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15

겨울의 시작


1. 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 The Tree of Life> (11.15)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의 영화라며 극찬하는 이도 보았고 맬릭의 가장 실망스러운 영화라며 비난하는 이도 보았다. 맬릭의 전작 <신세계 The New World>(2005)를 보았을 때, 그 숱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건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영화라고 생각했던 나는, 사실 <트리 오브 라이프>에 대한 어떤 비판도 영화를 보고 나면 결국 대부분 받아들이기 힘든 것임을 확신하게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마침내 맬릭의 이 끔찍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나서 우선 한국평론가들이 쓴 리뷰들을 찾아 읽어보았는데, "대체로 좋은 평을 받았지만 나는 달리 생각한다"든가 혹은 "이런 점들은 평가할 만하지만 이러저러한 점에서 실패작"이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거만하고 점잔빼는 문장으로 길게 늘여놓은 글들뿐이었다. 비판하는 글들조차 어찌나 정중한지 비판자들 자신이 맬릭의 허세에 저도 모르게 감염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달까. (나는 이런 영화엔 예의를 갖춰 비판할 필요가 없고 둘 중 하나의 태도를 취하면 그만이라고 본다. 아예 아무런 글을 쓰지 않고 침묵하던지 그게 아니라면 100년이 넘는 영화사(史)를 모독하며 21세기의 영화를 오도하려 드는 이 영화를 아주 부숴놓겠다는 결의로 달려든던지.)

영화적인 것이란 결국 물성(物性)과 감각이다. 조금 달리 말하자면 물성을 통해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건 심지어 영화에서 유령적, 신비적, 환영적인 것을 다룰 때조차도 마찬가지이며,환상성의 물성화를 통해 감각의 열림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들로는 <노스페라투 Nosferatu>(1922)와 <타부 Tabu : A Story of the South Seas>(1931)의 F.W.무르나우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I Walked wih a Zombie>(1943)의 자크 트루뇌르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영화감독들은 감각이 물성 앞에서 마침내 열리는 순간이 오리라는 믿음에 기대기보다는 물성 자체를 감각화함으로써 성급히 관객을 홀리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우주적인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 우주를 보여줄 필요는 없다. (<트리 오브 라이프> 초반부를 장식하는, 베르너 헤어조크 혹은 갓프리 레지오 풍의 그 '우주적' 시퀀스만으로도 이 영화는 올해의 가장 저주받을 영화가 되어 마땅하다. 문득 <용암의 집>에서 페드로 코스타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영화 도입부에 용암을 보여준 데 있다고 한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말이 떠오른다.) 생명의 나무를 환기시키기 위해 굳이 앙각으로 촬영된 아름드리 나무를 보여줄 필요도 없다. (나는 예전에 <씬 레드 라인>과 <신세계>의 마지막 쇼트에 대해 쓰면서 "식물성의 침묵"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트리 오브 라이프>는 오히려 식물성의 광란으로 넘쳐난다.) 다른 한편으로, 우주적인 것에 대비되는 개인적인 것을 다루기 위해서라면 굳이 1950년대를 살아가는 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도 없다. 그저 그것이 카메라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의의를 지니는 것(사물, 사태, 사건, 인물 등)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의 물성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영화적인 것이라고 하는 인식이 전무한 <트리 오브 라이프>는 도무지 보여줄 필요가 없는 것들로만 가득한, 나아가 영화의 모든 쇼트가 무가치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그런 영화다. 따라서 우주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이라는 대당을 적절히 - 변증법적으로(?) - 관계맺는 데 실패한 영화라든가 유기적이지 못하다든가 하는 지적은, <트리 오브 라이프>가 서로 긴밀히 연관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의의있는 개별적 순간들을 간직하고 있는 영화인 양 암시하는 비평적 언급들이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가? (<트리 오브 라이프>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 :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 A Space Odyssey>(1968)가 저지른 죄악을 그보다 과대망상증적인 형태로 재생산하고 있다. 생명을 이야기하는 죽음의 영화.) 그건 <트리 오브 라이프>가 풍부한 술어적 잠재성을 품은 고유명사적 존재(이 나뭇잎, 이 나무, 이 강아지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나)들의 구체성을 박탈 - 여기서 브래드 피트는 그저 1950년대 '어떤' 미국가정의 '어떤' 가장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  하고 모든 존재들을 진부한 은유의 보조관념으로 밀어넣음으로써, 구체적인 물성을 요하지 않는 감각적 형용사들과 동사들만 난무하는 역겨운 스펙터클의 영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보자면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모든 것은 a(존재)로서도, a에서 a',a'',a'''.../b,d,e...로 향하는 것(생성/변화)으로서도 호명되지 않으며 오직 'A적(的)인 것'을 가리키기 위한 희미한 이름 (a)로서만 불려나올 뿐이다.  (이때 감각은 열리기를 중단하고 잠에 빠져들거나 기껏해야 마비될 뿐이다.) 그러니 <트리 오브 라이프>의 모든 쇼트들이 어디에 시선을 둘 지 몰라 흔들리며, 머뭇거리다 재빨리 사라지고, 구원을 간청하듯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스스로의 존재의 이유를 잃은 쇼트들의 당황과 망설임. 


