하며 죽어간 눅스의 얼굴이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충만했던 것처럼, 이 불가능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것에 대한 확신을 불러들인다. 


2. So I Exist In This Wasteland

균질하다고는 할 수 없는 작은 모래알갱이들이 사방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사막의 표면은 흡사 필름 자체를 보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이 경이로운 유사성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초당 18프레임의 16mm 무성영화 작업을 고수하고 있는 너새니얼 도어스키가 <알라야>에서 가장 집요하고도 아름답게 드러내 보인 바 있다. 이 영화는 사막 자체 혹은 그것을 이루는 모래알갱이들을 찍은 숏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필름이라고 하는 물질의 물성을 탐구하는 것을 과제로 삼은 실험영화들은 적지 않지만 그 가운데 <알라야>가 예외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성취해 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물리적이거나 화학적인 방식으로 감광유제를 변형 내지는 손상시키는 식으로 필름 자체에 손대지 않으면서 그저 사막을 주의 깊게 찍는 것만으로 필름의 감촉을 시각화한다는 그 공감각적 아이디어 때문이다.  

사막이 서부극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라는 생각은 사실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해를 피하려면 영화에서 사막의 징후적 기능에 눈을 돌려야 한다. 사막이란 영화가 변용되거나 위태로워지는 순간(마다) 출현하는 불길한 비(非)형상이다. 도어스키의 작품이 보여 주듯 사막은 그 자체로는 필름이라고 하는 취약한 표면에 지나치게 가까울 뿐 아니라 그것이 화면에 범람할 때면 그 압도적 존재감으로 인해 불현듯 영화의 디제시스를 증발시켜버리곤 하는데 지평선을 경계로 그것과 맞닿아 있는 하늘만이 사막은 이야기를 위한 장소이기도 하다는 점을 간신히 암시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신중한 작가라면 섣불리 사막의 마력에 빠져드는 법이 없다. 자크 페이데의 <아틀란티스>와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같은 영화들, 그리고 쉬린 네샤트나 빌 비올라 등 동시대 영상작가들의 몇몇 비디오 작업은 사막의 마력에 걸려들어 옴짝달싹 못하게 된 이미지 자체를 미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도착적이기 짝이 없다. 반면 <탐욕>의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은 리얼리즘적 세부로 넘쳐나는 이 영화 자체와 탐욕으로 휘청거리는 등장인물들을 한꺼번에 무차별적으로 삼켜버리는 사막의 출현을 어떻게든 지연시키려 든다. 상영시간이 9시간에 달했다고 전해지는, 하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이 영화의 오리지널 버전에서 마침내 사막이 등장하는 순간의 충격은 우리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가 하면 현대영화의 작가들이 사막의 형상으로 화면이 뒤덮인 작품을 꺼림칙한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은 그들의 미학적 모험이 정점에 달하거나 그 반대로 위기에 처한 순간인 경우가 적지 않아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이후 행보를 기대와 불안감이 섞인 마음으로 지켜보게 만든다. <자브리스키 포인트>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데스 밸리로 향할 때, <파리, 텍사스>의 빔 벤더스가 빅 벤드로 향할 때, <마지막 사랑>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사하라 사막으로 향할 때, <동사서독>의 왕가위가 고비 사막으로 향할 때, <믹의 지름길>의 켈리 리처드가 오리건 트레일을 가로지를 때, 데뷔작 <리노의 도박사> 이후 줄곧 서부 지역에서 맴돌면서도 단 한 번도 서부극을 찍은 적 없는 폴 토머스 앤더슨이 <마스터>에서 동부를 유람하던 그의 인물들을 돌연 애리조나 사막으로 데려갈 때, 그리고 <제리>의 구스 반 산트와 <도원경>의 리산드로 알론소가 지리학을 무시하면서까지 비현실의 황무지로 인물들을 데려갈 때처럼 말이다. 

