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5

전장(戰場)으로서의 스크린, 장르와 풍경 사이에서
: 이만희와 한국영화의 원점

 

※ 1967년에 개봉한 <원점>은 이만희가 만든 51편의 영화 가운데 29번째 영화다. 이 해에만 그는 무려 열 편의 영화를 개봉했다. 1961년에 데뷔한 그는 1931년생으로 프랑스의 누벨바그나 일본의 전후파 세대와 비슷한 또래다. 누벨바그 세대는 텔레비전 시대가 열린 이후 영화계에 들어온 세대인데, 한국의 경우는 텔레비전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이 1970년대부터이니 그들과는 사정이 좀 달랐다. 일본의 전후파와 달리 이만희와 같은 한국 세대는 이십 대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에 군에 입대해 4년 넘게 근무했다. 무엇보다 이만희의 세대에게는 누벨바그나 전후파와 달리 극복해야 할 선배 세대가 없었다. 

이만희의 작업은 영화적 형식과 한국적 풍경의 조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국영화가 겪은 곤란을 첨예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형식은 고전적 할리우드를 변용한 것일 수도 있고, 당대의 모더니즘을 차용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장르영화를 혼용한 것일 수도 있다. 이만희의 필모그래피에서는 이러한 형식들이 모두 감지되지만 하나같이 한국적 풍경과 모종의 어긋남의 관계에 놓인다. 아래는  2024년 6월 22일 토요일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원점> 상영 후 한 시간 정도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강연에서는 특히 장르영화의 형식과 한국적 풍경의 불화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해 보았다. 



지금 보고 계시는 것은 <원점> 후반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주인공인 신성일과 문희가 눈 덮인 산을 오르는 가운데 숨어 있던 킬러 이해룡이 신성일을 겨누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다룰 주제로 내세운 것(“전장으로서의 스크린, 장르와 풍경 사이에서”)을 예시하기에 좋은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골라 보았습니다. 한 편에는 연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총이 있습니다. 연인들은 풍경 속을 배회하고 총은 장르를 재촉합니다. 문제는 이만희가 속해 있던 시기의 한국영화에서 그 둘이 공존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런데도 이만희는 그 둘이 공존하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는 거죠. 말하자면 긴장감 넘치는 산책. 한없이 느긋한 범죄.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공존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전투. 그러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으로서의 스크린. 

이만희의 연인들은 온전히 가까워지기를 망설이며 종종 풍경 속을 배회합니다. 1968년에 만들어졌지만 당시에는 공개되지 못했고 2005년에야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된 걸작 <휴일>이 대표적이죠. 그런데 꼭 연인이 아니어도 무방하고 어떤 죄책감이나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면 무방합니다. <원점>의 신성일은 자신이 영화 초반에 한 경비원을 죽게 했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입장에서 이 죄책감은 납득이 안 됩니다. 때로 이만희 주인공의 죄책감이나 강박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거의 혹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이만희의 유작으로 남은 <삼포 가는 길>에서 김진규가 그런 인물이죠. <원점>에서 우리는 신성일이 무엇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해요. 그가 셔터를 내려 경비원을 죽인 게 아니라 경비원 자신이 내린 셔터를 빠져나오려다 죽게 된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신성일은 자신이 괜히 살인자로 몰릴 것을 걱정할 수는 있어도 사장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살인한 데 대한 죄책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부조리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자신의 것이 아닌 죄책감까지도 떠맡는 것, 그래서 풍경 속을 배회하게 되는 것, 이만큼이나 이만희적인 인물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초기의 이만희 영화인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도 북한군인 형이 저지른 살인의 죄책감을 떠맡는 최무룡 같은 인물이 이미 등장하고 있어요. 최무룡이 배회하는 풍경은 한국전쟁의 전장입니다. 이런 모티브가 확실히 이만희스럽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만희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원점>의 시나리오와 완성된 영화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해요. 이번에 강의를 준비하면서 <원점>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거기서 주인공은 자기를 쫓아온 회사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난 살인자는 아니오! 그 영감은 자기 손으로 내린 샷타에 눌려 죽은 거요!” 경비가 죽었는데 자기가 누명을 쓸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죠. 그리고 회사 입장에서도 회사에 피해가 갈 것 같으니 주인공을 멀리 숨어 있게 한다는 설정이었죠. 그러니까 살인의 죄책감을 떠맡는다는 건 분명 시나리오에는 없고 완성된 영화에만 나타나는 매우 이만희다운 설정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죠. 굳이 자기가 느끼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죄책감까지 느끼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심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만희 영화에서는 꼭 필요한 설정을 가지고 가는 인물이 바로 신성일이죠.



