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4

시네마레나, 스캔들을 위한 경기장
: 알베르트 세라의 <고독의 오후들>

 

※ 아래 글은 사진 잡지 《보스토크》 51호(2025년 가을호)에 실린 것이다.


투우를 다룬 영화의 제목이 ‘고독의 오후들’이라고 하면 곧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세 개의 텍스트가 있다. 당연히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오후의 죽음』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헤밍웨이의 제목을 빌려온 두 프랑스 영화평론가의 텍스트, 즉 앙드레 바쟁의 「매일 오후의 죽음」과 세르주 다네의 「오후의 슬픈 죽음들」이 뒤를 따른다. 헤밍웨이는 투우에 열광했고, 바쟁은 저 글을 쓰기 전까지 투우를 본 적이 없으며, 다네는 일찍부터 스페인에 투우를 보러 다녔다. 이들의 글에서 감각의 인간과 두뇌의 인간을 가르는 차이를 감지할 수 있을까? 생리적인 것과 문체적인 것을 연결하는 상투적 가정에는 어쩐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께름칙한 구석이 있다. 이를테면, ‘공감을 일으키는 섬세한 여성적 문체’ 같은 진부한 표현이 그렇다. 어린 시절 이후 삼십 년 가까이 보지 않았던 투우에 이런저런 텍스트를 통해 다시 다가갔다는 이가 만든 투우 영화인 <고독의 오후들>은 공감과 반감을 넘어선 아연실색을 유발하고, 섬세한 동시에 거칠기 짝이 없고,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경계를 무심히 교란한다. 

영화와 투우의 관계는 흥미진진한 주제다. 특히 요즘에는 투우가 점점 더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금지되기도 하는 터라 더욱 그렇다. 범죄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의 바타유적 친연성을, 이제는 점점 희박해지고 있는 이 지독히도 난처한 결탁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어떤 예술적 활동을 다른 활동에 빗대어 고찰하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투우는 두 가지 점에서 아주 특별하다. 투우에서는 경기와 연기가, 예측불허의 승부와 주도면밀한 의식(儀式)이, 돌발성과 치밀함이 이중나선을 그리며 상승한다. 그거야 프로레슬링 같은 스포츠도 마찬가지 아닌가?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이 들었다면 투우의 경우 저 이중나선이 죽음으로 향한다는, 아니 반드시 향해야 한다는 필살의 규칙을 잠시 잊은 것이겠다. 



스페인에서 열리는 산세바스티안영화제에서 작년에 처음 공개한 <고독의 오후들>에서 알베르트 세라가 투우와 영화를 빗대어 보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담하고 난폭한 동시에 엄정하고 차분한 이 작품에서 영화적 이미지의 내부와 외부를 구획하는 프레임에 대한 세라의 집착은 놀랄 만한 강도로까지 상승한다. 세라의 프레임은 투우사 안드레스 로카 레이가 소와 싸우는 경기장의 모습을 담아낸다기보다 그 자체로 일종의 경기장이 된다. 여기서 그는 집요하게 하나의 표적에 매달린다. 그 표적은 안드레스도 아니고 그와 겨루는 소도 아니다. 일정한 복장과 장구를 갖추고 모종의 절차를 따라 필살의 의례를 수행하는 안드레스의 치밀함, 그런 것들 따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순수한 분노로 내달리는 소의 돌발성, 그리고 이들이 격렬하게 뒤얽히며 예정된 죽음에 다가가는 매 순간을 결코 반복되지 않을 뜻밖의 순간처럼 느끼게 만드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세라의 프레임이 집요하게 좇는 이 표적을 간단히 스캔들이라고 부르자. 스캔들은 이중나선을 그리며 상승하는 돌발성과 치밀함이 치명적 아름다움에 이르는 시간을 필요로 하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스캔들의 독특한 사건성은 그것이 반복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영화적 프레임으로 스캔들을 포착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광기나 다름없다.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영화는 원리상 무한히 반복 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일함의 반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분명 광기다. 바쟁이라면 이를 형이상학적 외설성이라고 불렀을 터다. 반복 불가능한 스캔들의 체험을 스크린에 비치는 반복 가능한 이미지로 사로잡아 우리에게 전하겠다는 세라의 시도는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라는 스크린상에서 실제의 죽음을 묘사하는 것이 반복 가능성을 통해 죽음에 엄숙함과 영원성을 부여하기에 감동적이라는 바쟁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반복 가능성이 아니라 반복 자체를 통해 죽음의 스캔들을 다루려 든다. 세라에게 프레임이 경기장이라면 반복은 투우사의 카포테나 물레타와도 같다.

반복 가능성이 아니라 반복 자체를 통해 반복 불가능한 것의 체험을 가능케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고독의 오후들>에서 소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이 영화가 언제 어디서든 거듭 상영될 수도 있다는 점과는 무관하다.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스크린상의 죽음이 반복되리라는 것, 즉 지금 상영 중인 영화의 외부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매일 오후의 죽음’은 세라의 관심사가 아니다. 바로 지금 상영 중인 영화의 내부에서 반복 자체를 통해 매 순간 스캔들의 체험을 야기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목표다. 반복은 크게 세 곳의 장소(투우 경기장, 자동차 안, 호텔 객실)만을 오가다시피 하면서 유사한 절차로 진행되는 다섯 차례의 투우 경기를 보여주는 이 영화의 내부에 있다. 세라는 반복의 장소들에 속하지 않는 두 개의 장소 가운데 하나를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주위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어둠 속에서, 검은 소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그리고 자동차 조수석에 탄 안드레스의 얼굴을 정면에서 포착한 쇼트가 이어진다.



경기장으로서의 프레임 속에서, 스캔들은 성난 소가 카포테나 물레타에 달려들듯 반복에 달려든다. 이때 엄습의 강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프레임의 견고함이 요구된다. 실로 <고독의 오후들>을 이루는 각각의 쇼트들은 절대적인 독립성을 지니고 있다. 롱테이크에만 기대기보다는 여러 다양한 쇼트들을 구사해 장면을 구축하는 데쿠파주의 영화이기도 한데 말이다. 이것은 개별적인 쇼트 하나하나가 ‘매일 오후의 죽음’에 해당하는, 그야말로 ‘고독의 오후들’로 이루어진 영화다. 이 쇼트들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서로 다른 시점에 촬영한 것인데도 집요한 반복의 감각을 준다. 우리는 어떤 영화의 쇼트들을 글로 묘사할 때 종종 그것들 내부의 상황 및 전후 관계에 의존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고독의 오후들>의 쇼트들을 적절히 구분해 묘사하는 일은 꽤 어렵다. 동시대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강고한 형식주의자인 세라의 쇼트들이 이처럼 식별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는 것은 어째서일까? 유사한 상황(‘안드레스가 소를 노려보고, 소가 그의 카포테나 물레타를 노려보고, 그가 카포테나 물레타를 흔들고, 소가 그것을 향해 돌진하고……’)이 거듭되기 때문일까? 그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실은 무엇보다 세라의 프레임이 거의 철저하다 할 만큼 시선의 벡터를 통제하고 있어서다.

