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19

전용의 계보: 당수태권도는 변증법의 정도(正道)일 수 있는가?


※ 2017년 10월 8일, 나는 이 블로그에 르네 비에네(René Viénet)의 유명한 상황주의 영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La dialectique peut-elle casser des briques?)>와 이 영화의 원전이라 알려진 홍콩영화 <당수태권도(唐手跆拳道)>, 그리고 이들 영화의 진짜 원전으로 추정되는 한국영화 <정도(正道)>에 대해 짧은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최근 연세대학교의 서현석 교수님으로부터 다음 호 《옵.신》에 이 블로그 글을 게재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이 글을 쓸 때 모아 두고도 활용하지 못한 자료, 그리고 자료를 검토하고 보완해야 할 부분 등이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이 기회에 전체적으로 관련 자료들을 재검토하고 글을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글을 쓰는 동안 조르주 페렉의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Un Cabinet d'Amateur)』을 종종 떠올렸는데, 건조한 보고서처럼 쓰여진 추리소설을 쓰는 기분으로 며칠 간 집과 영상자료원 및 도서관을 오가며 즐겁게 지냈다. (한 줄을 쓰기 위해 고심하고 또 고심하며 전전긍긍하곤 하는 비평문을 쓸 때와는 좀 다른 기분이었다.) 그 어떤 목적도 없는 순수한 즐거움을 위한 글쓰기. 2017년 당시에는 좀 불분명했던 몇 가지 점들도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다. 나로 하여금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에 활용된 영상의 출처에 관심을 갖게 한 남선우 씨, 그리고 전체적으로 글을 다시 정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서현석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조사한 내용들을 아래 정리해 보았다.




1973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La dialectique peut-elle casser des briques?)>는 가장 널리 알려진 상황주의 영화 가운데 하나다. 이 영화를 만든 이는 당시 스물아홉 살의 젊은 중국학 연구자이자 문화혁명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지닌 반(反)마오주의자였던 르네 비에네(René Viénet)였다. 그는 프랑스 회사 텔레몽디알(Télémondial)을 통해 홍콩에서 수입된 쿵푸영화 한 편의 사운드트랙을 프랑스어로 더빙하여 원작과는 전연 다른 내용의 정치적 영화로 탈바꿈시켰는데, 이로 인해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전용(détournement)의 방법론이 적용된 영화적 사례를 들 때마다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작품이 되었다. 

2017년 8월 17일, 나는 당시 일민미술관에서 근무하고 있던 남선우 씨에게서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저작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봐 줄 수 있겠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준비 중인 전시 연계 행사로 이 작품을 상영하고자 하는데 저작권자가 누구인지를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다지 까다롭지는 않은 일이라 생각해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고 검색을 하던 중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비에네가 전용한 홍콩영화는 두광치(屠光啟: 한국식 발음으로는 ‘도광계’)라는 감독이 연출한 것으로 알려진 <당수태권도(唐手跆拳道: 영어 제목은 ‘Crush’)>이다. 홍콩영화아카이브(www.filmarchive.gov.hk)에서 제공하고 있는 감독 정보에 따르면, 두광치(1914.8.26.~1980.5.30)는 중국 본토에서 태어났고 상하이에서 영화를 만들다가 1949년에 홍콩으로 건너갔으며, 1950년대 초반 쇼브라더스 ― 당시 회사의 명칭은 소씨부자유한공사(邵氏父子有限公司)였다 ― 의 중요한 감독 가운데 한 명으로 활약했다. <당수태권도>는 그의 마지막 연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어권 영화의 박스오피스 집계를 제공하는 중국표방(中国票房: www.boxofficecn.com)에 따르면, 이 영화는 1972년 6월 20일 홍콩에서 개봉되어 9일 동안 상영되었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 촬영된 것이고 출연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인이라는 점은 영화를 보면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가 1970년대에 횡행한 이른바 ‘한홍 합작영화’ 가운데 하나라고 추정해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작사에 대해 알아보다 보니 의외의 정보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영문 위키피디아 등에는 <당수태권도>의 제작사가 ‘Yangtze Productions’라고 되어 있다. 원어로 된 제 작사 이름에 양쯔강(揚子江), 혹은 장강(長江)이 들어간다는 것 정도는 추정할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정확한 제작사명을 가늠하기 어려워서 영화 제목과 감독 이름으로 중국어 바이두백과(baike.baidu.com)를 검색해 보았다. 곧바로 이 영화의 제작사는 ‘장강전영유한공사(長江电影有限公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홍콩영화데이터베이스(www.hkmdb.com)를 통해 회사의 정식 영문명이 실제로 ‘Yangtze Productions Ltd.’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수태권도>가 한국과 홍콩 제작사의 합작으로 ― 그 ‘합작’의 성격이 어떤 것이건 ― 만들어진 것이라면 혹시 한국영상자료원 데이터베이스에서도 무언가 자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검색해 보았지만 이런 제목의 영화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역시 이 영화는 호금전의 <산중전기(山中傳奇)>(1979)가 그러했듯 합작영화가 아니라 한국에 와서 이곳을 무대로 삼아 촬영한 외국영화였을 뿐인가?[1] 문득, 이 영화의 중국어 제목과 한국어 제목이 다를 수도 있고, 한국어로 된 자료에는 제작사가 ‘장강전영유한공사’라는 정식 명칭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설령 <당수태권도>가 합작영화라 해도 그것의 한국어 제목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제작사만을 단서로 삼아 ‘장강영화사’, ‘장강전영’, ‘장강전영공사’ 등으로 온라인 검색을 계속하다 보니 1973년 4월 5일 자 《중앙일보》에 실렸던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찾게 되었다.