이 시나리오를 쓴 김지헌은 이만희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는 <만추>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분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문예영화로도 알려져 있지만 통상적인 문예영화처럼 원작 문학작품을 각색한 것이 아니라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만들어졌어요. 김지헌 작가는 이만희 감독과는 <만추>와 <원점>, 그리고 역시 필름이 남아 있지 않은 <얼룩무늬의 사나이>까지 세 편을 함께 했습니다. 이건 <원점>의 크레딧인데요. 김지헌의 각본을 이만희 감독과 1966년부터 1970년까지 긴밀하게 작업했던 시나리오 작가 백결이 윤색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원작자로 되어 있는 작가 전지현에 대해서는 국립중앙도서관 등의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봐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인물이 쓴 <원점>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이 시기 한국영화에서 드물지 않은 거짓 크레딧이라고 추정되는데요.

영화 <원점>을 보다 보면 구성 자체가 짜임새가 있다기보다는 다소 임의적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적지 않아요. 앞뒤가 안 맞는 부분도 있고, 장면이 바뀔 때 톤이 너무 급격히 바뀐다고 여겨지는 부분도 있는데 그게 또 이 영화의 매력이기는 하죠. 영화 초반부에 사장은 신성일에게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자청한 것이 네 놈이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저놈을 없애지 않으면 7년 간의 비밀이 폭로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영화를 보다 보면 이만희와 각본가는 이 은혜는 어떤 은혜인지, 7년 간의 비밀은 어떤 비밀인지 아예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리고 이 조직은 문희에게 신성일과 설악산에서 시간을 보내라고 하면서 어떤 임무를 주겠다고 하는데 이 임무가 딱히 무엇인지도 명확하지 않아요. 나중에 문희가 신성일에게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때 정말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이상한 건 도피성 여행인데 왜 3일만 있어야 되는지도 알 수 없어요.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보면 이런 설정은 없거든요. 그냥 거기 가서 당분간 숨어 있으라고만 하죠. 여하간 이런 모호한 부분들을 이 영화는 그냥 내버려 둡니다. 이만희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기 전에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2006년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이만희 감독 전작전을 연 적이 있는데, 당시 영상자료원은 현재 이곳이 아니라 서초동에 있었습니다. 전작전이라고는 해도 당시 남아 있던 전작이라 그 이후에 추가로 발견된 영화들이 더 있습니다. 당시 진행한 인터뷰에서 백결은 이렇게 밝힌 바 있습니다. [강연 당시 자리하셨던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장님께서는 아래 인터뷰에서 백결이 '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충무로에서 관행적으로 시나리오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고 일러 주셨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스릴러라기에는 어쩐지 조금 나른한 리듬은 이런 작업 방식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죠. 이만희와 백결은 원래의 시나리오에서 인물과 설정을 일부 가져왔을 뿐 사실상 아예 다른 전개로 영화를 만들었어요. 김지헌의 시나리오에는 신성일이 연기한 주인공 이름이 이석이라고 명기되어 있고, 주인공이나 다른 인물이 그 이름을 말하기도 하는데요. 영화에서는 신성일의 이름이 아예 불리지를 않죠. 간혹 이 영화에 대한 리뷰들에서 (당시의 심의용 대본에 의거해) 주인공 이름을 석구라고 쓰는 경우도 있는데 영화에서 신성일의 이름이 불리는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래서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형사들이 문희에게 신성일의 이름을 아느냐고 하니 모른다고 하는 게 성립이 되죠. 즉, 여기서 신성일은 이름 없는 존재라는 것도 이만희의 연출이에요. 원래의 각본에서 신성일과 문희는 첫날 곧바로 육체 관계를 맺고 이후 애정 표현도 아주 노골적으로 하는데 영화에서 신성일은 이만희 특유의 성적 망설임을 지닌 남자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가장 대담한 건 총기의 등장인데요. 영화의 도입부에서부터 대단히 비현실적이게도 건물 경비원이 총기를 들고 나오는데, 이런 설정은 이만희가 이 영화를 얼마간은 무국적적 장르로서도 고려했다는 것이겠죠. 하지만 원래의 시나리오에는 총기라는 것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이런 도입부는 아예 없습니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이미 경비원은 죽었고, 주인공이 스파이 노릇을 하다 사람을 죽였다는 걸 알게 된 회사 사람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요.