투우 경기장 장면들에서 우리는 관중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카메라는 좀처럼 관중석 쪽을 향하지도 않고 관중이 보일 만큼 고개를 들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펜스 바로 뒤에 모여 있는 관계자들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심지어 투우사와 소와 그들을 둘러싼 모래만이 보이는 부감 쇼트들도 있다. 우리는 소리를 통해서만 관중의 존재를 떠올리는데, 그러다 보니 때로 그 존재 여부 및 함성이나 야유의 사실성이 미심쩍게 느껴지는 때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매개할 어떤 존재도 없이 각각의 쇼트와 맨눈으로 대면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안드레스의 일상적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경기장 밖의 삶은 호텔 객실과 자동차 내부에서 묘사되는 것이 전부다. 그가 투우 경기를 위한 의상을 입고 벗는 호텔 객실에서 우리는 거울은 볼 수 있지만 창문은 볼 수 없다. 안드레스와 동료 투우사들이 타고 이동하는 자동차 내부는 조수석 쪽에 고정된 카메라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처럼 촬영했다. 우리는 안드레스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영화가 반쯤 지났을 무렵에 나오는, 차창 밖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대응하는, 밤거리 풍경이 보이는 단 하나의 시점 쇼트가 있을 뿐이다. <고독의 오후들>에서 이 풍경은 저 반복의 장소들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하나다. 자동차 조수석에 탄 안드레스의 얼굴을 포착한 쇼트는 이 시점 쇼트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 영화 도입부의 검은 소와 마찬가지로, 이 밤거리 풍경은 프레임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스캔들의 지표다. 

이 유일한 시점 쇼트는 우리에게 이 영화의 쇼트들이 누구의 시점에도 귀속되지 않는 것임을 확실히 일러준다. 투우 경기의 경우, 관중석의 특정한 위치에서 경기장을 전후좌우로 둘러보는 시점을 기준으로 편집하는 스포츠 방송과 달리, 어떤 기준점도 가정하지 않는 여러 대의 카메라로 촬영된 쇼트들의 조합으로 구성되었다. 그럼에도 연속적인 인상을 준다는 점이 놀랍다. 프랑스 개봉 당시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세라가 쓴 표현을 옮기자면, 그는 어떤 직관이나 선입견도 없이 사물들을 포착하는 “두뇌가 없는” 카메라의 역량을 데쿠파주를 통해 강화하고 있다. (카메라의 이런 역량을 믿기에 그는 촬영 현장에서 카메라 오퍼레이터들이 포착하는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모니터를 쓰지 않는다.) 물론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문제 삼을 수도 있다. 세라는 프레임의 견고함을 추구하지만, 쇼트들의 일관성에 매달리는 법은 없다. 문득, 일관성이란 지극히 비인간적인 것으로 진지함과 더불어 광신적인 수도사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 했던 파졸리니의 말이 떠오른다. 생각해 보라. <고독의 오후들>을 만든 이 작가는 리베르탱들이 한밤의 숲에서 벌이는 난교를 묘사한 <리베르테>의 작가다. 그는 진지함과 일관성을 불문율로 삼는 미스터리물을 기분 좋게 농락한 <퍼시픽션>의 작가기도 하다. 견고한 프레임과 집요한 반복을 통해 스캔들의 경험에 다가간다는 언뜻 모순적인 시도를 떠받치는 그의 신조는 무엇일까? 



2022년에 세라는 자신의 고향인 스페인 북동부의 바뇰레스에서 열리는 축제에 연사로 초청받아 즉흥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이 연설은 이듬해에 『성 마르티리아를 위해 건배』라는 제목의 책자로 발간되었다. 여기서 그는 프레임을 비단 영화가 아니라 삶의 전 국면에서 의미심장한 개념으로 확장해 쓰고 있다. 왜냐하면 우연은 “잘 구조화된 프레임 내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가 한없이 사랑하는 카니발적 ‘축제(festa)’는 어쩐지 스캔들과 일맥상통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형태의 축제도 정의상 통제 불가능하다. 그것을 실행하고 조직화된 방식으로 관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너무나도 역설적인 도구를 사용하는 것, 즉 혼돈을 만들어내는 것뿐이다.”

지금 왜 세라는 이런 시도에 몰두하는가? 픽션영화에서의 죽음은 언제라도 평행우주에서 초기화할 수 있는 진부한 것이 되고, 다큐영화에서의 죽음은 스마트폰으로 기록되어 온라인에 유포되는 찰나의 충격을 빌려오거나 모방한 것이 된 지금, 거듭되는 실제적 죽음을 통해 영화적 이미지의 육감(肉感)을 되찾기 위해서일까? 하지만, 이 영화에서 소의 죽음은 스캔들이 아니다. 지나치게 우아한 의식과 절차를 따라 거행되는 투우라는 경기 자체의 난폭함만이 아니라, 세라가 프레임의 엄정함과 쇼트의 집요한 반복을 통해 역설적으로 활성화하려 드는 형식의 혼돈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러면 이 영화를 아무리 거듭 본다고 해도 결코 말끔히 가시지 않을 스캔들이 강렬하게 다가올 터다. 그것은 두뇌 없는 카메라가 그야말로 가차 없이 줄기차게 포착해 내는 안드레스의 표정이다. 불안, 안도, 긴장, 공포가 뒤섞인 이 현존하는 최고 투우사의 얼굴에는 스크린상에 아직 실현되지 않은 죽음의 스캔들이 시종일관 어른거린다. 내부 시사 자리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본 안드레스가 충격을 받았던 것도 이 때문은 아니었을까? 두뇌 없는 카메라는 당신이 바라는 대로 당신을 보지 않는다. 모두가 각자의 손에 카메라를 들고 각자의 이미지를 만드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이처럼 무심한 시각이야말로 진정한 스캔들이다. 

2025-09-11

바스러진 세계의 차가운 피부: 이민지의 사진들


※ 아래는 2025년 고양레지던시 입주작가 비평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쓴 글이다.