제작사 한진흥업을 고발
문공부는 우리나라를 무대로 우리나라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당수태권도>라는 영화가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용공 단체의 선전영화로 둔갑, 상영되고 있다는 보도(3월 31일 자 본지 4면 게재· 《중앙일보》 파리 주재 주섭일 특파원 보도)에 대해 진상조사에 나서 이 영화가 합작영화가 아닌 순수한 우리나라 영화(제목은 <정도>)임을 밝혀내고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이 영화를 작년 말 홍콩 장강전영공사에 수출한 제작사 한진흥업(대표 한갑진)을 검찰에 고발했다. 한진은 제작에 앞서 장강과 7천 달러에 수출하기로 계약, 동남아지역 상영권만 양도하기로 했는데 수출신고 절차를 밟기 전에 한진이 장강에 필름을 반출, 장강은 다시 토키를 중국어로 바꿔 임의로 프랑스 좌파 단체인 계급투쟁촉진회에 이중 수출했다는 것이다.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원전인 <당수태권도>가 홍콩영화도 합작영화도 아니고 한국영화라고? 우선 확인할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이때 1973년에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가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상영되었을 당시 관객들에게 배포된 전단이 도움이 되었다.[2] 이 전단에 따르면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1973년 3월 8일부터 파리의 그랑조귀스탱 극장(Salle des Grands-Augustins)에서 하루 6회씩 상영되었고, ‘계급투쟁의 촉진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확산을 위한 협의회(l'association pour le développement des luttes de classes et la propagation du matérialisme dialectique)’가 제작한 프랑스어 자막이 입혀진 판본으로 상영되었다. (즉,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첫 공개 당시 오늘날 흔히 접하게 되는 프랑스어 더빙판[3]이 아니라 중국어 사운드트랙은 그대로 둔 채 ‘엉뚱한’ 프랑스어 자막을 입힌 판본으로 상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일보》 파리 특파원이었던 주섭일이 이 영화를 보고 쓴 기사가 발표된 날짜가 1973년 3월 31일이니 시기나 정황은 꽤 그럴듯하게 들어맞는다. 또한 위 기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계급투쟁촉진회’란 바로 ‘계급투쟁의 촉진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확산을 위한 협의회’를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당시 주섭일 특파원이 영화를 보고 나서 《중앙일보》에 게재한 글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에 대해 한국어로 쓰여진 첫 비평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프랑스서 공산주의 선전영화로 둔갑한 합작 무협영화
한국에서 로케 촬영한 <당수태권도>란 영화가 <변증법은 벽돌장을 깨뜨릴 수 있는가?>라는 선전 문귀와 함께, 완전한 공산주의 계급투쟁을 위한 영화로 둔갑, 파리에서 상영되고 있어 자유민주주의 한국이라는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있다. 아마도 한·중 합작이거나 아니면 한·향항[홍콩] 합작영화로 보이는 이 영화는 장강영화공사 제작으로 되어있는데 태릉·북악산의 장면이 허다하게 나오고 여자는 치마와 저고리, 남자도 저고리와 바지에 대님 그리고 갓을 쓴 한국인들이 연기의 주된 그룹을 이루어 토키와 수명의 주인공만 중국어, 중국인일 뿐 거의 한국영화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데도 이 프랑스어 선전 문귀가 보여주듯 계급투쟁을 묘사한 공산주의적 작품으로 상영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이른바 계급투쟁촉진회에서 수입 그랑·오귀스텡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 이 영화는 “공산주의의 유물변증법은 벽돌장까지 깨뜨릴 수 있으며 태권도의 주먹이 피압박 계급으로 상징되어 칼 등 무기를 가진 지배 계급과 대항, 지배 계급이 결국 패퇴하고 만다”는 것이 주제로 되고 있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중세기이며 일본인 복장을 하고 칼 찬 집단이 지배 계급인 관료로, 짚신에 한복을 입고 상투를 튼 태권도를 잘하는 집단이 국민으로 묘사돼 있다. 지배 계급의 관료 집단은 갓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국민들을 짓밟고 탄압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며 특히 태릉을 비롯, 한국의 고궁에서 결투하는 장면도 허다하다. 이 영화는 “이 같은 두 계급 간의 투쟁 속에서 다행히도 한 불굴의 태권도 도인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주인공이다. 비록 이 주인공의 철학이 미심쩍은 주관주의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역시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계급투쟁의 전위이다”라는 유력지 《르·몽드》의 평까지 받았다. 이처럼 공산주의 선전에 이용당한 영화 <당수태권도>의 토키가 중국어이기 때문에 원래의 내용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제작 의도와는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으며 프랑스의 많은 관람객들은 원 내용은 짐작도 않고 무조건 공산주의 선전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이 영화는 중공산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서부 활극일까?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비공산주의계인 Ngay-Hong[4]에 의해서 제작된 영화이다. 문제의 묘는 상황의식을 가한 자막의 번역이 이 비공산주의 영화에 색채를 바꾸게 한 데 있다. 즉 완전히 자막 번역을 임의로 해 관중을 오도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또한 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자막을 달아 이곳에서 상영 중인 이 영화가 한국에서 촬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국인들이 등장하고 특히 우리의 자랑인 태권도를 주제로 삼고 있다는데 더 큰 문젯점이 있다. 이 같은 한·중 합작영화가 수출될 경우 우리나라는 아무런 권한도 행사할 수 없는 것인지, 또 어떤 경위로 프랑스 좌파단체인 계급투쟁촉진회로 넘어간 것인지에 대한 진상조사가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최근 붐을 일으키고 있는 한·중, 한·향항 합작에 대한 재검토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무국적(?)인 듯한 이 영화는 한국의 주기인 태권도가 제목이며 한국 로케에, 한국복장에, 한국인이 등장하고 있는 만큼 이같이 오도되고 있는 자막 번역과 프랑스식 제목이 시급히 시정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이 영화를 본 한 교포는 “아무런 정치성이 없는 스포츠(태권도)영화를 외국의 용공단체가 임의로 자막을 조작하여 전혀 엉뚱한 계급투쟁의 영화로 둔갑시켜 놓은 사실은 용납할 수 없는 일로 제작 의도가 정확히 관중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시정조치가 필요하다”면서 격분을 금치 못했다.

<당수태권도>의 한국어 제목이 <정도>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곧바로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www.kmdb.or.kr)에서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아쉬운 일이지만 이 영화의 35mm 프린트는 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5] <낙조>(1968)와 <그림자 없는 여자>(1970)를 연출한 경력이 있는 강유신이 감독으로, 설태호 감독과 콤비를 이루어 ‘용팔이’ 시리즈 ― <역전출신 용팔이>(1970), <남대문출신 용팔이>(1970), <신입사원 용팔이>(1970), <위기일발 용팔이>(1971), <운전수 용팔이>(1971) ― 의 각본을 쓴 유일수가 각본가로 기록되어 있었고, 영화는 홍콩에서 개봉된 지 거의 일 년이 지난 후인 1973년 5월 12일에 개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개봉영화에 대한 광고가 종종 일간지에 실렸음을 고려해 개봉일 즈음의 일간지들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정도>의 세로 광고 몇 개가 실려 있었다. 이 광고를 통해 <정도>가 1973년 5월 12일 스카라극장에서 개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6] 