영화의 도입부는 완전히 이만희의 창작물이에요. 거의 대사가 없이 전개되는 이 도입부는 2006년 전작전 당시 이 영화를 처음 접한 영화광들에게 그야말로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시퀀스였어요. 1960년대 한국영화에 이런 순간이 있었다니, 하는 거였죠. 그런데 또 도입부가 지나고 나면 '응? 도입부를 보면서 생각한 거랑 영화가 좀 다른데?'하는 느낌도 받았고요. 이 도입부의 주요 장면을 이루는 것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한밤에 신성일과 경비원이 벌이는 결투인데, 이것은 영화 종반부에서 설악산의 계단을 무대로 펼쳐지는 결투와 호응하죠. 여기서도 또 총이 등장하고 암살자가 이 총에서 발사한 탄에 맞아 신성일은 죽게 됩니다. 도입부와 종반부는 모두 장르적 쾌감이 극대화된 시퀀스이면서 한편으로는 이곳이 한국이라는 단서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의 부재를 특징으로 한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저는 오늘 풍경이라고 말할 때 그저 자연 풍광을 염두에 두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저는 이 용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용법과는 조금 다르게 쓸 겁니다. 저는 풍경을 이런 뜻으로 사용할 겁니다. 도시와 자연을 막론하고 어떤 장소의 구체적인 생김새를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을 특징 짓는 몸짓과 말과 동작을 드러내는 것으로요. 딱히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부득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는데요. 굳이 부연하자면, 우리가 흔히 '경관'이라고 말하는 것과 '풍속'이라고 말하는 것을 섞어서 '풍경'이라고 부르려 한다, 정도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토요일 오후 비 오는 날 한국영상자료원 앞의 풍경이라고 말을 할 수 있겠죠. 이런저런 건물들이 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걸 보면 떠오르는 인상이 있습니다. 잘 바라보고 있으면 2024년 한국 사람들의 어떤 습속이 보이기도 할 거고요. 하지만 오늘 강의에서는 풍경이란 단어를 다음과 같이 쓰지는 않을 거에요. 오늘 밤 하늘의 풍경, 작년 이맘때 태평양의 풍경, 이런 식으로는요. 이건 경관일 수는 있는데 풍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요.

<원점>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설악산에서 촬영된 눈 덮인 설산은 꽤 추상적인 영화적 무대를 제공하죠. 1960년대 당시 설악산의 자연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도 이국적이었을 거에요. 1960년대는 설악산과 제주도 같은 곳이 비로소 막 국내 관광의 명소로 개발되기 시작했던 때죠. 설악산이 관광 명소로 개발된 것은 분단 이후에 금강산이 갈 수 없는 곳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일반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곳을 그 대체 장소로 삼으면서라고도 하죠. 

이 영화에서 설악산관광호텔에 모인 관광객들은 이 익명적인 자연적 풍광을 삽시간에 다소 우스꽝스러운 느낌의 현실로, 한국적 풍경으로 돌려놓습니다. 영화에서 보신 것처럼 당시 설악산관광호텔은 십 수 개의 객실밖에는 없었고 이곳에 온다는 것, 그리고 영화에서 산부인과 의사 부인의 대사 중 “비행기에서부터 눈독을 드리든데 왜 이러죠?”라는 말이 있는데, 심지어 비행기를 타고 온다는 건 상류층의 매우 호화판 관광으로 간주되던 때죠. 지금으로 치면 일본 홋카이도로 여행을 가는 것 정도로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호사스럽게 느껴지는 수준이었을 거에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줄 때 <원점>은 돌연 풍속화적인 느낌을 띱니다. 신성일과 문희가 처음 소개되었던 도입부와 비교하면 아주 차이가 커요. 저는 이런 의미에서 한국적 풍경이라는 것을 우리가 떠올려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만희의 도전은 이런 거라는 거죠. 이런 풍속화적 느낌을 주는 한국적 풍경 속에서 영화적 장르를 성립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거요. 이건 훗날 송능한의 <넘버 3>에 의해 다시 건드려지고  봉준호나 박찬욱 같은 감독에게로 이어지는 도전인데, 봉준호는 과감하게 한국적 풍경을 거듭 정면돌파하는 방식을 취하고, 박찬욱은 <공동경비구역 JSA>와 <복수는 나의 것>에서 그걸 시도하다가 결국 돌파하지는 못하고 이후로는 우회해버리는 방식을 취하게 되죠.