전형이란 것이 있을 리 없는 서부극의 전형을 확립한 작가로 (잘못) 알려져 온 존 포드에게 있어서 모뉴먼트 밸리는 사막의 사막성을 강조하는 것이면서 가까스로 사막에 저항해 버티고 선 형상으로서 영화의 희미한 가능성의 표식이 된다. 따라서 그의 영화에 사막이라는 비형상이 범람할 때는 <3인의 대부>처럼 믿음과 결부된 성서적 모티브(3인의 동방박사 이야기, 뉴 예루살렘이라는 지명 등)를 과잉하지 않고는 버텨낼 수 없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 ‘약속의 땅’이라 부르는 유타 주의 산후안 밸리로 향하는 몰몬교도들의 여정을 그린 <웨건 마스터> 역시 마찬가지다.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한없는 존중을 표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동일성을 해체하고 산란시키는 데 기여한 할리우드의 대가들은 <리오 브라보>의 하워드 혹스처럼 사막을 서부극의 공간에서 주의 깊게 밀어내기 위한 서사를 고안하거나 “사막은 미국 서부의 일부를 보여줄 뿐”이며 “산들, 폭포들, 숲이 울창한 지역들, 눈 덮인 산꼭대기 등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 <벌거벗은 박차>의 안소니 만처럼 사막이야말로 서부극의 주 무대라는 관념에 이의를 표하기도 했다. 그 스스로 ‘안티-웨스턴’이라 부른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에서 로버트 알트만은 눈 속에 파묻혀 죽어가는 주인공을 보여줌으로써 서부극에 종언을 고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사막의 은폐가 서부극을 사로잡는 강박이라는 점을 서툴게 고백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방식으로 1990년대에 새삼 우리의 눈길을 서부극으로 돌려놓은 두 편의 미국영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와 짐 자무시의 <데드 맨>에서 사막은 어둠 저편으로 조심스레 물러나 있다.  

사실 서부극의 전형이나 그것의 주 무대로서의 사막이라는 관념은 풍경 없는 풍경으로서의 사막이 범람하는 가운데 감히 희희낙락하는 인물들을 어떻게든 용인할 수 있었던 이들에 의해 사후적으로 성립된 것으로, 스파게티 웨스턴이라 불리기도 한 이탈리아제 서부극, <황야의 7인>의 예기치 않은 성공이 혁명국가의 청소년들에게 미칠 악영향에 고심하던 소비에트의 관료들에 의해 추진된 ‘레드 웨스턴’, <스타워즈> 시리즈나 <백 투 더 퓨처 3> 그리고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와 같은 공상과학물, 그리고 한국에서라면 1960년에서 1970년대 초에 걸쳐 제작된 이른바 ‘만주 웨스턴’의 계보를 이은 김지운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같은 영화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멜 깁슨 주연의 <매드 맥스> 3부작, 특히 2편에 해당하는 <로드 워리어>가 사막을 전면화하며 그처럼 사후적으로 서부극을 명명한 영화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기원으로 간주되는 것들에는 전형이 (있을 수) 없고, 변형으로 간주되는 것들이 전형과 더불어 기원(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주제 이전에 변주가 있는 것처럼. 서부극에서의 ‘서부’란 미국의 서부여도 좋고 아니어도 무방한 어떤 영화적 비(非)장소의 환유라면, 그러한 비장소조차도 기어이 가시적인 것으로 환원시키지 않고는 그것의 이름을 부르거나 자신의 소재로 삼지 못하는 취약한 예술인 영화가 마지못해 끌어들인 비형상의 형상이 바로 사막이다. 말하자면 사막이란 서부극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서부극이 솟아난 텅 빈 바탕의 징후이며, 스크린상의 사막의 범람은 오히려 서부극을 나아가 영화를 위기에 몰아넣는 것이다. 그것은 사막을 길들이고 은폐하는 기예이자 기능으로서의 서부극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바로 사막이야말로 영화의 자리라고, 적어도 지금부터는 거기야말로 영화의 자리라고, 무엇보다 서부극과 관련해서는 거기를 최소화하거나 감추거나 밀어내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것을 성립시킬 수 없다고,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속삭인다. 그리고 불타버린다.


3. Some Kind of Redemption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는 두 개의 사막이 시종일관 충돌하고 있다. 하나는 영화의 촬영지인 아프리카의 나미브 사막으로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하나는 픽셀들의 집합으로서의 유사-사막, 즉 디지털 스크린이다. 전자는 지독하게 과시적(誇示的)이고 후자는 교묘하게 과시적(寡示的)이다. 