<정도>의 일간지 광고

<정도>의 개봉 포스터

<정도>의 제작사는 《중앙일보》 1973년 4월 5일 자 기사에 언급된 대로 한진흥업이다. 한진은 위에 언급한 ‘용팔이’ 시리즈 이외에도 서울 관객 37만 명을 동원, 1960년대 대표적인 흥행영화로 꼽히는 <미워도 다시 한 번>(1968)을 제작한 대양영화사가 전신으로, 1970년대 초반에 한진흥업주식회사로 영화사 등록 및 허가를 받은 곳이다. 궁금하기 짝이 없지만,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외국에 영화를 수출한 혐의로 제작사 대표 한갑진이 문공부의 조사를 받고 검찰에 고발당한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정도>가 극장에서 개봉된 경위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신문 광고 상단에 있는 “프랑스 파리에서 상영된 화제의 영화!”라는 문구가 보여주는 것처럼, 프랑스 상황주의자들에 의해 전용되어 상영된 사실을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기까지 하다. 여하간 <정도>라는 영화와 관련된 심의자료들(한국영상자료원 내 영상도서관에 방문 열람 가능)을 검토해 보면, 이 영화의 제작 관련 신고 내용 대부분이 허위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1972년 8월 5일에 시나리오 사전 심의 접수 신청을 한 이후 1972년 12월 23일에 영화 본편이 검열에 통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1973년 5월 12일에 스카라 극장에서 개봉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시기는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 있던 한국사회가 유신체제로 전환된, 한국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다. (그래서인지 감독의 이름이 ‘유신’이라는 사실이 쓸데없는 연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정도>의 심의자료들을 토대로 <정도>의 제작 심의 및 개봉과 관련된 일정을 당시의 다른 주요한 일들과 함께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70.03.17. 한진흥업주식회사 설립
1971.12.06. 국가비상사태 선포
1972.06.20. <당수태권도> 홍콩에서 개봉
1972.07.04.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08.05.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에 <정도> 시나리오 심의 접수
1972.08.14. 시나리오 심의 결과 보고 ※ “문제점 없음”으로 판정받음
1972.10.06. 문화공보부에 영화제작 신고서 제출 ※ 10월 11일에 제작 신고 수리 통보를 받음
1972.10.17. 대통령특별선언(10월 유신) 발표
1972.10.18. <정도>에 외국 배우 출연 승인 신청[7] 
1972.12.20. 문화공보부에 <정도> 본편 및 예고편 검열 신청서 접수
1972.12.23. <정도> 검열 통과[8] 
1972.12.27. 유신헌법 통과 ※ 대통령 직선제 폐지
1972.12.28. <정도> 예고편 검열 통과[9] 
1973.02.16. 제4차 영화법 개정(일명 ‘유신영화법’) ※ 영화사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전환
1973.03.08.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파리에서 개봉
1973.03.31. 한진흥업주식회사가 문공부에서 영화제작사로 신규 허가를 받음
                   《중앙일보》 파리 특파원 주섭일의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관련 보도
1973.05.12. <정도> 스카라극장에서 개봉


영화 <정도>의 중국어 판본인 <당수태권도>가 홍콩에서 개봉된 것은 1972년 6월 20일이다. 그렇다면 1972년 8월 5일부터 12월 28일까지 이루어졌던 <정도>의 심의 과정은 편집까지 이미 완료된 ― 물론 중국어 더빙판이 아닌 한국어 더빙판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을 수 있다 ― 영화를 두고 흡사 제작 예정인 영화인 것처럼 서류를 꾸며 진행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서는 우선 한진흥업과 장강전영유한공사 사이에 이루어진 매도 계약서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1972년 10월 18일 한진흥업이 외국 배우들의 출연 승인을 받기 위해 공보부에 제출한 신청서류에 첨부된 이 매도 계약서는 현재 국문본과 영문본이 모두 남아 있다.[10] 


한진흥업과 장강전영유한공사가 맺은 <당수태권도> 매도 계약서 영문본


국문본에 따르면 계약 체결일은 1972년 2월 27일이나, 영문본에는 “1972년 2월의 이 날(this day of February, 1972)”이라고만 되어있다. (국문본에 ‘27’이라는 숫자가 수기(手記)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영문본 계약서에서는 수기를 누락한 것으로 보인다.) 국문본에는 영화 제목이 ‘정도’라 되어 있지만, 영문본에는 ‘Tekondo’라는 제목과 함께 ‘正道’라는 한자가 수기로 함께 적혀 있다. 그리고 영화에 출연하게 될 중국계 홍콩영화 배우 세 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계약서에 표기된 바를 따르자면 ‘진홍렬(Chan Hong Ret)’, ‘백표(Bae Pyo)’ 그리고 ‘진호(Chan Ho)’이다.[11] 장강전영 측은 미화 7,000달러를 한진흥업에 지불하는 조건으로 향후 5년 동안 동남아지역 판권을 소유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이는 1973년 4월 5일 자 《중앙일보》 기사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 계약서가 위조된 것이 아니고 1972년 2월 말에 계약을 체결한 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한국영화계의 제작 관행을 고려할 때 홍콩 개봉일인 6월 20일까지 넉 달 정도의 기간에 영화를 제작해 납품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현존하는 <당수태권도>(혹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영상을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서울에서 겨울에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최후의 결투의 배경이 되고 있는 종묘(!), 그리고 야외 장면에서 종종 보이는 쌓인 눈과 배우들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을 확인해 보라.) <정도>/<당수태권도>가 촬영된 것은 12월 4일에 서울에 첫눈이 내렸던 1971년 말부터 1972년 2월 사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싶다. 그렇다면 <정도>가 <당수태권도>보다 뒤늦게 개봉된 이유와 관련해 두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먼저, 중국어 더빙이 되지 않은 편집본을 우선 홍콩 개봉일(1972년 6월 20일) 전에 홍콩에 보내고 한국어 판본은 추후 작업하기로 한 뒤, 문공부에는 수출계약을 맺고 제작 준비 중인 영화인 것처럼 꾸며 심의서류를 제출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당수태권도>는 한진이 수출한 <정도>의 중국어판이라고 보는 가정에 무게가 실린다.) 둘째로, 홍콩에서 편집본이 도착하기를 기다린 후에야 문공부의 심의 절차를 준비한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정도>의 수출계약은 허위라는 것이 된다.)

어떤 영화가 여러 개의 판본으로 존재할 때 어느 것이 원본에 가까운 것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각각의 판본을 대조해 보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정도>의 35mm 프린트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는 <정도>의 심의대본(영상자료원 관리번호 CKD016002. 방문 열람 및 출력 가능)을 참조해 이를 중국어로 된 <당수태권도> 영상[12]과 비교해 볼 수 있다. 