그리고 설악산관광호텔이라는 장소는 반쯤은 이국적인 느낌이고 반쯤은 한국적인 느낌을 주는 공간이어서 풍경과 장르를 함께 고려하기에 더할 나위 없죠. 원래의 시나리오에 이미 설정되어 있는 이 장소를 영화에서도 이만희가 그대로 고수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호텔에 모인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동들이 있잖아요? 라디오를 듣는데 거기서 피임약 광고가 나온다든지, 관광객들이 호텔에 도착하자 발레단이 나와서 환영의 춤을 추는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원래 시나리오에 있었어요. 이런 풍속화적인 것들은 이만희가 영화에 고스란히 끌어오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죠. 그럼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 장소는 어떻게 비칠까요? 설악산이라는 장소를 오롯이 풍경화해버린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 같은 영화가 나온 지도 사반세기가 넘었는데 말이죠.

문제는 이만희의 장르 감각이 무국적적이라는 데 있어요. 이만희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는 분명 장르영화의 세계에 매혹된 사람이지만, 그리고 전쟁영화, 공포영화, 스릴러영화, 혹은 어쩌면 서부극 등에 대단히 관심을 가진 사람이지만, 이런 남성적 장르들을 한국적 풍경 속에서 사고하는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그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마의 계단>을 만든 사람이 아니냐, 라고 반문하는 분이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전쟁영화의 주요 무대, 즉 전장은 엄밀히 말하자면 풍경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전쟁영화는 서부극과 유사한 종적 특성을 띠죠. 서부극의 황야는 꼭 미국의 서부여야 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서부극이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에서, 심지어 소련(이른바 '레드 웨스턴')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에요. 여하간 인천상륙작전을 촬영하기 위해 굳이 인천에 갈 필요가 없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죠. 대략 바닷가에서 찍고 그곳을 인천이라고 명명하는 것으로 충분해요. 왜일까요? 전쟁영화의 배경은 사실 지명으로 일컬어지는 경관이기 때문이죠. 이만희 감독은 특히 전쟁영화 장르를 선호했고 열 편이 넘는 전쟁영화를 연출했어요. 혹시 이것은 전쟁영화의 풍경 아닌 풍경, 즉 풍경이라기보다는 경관적 특성을 띤 배경이 자신의 장르적 감각을 발휘하기에 적절하다고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만희의 뛰어난 스릴러 <마의 계단>은 세트장에서 대부분이 촬영된 영화입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마의 계단>은 흥미진진한 장르영화들이지만 어디까지나 한국적 풍경의 회피 속에서 이루어진 성취입니다. 