2. 데이브 커의 <영화가 중요했던 때> (11.19)

지난 9월 토론토영화제를 방문했을 때, 영화평론가 데이브 커(Dave Kehr)의 평론집 <영화가 중요했던 때 When Movies Mattered>가 올해 출간된 것을 알고 구입해 두었다가, 최근 짬이 나는 대로 틈틈히 읽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평론집은 그의 최근 글들이 아니라 그가 <시카고 리더 Chicago Reader>의 평론가이던 시절, 그러니까 그의 나이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이었을 때 - 정확히는 1974년부터 1986년 사이, 책의 부제대로라면 영화의 "변형기"(transformative period)에 - 쓴 글들만을 모아 놓은 것이다. 커의 최근 글들은 <뉴욕 타임즈>나 <필름 코멘트> 같은 잡지들, 혹은 그의 블로그에서 종종 접해 왔지만 이처럼 그의 경력 초기의 글들을 접해본 건 처음이다. 그런데 글을 읽다가 대단한 통찰로 빛나는 문장들을 발견하고는 깜짝깜짝 놀라는 게 한두번이 아니다.

예컨대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 <프란시스카 Francisca>를 보고 나서 쓴 글(1983)을 보면 "장-마리 스트라우브가 막스 오퓔스와 협력해 만든 영화처럼 보인다"고 지적하면서 "올리베이라는 리얼리티를 촬영하지 않지만, 대신 영화에서 가능한  유일한 리얼리티, 즉 리얼리티의 예술적 대체물로서의 재현(representation) 자체를 카메라에 담는다."고 단언하는데, 이는 사실 올리베이라의 많은 영화에 폭넓게 적용되는 비평적 진술이 된다. 그런가 하면 라울 월쉬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쓴 그에 관한 에세이(1981)는 다음과 같은 비장한 문장들로 끝을 맺는다. "[월쉬 회고전은 고사하고] 몇몇 작품들이나마 지역의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법이 거의 없다. 아마도 월쉬의 저주는 그의 다산성(多産性)에 있는 듯하다. 익숙함의 유혹에 이끌려 선택되는 몇 편의 유명한 영화들에서 벗어나, 월쉬가 만든 백 편이 넘는 영화들 가운데서 영화를 골라낼 자는 누구인가?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월쉬의 작품은 들쑥날쑥하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모호하건, 거기에 그의 번뜩이는 재능, 보는 이를 감염시키는 그의 영혼이 제대로 담겨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월쉬의 영화를 봐야 한다. 궁극적으로, 월쉬를 위한 시네마테크는 심야 텔레비전이다. 그의 영화가 방영되지 않고 한 주가 지나가는 법은 거의 없다. 때로는 한주에 두세편이 방영되기도 한다." 커는 월쉬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의 스타일과 가치들이 그가 작업한 장르 자체와 워낙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월쉬의 전쟁영화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모든 전쟁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그의 서부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3. 아마도, 우연의 일치 (11.25)