한국의 온라인 중고서적 사이트에서 거래되었던 <정도>의 검열대본 표지[13] 


이 둘을 비교해 보면, 한국어판 <정도>와 중국어판 <당수태권도>는 ‘거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도>의 심의대본에는 인물들의 대사 뿐 아니라 영화의 데쿠파주와 각각의 쇼트에 담긴 상황을 묘사한 지문이 꽤 상세하게 적혀 있다. 대사의 경우 어느 수준인가 하면 <정도> 심의대본과 <당수태권도> 영상을 토대로 더빙(혹은 자막) 작업에 임하면 한국어(자막)판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다. 특히 태권도장 사범 역을 맡은 방수일과 꼬마 임연 역을 맡은 조덕명의 경우,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그들의 입 모양과 심의대본에 적힌 대사가 일치한다. (한편, 중국 배우들의 경우 더빙 상태가 조악하기는 하지만 입 모양과 사운드트랙 상의 발음이 거의 일치한다.) 심의대본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은 행위나 액션이 영상에 보이는 부분은 있지만 심의대본에 없는 대사 부분이 영상에 있는 경우는 없다. 다음은 <정도>의 심의 대본에 묘사된 쇼트 구성과 <당수태권도>의 영상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쇼트 구성이 유사함을 보여주는 한 예다. (영상은 00:24:17~00:24:53 부분이며, 사진 아래의 캡션은 심의대본에 있는 지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고시다 칼을 휘두르면 공중으로 뛰는 황도 (스로모션)

땅바닥에 구르는 고시다 다시 일어난다 (스로모션)

황도의 하반신 (스로모션)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황도 양발차기 한다 (스로모션)

황도의 발에 얻어맞고 떨어지는 고시다 (스로모션)

황도 뛰어내리며 고시다의 칼을 뺏는다 (스로모션)


씬의 전개방식을 놓고 보면, ⓵ 심의대본 상의 12~13씬 부분(영상 00:25:42~00:28:44)과 14~17씬 부분(영상 00:18:51~00:25:42)이 <당수태권도>에서는 서로 순서가 바뀌어 있고, ⓶ 34씬의 뒷부분이 따로 잘려 나와 35씬 사이에 삽입(영상에서 00:53:07~00:54:41과 00:55:38~00:56:00 부분은 심의대본에서는 이어져 있는 하나의 씬이다)되어 있기도 하다. 이 두 부분을 제외하면 <정도>와 <당수태권도>의 씬의 전개는 완전히 동일하다. 내 생각에, 영화 전체의 흐름을 놓고 보면 <당수태권도>의 편집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두 경우 모두 <정도>의 심의대본에 묘사된 것과 전개를 달리함으로써 교차편집의 효과 ― ①의 경우 이어지는 18씬 및 19씬과의 관계 하에서, ②의 경우 34씬의 후반부가 35씬 내에 삽입됨으로 해서 ―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정도>의 심의대본에 부합하는 판본의 (현존하지 않는) 영화가 <당수태권도>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정도>/<당수태권도>가 한진흥업에서 홍콩 배우들을 데려와 제작하고 수출한 한국영화인지, 아니면 홍콩 감독이 한국에 와서 연출한 것을 위장 수출한 영화인지 단정 내릴 수는 없다. 한진흥업은 <정도>의 편집본을 장강전영유한공사에 보내고 또 그 편집본을 토대로 심의대본을 작성했지만 장강 측이 홍콩 개봉시 편집을 일부 수정했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장강이 <당수태권도>의 편집본을 한국에 보내고 추후 편집을 일부 수정해 홍콩에서 개봉했지만 한진은 애초의 편집본을 토대로 <정도>의 심의대본을 작성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앞서 인용한 《중앙일보》 1973년 4월 5일 자 기사는 한진이 1972년 말에 무단으로 홍콩에 필름을 반출했음을 문공부가 밝혀냈다고 전하고 있다. 이 기사대로라면 1972년 6월 20일에 홍콩에서 <당수태권도>가 개봉되었다는 정보는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1972년 말에야 홍콩으로 필름이 건너간 것이 사실이라면 ― <정도>의 심의서류 상에 기재된 일정대로 영화 제작이 진행되었고 11월 23일에 첫눈이 내린 1972년 말부터 촬영이 이루어졌다고 가정한다면 ― 불과 2개월, 길어야 3개월 사이에 한국에서 홍콩으로, 다시 홍콩에서 프랑스로 필름이 수출되고 ‘계급투쟁의 촉진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확산을 위한 협의회’가 제작한 상황주의적 내용으로 자막 처리까지 되어 1973년 3월 8일 파리에서 공개되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게다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당수태권도>에 그저 새로운 자막 혹은 더빙을 입힌 영화인 것만은 아니다.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와 <당수태권도>의 구성은 매우 상이하다. <정도>와 <당수태권도>의 구성이 대동소이함은 앞서 밝힌 대로다. 그런데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경우 (<정도> 심의대본에 있는 씬 번호를 기준으로) 11씬까지는 <당수태권도>와 동일하지만, 이후 돌연 23씬으로 넘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원본 영화의 구성을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 이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가 <당수태권도>의 사운드트랙 부분만을 바꿔놓은 영화라고 하는 널리 퍼진 견해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즉 르네 비에네는 프롤레타리아와 관료주의자의 대결이라고 하는 플롯을 전개하기에 걸맞은 방식으로 <당수태권도>의 구성을 재조정하고 거기에 프랑스어 자막(추후에는 더빙)을 입힌 것이다. 


<정도>의 오리지널 대본 표지


그렇다면 유일수가 썼다고 하는 오리지널 대본과 <정도>의 심의대본 및 <당수태권도>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 이 오리지널 대본 또한 한국영상자료원(관리번호 CKO015790)에 보관되어 있다. 심의대본 표지에는 강유신 감독이 같이 쓰여 있는 반면, 오리지널 대본에는 각본가 유일수의 이름만이 쓰여 있다. 영화 제작에 합류할 스탭들을 적게 되어 있는 내지에도 제작자 한갑진과 각본가 유일수의 이름만이 기재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공란으로 남겨져 있다. 오리지널 대본과 심의대본 모두 도입부에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이 쓰여 있다.

