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14

칼 드레이어의 <분노의 날>(1943)


(* 아래 글은 2012년 5월 11일(금)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칼 드레이어의 <분노의 날> 상영 후 진행된 강연을 위해 미리 준비했던 메모를 정리한 것이다. 전체 내용은 아니고 강연 후반부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다. 강연 전반부는 주로 <분노의 날> 제작과정에 대한 언급이었으며 여기서는 생략했다. 또한 <분노의 날> 제작 이후 드레이어의 행적에 대한 종반부의 언급도 생략했다. 강연시간이 50분 정도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쉽게도 미리 준비한 발췌영상을 보여줄 수 없었는데 대신 이 포스트에 DVD에서 캡처한 사진들을 올려 둔다. 또한 시간문제로 실제 강연시 생략한 몇몇 설명들을 덧붙였다. 강연 기회를 주신 한국영상자료원 측에 감사드린다.)


화형대 앞에서 : 칼 드레이어의 <분노의 날>(1943)


[...] <분노의 날>이 1943년 11월 덴마크에서 개봉되었을 당시 영화가 너무 "느리다"며 비판하는 평자들이 적지 않았다고 하는데, 드레이어는 이런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한 적이 있습니다. "빠른 편집은 무성영화와 관련된 것이다. 한 사람이 철로 위에 누워 있는데 열차가 다가오는 중이라고 하자. 무성영화에서라면, 관객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이 적절한 감정을 느끼게끔,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장면을 유성영화로 연출한다면 나는 열차는 아예 보여주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철로 위의 사람을 보여주고 열차는 사운드에 맡겨 두겠다. 그리고 한 쇼트 내에서 점점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답변은 <분노의 날>의 "느린" 페이스를 비판하는 이들에 대한 답변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이 변론에는, 드레이어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유성영화란 무엇보다 믿음의 문제에 달려 있는 것이라는 자각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열차의 사운드를 들려 주는 것만으로도 관객이 화면 바깥에 열차가 다가오고 있는 중이라는 점을 믿게  될 것이란 확신이 없다면 - 혹은 관객들이 그러한 믿음을 거부한다면 - 이 장면에서의 서스펜스는 작동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갑자기 쇼트가 확 바뀌면서 철로에 누워 있던 사람이 스튜디오 안에서 액션영화 촬영에 임하고 있는 배우임을 - 즉 그는 완벽하게 '안전'함을 - 보여주는 식의, 익숙한 트릭들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트릭은 관객의 믿음에 대한 기만 내지는 조롱에 기반한 것으로 - 때론  이런 트릭이 '자기반영적'이라는 식으로 제법 그럴싸하(지만 그릇되)게 이야기된 적도 있지만 - 이른바 '영화에 관한 영화'들의 도입부에서 흔히 쓰이곤 하죠.) 