<빛의 파노라마>(2025)


이민지 자신에 따르면, 그는 본 것과 못 본 것을 찍는 사진작가다. 종종 이민지의 말은 그가 찍은 사진만큼이나 혼란스러운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그와 긴밀하게 작업한 이들조차 이 말의 의미를 두고 씨름하곤 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그의 개인전을 기획하고 사진 책을 편집하기도 한 박지수는 “그의 작업은 보이는 것보다 바라보다가 끝내 보지 못한 것, 보여주는 것보다 보여주려다 결국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짚은 적이 있다. 정확한 지적이다. 여기에 굳이 말을 덧붙이자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결국 작업의 결과물로서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지수는 이민지의 사진은 보이는 것을 통해 그가 염두에 두고 있(지만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환기하는 작업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물론 ‘본 것’이라는 표현에 모호한 구석은 없다. 문제는 ‘못 본 것’이라는 표현이다. 이것이 사진을 찍는 동안 보지 못한 것을 뜻하는 것인지, 보이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볼 수 없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가 애매하다. 이민지는 어떤 뜻을 염두에 두었을까. ‘못 본 것’이란 가시적임에도 간과한 것일까, 비가시적인 것일까, 아니면 볼 수 없도록 은폐되거나 금지된 것일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못 본 것’은 분명 가시적인데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지나친 것을 뜻한다. 그런데 작가가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지나쳤다 해도 가시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진에 찍힐 수 있고 실제로 찍힌다. 이런 해석을 따를 경우, 본 것과 못 본 것을 찍는 사진작가라는 이민지의 자기규정은 그저 상식적인 말이 된다. 왜냐하면 사진에는 언제나 작가가 본 것과 못 본 것이 함께 찍히는 법이기 때문이다. 관심의 인간인 작가는 보지 못하는 것을 무심한 카메라는 무차별적으로 본다. ‘여기 이런 게 있었네!’라는 감탄과 결부되는 뒤늦은 발견은 사진을 구석구석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이에게 무척이나 친숙한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민지는 이런 뜻으로 말한 것일까. 이러면 어떨까. 이민지의 자기규정을 그의 사진처럼 대한다면 말이다. 그것의 뜻을 파악하려 들기보다 그것이 유발하는 혼란을 오롯이 받아들여 보자. 자신은 본 것과 못 본 것을 찍는다는 말, 지나치게 애매하다면 애매하고, 지나치게 투명하다면 투명한 이 말은 의미적으로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그의 사진과 닮았다. 일차적으로 이민지의 사진은 구체시를 이루는 시어詩語와 유사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사진작가인 그에게는 시인과는 달리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관습적 어휘의 목록이 없다. 그가 구사하는 것은 세계로부터 찍어낸 이미지들이다. 여기서 찍어낸다고 할 때 무엇보다 그것은 카메라로 촬영하는 행위를 뜻하지만, <실버 라이닝>(2023)의 경우처럼 프로타주 기법을 통해 대상을 본뜨는 행위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 결과물은 지나치게 애매하다면 애매하고, 지나치게 투명하다면 투명하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그가 초기에 찍은 한 사진에서 우리는 텅 빈 냉장고 안에 놓인 파인애플 하나를 본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에 찍은 한 사진에서는 줄에 매달린 심벌 위에 돌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본다. 최근에 발표한 한 사진에서는 나무판 위에 올려진 커다란 돌덩이와 그것을 버티고 있는 누군가의 손을 본다. 이 이미지들은 더할 나위 없이 즉물적인 투명함으로 다가오지만,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애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처럼 애매한 느낌이 드는 것이 작가가 보지 못하고 지나쳤거나, 보이지 않거나, 은폐된 무엇을 사진이 지시하기 때문은 딱히 아닌 듯싶다. 이민지의 사진들 가운데 즉물적인 유형의 사진들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시각적으로는 아예 포착 불가능한 감각을 맹목적으로 환기하려 든다. 냉장고 안에 든 파인애플은 냉기라는 촉각적 자극을, 심벌 위에 놓인 돌들은 소리라는 청각적 자극을 예기하며 조용히 멎어 있다. 커다란 돌덩이를 지탱하고 있는 손은 한없이 그러고 있지는 못할 터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이민지의 사진에 감도는 고요하고 서늘한 감각적 예기의 정취 혹은 기분은 그의 사진을 결정적인 것이라기보다 잠정적인 것에 가까운 것으로 만든다. 이를 단순하게 ‘순간’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시간의 피부를 살짝 떼어낸 얇고 차가운 조각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겠다. 그래야 이민지의 사진에 은은히 서린 촉각성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그의 사진은 눈을 이끄는 동시에 몸을 건드리려 든다. 

2019년에 발간된 사진 책에 수록된 작가 노트에서, 쪼개지고 떠밀려 해변까지 온 빙하를 떠올리며 이민지가 “조각난 뼛조각 같은 얼음들”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곧바로 자신의 사진들을 가리키는 말처럼 들린다. 이로부터 2년 후에 쓴 ‘몸-눈 일지’에서는 “사진은 뼈, 화석, 단단한 것인 동시에 투명한 허물일지 모른다”고 적는다. 그런데 그가 화석을 언급했다 해서 사진의 지표성이라는 익숙한 이론적 개념을 떠올려선 안 된다. 이민지의 말에서 화석은 뼈와 더불어 사진의 단단함을 환기하는 은유다. 그가 “허물을 벗듯 떨어진 사진들”이 “점차 굳어가, 뼛조각 혹은 화석처럼 단단해”진다고 말하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럼 혹시 그가 말하는 단단함이란 애매함의 다른 표현일까. 그렇다면 사진이라는 허물 내지는 뼛조각은 어떻게 얼음이면서 한편으론 화석일 수 있을까. 얼음의 연약한 투명성과 화석의 단단한 애매함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그가 쓴 텍스트들은 이런 물음들 곁에서 서성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민지의 사진은 가능한 답변을 찾아 움직이는 여행이다. 암석 표면을 촬영한 이미지들을 그야말로 조각난 허물 내지는 뼛조각처럼 평면에 배치해 만든 작업인 <걷기 시퀀스>(2021), 혹은 2017년에 작가가 실제로 방문했던 아이슬란드의 빙하 지대를 맵스미MAPS.ME에 남겨둔 좌표값을 통해 구글어스로 ‘필드 트립’하며 갈무리한 일련의 사진들을 떠올려 본다. 이런 작업의 의의는 카메라를 통해 포착할 수 있는 실제의 장소만이 아니라 디스플레이라는 가상의 장소 역시 이민지가 사진이라는 피부의 이중성을 답사하는 중요한 장소로 삼고 있음을 일러준다는 데 있다. 구글어스처럼 네트워크로 연결된 디스플레이를 누빌 때 우리가 느끼는 바스러진 세계의 감각은 그의 사진에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 장소에 천착해 찍은 것이라 해도, 그의 사진은 지극히 즉물적이고 투명하게 다가오면서도 그것이 딱히 무언가를 가리키는 흔적은 아니라는 점에서 애매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본 것과 못 본 것을 사진 찍는다는 말은 스스로의 사진에 깃든 바로 이런 특성을 염두에 둔 (투명한 동시에 애매한) 언급이다.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낫겠다. 그의 사진은 무언가의 흔적일 때조차 그것이 가리키는 것을 지우고 얇고 차갑고 단단한 존재로만 남는 (투명한 동시에 애매한) 순수 흔적, 즉 몸체 없는 허물이자 속살 없는 피부다.