천구백십이년 한일합병 직후 일본 침략자들은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말살시킬 계책으로 민족 고유성이 있는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중의 하나가 태권도였다. 고구려 시대부터 전해온 한국 고유의 태권도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고 박치기로 벽돌을 박살냈다. 이러한 사실이 일제침략자들에겐 실로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 관헌들은 소위 그들 특유의 무리배들을 끌어들여 태권도 말살책을 시도했다. 이 영화는 침략자 일본의 태권도 말살정책에 항거했던 한국 태권도들의 우국 투쟁기록이다.

실제로는 한국 태권도장 사람들을 도와 일본 낭인 패거리에 대적하는 방랑객(오리지널 대본에서는 한국인이지만 심의대본에서는 중국인으로 바뀌어 있음)이 주인공인 활극에 가깝지만 대체로 내용에 부합하는 내레이션이다. 재미있는 것은 1972년 8월 14일 자 시나리오 심의 결과 보고서에는 꽤 다른 내용의 줄거리가 적혀 있다는 점이다. 다음과 같다.

한일합병의 전후하여 일인들의 행패가 날로 심하여 갔다. 그중에도 낭인들의 천인공로할만함은 날이 갈수록 극심하여졌다. 당시 한국의 기생은 정조와 시에나 또는 무술에도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다. 여기 소개되는 기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인들의 갖은 탄압을 받아오던 태권도를 몸소 배우면서 일인들과 맞섰다. 때로는 미소로 유혹도 해보고 때로는 실력으로 대결도 해보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뛰어난 솜씨가 있다 해도 결국은 여자였다. 그는 어느 날 일인들과 맞서서 싸우다가 죽게 됐다. 이를 본 태권도 도장생들이 일인과 싸워서 오만한 그들에게 옳은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얘기다.

여기서 주역으로 기술되어 있는 기생은 오리지널 대본에는 ‘여옥’, 심의대본에는 ‘김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조역 가운데 한 명이다. 이처럼 오리지널 대본과 심의대본에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장효진/황도, 이께다/고시다, 다나까/아끼야마, 강성현/송정현, 명희/봉아, 동구/임연 등)[14] 성격이나 역할은 거의 동일하며 극의 전체적인 플롯 또한 유사하다. 주인공의 국적이 한국에서 중국으로 바뀌어 있고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는 서로 간에 조금씩 다르지만 (이미 살펴보았듯 영화 <당수태권도>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편집본의 대사와 부합하는 <정도> 심의대본의 대사는) 현장에서 실제로 영화를 연출하는 동안 있을 수 있는 변경의 수준에서 머문다. 예컨대 ‘정도(正道)’라는 제목을 쓴 뜻을 가늠케 하는 대사가 등장하는 다음 부분(00:17:53~00:18)을 보자.


[오리지널 대본]

강성현: 여옥이, 말해봐라!
여  옥: 참는 것, 마지막 순간까지 참는 것이 태권도의 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강성현: 그렇지. 마지막 순간, 최후의 순간까지 참는 거야. 그게 태권도의 정도이다.

[심의대본]

송정현: 김려, 말해봐라!
김  려: 예! 참는 것! 마지막 순간까지 참고 또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송정현: 옳지! 마지막 순간까지 참고 또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이지!


꽤 표면적이기는 하지만 일제 시기 태권도장 사람들의 항일정신을 담은 <정도> 오리지널 대본의 내용, 유일수의 액션영화 각본가로서의 이력, 그리고 이상의 검토 내용 등을 종합해 보면 <정도>/<당수태권도>의 원작자는 <당수태권도>의 크레딧에 표기된 ‘예광(倪匡)/Ngai Hong’이 아니라 유일수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정도>의 심의대본과 <당수태권도>는 유일수의 오리지널 대본에 따라 촬영한 (현존하지 않는) 영화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결과물일 가능성이 크다. 

1973년 4월 5일 자 《중앙일보》에는 앞서 인용한 기사 이외에 주섭일 파리 특파원이 쓴 다음과 같은 기사가 함께 실려 있다.

불서 상영된 한국영화 <정도> 내용 왜곡 경위 진상을 조사 : 주불 한국대사관, 불 정부에 요청
주불한국대사관은 이곳에서 상영되고 있는 한국영화 <당수태권도>(원제 <정도>)가 프랑스어 자막이 엉뚱하게 표현됨으로써 본래의 내용을 왜곡시키고 있는 데 대해 진상을 조사 중이다. 주불한국대사관은 프랑스 문무성 관계당국에 우선 이 영화가 수입된 경위 및 프랑스 수입상사인 텔레몬달과의 계약 내용, 그리고 전혀 다른 자막을 붙이게 된 경위를 조사해 주도록 요청했다. 3일 대사관 공보당국자는 “본래의 내용과 전혀 상이한 자막을 단다는 것도 영화 윤리상 있을 수 없는데 더욱 계급투쟁을 고취하는 내용으로 둔갑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하고 “조사가 끝나는 대로 본국 정부에 보고하겠다”고 밝혔다.

그 조사결과는 어떠했을까? 무엇보다, <정도>/<당수태권도>의 감독은 과연 누구일까? 지금까지 검토한 자료들만으로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중국어 판본에서는 각본가의 이름이 유일수가 아닌 (홍콩 관객들에게 알려져 있는 작가인) 예광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감독 또한 두광치가 허위로 등재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강유신이 <정도>/<당수태권도>의 진짜 감독일까? 하지만 나는 강유신은 대명(代名) 감독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한진흥업의 위장 합작영화들로 추정되는 <혈보산천(血保山川)>(1972)의 설태호나 <사문(沙門)의 승객(僧客)>(1979)의 한국 측 감독으로 기록된 이영우처럼 말이다.[15] 내가 강유신이 <정도>의 감독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음의 자료 때문이다. 1975년에 영화진흥공사에서 펴낸 『영화백과: 제1집(映畫百科: 第1輯)』(영화백과편찬위원회 편집)을 보면 한진흥업주식회사를 소개하는 면이 있다. 한진이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목록에는 1972년부터 1974년까지 한진이 제작한 작품의 감독과 주연배우가 빼곡히 기재되어 있다. 감독도, 주연배우의 이름도 표시되지 않은 영화는 단 두 편, <정도>와 <혈보산천>뿐이다. 다만 <혈보산천>의 경우, 제작영화 목록 바로 옆의 수출영화 목록(사진의 왼쪽을 볼 것)에도 올라 있다. 그럼 <정도>는 왜 수출영화 목록에 올라 있지 않을까? 1973년 초에 프랑스에서 <변증법이 벽돌을 깰 수 있는가?>가 상영되고 이 사실이 《중앙일보》 보도로 알려지는 바람에 ‘불법’적으로 해외에 반출한 영화임이 드러나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감독도 주연배우의 이름도 없이 달랑 ‘정도’라는 영화 제목만 표시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로서는 그저 추측만 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영화백과: 제1집』의 한진흥업주식회사 소개면에 실린 제작영화 목록