디지털 특수효과를 만끽하며 짐짓 흥청거리는 것처럼 보였던 <해피 피트> 시리즈에서 짓궂게도 픽셀의 유사-사막을 얼음으로 가득 채웠던 조지 밀러는 이번에는 작심이라도 한 듯 사막이라는 저 위험한 비형상으로 (다시) 향한다. 그런데 멜 깁슨 주연의 <매드 맥스> 3부작 이후(3편은 1985년에 개봉되었다) 오랜만에 실제의 사막으로 귀환하면서, 그는 사막 자체가 아니라 더 이상 사막의 감촉과 아무런 유사성도 없는 디지털의 표면, 이 유사-사막을 단호하게 자신의 영화의 가상적 토대로 삼고 있다. 디지털 스크린은 한때 영화에서 사막이 떠맡았던 역할, 비형상의 형상이자 텅 빈 바탕의 징후라고 하는 그것을 픽셀의 유사-사막에 ‘논리적’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이때 실제의 사막, 나미브 사막의 범람은 유사-사막에 솟아오른 모뉴먼트 밸리와 같은 것이면서 그 유사-사막에 ‘형상적’으로 정착되어 과시적(寡示的)인 것의 사막성을 과시적(誇示的)으로 들뜨게 하기 위한 것이 된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사막과 마침내 들뜬 유사-사막 간의 대결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은 CG로 만들어낸 거대한 모래폭풍 속으로 맥스 일행과 그들을 뒤쫓는 임모탄의 워보이들이 진입하기 직전의 광경을 묘사한 익스트림 롱숏(사진 1)일 것이다. 이 광경은 이 영화가 사막이라는 물리적 비장소가 아니라 디지털의 표면이라는 논리적 비장소에서 펼쳐지는 형상의 서부극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진 1] 모래폭풍 속으로 진입하는 맥스 일행과 임모탄의 전사들


결국 디지털 편집 프로그램의 타임라인에 올라 변형되고 말 SF영화의 ‘소스영상’을 위해 35mm 필름 촬영을 고집하는 <인터스텔라>의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쓸데없는 허식과 낭비가 조지 밀러에게는 없다. 디지털 영화제작이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는 영화사(史)에서 ‘억압된 것의 귀환’을 가능케 했다는 『뉴미디어의 언어』의 마노비치적 명제를 기꺼이 수용하면서도 전기안구도기록법(EOG:electro-oculography)으로 보완한 정교한 모션캡처로 영화이미지에 어떻게든 지표성(좌표계에서 상대적 위치와 운동의 지표성)을 부여하려 한 <베오울프>의 로버트 저메키스처럼 소심하지도 않다. 조지 밀러가 본격적으로 컴퓨터그래픽을 수용하면서 그동안 왜 인간이 아닌 돼지와 펭귄 같은 동물을 그 주인공으로 삼았을지 생각해 보라. 혹시 그것은 디지털에 자신의 영화를 의탁하면서 놀란 식의 노스탤지어도 저메키스 식의 멜랑콜리아도 거부하겠다고 마음먹은 강한 냉소주의자의 유머는 아니었을까?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CG를 최소화하며 이른바 ‘아날로그 액션’의 진수를 보여준 영화로 회자되기도 했다. 그런 진술은 이른바 ‘아날로그적인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멜랑콜리아가 아드레날린 과잉의 폭력으로 분출해 버리고 만 <옹박>이나 <레이드> 시리즈와 이 영화의 차이를 간과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미 꽤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이 영화는 실사 촬영한 소스영상을 용의주도하게 디지털의 표면에서 합성해내는 작업을 통해 제작되었고, 앤드류 잭슨이 이끈 시각효과 팀이 주조해낸 숏은 2000개가 넘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액션을 실제로 찍었다는 사실 자체라기보다는 그렇게 찍은 것을 디지털의 표면에 배치해 합성하고 조작함으로써 디지털 육감의 강화를 노렸다는 점이다. 디지털 영화제작에서 기술적인 상식이 된 원리, 몽타주는 숏과 숏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숏 내부에서도 이루어진다는 원리를 명심하면서 말이다. 여기서는 ‘리얼’의 ‘리얼리티’가 아니라 ‘버추얼’의 ‘(코포)리얼리티’(이것을 흔히 가상현실이라 부르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가 문제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이제는 더 이상 그 뜻을 판별하기 힘든 ‘과시적인 사막’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실사’는 디지털의 표면을 통해 영화로 귀환하지만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다. 한쪽 팔이 없는/지워진 퓨리오사/테론이 심하게 부상을 입은 채로 시타델로, 저 손상된 자들의 요새로 돌아가는 것처럼.   