서점에 들렀다가 지난 9월 출간된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의 <지도와 영토 La Carte et Le Territoire>(2010)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구입해 읽는 중인데,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소설 속 <르몽드> 기자가  주인공의 첫 전시회를 보고 쓴 리뷰의 한 문장인데, 워낙 소설 자체가 반어와 직설이 구분불가능할 만큼 뒤섞인 문장들로 넘쳐나는 만큼, 그처럼 따옴표 사이에 자리한 문장에 작가의 진의가 얼마나 담겨 있는지 판단하기란 불가능하다. 여하간 이런 문장이다. "그는 공동창작자로서의 신의 시점을 채택해 인간의 편에서 세상을 (재)구성한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문득 이건 우엘벡 자신의 소설에 대한 능청맞은 논평(내지는 옹호의 발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대의 풍속을 사실적으로 기술한 듯한 스타일 때문에 가끔 잘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지만 이미 우엘벡의 <소립자>(1998)를 읽었을 때부터 이 작가는 기묘하게 스위프트적인 데가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반면 <트리 오브 라이프>의 테렌스 맬릭은 신의 시점을 채택해 아예 그 절대자의 편에서 자신의 영화적 우주를 (재)구성하려 갖은 애를 썼던 것이고 나는 그런 가당찮은 태도를 견딜 수 없었다. 이 영화의 기도-로서의-내레이션은 발화자의 입장이 아니라 청자의 입장에서 삽입된 것처럼 보인다.) 일단 끝까지 읽고 다시 생각해 볼 참이지만 현재까지 읽은 감상으로는 - 딱 250페이지 읽었다 - 술술 읽히긴 하지만 그의 초기소설보다 서늘한 맛이 덜하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인데, 현대 미술계의 이면에 관한 이야기와 시대상(및 연애담)을 교차시키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혹시 출판사 문학동네에 이런 쪽에 취향이 있는 편집자가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유인즉 지난 6월에 문학동네에서 번역, 출판된 마키 사쓰지(쓰지 마사키)의 추리소설 <완전연애>(2008)도 비슷한 설정을 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 까닭이다.

지난 일요일 광화문의 미로스페이스에 가서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 Drive>(2011)를 보았다. DVD로 상영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화질이 형편없는 데다 사운드도 엉망이라 환불을 요구하고픈 심정이었다. 지난 9월 토론토영화제에서 볼 때완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고, 결국 이튿날 집 근처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가서 다시 관람했다. 이 영화는 올해 한국에 개봉된 영화 가운데 소이 청(정보서 혹은 청 퍼우소이)의 <엑시던트 Accident>(2009)와 더불어 최고의 액션영화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개봉한 베넷 밀러의 <머니볼 Moneyball>(2011)과 이 영화를 나란히 놓고 보면 두 영화의 주인공들에겐 자동차 운전석이야말로 진정 유일하게 사적이고 친숙한 공간인 것처럼 비친다. 두 영화 모두, 운전석에 홀로 앉아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 - 강도사건(<드라이브>), 야구경기(<머니볼>) - 의 추이를 긴장된 상태로 기다리고 있는 주인공들의 모습으로 시작해, 홀로 차를 몰고 도로를 질주하는 그들 위로 노래의 형식을 빌려 그들의 삶의 방식을 위무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 "A Real Hero"(<드라이브>) "The Show"(<머니볼>) - 것으로 끝난다. 낭만적 고독과 세속적 도전, 장르와 리얼리즘, 감각적 폭력과 설득/대결의 언어, 화폐의 강탈과 자본의 경영, 이처럼 상이하게 갈라진 두 영화가 결국 만나는 장소. 혹은 자동차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마지막 공간 중 하나이자 [...] 인간에게 제공된 마지막 일시적 자치권역 중 하나"(미셸 우엘벡, <지도와 영토>)처럼 보인다.

2011-11-06

포르투갈 영화주간

11월 8일에서 10일까지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화상강의실(BRICS Multimedia Auditorium)에서 "포르투갈 영화주간"이 열린다. 모든 영화에 한국어자막과 영어자막이 제공되며 작품당 한 번씩만 상영된다. 한국-포르투갈 수교 50주년을 맞아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포르투갈영화특별전이 차례로 개최된바 있는데 편수는 많지 않지만 두 차례의 특별전에서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특히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영화의 팬들에게는 올해가 매우 특별한 한 해가 될 듯한데, 전주와 부산에서 그의 창조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좌절된 사랑의 4부작"(Tetralogy of Frustrated Love) - <과거와 현재 The Past and the Present>(1971), <베닐드 혹은 성모 Benilde or the Virgin Mother>(1975), <저주받은 사랑 Doomed Love>(1978), <프란시스카 Francisca>(1981) - 이 모두 소개된 데 이어 이번 외대 영화주간에선 그의 장편데뷔작 <아니키 보보 Aniki Bobo>(1942)와 더불어 올리베이라가 배우로 출연한 1930년대의 대표적 코미디(이자 포르투갈에서 제작된 최초의 유성영화)인 <리스본의 노래 A Song of Lisbon>(1933)가 상영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11월8일 <아니키 보보> 상영에 앞서 1시간 정도 강연할 예정이다.) 사전 예약은 없고 선착순 입장이며 입장료는 무료다.