그런데 딱히 풍경 특정적이지 않은 남성적 장르영화에 매혹된 한국 감독이 한국적 풍경에서 그 장르가 존립하게끔 하려고 할 때 겪는 곤란은 딱히 이만희만의 것은 아니겠죠. 그건 한국영화라는 것이 탄생한 이래 거의 모든 한국감독들이 겪었던 곤란입니다. 하지만 <원점>의 이만희처럼 그 곤란 자체를 주제로 삼아 스크린이라는 전장에서 풍경과 장르의 대결을 보여준 대담한 감독은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오늘 강연의 제목을 생각하면서 부제를 “이만희와 한국영화의 원점”이라고 붙인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한국영화가 이런 곤란을 온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돌파한 것은 21세기 들어서서, <살인의 추억>과 <괴물>의 봉준호 같은 감독을 통해서일 겁니다. 한국적 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연쇄 살인극, 한국적 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몬스터 무비. 그런데 이만희 및 그와 동세대 감독들과 봉준호 및 그와 동세대 감독들의 차이라면 이런 거겠죠. 한국영화계의 상황이 그야말로 처참하던 때라 전자는 후자와는 달리 숙고하고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요. 그러니까 백결의 인터뷰에서 감지되는 것처럼, 일단 가자, 그리고 어찌 되는지 보자, 하는 식으로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이런 상황은 이만희의 연출작 수만 고려해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점>은 이만희가 만든 51편의 영화 가운데 29번째 영화에요. 이렇게 보면 이만희가 이때까지 꽤 오래 작업한 감독처럼 들리지만, 그는 1961년에 <주마등>으로 데뷔했어요. <원점>이 나온 게 1967년이니 6년 동안 29편의 영화를 찍었던 거죠. 그리고 <원점>이 발표된 해에 개봉된 이만희 영화만 고려해도 무려 10편이에요. 



<원점>을 떠올려 볼까요? 도입부의 경우 실외 촬영분은 어둠이 내린 밤거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옥상에서 밤거리를 내려다보며 찍은 숏을 보면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과 주변 건물의 네온사인 등이 보이지만 빠르게 패닝으로 이동해서 정확히 식별할 수는 없어요. 종반부의 설악산 계단은 실제로는 금강굴로 가는 길이지만 그저 험준한 악산 어디라고 해도 무방하겠죠. 바로 이런 배경, 이걸 풍경이라고 한다면 완전히 익명화되고 추상화된 풍경, 이런 곳에서 이만희의 장르적 감각은 극대화됩니다. 

그런데 이만희의 다른 한 극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풍경의 영화를, 무엇보다 한국이라는 풍경을 가로지르는 영화를 찍는 거에요. 하지만 이 풍경은 종종 서사를, 이야기를 지연시키는 것입니다. 혹은 서사의 방향을, 이야기의 방향을 아예 딴 데로 돌려놓기도 하고, 인물들을 뚜렷한 이유 없이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장르에 장애가 되는 풍경입니다. 신성일을 죽이려고 온 암살자가 입산하는 가운데 돌연 지배인이 “여기서부터는 금엽구역(사냥이 금지된 구역)입니다. 총은 제가 보관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암살자는 순순히 총을 내어놓은 매우 현실적인 한국적 상황이 묘사되고 있는 것도 이런 점에서 재미있습니다. 액션이 펼쳐지려는 순간에 고민하게 만들고, 서스펜스를 불러일으켜야 하는 순간에 실소가 터지게 만들고, 무시무시하고 소름 끼쳐야 하는 것을 서글프게 만듭니다. 

물론 해결책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예 장르를 포기하고 풍경에 천착하면 됩니다. <휴일>은 그렇게 만들어진 걸작입니다. 그런데 <원점>에서 이만희는 장르라고 하는 극과 풍경이라고 하는 극을 시작부터 나란히 제시하고는 과연 영화가 어떻게 될지 보자 하는 식으로 모험을 감행합니다. <원점>은 <마의 계단>이나 <휴일>만큼 완벽한 영화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 훨씬 흥미진진한 영화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야말로 풍경과 장르 사이의 전투가 펼쳐지는 전장으로서의 스크린을 눈앞에 마주하게 되죠. 생각해 보세요. <마의 계단>과 <휴일>을 하나의 영화에서 같이 보게 되는 것을요. 그야말로 동시상영으로서의 영화. 그것이 성공이냐 실패냐의 여부와 상관 없이 영화를 보는 사람을 정말 흥분시키는 건 이런 도전이거든요.




영화광들을 사로잡는 저 기나긴 프리크레딧 시퀀스, 풍경 없는 장소에서 펼쳐지는 이만희의 장르적 액션 연출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퀀스가 끝나고 나면, 제목과 출연진과 제작진의 이름이 닫힌 셔터 위로 차례로 뜨고, 돌연 이만희식 풍경의 영화가 훅 나타납니다. 조선호텔 인근 소공동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문희의 모습이 보이죠. 주변 건물들의 간판과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든 것이 구체적이어서 1960년대 서울의 풍경을 떠올리기에 손색이 없죠.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다시 신성일이 그에게 서류를 훔쳐올 것을 의뢰한 자들과 언쟁을 벌이는 장면이죠. <원점>에서 본격적으로 대화다운 대화, 대사다운 대사가 나오는 건 영화가 시작되고 거의 18분이 지난 바로 여기서부터입니다. 



