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27

펠리니의 모더니티에 대한 의문

(아래 글은 2010년 6월 19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행한 강연을 위해 준비했던 원고를 발췌, 정리한 것이다. 강연 당시 펠리니 영화의 몇몇 장면들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했던 부분들 및 <로마>에 관한 별도의 코멘트 등은 삭제했다.)

피터 보그다노비치는 오슨 웰스를 인터뷰하면서 당대의 몇몇 유명 감독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은 적이 있다. 웰스는 히치콕과 관련해서는 그가 미국에서 연출한 작품 가운데 <의혹의 그림자 Shadow of a Doubt>를 가장 좋아한다고 밝히면서 하지만 그의 많은 작품에는 어딘지 차갑게 계산적인 것이 있어서 좀 꺼려진다고 말한다. 또한 히치콕 자신은 배우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지만 웰스 자신이 보기에는 히치콕은 때로 인간 자체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지적한다. 이어 보그다노비치가 "그럼 펠리니는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웰스는 "좀 쉬었다 하지 그래. 그건 그렇고, 펠리니가 히치콕하곤 뭔 상관인가?"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보그다노비치는 "그냥 당신의 생각이 궁금해서요. <길>을 싫어하시는 걸로 알거든요"라고 말하면서 재차 묻는다. 그러자 웰스는 "나는 <영혼의 줄리에타>도 아직 못 보았는데"라고 말하며 답변을 피한다. 보그다노비치는 "그럼 <달콤한 인생>은요?"라고 묻자 그제야 답변을 들려주는데 이 답변이 짧기는 하지만 꽤 흥미롭다. 웰스는 펠리니는 본질적으로 로마에 실제로 가보지 못한 "스몰 타운 보이"(small town boy), 말하자면 촌놈이라고 운을 뗀다. 그러면서 그는 여전히 밖에 서서 문틈으로 안을, 그러니까 촌놈의 시선으로 로마를 들여다보고 몽상하고 있는 중인데, <달콤한 인생>과 같은 영화의 힘은 'provincial innocence', 그러니까 촌놈의 순진함에서 나온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곤 그때까지, 그러니까 <8 1/2>까지의 펠리니 영화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은 "촌놈의 관점"이 잘 드러난 <비텔로니>가 아니겠냐는 보그다노비치의 말에 동의하며 말을 맺는다. (덧붙이자면 펠리니에 이어 보그다노비치가 웰스의 견해를 묻는 감독은 바로 고다르인데, 고다르에 대해서는 영화라는 기계장치에 대한 그의 놀랄만한 경멸을 깊이 존중한다고 답변한다.)


확실히, <시민 케인>과 <거짓과 진실 F for Fake>의 작가인 이 모던시네마의 거장이 펠리니를 두고 한 말에는 다분히 경멸적인 태도가 배어 있다. 게다가 <달콤한 인생>과 <8 1/2>같은, 소위 1960년대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처럼 흔히 일컬어지고 있는 영화의 창작자를 두고 촌놈의 순진함이 힘이라 말하는 데선 어쩐지 기묘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웰스의 발언에서 경멸적인 암시를 좀 걷어내고 펠리니의 영화 경력에 비추어 그의 말을 되새겨 보면 문득 웰스의 발언이 매우 정확한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우선 잠정적인 결론삼아 미리 말하자면 펠리니의 모더니티란, 예컨대 "영화라는 기계장치에 대한 놀랄 만한 경멸"이라고 웰스가 표현했던 바의 모더니티, 즉 고다르 뿐만 아니라 웰스 자신도 공유했던 그런 모더니티, 즉 매우 자기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미적 모더니티,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 즉 기존의 것을 폐기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망에 기반한 모더니티와는 꽤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8 1/2> 같은 영화의 사뭇 자기반영적으로 보이는 형식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러했던 게 사실이지만, 이조차도 펠리니 특유의 성향에서 비롯된 충동적 스타일이 우연히 모던의 형식과 맞아떨어진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펠리니는 새로움보다는 기이함에 더 이끌렸던 감독이다. 그리고 그 기이함이 불러일으키는 경이(wonder)의 경험이야말로 펠리니의 경력을 이끌고 가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펠리니의 모더니티란 영화의 영역, 예술의 영역, 미학적 수준에서 말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근대라고 말할 때 근대의 여러 발명품들이 인간에서 선사했던 경이의 체험, 즉 모던의 경험을 영화에 담아내려 했다는 의미에서의 모더니티인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면, 뤼미에르의 <열차의 도착>이 그 자체로 모던한 영화, 모더니즘영화 혹은 모던시네마라고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열차라고 하는 근대의 발명품과 움직임의 환영을 통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 영화라는 기계장치의 결합을 통해 모던의 경험, 그 경이의 체험을 사람들에게 선사한 영화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내가 펠리니 영화에서의 모더니티를 말할 때는 정확히 이와 같은 의미에서다. 그러니까 리미니라는 이탈리아 시골마을에서 20년 가까이 살아오다가 19살에 도망치듯 빠져나와 로마로 왔던 펠리니라는 시골청년의 영화에 경이로서의 모던의 체험이 깃들어 있고 또 그게 그의 힘이 된다고 했던 웰스의 말은 꽤 일리가 있는 셈이다.