등대가 없던 시절에 달빛을 반사해 바다를 지나는 이들의 길잡이가 되었던 인천 소청도의 석회암 지대를 기록한 <빛의 파노라마>(2024) 연작 가운데 하나를 나는 고양레지던시에 있는 이민지의 작업실에서 보았다. 전시라는 맥락에 자리할 경우라면 몰라도 이 사진은 그 자체로는 소청도의 석회암 지대와 관련된 어떤 이야기와도 무관하다. 이 사진은 그저 실제의 장소에서 떨어져나온 하나의 순수 허물이자 피부일 뿐이다. 심지어 이 사진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암석의 표면은 가히 무시간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추상적 형상으로까지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자칫 사진이 이끌리기 쉬운 무시간적 추상성의 아름다움이야말로 꺼림칙한 것이다. 이민지의 사진이 여기서 멈추는 법은 없다. 수직의 암석 평면 위아래로 줄지어 뻗어 있는 옛 채석 작업의 자국들은 가까스로 이 사진을 투명성과 애매함이 엇물리고 ‘본 것’과 ‘못 본 것’이 넘나드는 자리로 돌려놓는다. 주인을 잃은 기억은 거기로 스며든다. 사진은 이런 기억을 붙들려 드는 무모한 시도다.


부기附記

본문에서 “나무판 위에 올려진 커다란 돌덩이”를 찍은 사진이라고 언급한 것은 <빛과 물질>(2025)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 사진에 보이는 것은 사실 돌덩이를 닮은 종이로, 돌가루와 종이죽 및 기타 재료들을 섞어 임선구 작가가 제작한 얇은 조각이다. 나는 이 글을 쓰고 난 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침 집에 배달되어 온 사진 잡지 《보스토크》 2025년 가을호에도 이 사진이 수록되어 있어 나는 유심히 다시 그것을 들여다보았는데 사진만 보아서는 도무지 감지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오해 내지는 착오가 이 글의 논지와 관련해 무척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투명성과 애매함을 동시에 간직한 이민지 사진의 특성 말이다. 또한 이 ‘얇은 조각’은 그야말로 피부이자 허물 같기도 하다. 그는 <빛의 파노라마>의 소재가 된 소청도의 바위, 빛을 반사하는 돌덩이를 떠올리며 <빛과 물질>을 찍었다고 한다. 


<빛과 물질>(2025)


2025-07-26

밤과 잠과 꿈 ─ 가상의 태양 아래서 (혹은 안에서)
: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태양과의 대화>


※ 아래 글은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2024 《우주 엘리베이터》 리뷰북에 수록된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대단히 정중한 사람이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벌써 십수 년 전이다. <엉클 분미>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그는 상대방의 이야기가 그다지 자신의 흥미를 끄는 것이 아니어도 주의 깊게 듣는다. 나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상대방에게 그런 느낌을 준다. 그러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의견을 구하면 차분하게 답하곤 한다. 

물론 그의 인내심에 한계가 없지는 않다. 이런 일이 떠오른다. 공동 기자회견이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일군의 기자들이 기어이 그와 단독으로 만나야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답게도 몇 시간을 할애해 그들 각각과 차례로 인터뷰를 한 다음이었다. 그가 대담 장소를 나와 한숨을 쉬고 넌더리를 치며, 하지만 예의 그 미소를 띠고 “정글! 정글! 또 정글!”이라고 내뱉는 것을 나는 보았다.

위라세타쿤에게 정글이라는 장소의 의미를 묻는 것은 서부극을 만드는 감독에게 사막이나 황야 같은 장소의 의미를 묻는 것만큼이나 열없는 일이다. 그에게 정글은 관념적 형상이 아니라 실재적 질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 질료가 어디 정글뿐일까? 밤과 잠, 그리고 꿈 또한 그런 질료에 속한다. 그러니 그에게 굳이 장소의 의미를 묻겠다면 차라리 침대의 의미를 묻는 편이 낫다. 그가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는 것, 영원한 것이 아니라 덧없는 것, 날숨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들숨에 작용하는 것, 이런 질료들을 따라 우리가 배회하게 되는 세계는 그가 창조한 예술적 세계라기보다 그를 매개 삼아 예술로 드러난 세계에 가깝다. 여기엔 “시인이 끊임없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그를 생각한다”고 말했던 호프만슈탈의 태도에 한없이 가까운 시학이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관능적으로 충만한 행복한 수동성의 감각이 있다. 간단히 규정하기 힘든 이 수동성은 작품마다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렇기는 해도 위라세타쿤의 경력 초기부터 어떤 식으로든 뚜렷이 감지되었던 것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정오의 낯선 물체>나 <아시아의 유령>에서처럼 영화의 진행을 타인들의 우발적 발화에 기꺼이 유희적으로 의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친애하는 당신>에서처럼 한낮의 태양 아래 느긋하게 몸을 내맡긴 인물들의 시간 속에 영화 자체가 한껏 잠겨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아이언 푸시의 모험>이나 <세계의 욕망>에서처럼 공동 연출의 방식으로 작가적 권한을 나누어 행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건, 수동성의 양상이 다를 뿐 관능적 행복의 강도는 언제나 최대로 치솟는다. 위라세타쿤의 퀴어 시네마는 정체성의 정치보다는 수동성의 경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태양과의 대화》(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태양과의 대화. 이 표현이 가리키는 대상은 복수이며 확정적이지 않다. 그 가운데 내가 아는 것은 다음의 셋이다. 

첫 번째 대상은 전시다. 이것은 2022년 5월 28일부터 7월 10일까지 태국 방콕 시티시티 갤러리에서 열린 위라세타쿤의 개인전 제목이다. 나는 이 전시를 보지 못했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짧은 공식 기록물을 보았을 뿐이다. 그가 몇 년 동안 직접 촬영해 모아둔 영상들을 가지고 “그의 개인적 기억이 없는 존재의 가능성을 탐문”한다는 다소 모호한 전시 소개문이 어쩐지 눈길을 끌었다. 분명 위라세타쿤이라는 개인에게서 연유한 것이지만 그에게 귀속되지 않는 존재라니, 어쩐지 그 특유의 수동성에 너무나도 잘 부합하는 표현처럼 다가왔다. 저런 탐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창작자보다는 매개자다.