이쯤에서 잠깐 이만희 식으로, 아니 <원점> 식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가겠습니다. 지금은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사라진 이만희 영화 가운데 하나인 1964년 작품 <추격자>에 대한 것인데요. <원점>보다 3년 전에 개봉된 영화죠. 영화는 7월 9일에 개봉했는데 7월 22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도입부의 새 시도 무언극. <추격자>: 증기기관차가 달려오는 오프닝의 첫 카트, 가마니를 산적한 괴뢰군 트럭과 놈들의 검문소, 이어서 나타나는 빨갱이들의 총살형장, 사형수들이 달구지로 끌려나와 담벽 앞에 세워지고, 기관차 통과시의 굉음에 겹쳐 백연을 토하는 총구와 픽 쓰러지는 사람들, 이러한 서두가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거칠은 효과음만으로 서스펜스를 높여가는데 타이틀백이 나올 때까지 무언극이 장장 20분. 우리 영화로선 보기드문 시도였으나 이것이 제대로 성공했다. 자막이 끝나면 말소리 및 음악소리와 함께 땅굴 속 감방. 자크 베케르의 <구멍>과 [제이 리] 톰프슨의 <나바론[의 요새]>을 연상시킨다.” <원점> 도입부에서도 부분적으로 시도된 이런 무음, 무언의 형식에 대해서 그저 이만희가 시각적인 감독이었다는 둥, 영화적인 감독이었다는 둥 하는 식으로 말하는 건 어쩐지 불충분해 보입니다. 오히려 그는 한국어라고 하는 말, 그리고 1960년대 한국영화의 녹음 수준까지도 일종의 한국적 풍경의 일부로서 느꼈고 그것이 자신의 장르적 감각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충무로라고 하는 상업영화의 현장 한복판에서 활동하는 감독으로서 도입부에서 부분적으로만 소리를, 말을 배제하는 방책을 썼던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다시 <원점>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신성일과 경비원의 결투, 소공동을 배회하는 문희, 신성일과 그가 어울리는 패의 언쟁에 이어 장면이 바뀌면 대단히 멋진 숏이 하나 나옵니다. 문희가 거리에서 만난 손님과 자신의 집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죠. 왼쪽으로는 아파트 외부가, 오른쪽으로는 아파트 복도가 같이 포착되어 있는데요. 카메라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패닝하는 것 말고는 커트 없이 길게 촬영된 쇼트입니다. 아무리 여기서 문희가 거리의 창녀라고 해도, 그리고 지금이 인적이 드문 밤이라고 해도, 역시 낯선 남자와 자기 집으로 간다는 건 어색한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남자의 앞에서 길을 안내하면서 조용히 걸을 수밖에 없어요. 남자 입장에서도 기대감은 있겠지만 어쩐지 남의 시선도 있을까 신경쓰이고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니까 조용히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죠. 게다가 이것이 1960년대라는 것도 생각해야 하겠죠. 여기서 커트가 있었다면 이 긴장은 금방 깨지거나 풀려버렸을 거에요. 아직 아파트 복도로 들어서기 전에 문희는 살짝 뒤를 돌아보며 남자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는데, 이때 남자가 슬쩍 몸을 돌려 시선을 피하더니 문희가 다시 걷기 시작하니 또 걸어옵니다. 그런데 아파트 복도에 둘이 들어서고 난 뒤 문희가 뒤를 돌아볼 때는 그냥 계속 앞으로 걷습니다. 이제 뭔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구역에 들어섰다는 느낌이겠죠. 그리고 그제서야 커트가 이루어집니다. 이만희의 풍경의 영화, 그 배회의 리듬이 구성되는 방식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부분이어서 잠깐 영상으로 보고 가겠습니다. 