이 영화는 덴마크의 나치 점령기인 1943년에 만들어졌고 그 때문인지 <분노의 날>을 나치 점령기에 대한 정치적 알레고리로 보는 견해도 있었지만 그런 건 손쉬운 사이비 비평의 가장 천박한 사례일 뿐이라 여겨집니다. 만일 <분노의 날>이 정치적인 영화라면, 그건 무슨 정치적인 사건이나 환경에 대한 알레고리여서가 아니라, 어느 때부턴가 - 유성영화가 탄생하면서? 혹은 2차 대전이 시작될 즈음에? - 영화가 변화되어 이미지/사운드의 관계는 물론이고 이러한 영화장치의 관계에 대한 관객의 믿음의 문제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따라서 영화가 굳건한 자기확신에 의해 지탱되었던 시절 - 이 시기를 드레이어는 무성영화 시기라고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은 지나가고 불확실성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받아들여야 함을, 이 <분노의 날>이라는 영화가 매우 강력하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분노의 날>이 이런 인식을 담은 최초의 영화라고 말할 생각은 없고, 굳이 말하자면 1933년, 그러니까 유성영화 초창기에 이미 프리츠 랑이 <마부제 박사의 유언> 같은 영화에서 그런 식의 통찰을 빼어나게 영화화한 바 있죠. 그런데 랑의 영화가 일종의 '진단'이었다면 이 영화는 일종의 '암중모색'(실험)이라는 점에서, 같은 해에 나온 로베르 브레송의 <죄악의 천사들>이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의혹의 그림자> 같은 영화들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영화라 하겠습니다.) 사실 몽타주란 쇼트들이 서로 관계될 수 있다 - 극도로 상징적이거나 모호한 수준까지를 포함해서 - 고 하는 영화장치(기계장치)의 자기확신의 결과이며, 이러한 자기확신이 붕괴되었을 때 컷(cut)이란 쇼트 간 관계의 여부를 전적으로 관객의 믿음에 거는 도박 비슷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자면, 한 쇼트에서 다른 쇼트로의 전환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비약'(salto mortale)이 되는 것이죠. 저는 이 불안의 결과로 나온 것이 (앙드레 바쟁의 논의로 대표되곤 하는) 롱테이크의 미학화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또한 이는 드레이어가 내놓은 <분노의 날>의 "느린" 리듬에 대한 변론을 제 식으로 이해한 바이기도 합니다.

내러티브 상으로 볼 때, <분노의 날>에서 믿음의 문제는 단 하나의 질문에 달려 있습니다. 다름 아닌 "마녀와 그녀의 주술은 존재하는가?"하는 것이죠. 가령 안느가 마녀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목사 남편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 그녀의 말이 실제로 주술적인 힘을 행사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아닌가의 문제에 달려 있죠. 극중 인물들이 마녀와 주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바와는 무관하게, 이 영화 자체는, 그리고 드레이어 자신은, 이 물음에 어떤 결정적인 답변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화 마지막에 가면 안느 자신은 그 말과 사건의 관계를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화형대가 기다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요. 시어머니가 안느를 마녀라고 단죄하는 것은 어떤 확신이나 믿음 때문이라기보다는 질투 때문인 것처럼도 보이며, 마르틴이 할머니의 말에 동조하는 것은 그저 두려움 때문인 것으로도 보이지만, 안느는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사건의 관계를, 그 주술적인 연관을, 진정 수긍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형식적으로, 드레이어가 이 믿음에 관련된 질문을 영화 속에 새겨넣은 방식은 무엇보다 교차편집에서 드러납니다.