몇 년 전, 두광치의 이름이 한국영화 연구자들 사이에서 다시 거론되게끔 한 사건이 있었다. 다만 한국식 발음으로 읽은 ‘도광계’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은 최초의 합작영화(한국-홍콩)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컬러 한국영화인 <이국정원(異國情鴛)>(1957)을 발굴해 그 복원판을 공개했는데, 두광치는 한국의 전창근, 일본의 와카스기 미츠오와 더불어 이 영화를 공동 연출했다. 이 영화는 이승만 정권 시절 정치깡패로 유명했고 ‘반공예술단’의 단장을 맡는 등 한국영화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임화수의 한국연예주식회사와 쇼브라더스(합작 당시에는 소씨부자유한공사)가 실제로 합작해 내놓은 결과물이었다. 결국 두광치는 실제 합작영화 한 편(<이국정원>)과 프랑스 상황주의자들에 의해 전용된 미심쩍은 합작영화 한 편(<당수태권도>)으로 기억되는 인물이 되었으니, 그와 한국의 인연은 참으로 기이하고 또 뒤틀린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국정원>의 포스터


<정도> 혹은 <당수태권도>는 원래 컬러영화다. 1973년에 프랑스에서 상영된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당수태권도>의 중국어판 프린트를 활용해, 중국어 사운드트랙은 그대로 둔 채 원래 영화와 무관한 프랑스어 자막을 입힌 것이었다. 하지만 이 프린트는 현존하지 않는다. 이 다음에 만들어진 것이 프랑스어로 더빙된 판본이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도 이것이다. 온라인에는 프랑스어 더빙판에 영문으로 자막 처리된 영상이 여기저기 올라와 있는데 흑백인 데다 레터박스 처리가 되어 있다. 이유인즉, 이 프랑스어 더빙/영어자막/흑백화면 판본은 르네 비에네가 <당수태권도>를 ‘전용한 것을 다시 전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1990년대에 비디오아티스트이자 영화작가인 키스 샌본(Keith Sanborn)이 만든 것이다. 자신의 비디오 작업 <노벰버(Novemeber)>(2004)에서 ‘전용한 것을 다시 전용’한 이 영상을 또 전용한 바 있는 히토 슈타이얼은 「순응주의로서의 에세이?」에서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작품의 작가는 누구인가? 영상트랙을 만든 중국인 감독들인가, 음성트랙을 만든 프랑스 감독인가, 아니면 필름을 흑백 비디오로 옮긴 익명의 인물인가?[16] 이 작품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 떠돌아다니는 협객을 보여주는 (…) 이미지는 그 자체로 소유권, 계보 및 기원뿐 아니라 작가성의 전통적 개념들에 반항하고 또 그에 도전하며 떠도는 반항아가 되었다.

Ⓒ 유운성, 2019


변증법적 후기

한진흥업의 한갑진 회장은 1998년 『우리 어머니처럼 살면 무엇이 두려우랴』라는 자전 에세이를 출판했다. 우리는 이 책에서 한진흥업이 영화사로 등록되기 직전 ‘대양영화사’로 있던 시기의 사정을 일부 가늠해 볼 수 있다. 한갑진의 회고에 따르면 <정도>의 각본가로 등재되어 있는 유일수는 “김일성대학에서 공부를 한 작가로 코미디물에 소질이 있”어 “대양영화사 전속작가로 채용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당시 서울 마포에 갓 마련했던 집에 “유일수 씨, 설태호 감독과 함께 기거하면서 새 작품을 구상했다”고도 한다. 그 새 작품이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용팔이’ 시리즈이다. 

그렇다면 <정도>는? 이 책의 232~236페이지에는, 한갑진이 <아빠하고 나하고>(이원세 감독, 1974)를 들고 1975년 가을 이란의 테헤란에서 열린 국제 아동영화제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파리에 들러 겪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거기서 우리는 <정도>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질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이미 <정도>와 관련된 기록 자료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이 영화와 관련된 한갑진의 회고는 왜곡된 기억, 그리고 약간의 과장과 거짓으로 얼룩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사이사이에 진실을 담고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직접 읽고 판단해 보라.

내가 파리로 가는 목적은 프랑스 영화 시장을 직접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몇 년 전 우리 회사에서 제작한 <정도>(正道=일명 ‘일격필살’)라는 영화를 프랑스에 수출했다가 수난을 겪은 일이 있었는데 그 수입회사인 드몽영화사[텔레몽디알(Télémondial)을 뜻하는 것으로 보임]를 찾아보려는 목적도 있었다. (…)
우리 회사 작품인 <일격필살>을 수입해 손해는 보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손을 저으면서 흥행 성적이 좋았다고 한다. 또 어떻게 프랑스 말로 더빙을 했느냐고 했더니 한국에서 보낸 영어 대본을 근거로 프랑스 정서에 맞게 조금 고쳤다고 했다. 그랬더니 관객의 반응이 좋아 흥행에 성공했노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흥행 성적이 좋다는 정보를 홍콩 오퍼상으로부터 듣고 수입했다는 말도 했다. 나는 한국에서 보낸 영어 대본에는 이마로 벽돌을 깨는 장면에 대사가 없었는데 어찌해서 ”공산주의 정신이란 이마로 벽돌도 깨는 것“이라는 대사를 집어넣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파리에는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젊은이가 많아서 그들의 입맛에 맞을 대사를 구사한 것이라고 답했다. 어이가 없었다.
프랑스에서 상영된 <일격필살>은 동양영화로는 크게 성공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파리에서 상영 중인 영화를 감상한 J일보 파리 특파원이 기사를 쓰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가 ”프랑스에서 히트한 한국영화 <일격필살>을 보니까 한국의 젊은이들은 공산주의로 무장돼 있기 때문에 이마로 벽돌을 깬다는 대목이 나온다“는 기사를 쓴 것이다.
그 보도가 나간 다음 날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경찰서 등 한국의 모든 수사기관에서 한진흥업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 대상자는 나 한 사람인데 조사하겠다는 곳은 세 군데나 됐다. 문공부에서도 덩달아 조사를 하겠다고 했다. 나는 몹시 당황했다. (…)
나는 [중앙정보부의] 어느 조사관실에 안내됐다. 조사관이 문공부에서 허가한 제목을 <정도(正道)>인데 수출 작품의 제목은 왜 <일격필살>이며 공산주의 운운은 어째서 튀어나오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영화 수출 경위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당초 영화 제목은 <일격필살>이었는데 문공부에서 제목을 바꾸라고 지시해 <정도>로 변경했고, 검열 대본에도 <정도(일격필살)>로 돼 있었다는 것과 프랑스에서 자국어로 더빙할 때 마음대로 공산주의 운운하는 대목을 첨가했다는 점 등을 말했다. 그리고 이 작품을 파리에서 한국 특파원이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한국영화가 해외에 알려졌고 해외 개척 가능성을 보인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내 얘기를 들은 조사관은 자리를 떴다가 한참 만에야 돌아왔다. (…) 그런데 조사관은 뜻밖에도 나더러 돌아가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언제 또 와야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연락이 없으면 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내가 다시 치안본부와 경찰서에서도 출두명령이 왔는데 거기도 출두해야 되느냐고 묻자 그는 중정에서 모두 연락해줄 것이니 좋은 영화나 열심히 만들라고 했다.