영화 시작부터 이 부분까지 보고 있으면, 이미 <원점>은 두 편의 성격이 다른 영화가 번갈아 상영되는 느낌을 줘요. 신성일 주연의 액션 영화 하나와 문희 주연의 풍경의 영화 하나가 영사기사의 실수로 릴이 뒤섞여 상영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저는 그런데 <원점>이 풍경과 장르를 불화하는 가운데 공존케 하려는 영화라고 본다고 말씀드렸죠. 아주 흥미롭게도, 이만희는 방금 보여드린 두 개의 쇼트 구성을 풍경의 영화를 위해 사용했다가 장르의 영화를 위해 다시 사용합니다. 문희와 손님이 방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여준 다음이죠. 이사장(사무실에서 슬쩍 비치는 명패를 보면 이름이 ‘이상한’인데요. 이상한 사장, 인거죠)의 부하인 전무가 문희의 집으로 찾아오는 것을 보여주는 두 개의 쇼트가 보이는데 앞서 문희와 손님이 아파트로 오는 것을 보여준 두 개의 쇼트와 구성이 동일합니다. 그런데 쇼트의 구성만 같은 게 아니라 인물의 몸짓까지 그래요. 심지어 문희의 손님이 슬쩍 뒤돌아 보았던 곳에서 전무도 똑같은 동작을 취하고 와요. 그런데 전무는 혼자 오고 있는 중이거든요? 그리고 커트해 복도 안쪽에서 전무를 보여주다가 그가 문손잡이를 돌리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직접 보시죠.



지금 보신 부분은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계기적 순간이에요. 왜냐하면 이 부분 이전까지 우리는 신성일 파트와 문희 파트를 서로 아무런 교통 없이, 그냥 두 편의 다른 영화가 번갈아 상영되고 있구나, 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전무라는 사람이 문희의 아파트로 찾아오는 이 장면에서 비로소, 장르가 풍경에 노크를 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때 풍경의 영화에서 사용했던 쇼트 구성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 거죠. 그럼 아 그럼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하고 숨죽이며 보게 되는 거죠. 이건 영화의 이야기나 서사가 아니라 구조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입니다. <원점>은 이야기의 흐름만 따라가면 매우 터무니없는 영화로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만희라는 감독이 영화를 어떻게 형식적으로 사고하고 있는지를 정말 잘 보여주는 영화기도 해요.

<원점>을 크게 세 개의 파트로 나눠서 고찰해볼 수 있습니다. 음악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소나타 형식을 띠고 있어요. 제시부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파트에서는 신성일과 경비의 결투가 이루어지는 순수 장르와 소공동을 배회하는 문희의 모습이 보이는 순수 풍경이 나란히 제시되죠. 재현부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파트는 첫 번째 파트의 변주죠. 신성일과 그를 쫓아온 패들의 결투가 설악산을 무대로 펼쳐집니다. 여기서 설악산은 설악산관광호텔 같은 풍경이 아닌 장르에 걸맞은 익명적 무대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순수 장르가 펼쳐지죠. 신성일은 죽고 다시 우리는 문희를 둘러싼 순수 풍경의 세계로 이행합니다. 이 제시부와 재현부 사이에서 전개되는 두 번째 파트는 우선 설악산관광호텔이라는 혼종적인 장소에서 펼쳐집니다. 반은 장르에 걸맞고, 반은 풍경에 걸맞은 그런 장소죠. 그리고는 두 번째 날 밤에 관광객들이 묵는 야영소, 그리고 신성일과 문희가 무리를 빠져나와 둘이서만 잠시 잠을 청하는 버려진 초막집으로 장소가 이행하면서 점점 풍경은 익명적인 무대로 변해갑니다. 호텔의 객실, 야영소, 그리고 초막집으로 말이죠. 그리고 다시 완전히 익명화된 무대인 계단을 올라가다 신성일은 죽음을 맞습니다. (물론 설악산의 굴 입구로 들어가는 실제 계단이기는 하지만 영화에서는 아주 익명적으로 처리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파트에서는 경비가 계단을 내려와 죽음을 맞았는데 말이죠. 마치 한국이라는 풍경은 장르와는 걸맞지 않다고 받아들이는 듯이 신성일은 죽습니다. 신성일은 문희의 세계로 이행하지 못해요. 그런 이행이 불가능한 건 심리적인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만희 영화의 구조적 특성에 이유가 있어요.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을 쫓아오는 무리를 피해 달아나는데 산길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굳이 힘겹게 올라가는 경로를 취할 이유가 없죠. 장르는 풍경을 노크하지만 들어가지는 못해요. 산을 내려가면 무엇이 나오나요?문희의 풍경이겠죠. 거기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이제 장르이길 멈추고 오롯이 풍경이, <휴일> 같은 영화가 되겠죠. 그러니까 <원점>의 신성일은 내려가지 않고 올라가는 겁니다. 가장 익명적인 곳이로요.