[참조영상]  <분노의 날> 1:09:26 ~ 1:13:10 부분



교차편집은 상이한 공간에서 동일한 시간대에 벌어지는 두 사건 사이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서스펜스를 유발하기 위한 최적의 기법이었습니다. (물론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일 겁니다.) 그런데 드레이어가 <분노의 날>을 만들던 1943년 즈음이 되면 교차편집이 노리는 사건 간의 관계는 관객의 믿음이 없이는 성립불가능한, 무언가 불확정적인 것이 되어 버립니다. 죽음이 압살론의 가슴을 스쳐 지나간 것은 안느의 말의 주술적인 효과일까요, 아니면 방금 전 한 사제의 죽음을 목도한 데 따른 충격 때문일까요, 그도 아니면 노령의 압살론에게 다가온 자연적인 신체적 반응일까요. 드레이어는 안느의 말의 '주술적'인 효과를 강조하기 위한 어떤 특수효과도 없이 - 마녀가 등장하는 여타 호러영화들을 떠올려 보세요 - 그저 목사관에서 밀어를 주고받는 두 연인의 모습과 집으로 돌아오는 압살론의 모습을 단순한 편집으로 교차시켜 보여줄 뿐입니다(위의 캡처사진 참조). 주술이 작동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객의 믿음의 강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 강도에 따라 <분노의 날>은 어떤 이에게는 마녀가 등장하는 호러영화가 될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17세기의 정신적 암흑에 관한 유물론적 시대극이 될 겁니다. 이게 바로 제가 <분노의 날>이 불확정적인 영화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분노의 날>은 무성영화 시기에 발명된 가장 대표적인 편집기법 하나에 불확실성의 안개를 드리웁니다. 또한 이런 교차편집을 떠나 전체적인 구성을 살펴 보아도, 사제 하나가 병으로 죽어 가는 것이 화형대에서 죽은 노파의 저주 때문인지 우연인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말하자면 <분노의 날>은 내러티브 상의 핵심질문인 "마녀와 그녀의 주술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의 불확실성, 불가능성을 형식적인 수준에 새겨넣음으로써 영화 자체를 전적으로 믿음의 문제에 내걸고 있는 모험적인 영화입니다. 물론 이것이 안느가 마녀임을 믿지 않으면 <분노의 날>이란 영화에 대한 감상은 불가능하다, 는 식의 말이 아님을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다만 이 영화가, 어느 시기부턴가 영화가 떠안게 된 불안, 영화적 요소들간의 관계가 심리적이고 미학적인 수준에서 내재적으로 맺어지는 단계를 벗어나, 그러한 관계나 연관이 오직 영화와 관객 사이에서, 나아가 영화와 세계 사이에서 교환되는 믿음의 문제에 내걸리게 되는 불확정적인 영화에 대한 불안을 보여 주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을 뿐입니다. (전후의 현대영화들이 1950년대가 되면 신뢰의, 관계의 회복을 가능케 하는 '기적'(miracle)의 문제에 매달리게 된 것도 이상의 언급과 무관하지 않은 듯 합니다. 특히 1954년이 아주 주목할 만한 해입니다. 이번에 상영되는 드레이어의 <오데트>부터 미조구치 겐지의 <산쇼 다이유>,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이 모두 같은 해에 발표되었죠.)

안느라는 인물은 바로 그러한 불안이 내러티브상에서 구체화된 인물이죠. 어떤 면에서 안느는 (불안의) 영화 자체이자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이기도 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엔 분명한 분리가 있죠. <분노의 날>에는 이 점과 관련해 매우 아름다운 장면 하나가 등장합니다(아래 캡처사진 참조). 자수 틀을 사이에 두고 안느와 마르틴의 모습이 차례로 보여지는 부분인데요. 자수 틀(프레임)과 천(스크린) 너머의 안느의 모습은 완벽하게 영화적인 메타포라 할 수 있죠. 한편 자수그림의 비너스 옆, 에로스가 있어야 할 자리에 놓인 마르틴의 모습은 안느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연인이기도 한 그의 위치를 암시합니다. 앞선 쇼트에서 안느가 하나의 영화적 프레임/스크린으로서 보여졌다면 여기선 그녀가 관객으로서 프레임/스크린에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투사하고 있는 겁니다. 안느의 자수그림에서 에로스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안느와 마르틴이 서로 번갈아가며 상대방을 위치시키는 그 자리, 그 욕망의 자리는 지금껏 제가 말해 온 믿음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안느의 자수는 믿음의 개입을 통해서만 작동되는 불완전한 영화와 꼭 닮았습니다. 


  
처음에 안느는 한 명의 관중 내지는 관객으로서 마녀를 지켜보았을 뿐입니다. 마을의 노파가 화형당할 때죠. 그러다 영화 마지막에 가면 우리라고 하는 관객 앞에서 한 명의 마녀로서 자신을 인정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드레이어는 마녀/안느를 바라보는 디제시스 상의 어떤 관객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단 한 번, '죽은' 압살론의 얼굴이 인서트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오직 안느를 보여주는 단 하나의 쇼트가 존재할 뿐이고 관객은 우리 외에는 없습니다. 사랑에 빠진 순간에조차 검은 옷으로 온 몸을 휘감고 있던 그녀가 스크린처럼 새하얀 옷을 입고 거기 그렇게 앉아 있습니다. 이때만큼은 영화(안느) 스스로가 자신은 주술을 걸 수 있는 존재임을 다시 믿게 되는 순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전적 자기확신의 영화는 얼마 후면 화형대에 매달리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