두 번째 대상은 책이다. 방콕에서 열린 전시에 맞춰 발간된 이 동명의 책에는 GPT-3 플랫폼을 통해 구성한 대화들이 담겨 있다. 이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미디어버스에서 출간되었다. 대화 참여자들 가운데는 위라세타쿤 자신을 비롯해 살바도르 달리, 크리슈나무르티, 아서 C. 클라크, 틸타 스윈튼, 올리버 색스 같은 실존 인물도 있지만 이름 모를 인도 소녀도 있고, 늑대 그리고 블랙홀과 태양 같은 비인간 존재들까지도 있다. 이들의 모든 대화는 위라세타쿤과 공학자인 팻 파타라누타폰이 입력한 프롬프트를 따라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이 작업이 배우들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알려주지 않은 채 그들 주위를 서성이며 영화를 연출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정오의 낯선 물체>에서 효과적으로 운용해 성공을 거두었던 ‘우미한 시체’라 불리는 초현실주의적 방법을 인공지능 플랫폼에 적용해본 수동성의 사례랄까?

세 번째 대상은 가상현실 퍼포먼스다. 이것은 2022년 7월 30일부터 10월 10일까지 열린 아이치트리엔날레의 커미션을 받아 제작되었다. 큐레이터 소마 치아키와의 인터뷰에서, 위라세타쿤은 “다른 미디어를 탐구하면서도 시네마로 되돌아온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퐁피두센터에서 이 작품을 선보일 때는 이렇게 말했다. “VR은 무언가 다르다. 그건 전혀 시네마가 아니다. (…) 나는 VR이 꿈에 가깝다는 것을 발견했다.” 꿈은 분명 꿈꾸는 자의 기억에서 연유하는 것이지만 꿈꾸는 자의 의지로 결코 통어할 수 없는 수동적 창조력의 극치다. VR에 관한 위라세타쿤의 언급에는 모호한 구석이 없지 않다. 그의 말은 VR이 관람자에게 꿈과 유사한 체험을 선사한다는 뜻일까? 하지만 그의 말은 그것을 다루는 작가에게 VR은 꿈과 기능적으로 닮은 장치이자 도구라는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은가?


<메모리아>(아피찻퐁 위라세타쿤, 2021)


이제 우리는 위라세타쿤에게 정글에 관해 묻기보다는 태양에 관해 물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자면, 그에게 정글은 실재적 질료다. 하지만 태양은 더는 그렇지 않다. 태양은 여러 실재적 질료들을 통해 그가 드러내려 하는 어떤 관념적 형상이다. 물론 그는 VR이 우리를 태양으로부터 떼어놓는 매체인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태양은 지구가 그 주위를 도는 천체를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무심한 말에 오도되어서는 안 된다. 그가 제공하는 가상현실 이미지는 컴퓨터로 만들어낸 시뮬레이션이고, 거기 등장하는 태양은 진짜 태양의 모사물일 뿐이라는 상식적인 발언에 자칫 길을 잃어서도 안 된다. 대화의 상대로서 태양은 현실의 천체와 무관한 형상이다. 이 태양은 천체가 아니라 매체다. 이 태양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태양과의 대화라고 명명된 전시와 책과 퍼포먼스는 하나의 태양과 나눈 세 개의 다른 대화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서로 다른 ‘태양들’을 드러내기 위한 세 번의 다른 시도처럼 보인다. 내가 실제로 접할 수 있었던 두 개의 시도만을 고려한다 해도, 위라세타쿤의 첫 VR 작업은 GPT-3가 생성한 대화를 엮은 책과는 전혀 무관한 퍼포먼스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로 하여금 창조적 수동성의 열락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장치, 그의 기억을 소재로 삼되 그의 통어에서 풀려난 세계를 만들어내는 장치, 달리 말하자면 꿈의 기제를 기술적으로 전유한 비개인적 또는 탈개인적 장치의 고안이라는 점에서는 놀랄 만큼 닮았다. 태양은 이런 장치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위라세타쿤의 영화는 그 자체로 이런 장치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는 이런 장치의 특성을 띤 인물이 종종 등장한다. 의인화된 장치라고 해도 좋겠다. 그의 영화에서 곧잘 마주치게 되는 잠자는 사람들 가운데 <메모리아>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에르난은 이런 장치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주 특별한 존재다. 그는 꿈조차 꾸지 않고 잠에 푹 빠져드는 존재다. 영화의 주인공인 제시카는 이런 상태를 죽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잠재적으로 세계의 모든 기억을 저장하는 ‘하드 디스크’임을 자처하는 에르난은 접촉을 통해 제시카에게 진정 수동성의 창조적 열락이란 어떤 것인지를 체험케 한다. 여기에는 <열대병>에서 보았던 인간과 비인간의 조우를 둘러싼 애니미즘적 신비 대신 오토마티즘적 경이가 있다. 그것과 대화하고 접촉하는 이를 이런 경이로 이끄는 인격적 비인격이야말로 오늘날 위라세타쿤을 매혹하는 가상적 태양이다. 즉, 에르난은 이런 태양의 형상이다.


<태양과의 대화>(아피찻퐁 위라세타쿤, VR 퍼포먼스)


위라세타쿤의 VR 퍼포먼스를 체험하는 공연장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한가운데 커다란 양면 스크린이 설치된 공간에서 헤드셋을 착용하고 이리저리 느리게 배회하는 일군의 관람자들을 보게 된다. 우리보다 앞서 입장한 이들이 보고 있는 가상현실 속 풍경은 어떠한지 당장은 알 수 없다. 공연장 가운데 놓인 커다란 스크린 양편에는 서로 다른 영상이 프로젝션되고 있지만 그 둘을 동시에 보기는 어렵다. 이처럼 동시적 관람을 어렵게 하는 더블 프로젝션 방식은 위라세타쿤이 초기 설치 작업인 <홍콩에서의 두 번째 사랑>에서부터 이미 사용했던 터다. 먼저 입장해 헤드셋을 쓰고 배회하는 관람자들의 몸짓을 나중에 입장한 관람자들이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보게 하는 방식도 오늘날의 VR 작업에서 낯선 것은 아니다. 

이 작업에서 진정 흥미를 끄는 것은 스크린에 프로젝션되는 두 개의 영상과 헤드셋에 재생되는 가상현실 영상을 위라세타쿤이 흡사 생성형 AI의 작동을 활성화하는 프롬프트처럼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 이때 생성형 AI에 해당하는 장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휴먼 러닝’의 역량을 갖춘 관람자 각각을 유닛으로 삼아 일종의 신경망처럼 기능하는 공연장 자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또 다른 가상적 태양을 마주하게 된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여기서 우리는 아예 그 태양 속에, 태양의 일부로 있다.