시계태엽장치를 보는 오렌지


흥미롭게도 펠리니의 영화에서 기차는 범용한 일상의 탈것으로만 단순하게 보여지는 일이 거의 없다. 반면 오즈 야스지로 같은 감독의 영화에서는 기차가 매우 인상적인 사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등장인물들에게 색다르고 경이로운 체험을 선사하는 그 무엇은 아니다. 하지만 펠리니의 영화에서는 (거의 20세기 초엽의 초기영화들을 떠올리게 할 만큼) 기차가 기대감과 경이의 경험으로 가득한 사물로 묘사되곤 한다.


[... 중략...]


이런 식으로 근대적 기계들을 매우 특권적으로 묘사하는 펠리니의 성향을 보여주는 사례는 기차 이외에도 선박, 자동차(특히 자동차는 그의 영화에서 종종 괴물스러운 대상들로 묘사된다. <8 1/2>이나 <로마>에서의 교통체증 장면을 떠올려 보라. <달콤한 인생>에서 자동차는 연인들이 싸우고 다투는 공간이다), 오토바이, 비행기, 우주선(세트) 등등 다양하다.또한 영화촬영에 수반되는 번잡한 기계장치들과 세트들에 대한 경이의 시선(<인터비스타>), 그리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특권적인 경험의 묘사(<비텔로니>, <로마>, <아마코드>) 등도 포함시킬 수 있다. 이러한 기계장치들을 바라보는 시선이야말로 모던의 경험에 대한 영화적 기록으로서의 펠리니의 모더니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이 꼭 긍정적인 경이의 체험으로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고 그러한 장치들에 담긴 어떤 무시무시한 부분에 대한 의혹의 시선도 있다는 걸 강조해 두고 싶다. 사실 그러한 장치들에 대한 매혹과 두려움의 양가감정이야말로 모던의 경험의 양면성을 특징짓는 중요한 것이다.) 펠리니가 (특히 그의 후기작에서) 영화장치들과 세트들을 보여줄 때, 거기엔 그가 기차나 선박, 비행기나 우주선을 영화에서 포착할 때와 동일한 감정이 담겨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걸 간과하게 되면 흔히 그의 후기작들을 두고 영화 매체 자체에 대한 반영적 시선이 들어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해서 그의 모더니티를 오해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심지어 포스트모던하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거의 말장난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펠리니는 모던의 경험 자체에 대한 집착을 통해 (웰스나 고다르 등에 의해 수행되었던) 모던시네마의 야심적 시도들에 (우연히?) 부분적으로 다가간 인물이다. <로마> 같은 매우 현대적인 에세이 영화를 만든 이가 곧바로 <아마코드>나 <카사노바> 같은 별반 새롭지 않은 형식의 영화들로 돌아가면서도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중략...]