11월 8일(화)

18:00 ~ 20:00  <아니키 보보 Aniki Bobo>(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Manoel de Oliveira, 1942) * 상영전 강연

11월 9일(수)

19:00 ~ 21:30  <안드레 발렌테 Andre Valente>(카타리나 후이부 Catarina Ruivo, 2004)
                        + 포르투갈 단편애니메이션

11월 10일(목)

18:00 ~ 21:30  <리스본의 노래 A Song of Lisbon>(코티넬리 텔무 Cottinelli Telmo, 1933)
                        + <노던 랜드 The Northern Land>(주앙 보텔류 Joao Botelho, 2008)

2011-11-05

비엔나영화제

지난달 20일 개막해 이달 2일 폐막한 오스트리아 비엔나국제영화제(Vienna International Film Festival : 일명 Viennale)에 다녀왔다. 2007년에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지만 - 페드로 코스타, 하룬 파로키, 유진 그린 감독이 참여한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2007 : 메모리즈 Jeonju Digital Project 2007 : Memories>를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 당시엔 2박3일 일정으로 짧게 들렀던 탓에 영화제를 제대로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올해로 49회째를 맞은 이 유서깊은 영화제는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해외의 숱한 감독들과 평론가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영화제 가운데 하나다. 칸, 베니스, 베를린, 토론토, 부산 등에서라면 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마주치게 될 영화 '장사꾼들'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고, 한국의 영화제에선 그토록 흔한 부대행사나 이벤트 하나 없이 비엔나 도처에 자리한 여섯 군데의 작은 영화관에서 조용히 열리는 행사일 뿐인데도, 많은 감독들이 자신의 영화가 이곳에 초청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물론, 초청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이번에 비엔나에 가게 된 것은 내년에 50주년을 맞는 이 영화제와 관련해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특별전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는데, 비엔나영화제 측은 그들과 "같은 영혼"을 같고 있다고 판단한 대륙별 세 곳의 영화제에 비엔나영화제 50주년 특별상영 기획을 제안했다. 바로 유럽 포르투갈의 인디리스보아(Indie Lisboa), 미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국제영화제(일명 BAFICI), 그리고 아시아 한국의 전주국제영화제 세 곳이다. (최근 외국평론가들과 영화제전문가들은 비엔나, 인디리스보아, BAFICI, 전주 그리고 마르세유다큐멘터리영화제(일명 FIDMarseille) 등을 "자매영화제" - 실제로 자매결연 같은 걸 맺은 건 물론 아니다 - 라 칭하고 있으며, 전주국제영화제를 설명하기 위해 "비엔나와 BAFICI의  아시안 카운터파트(asian counterpart)"라는 표현을 쓴 이도 있다.)  

비엔나영화제는 세상의 모든 영화제 가운데 가장 간단하고 또 '평등'한 섹션구분을 자랑한다. 극영화/다큐멘터리/단편영화/특별전과 회고전. 경쟁부문은 아예 존재하지 않고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초청감독, 배우, 프로듀서, 영화제관계자들이 모두 같은 호텔에 묵게 된다. (심지어 영화제 몇몇 팀의 사무실과 게스트라운지도 호텔 안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많은 감독들은 비엔나야말로 수상발표를 기다리며 초조해하거나 경쟁감독과 비경쟁감독, 경력있는 감독과 신인감독 간의 대접을 달리하는 데서 스트레스 받는 일 없이 가장 편안하게 영화제를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언젠가 필리핀 감독 라브 디아즈는 자신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한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작 상영이 끝나기 무섭게 리무진이 극장 앞으로 달려와 자신을 '납치'해가는 통에 도무지 영화제 기간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다며 불평을 토로한 적이 있다.) 아침마다 조식자리에서 옛 친구들과 만나거나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과 함께 카페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다 함께 영화를 보러 가고, 영화가 끝나면 관객들과 극장 앞 로비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매일 밤 도나우강 위에 띄운 보트 위에서 열리는 - 이렇게 말하면 꽤 호사스럽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실은 강가의 작은 클럽 정도라고 보면 된다 - 조촐한 파티에 간다. (때론 영화제 참여감독 몇몇이 직접 DJ로 나서기도 한다.) 