[1] <산중전기>는 한국의 세경흥업이 이 영화의 수입을 위해 위장합작 형식으로 서류를 꾸며 개봉한 영화로 알려져 있다. 세경흥업이 문화공보부에 <산중전기>의 합작영화 제작허가 신청서를 접수한 것은 1977년 8월 11일이다. 호금전의 원판은 191분에 달하지만 국내에서는 상영시간이 반으로 축소되어 한국어 더빙판으로 개봉되었다. 한국어판에는 다수의 공포영화를 연출했던 박윤교 감독이 공동감독으로 올라 있지만 사실상 이름만 빌려준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어판의 35mm 프린트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산중전기> 복원판은 2016년 베니스영화제를 통해 공개되었다.

[2] 2014년에 출간된 라울 바네겜과 제라르 베레비의 책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시작이다(Rien n’est fini, tout commence)』에 수록된 이 전단의 영문 번역은 www.notbored.org/BreakBricks.pdf 

[3] 더빙판의 오프닝크레딧 부분에는 여성 내레이터의 목소리로 프랑스어 더빙판은 ‘계급투쟁의 촉진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확산을 위한 협의회’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4] 1973년 3월 9일 자 《르몽드》 지에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원전과 관련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촬영된 리얼리즘적 서부극일까? 천만의 말씀, 비공산주의자 중국인인 Ngay-Hong에 의해 극동에서 연출된 상업적 서부극(Western réaliste tourné en Chine populaire? Pas du tout, western industriel réalisé en Extrême-Orient par un chinois non-communiste Ngay-Hong)”이라는 표현이 있다. 전거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주섭일은 바로 이 기사의 해당 부분을 거의 고스란히 옮겨 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Ngay Hong’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해 로마자로 표기한 것 같다. 그렇다면 대체 ‘Ngay-Hong’은 누구인가? <당수태권도>의 오프닝크레딧에는 편극(編劇: 각본)을 담당한 이가 한자로는 ‘倪匡(예광)’, 영어로는 ‘Ngai Hong’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예광은 김용과 더불어 홍콩의 대표적인 무협소설가로 꼽히는 작가이면서,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獨臂刀)>(1967)와 <13인의 무사(十三太保)>(1970) 등 장철과 긴밀하게 협력한 각본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Ngai Hong’은 통상 ‘Ni Kuang’이라 표기하는 그의 이름의 여러 로마자 표기 가운데 하나다.

[5] 2012년 12월 7일 자 《동대신문》을 보면 한진흥업의 한갑진 회장이 “소장하고 있던 한국영화 필름 127편 및 해당 작품들의 지적 재산권, 대본, 스틸사진, 영화 기자재, 비디오테이프, 영화 서적 등 관련 저작물 일체”를 동국대학교에 기증했다는 기사가 있다. 현재 이 자료들은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한진컬렉션(lib.dongguk.edu/local/html/3171)’이란 이름으로 보관되어 있는데, 웹사이트 안내에 따르면 한진흥업은 2012년 10월 15일 116건의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을 동국대학교에 양도했다. 그리고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은 이 가운데 84편의 영화를 대상으로 한국영상자료원과 저작권 대리중계 계약을 체결했다. 이 84편의 영화목록은 해당 웹사이트에서 PDF 파일로 다운받아 볼 수 있다. 이 목록에서 <정도>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한진컬렉션 소장자료들을 검색해 보면 <정도>의 비디오 녹화자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언어가 중국어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홍콩판의 비디오 녹화자료인 것으로 추정된다. 웹사이트에는 강유신과 더불어 도광패가 공동감독으로 올라 있는데 이는 한국식 발음으로는 ‘도광계’라 읽어야 할 ‘屠光啟’를 잘못 읽은 데서 초래된 오기로 보인다. 외부인은 열람이 제한된 자료로 분류되어있어 아직 확인하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6] 1977년에 영화진흥공사에서 펴낸 『한국영화자료편람: 초창기~1976년(韓國映畵資料便覽: 草創期~1976年)』에는 이 영화가 13일 동안 상영되어 28,258명의 관객이 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7] 흥미롭게도, 한진흥업은 1972년 10월 28일에 외국 배우 출연승인서 반환요청을 하고, 실제로 10월 31일에 공보부는 취하 처리를 한다. 반환요청 서류를 살펴보면 그저 “폐사[한진흥업]의 사정에 의하여”라고만 되어 있다. 그리고 12월 5일에 다시 출연승인서를 접수하고 12월 13일에 최종적으로 승인을 얻었다. 한진이 <정도> 본편 및 예고편의 검열 신청서를 접수한 것이 12월 20일임을 고려하면 매우 부조리한 일이다. 서류만 놓고 보면 외국 배우들의 영화 출연을 승인받고 나서 불과 일주일 만에 영화를 완성해 검열까지 통과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도> 본편의 검열 합격을 통보하는 기안문을 살펴보면 영화의 규격 및 수량은 35mm 프린트 9권이라고 명기되어 있고, “팔 잘리는 것”과 “입에서 피 흘리는 장면”을 삭제하고 “고시다 목욕하는 장면[은] 지나친 부분”이니 화면을 단축하라는 지시까지 적혀 있다. 10월 18일에 접수된 외국 배우 출연승인서와 12월 5일에 재접수된 출연승인서의 내용은 완전히 동일한데, 전자의 경우 한국 배우들(김석훈, 방수일)의 이름이 중국 배우들(진홍렬, 백표, 진호)보다 먼저 나오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중국 배우들의 이름이 먼저 기재되어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조건은 “연기자의 출연료는 양체회사[장강전영유한공사]에서 지불하고 촬영 중 제비용만 폐사[한진흥업]에서 지불”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8] 검열 통과 서류에는 검열 통과일이 12월 23일로 된 검열통제관 직인이 찍혀 있지만, 한진 측이 받은 영화검열합격증에는 12월 22일로 되어 있다.