저널리즘과 스펙터클


펠리니 영화에 나타난 근대적 기계장치들만을 두고 펠리니의 모더니티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너무 편협한 일이 될 것이다. 그가 네오리얼리즘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일탈'했다고 말해지는 <8 1/2>이후 펠리니의 영화는 점점 직선적인 이야기보다는 현실과 환상/상상/망상의 자유로운 교차(<영혼의 줄리에타>), 혹은 개별적인 에피소드의 연쇄(<사티리콘>, <카사노바>, <그리고 배는 항해한다>), 하나의 소재를 둘러싸고 가능한 것들(가짜/진짜 다큐멘터리, 극영화적 재현, 스케치)을 모조리 끌어들이는 에세이적 구조(<광대들>과 <로마>) 쪽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펠리니의 이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영화적 모더니즘의 지적인 태도보다는 오히려 그야말로 천진난만한 악동의 태도라고 할 만한 것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때로는 거의 반지성주의적으로 여겨질 정도인데, 서사라고 하는 전통적 구조물에 대한 지적인 비판이라기보다는 단지 그것을 귀찮아하면서 자신이 흥미롭다고 여기는 이야깃거리들을 수다스럽게 풀어놓는 - 때로는 곁길로 새는 것도 얼마든지 용인하면서 - 저널리스트적 태도 같은 것이다.


펠리니는 애초에 영화감독이 될 생각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가 19세에 로마로 왔을 때 그의 목표는 <마르크 아우렐리오>라는 상업지에 기고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대단한 발행부수(30만부)를 자랑하고 있던 이 상업지는 펠리니가 어린시절부터 애독해오던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거기에 자리를 잡아 카툰, 기사, 칼럼 등을 약 3년간 게재하게 된다. 여기에 쓴 글 가운데 어린 시절을 회고한 칼럼에 자주 등장했다고 하는 인물이 학창시절 그의 짝꿍이었던 티타(본명은 루이지 벤지)인데, 그는 바로 <아마코드>의 주인공이다. (실제의 티타는 <아마코드>에서 내레이터 역할을 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 외에도 시골이나 도시에서의 경험, 첫사랑 같은 이야기들을 일인칭 혹은 삼인칭으로 써내려간 이 칼럼 기고문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훗날 펠리니 영화에 재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펠리니의 경력은 신변잡기적 칼럼니스트, 혹은 유머작가로 시작되었으며 이는 그가 영화감독이 된 뒤에도 변치 않고 지속되었다고 봐야 한다.


연재칼럼의 형식은 이미 <비텔로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텔로니>의 이야기는 그 내레이터에 따르면 '작년'에 일어난 이야기이고 각 시퀀스 별로 기승전결이 갖춰진 독립적인 회고조의 이야기가 나란히 이어지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광대들>, <로마>, <아마코드> 같은 영화들은 칼럼니스트의 주제별 글 모음집과 비교해 볼 만한 영화들이다. <그리고 배는 항해한다>에는 아예 저널리스트가 등장하는데 영화 자체는 카메라로 기록한 크루즈선 여행 칼럼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상업저널리스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달콤한 인생>은 밤마다 주인공이 겪은 로마의 밤문화에 대한 이미지-칼럼들을 시퀀스별로 모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밀고 나가자면 펠리니는 <달콤한 인생>에서 마르첼로가 겪은 이야기에 상응하는 '역사적' 이야기들을 카사노바의 회고록이나 페트로니우스의 소설에서 발견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편 펠리니가 버라이어티 극장에 종종 드나들곤 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첫 장편인 <버라이어티 극장의 불빛 Luci del varieta>을 비롯해 시작해서 <카비리아의 밤>, <로마> 등에도 버라이어티 극장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펠리니가 어린 시절에 매혹되었던 서커스와 더불어 버라이어티 극장 펠리니 영화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또한 매우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서커스나 버라이어티 극장에서 중요한 것은 스펙터클 자체의 연쇄이지 이야기가 아니다. (동일하게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연극이나 오페라와 다른 점.) 예컨대 주인공(들)을 내세우되 느슨한 모험의 줄기만을 세워 두고 그들이 방문한 장소에 따라 각기 다른 상황들이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는 두 편의 시대극 <사티리콘>과 <카사노바>는 서커스와 버라이어티의 영향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펠리니가 버라이어티 극장에 매혹되었다고 할 때 그는 단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만이 아니라 객석의 관객들이 보이는 모습에도, 어쩌면 그것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펠리니가 <마르크 아우렐리오> 시절에 기고한 글 가운데는 다음과 같이 버라이어티 극장을 묘사한 것이 있다. "여기에 어머니들은 없다. 단지 소리 지르는 소년들과, 기술적인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견습생들, 입을 헤벌리고 군침을 흘리는 노인네들이 있을 뿐이다. 배우가 무대 위로 올라오면 군중은 짐승처럼 소리 지르며 열광한다." 펠리니가 영화에서 어떤 퍼포먼스 장면을 연출할 때, 그가 퍼포먼스 자체보다 그걸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이 벌이는 소동의 스펙터클에 더 치중하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반면 그가 서커스를 보여줄 때만큼은 퍼포먼스 자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광대들>의 마지막 시퀀스.)