비엔나영화제가 어쩐지 '관광영화제'같은 느낌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  물론 비엔나는 비단 영화가 아니더라도 도시 자체가 매력으로 넘치는 곳이긴 하다. 하지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비엔나영화제의 프로그램은 가장 시네필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는 점이다. (산세바스티안영화제에서 나와 함께 신인감독상 심사를 맡았던 오스트리아 감독 예시카 하우스너(<루르드 Lourdes>(2009))는 비엔나영화제에 대해 말하자 미소를 떠올리며 자랑스레 말했다. "비엔날레는 우스꽝스러운 위계로 게스트를 차별하지 않고, 정말 모험적인 영화들만을 상영한다.") 그러니까 두기봉의 신작과 조나스 메카스의 신작을 나란히 놓고 영화에서 '퍼스널'(personal)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고 제안하는 곳, 한쪽에서는 샹탈 아케르망의 전작 회고전(과 그녀가 추천한 14편의 영화 상영전)이 열리는 동시에 다른 극장에서는 홍콩감독 소이 청의 회고전이 열리는 곳,  그곳이 비엔날레다. (작년 12월 말 서울의 단 한 극장에서 개봉된 소이 청의 <엑시던트 Accident>(2009)는 한국평단에서 거의 무시당했다. 이 작품은 지난 1년 간 국내 개봉한 영화들 가운데 가장 근사한 액션영화다. 이번 비엔나영화제 기간 동안 나는 운좋게도 그의 두 번째 장편 <공포열선 Horror Hotline : Big Head Monster>(2001)을 극장에서 볼 수 있었다. 성공적이라 말하긴 힘들지만, 굉장히 흥미로운 아이디어들이 넘쳐나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메타-호러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 또한 장-피에르 고랭, 톰 앤더슨 같은 전위적인 영화감독들이나 조너선 로젠봄처럼 폭넓은 영화적 식견을 지닌 평론가들을 게스트큐레이터로 초청, 영화제 전후 한 달 동안 오스트리아필름뮤지엄(비엔날레 상영관 가운데 하나다)에서 열리는 특별프로그램을 기획하게끔 기회를 주기도 한다. (그동안 그들이 기획한 프로그램의 제목만을 적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흰개미의 길 : 영화에서의 에세이 1909~2004"(고랭, 2007년), "로스앤젤레스 : 영화 속의 도시"(앤더슨, 2008년), "불온한 미국인 : 전복적인 미국 코미디영화들"(로젠봄, 2009년))


오스트리아필름뮤지엄 앞에서 기다리는 관객들


샹탈 아케르망 회고전 포스터. 포스터 아래쪽의 안내문구가 재미있다.
("오스트리아필름뮤지엄은 시네마테크입니다. 전시는 스크린상에서 이루어집니다.")

올해도 많은 영화감독들이 비엔날레를 방문했고, 그 가운데 개막작 <르 아브르 Le Havre>의 아키 카우리스마키, 난니 모레티, 데이빗 크로넨버그, 회고전의 주인공인 샹탈 아케르망 등은 잘 알려져 있는 이름들일 것이다. 비엔날레를 대표하는 것 가운데 하나로 1995년 이후 매년 여러 전위적인 감독들에게 의뢰해 제작, 공개하고 있는 1분짜리 영화제 트레일러가 있다. 기껏해야 영화제 트레일러 아니겠느냐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사실 비엔날레 트레일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되어 몇몇 다른 영화제 프로그램에도 포함될  만큼 -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그동안 비엔날레 트레일러 몇 편을 "영화보다 낯선" 프로그램에서 상영해 왔다 - 작품성이 뛰어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비엔날레 트레일러 작업을 모방해 감독들에게 영화제 트레일러 제작을 의뢰하는 영화제들도 생겨나고 있다. 수준은 제각각이지만 라야 마틴이 2011년 로테르담영화제를 위해 만든 <아르스 콜로니아 Ars Colonia>는 정말 훌륭하다.) 그동안 참여한 감독들의 이름만을 적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995년부터 순서대로) 구스타프 도이치(1995년과 1996년), 마르틴 아르놀트, 브루스 베일리, 피터 체르카스키, 마티아스 뮐러, 조나스 메카스, 스탠 브래키지, 어니 기어, 아녜스 바르다, 켄 제이콥스, 레오스 카락스, 젬 코헨, 장-뤽 고다르, 제임스 베닝,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이 가운데 체르카스키의 <준비 Get Ready>(1999), 고다르의 <파국 Une catastrophe>(2008), 베닝의 <불과 비 Fire & Rain>(2009)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들이고 모두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 상영한 바 있다.) 올해엔 미국의 데이빗 린치 감독이 만든 <The 3 Rs>가 트레일러로 공개되었다.