[9] 검열 통과 서류에는 검열 통과일이 12월 28일로 된 검열통제관 직인이 찍혀 있지만, 한진 측이 받은 영화예고편검열합격증에는 12월 26일로 되어 있다.

[10] 장강전영유한공사는 국문본에는 ‘양채영화제작회사’로, 영문본에는 ‘Yangtze Productions Ltd.’로 표기되어 있다.

[11] 진홍렬(陳鴻烈, Chen Hung-Lieh)은 호금전의 <방랑의 결투(大醉俠)>(1966)에 출연하기도 했던 악역 전문 배우로 <정도>에서는 낭인 패거리의 우두머리 역할을 맡았다. <정도>의 주연을 맡은 백표(白彪, Jason Pai Piao)는 홍콩의 가예TV(佳藝電視)의 인기 드라마 <사조영웅전>(1976)의 주연을 맡아 이름을 알리는 한편 여러 무협영화에 출연했던 이로 <정도>의 개봉 포스터에는 ‘백호’라고 잘못 표기되어 있다. 진호(陳浩, Chen Hao)는 진홍렬의 형으로 <정도>에서는 낭인 패거리의 2인자 역을 맡았다. 사실 이 계약서 및 출연승인서에 기재된 중국 배우 목록은 허위라 할 수 있는데 <정도>에 출연하고 있는 중국 배우는 상기한 세 명 이외에도, 호인인(胡茵茵, Hu Yin-Yin), 노준곡(魯俊谷, Liu Chun-Ku), 리봉란(李鳳蘭, Lee Fung-Lan) 등 더 많기 때문이다. 극중에서 태권도 사범 송정현 역을 맡은 방수일 정도를 제외하고는 <정도>/<당수태권도>의 주역 및 비중 있는 조역들은 대부분 중국 배우들이 맡았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1972년 9월 6일부터 홍콩에서 일주일 동안 개봉된 <맹권(盲拳: 영어제목은 ‘Blind Boxer’)>은 한국의 합동영화가 합작 형식으로 제작했다고 하는 (한국판 포스터 정보대로라면) 장진원(한국)과 장삼(張森: 홍콩) 공동연출의<권왕의 복수>이다. 『한국영화자료편람』에는 <권왕의 복수>가 1972년 9월 1일에 검열에 통과한 것으로 나오지만 국내 개봉 기록은 없다. 한국에서 촬영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는 야외 장면들이 있는 이 영화에는 <정도>에 출연한 중국 배우들 가운데 백표가 주연으로, 그리고 호인인과 노준곡도 출연하고 있다. 홍콩판의 오프닝크레딧을 보면 제작사가 <당수태권도>의 ‘장강전영유한공사’(!)로 되어 있다. 각본 또한 <당수태권도>와 마찬가지로 ‘예광(倪匡)/Ngai Hong’이 올라 있다. 1972년 5월 12일에 서울의 스카라극장에서 개봉된 <혈보산천(血保山川)>은 신상옥의 안양영화가 제작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한진흥업의 위장 합작영화 가운데 하나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한국 개봉 당시 신문광고에는 설태호가 감독으로 올라 있다. 이 영화는 홍콩에서는 <용형호제(龍兄虎弟: 영어 제목은 ‘The Invasion’)>로 1972년 9월 8일에 개봉되었는데, 홍콩판 포스터에는 감독이 손가문(孫家雯)이라 되어 있다. 이 영화에는 <당수태권도>에 출연한 중국 배우들 가운데 백표, 진호, 노준곡, 호인인, 리봉란이 출연하고 있다. 제작사는 ‘장강전영유한공사’(또!)이고 각본가로는 예광이 올라 있다. 1972년, 장강전영유한공사, 출연진이 겹치는 세 편(혹은 그 이상의) 한국에서 촬영된 이른바 합작영화들. 여러모로 수상쩍은 구석이 있지만, 이들 영화와 <정도>/<당수태권도>의 관계에 대한 더 이상의 추정은 여기서는 삼가기로 한다.

[12] 유튜브(www.youtube.com/watch?v=ZmM2-SZV3Rs)에서 볼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이 글에서 영상의 타임라인을 언급할 때는 이 영상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 영상의 오프닝크레딧에는 ‘무적의 황(Huang der Unschlagbare)’이라는 독일어 제목이 붙어 있다. 

[13] 표지 중앙 오른쪽에 붉은색 펜으로 ‘72, 12/23’ 그리고 ‘72, 12/26’이라 쓴 것이 눈에 띈다. 본문과 주8 및 주9에서 밝혔듯 1972년 12월 23일은 <정도> 본편이 검열 통과된 날짜(검열 통과 서류 기준)이며, 12월 26일은 예고편이 검열 통과된 날짜(검열합격증 기준)이다.

[14] 한진흥업이 1972년 10월 18일에 문공부에 접수한 외국 배우 출연 승인 신청서 및 이를 취하하고 1972년 12월 5일에 다시 접수한 신청서에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오리지널 대본대로 기재되어 있으나, 영화예고편 검열 신청서(1972년 12월 20일)에는 심의대본대로 기재되어 있다. 

[15] 이 영화는 다름 아닌 호금전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공산영우(空山靈雨)>의 한국어판이다. <공산영우>는 <산중전기>와 더불어 호금전이 한국에서 촬영한 작품이다. <사문의 승객>은 주4에서 언급한 ‘한진컬렉션’ 가운데 하나다. 한국어판의 오리지널 네거티브는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저작권은 한진흥업으로부터 저작권을 양도받은 동국대학교에 있다.

[16] 히토 슈타이얼은 글에서 <당수태권도>의 감독을 ‘Doo Kwang Gee’와 ‘Lam Nin Tung’이라 적고 있다. 후자에 해당하는 임연동(林年同)은 <당수태권도>의 오프닝크레딧에는 한자로는 ‘製片’, 영어로는 ‘Production Supervisor’를 담당한 것으로 올라 있다. 한편,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흑백 영어자막 판본의 맨 끝에는 ‘Subtitles Ⓒ Keith Sanborn―1990’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슈타이얼의 실수일 수도 있지만, 이런 오류 자체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를 둘러싼 전용의 혼란스러운 계보를 패러디한 것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