무리를 피해 들어간 초막집에서 문희만 남겨 두고 신성일이 떠났다가, 돌아와서, 돈을 두고 떠나려는데 문희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죠. “우린 이틀을 지냈으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원래의 시나리오에서는 상황이 이와 전혀 달랐고 둘은 첫날부터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말씀드렸죠. 하지만 이만희의 영화에서 장르(신성일)와 풍경(문희)이 그렇게 쉽사리 관계할 리 없습니다. 문희의 말을 듣고 신성일은 잠시 생각해본 뒤에 굉장히 엄숙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며 문희에게 돈을 건넵니다. “너를... 산다.” 바로 이 대사, <원점>의 가장 해괴한 대사 가운데 하나를 이와 관련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오직 거래로만 성립될 수 있는 관계. 그런데 이 거래는 풍경에 속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장르에 속하는 것일까요? 이런 모호함을 통해서만 풍경과 장르는 잠시나마 함께 공존할 수 있습니다. 이 모호함이 무너지는 순간 이 대사는 비속한 풍경의 영화의, 풍속화의 대사가 되거나 비속한 장르의 영화의, 신파극의 대사가 되어버릴 겁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원점>은 묘하게 균형이 깨지지 않고 모호한 채로 남아요. 문희의 눈물도 그렇고요. 이런 걸 우리는 종종 부조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부조리는 이만희의 스타일이 아니라 그의 영화를 지탱하는 필수적인 기능으로 요청되는 겁니다. 대부분의 이만희 영화에서 이점을 감지할 수 있지만 <원점>은 이게 스크린에 아주 전면적으로 드러나서 흥미진진한거죠. 이만희가 여기서 하고 싶었던 것을 떠올려 봅니다. 저런 한국 사람들이, 저런 데 모여서, 저런 풍속화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가운데, 저런 스파이와, 저런 킬러와, 멜로드라마의 주인공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장르가 과연 성립되는가?

풍경과 장르의 대결이라는 오늘의 주제와 관련해서, 그리고 부조리의 기능과 관련해서, <암살자>처럼 둘 모두를 한꺼번에 무화시켜버리는 극단적인 구조적 니힐리즘의 영화도 떠올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해방 직후 신탁통치라는 사안을 두고 좌우대립이 격화된 때, 한국전쟁 직전의 분명한 역사적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영화에요. 어쩐지 매우 이만희답게 알쏭달쏭한 이유로 고뇌에 빠져 있는 킬러로 장동휘가 나오는데요. 역시 고뇌의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혹은 납득이 안 됩니다. 장동휘는 암살 대상을 찾아 하룻밤 동안 춘천호반 인근을 배회하는데 사실상 배회 자체가 목적이 아닌가 여겨질 지경이어서 어떤 식으로도 장르를 영화에 끌어들이지 못해요. 역시 여성이 주요하게 나오는데 장동휘가 돌보고 있는 소녀인 전영선이죠. 그런데 이 소녀는 장동휘가 일을 하러 간 밤새도록 그녀를 감시하러 온 남자와 집안에서 소소한 놀이를 하는 게 전부라서 어떤 식으로도 풍경을 영화에 끌어들이지 못해요. <원점>에서 문희가 초반부에 아파트에 같이 온 손님과 함께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방에만 머물고 끝내 신성일과 만나지 못하는 식이라면 이런 느낌일까요? 구조적 니힐리즘, 나아가 구조적 자학의 인상까지 풍기는 <암살자>를 보고 있으면 역시 장동휘가 주연을 맡았던 <검은 머리>에서 내뱉은 참으로 해괴한 대사가 떠오릅니다. “명령한다. 나를 처벌하라!”는 대사요. 이건 어쩐지 이만희가 이만희 자신에게, 이만희의 영화가 영화 자체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이하 내용은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