데이빗 린치(David Lynch) 감독이 연출한 2011년 비엔나 영화제 트레일러 <The 3 Rs>


비엔나영화제는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를 거의 매년 초청해 왔고 장-마리 스트라우브, 클레어 드니, 호세 루이스 게린이 참여한 올해 작품도 어김없이 이곳에서 상영되었다. 한국영화로는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과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2010) 두 편이 초청되었다. 그런데 왜 한국영화들은 이곳에 잘 초청되지 않는 것일까? (심지어 비엔나는 월드 혹은 인터내셔널 프리미어를 요구하는 영화제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로테르담영화제나 뱅쿠버영화제처럼 아시아영화 전문 프로그래머를 따로 두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영화에 집중하는 곳이 아니란 점도 이유가 될 것이다.  한편 비엔나영화제 집행위원장인 한스 후르흐(Hans Hurch)의 말에 따르면 그건 비엔나가 한국영화를 꺼리는 것이 아니라 한국영화감독들이나 배급사들이 비엔나 출품을 꺼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대부분의 한국영화 배급사들은 초청장을 받고 나면 대뜸 "경쟁부문은 있느냐?"고 묻고, 이에 경쟁부문은 따로 없다고 대답하면 턱없이 비싼 상영료를 요구하곤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세계각국에서 중소규모의 경쟁부문을 갖춘 영화제들이 신설되고 고액의 상금을 내건 영화제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는 때라 (개봉보다는 영화제 상영료나 상금으로 비용을 회수하려 드는) 배급사들은 더더욱 그쪽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저 경쟁부문이 있기 때문에, 상금이 많이 걸려 있기 때문에, 비엔나같은 영화제를 거절하고 다른 영화제에 영화를 보내는 것은 정말이지 바보 같은 일이다. 


비엔나영화제 기간 동안 많은 영화를 보았는데 특히 벤 리버스(Ben Rivers)의 장편데뷔작 <바다에서 2년 Two Years at Sea>(2011)을 영화관에서 보고 감독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행복했다. 이 작품은 후반작업 진행중이던 올해 초, 전주국제영화제의 "워크인프로그레스 Work in Progress"에 출품, 1000만원의 제작지원금을 받아 완성한 16mm  장편영화인데, 이후 지난 9월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 부문에서 상영되어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비엔나를 떠나기 이틀 전, 벤 리버스 감독 그리고 알베르트 세라 감독(<기사에게 경배를>(2006), <새들의 노래>(2008))과 아침을 먹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근사한 턱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 한 명이 다가와 벤 리버스에게 말을 걸었다. 자신이 어제 리버스의 <바다에서 2년>을 보았는데 정말 멋진 영화였고 꼭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년 사내가 누구였는가 하면 바로 (내가 2010년 세계영화 '10 베스트' 가운데 하나로 꼽은 바 있는) <아이타 Aita>(2010)의 감독 호세 마리아 드 오르베(Jose Maria de Orbe)였던 것이다. 그 둘은 한참 이야기를 더 이어나갔고 나는 다음날 아침 드 오르베 감독과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내게 자신이 제작한 여러 실험적 조각작품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과연 <아이타>에서의 그 독특한 파운드푸티지 활용방식이 갑작스레 나온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호세 마리아 드 오르베 감독과 함께


<아이타>는 작년 산세바스티안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되었던 작품이지만 첫 공개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오히려 올초부터 각종 영화제에서 뒤늦게 이 작품을 발견한 평자들에 의해 서서히 입소문이 퍼지고 있는 중이다. 드 오르베 감독은 작년 산세바스티안에서 있었던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주었다. 경쟁부문 심사위원 가운데 필리핀감독 라야 마틴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호텔 로비에서 드 오르베 감독을 만나자마자 (심사위원으로서 지켜야 할 원칙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고) 모든 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에게 달려들며 "호세 마리아! 당신 영화가 최고예요, 최고!"라고 외치는 통에 말리느라 혼났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엔나를 떠나기 직전 받은 선물 하나. 올해 로카르노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나나 Nana>의 감독 발레리 마사디앙(Valerie Massadian)이 사진을 찍어 내 메일로 보내주었다. 작년(2010년)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았던 이들에게 발레리 마사디앙은 낯선 이름이 아닐 수도 있다. 페드로 코스타 회고전에 맞춰 발간한 책자 표지의 근사한 흑백사진, 코스타의 영혼을 담아내었던 사진작가가 바로 그녀이기 때문이다.

 (photographed by Valerie Massad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