스크린에 비치던 두 개의 영상이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우리는 앞서 입장한 관람자들이 벗어둔 헤드셋을 착용한다. 이 체험형 퍼포먼스에서 헤드셋을 쓴다는 것은 눈을 감고 잠에 빠져 꿈을 꾸는 상태와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잠들어 있되 서서 배회하는 몽유의 상태라고 해야 옳겠다. 헤드셋을 쓴 다른 관람자들은 허공에서 떠도는 하얗게 빛나는 조그만 점의 형상으로 보인다. 우리보다 늦게 입장해 아직 헤드셋을 쓰지 않은 관람자들은 알아서 조심스레 우리를 피해 다닐 것이다. 두 부류의 관람자는 스크린이나 디스플레이에 비치는, 러닝타임이 정확히 맞춰진, 이따금 확실히 시선을 유도하는 시각적 요소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영상을 보며 각자의 움직임을 그린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향은 청각적인 수준을 넘어 종종 촉각적으로 다가온다. 

이 퍼포먼스를 관통하는 원리는 단순하고 강력하다. 모두가 다른 것을 보면서도 하나의 응시 안에 놓여야 한다. 이것은 장치의 명령이고 장치적 명령이다. 헤드셋을 쓰고 나면 곧바로 보이는 것은 공연장 전체가 모델링된 증강 현실이다. 공연장 가운데는 여전히 커다란 양면 스크린이 있다. 그런데 공연장 사면의 벽 위쪽으로 더 많은 스크린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 스크린은 이내 하나둘씩 사라지고 하나의 강력한 형상, 하얗게 빛나는 태양의 형상이 떠오른다. 이 태양은 이 퍼포먼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스펙터클한 형상이다. 여기서 위라세타쿤이 이처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된 태양의 형상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왜일까? 소마 치아키에게 말하길, 그는 이 작업을 진행할 때 “스크린을 축복하는 동시에 스크린과 작별을 고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헤드셋을 쓰지 않고 공연장을 배회하는 관람자들이 성물로서의 스크린에 경의를 표하는 자리에 놓인다면, 헤드셋을 쓴 관람자들은 스크린에 작별을 고하면서 태양을 환대하는 자리에 놓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태양의 응시 가운데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심해의 구덩이 같은 곳에서 부유하고 있다. 어쩐지 이건 위라세타쿤이 자신의 아득한 기억에서 끄집어낸 무언가를 시뮬레이션한 것 같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 게임을 즐겼고, 아타리가 1982년에 출시한 <E.T.>는 유년기의 그를 사로잡은 게임 가운데 하나였다. 그야말로 배회하는 일이 전부라 할 이 악명 높은 게임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역사상 최악의 컴퓨터 게임으로도 꼽히곤 한다. 어린 시절 이 게임을 플레이해본 이라면 (위라세타쿤이나 나와 동년배라는 뜻이겠지만) 태양과의 대화라 명명된 가상현실 퍼포먼스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움직임의 감각이 <E.T>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문득 깨닫게 될 터다. 배회하고, 구덩이에 빠지고, 때로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 게임의 플레이어는 과연 누구일까? 행복은 누구의 것일까?

2025-04-13

불가능한 포옹

 

※ 아래는 "애도에 관하여"를 표제로 삼은 《보스토크》 제39호(2023.5.18)에 발표했던 글이다.


지난 세기에 현대 영화의 도래를 알렸던 중요한 영화인들 여럿이 안타깝게도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이 죽음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직 한국에서는 합법화되지 않은 조력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장-뤽 고다르일 터다. 사진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2019년 9월 9일에 세상을 떠난 로버트 프랭크와 2022년 9월 10일에 세상을 떠난 윌리엄 클라인, 현대 사진의 출발을 상징하는 두 인물의 부고가 대유행 시기의 대략 앞뒤에 들려왔다. 프랭크와 클라인은 사진 작업에서 얻은 통찰─특히, 인물을 포착한 사진적 이미지에서 현실성과 허구성은 분리 불가능하다는 것─을 영화 작업으로 이어가는 일에 전념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타계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영화 문화에서 그들의 노고와 성취에 합당한 관심을 찾아보기란 어려웠다. 이를테면, 데뷔 시절 고다르의 얼굴을 담은 클라인의 사진은 유명하지만, 프랑스 누벨바그 태동기에 파리에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해 고다르의 <기관총부대>와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사이에서 격렬하게 진동하는 <폴리 마구, 당신은 누구세요?>나 <미스터 프리덤>처럼 몰아치듯 선동적인 역작들을 내놓은 그의 경력은 영화사(史)에서 종종 배제되곤 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시네필 문화에는 클라인의 영화에 대한 기억이 없기에 그에 대한 애도는 겸연쩍은 일이 되어버린다.

그렇지만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있다고 해서, 숱한 개인적 기억이 그의 이미지 주위에 맴돌고 있다 해도, 애도라는 행위에 수반되는 공포감을 떨쳐버릴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기억 때문에 공포감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다. 대유행 기간에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지만, 내게 이 시기는 무엇보다 2020년 10월 9일에 타계한 홍성남 영화평론가에 대한 애도를 회피하며 빠져든 자책의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자책에 빠질 때마다 거듭해서 머리에 떠올랐던 것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배수아 옮김, 필로소픽, 2014) 종결부를 채우고 있는 통렬하기 짝이 없는 문장들이었다. 이 글을 쓰기 직전까지도, 나는 베른하르트가 그의 친구였던 파울 비트겐슈타인과의 우정을 술회하고 있는 이 책을 다시 들춰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도 글을 쓰기 위해 가까스로 몇 개의 문장들만을 드문드문 확인하고 나면 재빨리 덮어야 할 지경이다. “우리는 죽음의 낙인이 찍힌 자들을 피한다. 나 또한 이런 저열한 감정에 굴복하고 말았다. 친구가 죽기 몇 달 전부터 나는 구차한 자기보호 본능 때문에 완전히 의도적으로 그를 피했다. 아직도 나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 흡사 나의 고백이어야 할 것이 다른 이의 언어를 빌려 내게 던져진 것처럼, 이 글자들 앞에서 나는 흠칫 놀란다. 여기서 몇 페이지를 더 넘기고 나면 “나는 그의 무덤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는 차갑고 하얀 방역복과도 같은 문장으로 책이 끝난다. 