<8 1/2> 같은 이른바 '모던'하다 일컬어지는 펠리니 영화조차도 서술적 이야기와 스펙터클한 쇼, 그리고 추억 사이의 투쟁이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주인공 귀도의 입장에서야 현실과 상상 사이의 갈등이겠지만, 감독인 펠리니의 입장에서는 <달콤한 인생>까지는 어떻게든 유지해왔던 이야기의 진행을 여기서도 견지할 것이냐 아니면 온전히 스펙터클과 추억의 연쇄로 밀고나갈 것이냐를 두고 벌어지는 실험이 되는 것이다. 펠리니가 애초부터 이 영화를 영화감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야기로 구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정부와 아내의 방문을 동시에 맞게 된 한 남자의 갈등에 관한 것이었는데(이렇게 밀고 나갔다면 <달콤한 인생>과 유사한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남자의 직업을 끝내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영화감독으로 설정하고는 이 영화 촬영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겪었던 자신의 경험담을 거기에 투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무엇에 쓸지도 모르면서 지으라고 해 놓았던 우주선 세트는 결국 영화 트레일러 제작용으로 촬영했다가 결국 그 영상을 영화의 엔딩으로 쓰게 되었다.) 이 영화의 환상 장면들, 특히 어린 시절, 귀도의 하렘 환상, 윤무가 이루어지는 서커스 공연 같은 엔딩 등은 각각 나중에 <아마코드>, <카사노바>, <광대들>같은 독립적인 영화들로 만들어지게 된다.


말하자면 펠리니 영화의 분산적 서사는 20세기(초/중반)의 대중들이 누렸던 오락적 매체들의 특징을 자유분방하게 끌어들인 데서 연유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 역시 모더니스트적 접근이라기보다는 모던의 경험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펠리니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정신분석학의 영향이나 펠리니가 영화를 시작하고 한참 경력을 쌓아가던 무렵에 이탈리아에 번역되었던 모더니스트 소설들과의 관련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에 관해 말하자면 펠리니가 거기서 받은 영향이란 것은 - 그의 영화작품들만을 놓고 보자면 - 거의 개론서에도 못 미치는 수준의 피상적인 것일 따름이다. 알베르토 모라비아 같은 소설가는 펠리니의 <8 1/2>을 보고 나서 그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을 읽고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하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지만 - 이 소설은 1960년에 이탈리아어 번역판이 처음 나왔다 - 펠리니의 친구이자 그의 전기를 쓴 툴리오 케치히라는 이에 따르면, 펠리니를 아는 사람이라면 당시 그가 그 소설을 읽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걸 알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떤 모던한 형식의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그 감독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반드시 지적인 예술의 흐름과만 관련지으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리한다면 우리는 펠리니는 물론이고, 자크 타티 그리고 제리 루이스 같은 이들의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펠리니는 자신에겐 부족한 이른바 '고급예술'의 전통을 원숙하게 끌어들일 수 있는 다른 이들의 힘을 빌리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예컨대 그와 평생에 걸쳐 작업한 니노 로타는 펠리니가 음악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펠리니 스타일의 미술을 가능케 한 피에로 게라르디, 다닐로 도나티, 단테 페레티 같은 프로덕션 디자이너들에 대해서도 언급해 두어야겠다. 오히려 그런 쪽을 다른 이들에게 맡기면서 펠리니는 영화의 분산적 구조를 짜고,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에서 장기를 발휘하곤 했던 것이다. 특히 펠리니적 서사의 구축에 있어 버라이어티 극장(의 프로그램 구성방식)과 상업저널리즘의 칼럼 스타일 글쓰기(물론 카툰도 포함되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기선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펠리니의 영화에는 인물묘사나 상황설정에 있어 몇몇 특징적인 요소들을 과도하게 부각시키는 캐리커처의 특징이 있다는 점만 지적하고자 한다)는 핵심적인 참조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하 내용은 생략]    