녹색의 땅으로 향하던 맥스와 퓨리오사는 다른 이들이 잠든 사이 대화를 나눈다. 퓨리오사는 임모탄의 여자들이 “희망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럼 당신은 무엇을 찾느냐는 맥스의 물음에 그녀는 “redemption”이라고 짧게 답변한다. 이는 개봉 당시 한국어로 ‘구원’이라 번역되었다. 문맥을 고려할 때 적절한 번역이지만 나는 이 말의 의미를 보다 확산시키고 싶다. 디지털의 표면에서 이루어지는 ‘버추얼’의 ‘(코포)리얼리티’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이 말을 듣고 있노라면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영화의 이론』의 부제이자 이 책의 핵심적 논제가 되고 있는 ‘redemption of physical reality’라는 표현이 머릿속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 희망이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것 혹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이들의 정념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면 ‘redemption’의 추구란 손상된 조각들을 매만지면서 거기 결여된 것을 기억의 강렬함으로 버텨내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의 의지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녹색의 땅으로 향하는 퓨리오사는 ‘redemption’에 대해 말하면서 실은 희망을 좇는 이들과 같은 정념을 품고 있다. 방향을 돌려놓는 것은 맥스로 그는 녹색의 땅 또한 황폐해졌음을 알게 된 이후 이번엔 오토바이를 타고 사막을 가로질러 다른 녹색의 땅을 찾아가려는 중인 일행을 막아서며 시타델로 돌아갈 것을 제안한다. 그는 ‘redemption’이 도망쳐 나온 곳으로의 귀환(re-)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그 귀환이 반드시 ‘redemption’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란 점 또한 솔직히 고백한다. “we might be able to... together... come across some kind of redemption.” 우리가 함께 시타델(사진 2)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면, 구원-회복-복원-속죄 같은 것(some kind of redemption)과 우연히 마주치게(come across)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 2] CG 작업이 마무리되기 이전의 시타델의 모습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맥스 일행과 임모탄의 전사들은 최후의 추격전을 벌인다.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차량이, 차량과 차량이 부딪히고, 내동댕이쳐지고, 상처입거나 손상되고, 죽거나 파괴되고 급기야 이들이 이미 지나쳐왔던 저 운명의 협곡으로 다시 향할 때까지 디지털의 과시적(寡示的) 표면 위에서 온갖 (코포)리얼한 물리적 액션이 과시적(誇示的)으로 펼쳐진다. 죽기 직전까지 눅스가 몰던 차량에서 떨어져 나온 핸들이 앞으로 돌출해 튀어나와 거기 장식된 우스꽝스러운 해골 문양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그 순간까지. 디제시스의 액션이 픽셀 스크린의 어둠으로 환원되는 그 순간까지. 어쩌면 이 어둠은 녹색의 땅으로 향하던 도중 임모탄의 여인 가운데 하나가 트럭 내부 천장에 새겨진 해골 문양을 짐짓 무심한 듯 만지작거리던 그 순간에 예견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때 우리는 그 몸짓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제 와서야 그녀의 몸짓을 새삼 떠올리게 된 것은, 이들이 간밤에 밤하늘을 홀로 배회하는 인공위성을 바라보며 나누었던 이야기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채로 돌아온 이들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한때는 세상의 모든 이들이 같은 쇼를 볼 수 있게 했었다는 장치, 영화의 운명을 바꿔놓고 떠도는 저 무심한 기원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채로 말이다. 혹은, 천체는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