그처럼 가책을 끝까지 자신의 업으로 짊어질 용기가 없는 나는, 홍성남 평론가가 죽고 나서 일 년 남짓이 지나 작년 1월 중순 겨울날 오후에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하늘원추모관이라는 봉안당을 처음 찾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연구자이자 뮤지션인 유지완 씨가 차로 그곳까지 데려다준 덕이다. 봉안당 앞에 자리한 사무동 건물 1층에는 추모객들을 상대로 하는 작은 상점이 하나 있었는데, 염치없이 빈손으로 온 것을 가릴 요량으로 잠시 매대를 둘러보았지만 물건들이 하나같이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생전의 홍성남 평론가라면 응당 고개를 가로저었을 무언가를 들고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좀 더 무거운 마음으로 찾아뵙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정오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는데도 봉안당 안은 어두침침하기 짝이 없었다. 홍성남 평론가의 유골이 봉안된 자리는 커다란 창문 옆이었지만 어둑한 기운은 여전했다. 어색하게 봉안당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당내가 환해졌다. 누군가 형광등 전원을 켠 것이다. 추모하는 동안에만 등을 켜 두었다가 추모를 마치고 나면 끄고 나가라는 안내문이 입구에 있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홍성남 평론가의 봉안함 옆에는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2010년 12월 1일 이후 10년 가까이 곁에서 간병하다 그의 장례 절차를 마무리하고 세상을 등지신 어머님의 봉안함이 같이 놓여 있었다. 

홍성남 평론가가 수술을 받고 나서 입원해 있을 때 나는 병원에서 몇 차례 어머님을 뵌 적이 있다. 문병을 간 우리 부부를 침대에 앉아 바라보는 홍성남 평론가의 눈에서는 우리가 알고 좋아했던 사람의 흔적을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수술이 잘 끝났다고는 해도 뇌 기능이 회복될 가망이 없음이 역력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아이의 얼굴도 아니었고 광인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의 얼굴이었다. 이 얼굴을 어루만지며 어머님께서는 “지난번보다 훨씬 좋아졌지?”라며 연신 우리에게 다짐하듯 물어보셨다. 나는 나중에 베른하르트의 잔인한 문장들 앞에서 이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나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친구는 이미 죽음에 가까이 가 있는데 나는 아직 그렇지 않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나는 “죽음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칠까 봐 너무도 두렵기 때문에” 홍성남 평론가를 더는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죽음은 기어이 다가와 무심히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 홍성남)께서 2020년 10월 9일(금)에 별세하였기에 알려드립니다. 

빈소 원주의료원 1호실. 발인 10월 11일(일) 11시. 화장장 충주화장장.


그는 2020년 10월 9일 오후 10시 50분에 강원도 원주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미조구치 겐지의 <산쇼 다유>를 막 보고 나온 참이었고 부고 문자는 이튿날에야 뒤늦게 받았는데 그날은 바로 내 생일이었다. 부고를 받고 나서도 나는 그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조문을 가서 애도를 표한다는 것이 얼마간 자기 위로의 행위도 된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십 년 동안 나의 것으로 삼아온 수치심과 죄책감을 그의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조금도 덜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를 각별히 아꼈던 방혜진 평론가─홍성남 평론가 그리고 나와 함께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한 단행본을 구상하고 《토킹 픽처》라는 이름의 웹진 창간도 꽤 구체적으로 진행한 적이 있지만 어느 것도 실현되지는 못했다─에게서도 몇 차례 연락이 왔지만 나는 끝내 애도를 회피했다. 무엇보다 나는 장례식장에 놓여 있을 그의 영정 사진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영정 사진에는 고인이 된 이들이 침착하고 평온하게 또는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바라보는 모습이, 그렇게 해서 우리를 바라보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에게 요구하는 표정이다. 우리는 죽음을 위로하는 한편으로 죽음이 우리를 위로하길 바란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죽음마저도 삶의 얼굴을 띨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죽음의 얼굴로서 대면하고 그래서 피해왔던 그를 저 가상적 삶의 얼굴로 마주할 수 없었다.

내게는 그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 몇 장 있다. 대개는 나의 동반자인 김미경이 찍은 것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우리 부부는 그와 함께 종종 국내외로 여행을 다녔는데 도쿄국립근대미술관필름센터(현재는 국립영화아카이브)에서 열리는 칼 드레이어 특별전을─특히 당시로선 어디서도 구해볼 수 없었던 <글롬달의 신부>를─보기 위해 2003년 11월 초에 일본에 간 것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가 찍힌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카메라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좀처럼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사실, 그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은 내겐 한 장도 없다. 기념사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2004년 3월 말에 대만의 타이페이에서 허우샤오시엔을 만나 인터뷰를 하던 당시에 찍은 사진을 봐도 그렇다. 인터뷰 자리에 동석해 그저 이따금 질문을 던졌을 뿐인 우리 부부도 태연하게 카메라를 똑바로 보고 있는데도, 정작 인터뷰어인 홍성남 평론가 자신은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코에 대고 슬며시 카메라를 피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런 자세는 너무나도 그다운 것이라 그 밖의 다른 자세를 떠올리기 힘들 정도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카메라 앞에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내길 꺼리는 이들의 흔적이나 부재가 아닐까? 그러한 흔적이나 부재는 외화면 영역이나 비가시 영역 같은 용어로는 포착되지 않는 무척이나 개인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진에 찍힌 홍성남 평론가와 가장 근사하게 공명하는 이는 그날 카메라로 우리를 찍고 있었기에 정작 그 자신은 사진에 보이지 않는 사람일 터다. 카메라 앞에 서기보다는 종종 뒤에 머물곤 했던 유맹철 씨는 영화제나 시네마테크 일을 하기도 했지만 최근까지 한동안은 영사 기사로 근무하면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이들 누구보다 스크린에서 멀리 떨어져 뒤쪽에 있기도 했다. 지금 여기에서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이들 외에는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다짐한 듯한 사람들, 오늘날에 전면화된 텔레-비주얼한 얼굴성을 단호히 거부하는 이런 사람들의 얼굴을 죽음의 얼굴로 대면하는 것은 소름 끼치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얼굴을 우리를 바라보며 위로하는 저 가상적 얼굴로 대면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죽음과의 포옹은 불가능하다. 아직 내게는. 그렇다면 수치스러운 채로 살아가야 한다.




   

2025-03-22

엇갈리는 선: 송석우의 사진에 대하여


※ 아래는 2024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들에 대한 비평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쓴 것이다.


Wandering Wandering #01 (2020)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지만 화창한 느낌은 아니다. 하기야 화창한 날씨는 송석우의 사진과 어울리지 않을 것도 같다. 어쨌거나 이 사진 속 하늘은 파랗다. 그런데 쨍한 기운이라곤 도무지 없고 전면에 엷은 회색빛이 감돌고 있는 것 같은 하늘이다. 그런 하늘 아래로 아스팔트 공터가 널찍하게 펼쳐져 있다. 주차장인가 싶기도 하지만 주차 라인이 어디에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면 다른 용도로 쓰이는 공터인 것 같다. (송석우는 이 사진을 드론 전용 비행장으로 조성된 광나루 비행장에서 촬영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런 정보는 사진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은 아니다.) 하늘과 공터가 맞닿은 경계에는 좌우로 숲이 널찍하게 펼쳐져 있다. 