2011-05-17

김응수 감독의 신작 소식

지난 일요일 김응수 감독의 신작 첫 편집본을 보기 위해 충주에 들렀다. 충주시내에서 충주호 방향으로 차를 몰고 가다 마즈막재라는 곳을 지나면 왼편으로는 충주댐, 오른편으로는 목벌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온다. 목벌 쪽으로 방향을 잡고 한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이차선 포장도로도 끝이 나고 비포장도로가 이어지는 데 하루 세 번 이곳을 오가는 시내버스 종점 부근에 김응수 감독의 작업실이 자리해 있다. 지어진 지 30년 가량 된 오래된 단독주택으로 앞마당엔 한때 횟집으로 사용되었던 두 채의 가건물이 좌우에 위치해 있다. 거실에서 창문을 내다보면 세 그루의 정자나무 너머로 충주호반의 풍경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 

김응수 감독의 신작은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의 <요코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출발한 작품으로 제작준비단계에서는 <요코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알려졌었으나 현재는 <아버지가 있는/없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었고 최종판에서는 또 다른 제목이 붙여질 것이라 한다. 김응수 감독의 전작 <천상고원>(2006), <과거는 낯선 나라다>(2007), <물의 기원>(2009)을 지켜보아온 이들이라면 이미 짐작하겠지만, 이 신작은 <요코 이야기>를 극화한 것도 아니며 그 책과 관련된 사실들에 관한 다큐멘터리적 기록도 아니다. 70분 남짓한 1차 편집본을 보고 나서 든 개인적인 생각은, 풍경의 답사를 통해 일본이라는 국가의 내면으로의 여행을 시도했던 에세이 영화의 고전들 - 예컨대 크리스 마르케의 <태양 없이>나 빔 벤더스의 <도쿄-가> - 에 대한 한 한국 지식인의 영화적 응답이 아닐까라는 것이었다. 

이 영화엔 두 갈래의 여정이 교차되고 있다. 요코가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그녀 아버지의 고향 아오모리를 찾아나선 Q라는 인물의 여정, 그리고 한국남자와 결혼해 현재 충주에 살고 있는 마사코라는 여인이 아버지와 화해하기 위해 고향 고토로 가는 길에 동행한 P라는 인물의 여정이 그것이다. (김응수 감독 자신의 이중화된 동시에 중첩된 영화적 분신들이라고도 할 수 있을) Q와 P는 화면에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그들이 서로 주고받는 편지를 통해 존재를 드러내고 또 호명된다. 즉 이 영화의 내레이션은 전적으로 Q와 P가 주고받는 편지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편지와 여정의 기록들은 <요코 이야기>라고 하는 문제적 텍스트를 '해체'(deconstruction)하면서 쓰여지지 않은 여백의 역사들을 현재에 불러들인다. 

아직 영화가 마무리된 것은 아닌 만큼 성급한 결론은 피해야 하겠지만, 김응수 감독의 이 새로운 '충주영화'가 <과거는 낯선 나라다>(2007)와 <물의 기원>(2009)과 더불어 일종의 '역사 3부작'을 이루면서 그의 최근 경력을 중간결산하는 작품이 되리라는 건 확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