하지만 이 사진에서 무엇보다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노란색과 검은색으로 도장한 철제 바리케이드에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아스팔트 공터 위에 놓인 다섯 개의 바리케이드에는 다섯 명의 사람이 똑같은 모습으로 늘어져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대략 남성으로 추정되는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바지를 입고 사진 속 하늘빛을 닮은 셔츠를 걸치고 있는 것 같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건 연출사진이로군,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무언가를 보여줌으로써 무언가를 말할 수도 있는 것이라면 연출사진은 반드시 무언가를 말한다. 이를 현시와 표명의 차이라고 해도 좋겠다. 꼭 직접적으로 어떤 주제를 표명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연출사진에는 모종의 광경이 빚어내는 수수께끼나 환상, 혹은 감각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송석우의 연출사진은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흥미로운 사진이 으레 그러하듯, 그의 연출사진은 단박에 들어오는 광경이 아니라 세부를 통해 말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다섯 개의 바리케이드는 왼쪽에 세 개, 그리고 오른쪽에 두 개가 놓여 있다. 여기서 굳이 비대칭의 구도를 끌어들인 것은 왜일까? 그러고 보니 좌우로 넓게 펼쳐진 숲 또한 왼쪽은 제법 큼직한 나무들로 무성해 보이지만 오른쪽으로는 관목들만 보인다. 사진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왼편 바리케이드에 늘어져 있는 사람들과 오른편 바리케이드에 늘어져 있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하늘색 셔츠가 언뜻 보기엔 같아 보여도 실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왼편 사람들이 입은 셔츠는 짙은 바탕색 위에 연한 줄무늬가 있는 것이지만, 오른편 사람들이 입은 셔츠는 연한 바탕색 위에 짙은 줄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들이 신고 있는 신발 또한 제각각이다. 마지막으로, 바닥의 아스팔트 위로 길게 그어진 두 개의 선도 기묘하기 짝이 없다. 이 중 하나는 아마도 잘못 그어진 것인 듯 덧칠해 지우려 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쯤 되면 기분 좋게 혼란스러워진다. 작가에 의해 연출된 것(바리케이드와 셔츠)인지 상황에 의해 주어진 것(숲과 선)인지 분명히 판단하기 어려운 대상인 신발은 이 혼란에 매력을 더할 뿐이다. 가만히 보면 어긋나고 빗나가고 엇갈리는 것이 곳곳에 있다. 송석우의 연출사진이 무언가를 말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어긋남과 빗나감과 엇갈림을 통해서다. 따라서, ‘Wandering Wondering’이라는 표제가 붙은 연작의 첫머리에 이 사진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송석우 스스로도 이 사진이 연작의 방향을 정립한 작품이라고 인정한다.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이 사진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십 대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그의 말이다. 정작 이 사진은 그것보다 많은 것을, 그것과 다른 것을 말한다. 즉, 이 사진에는 현시와 표명 사이를 흐르는 야릇함이 있다. 그가 자신의 사진에 대칭적 구성을 끌어들인다면 이는 그것을 어긋남과 빗나감과 엇갈림에 열어두기 위해서다. 연작 가운데 대칭적 구성이 가장 도드라지는 사진(#4, #10, #12, #23, #41 등) 가운데 무엇이든 찬찬히 들여다보라. 대칭적이라는 첫인상은 그러한 열림을 위한 구실일 뿐이었음을 누구든 알게 될 터다.

송석우가 사숙했다고 밝힌 사진가들은 박현두, 오상택, 사타, 드웨인 마이클즈, 그레고리 크루드슨 그리고 샌디 스코글런드처럼 퍼포먼스적 요소를 사진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작가들이다. 이 목록을 듣고 나서 송석우의 사진을 보며 부주의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의 말은 주의를 기울여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여야 한다. 송석우의 사진에는 사타나 스코글런드의 환상성이 없다. 그의 사진은 아무리 연출된 것이라고는 해도 물리적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송석우의 사진에는 마이클즈나 크루드슨의 영화적 몽타주나 미장센이 없다. 그가 사진의 순수주의를 옹호하는 작가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분명 그의 관심은 사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있다. 송석우의 사진에는 박현두나 오상택의 사진과는 달리 사회적 주제를 초과하거나 심지어 무화해 버리기까지 하는 초연함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탐구하고자 했다는 그의 말은 작업의 출발점을 확인하는 단서일 수는 있어도 도착점을 가늠하는 지침일 수는 없다.


A Crowd within a Crowd (2024)


위에서 언급한 작가들에 대한 송석우의 관심은 사실 스토리텔링, 즉 이야기하기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다시 강조하지만, 연출사진은 반드시 무언가를 말한다. 하지만 말하는 것이 꼭 통상 주제라고 부르는 것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송석우는 이 작가들의 작업에서 어긋남과 빗나감과 엇갈림을 통해 이야기하는 각양각색의 사진적 방식들을 본다. 물론 그런 이야기하기에 꼭 퍼포먼스적 요소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다. 가령, 그가 고양시 소재 어느 개발제한구역의 숲을 배회하다 촬영한 <A Crowd within a Crowd>(2024) 같은 최근의 사진을 보면 더욱 그렇다. 사진 속의 나무들에는 범람한 습지의 잔여물처럼 보이는 대상이 가지 곳곳에 걸려 있다. 이 사진의 기묘한 매력은 그렇게 보이는 대상이 자세히 보면 가지에 앉은 새들의 무리라는 (혹은, 사실은 그것도 아닐 수 있다는) 데서 나온다. 이런 사진은 퍼포먼스적 요소의 도입 없이도 송석우가 그만의 사진적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작가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Barren Gaze (2024)


하지만 송석우의 사진에서 공간과 대상이 맺는 ‘물리적 초현실’의 감각은 언젠가 우연한 발견에 이르기를 바라며 풍경 앞에서 기다리는 방식만으론 거의 포착하기 힘든 것이다. 그리하여 퍼포먼스의 연출이 일종의 촉매로서 도입된다. 한밤중에 바닷가 바위 위에 홀로 서 있는 (복장으로 봐서는 여성처럼 보이지만 온전히 확신할 수는 없는) 사람을 포착한 <Barren Gaze>(2024)를 보자. 새벽녘의 바위 위에 서서 수평선 부근의 섬을 바라보고 있는 세 인물을 포착한 오상택의 <섬>과 이 사진을 같이 두고 바라보자. 인물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제법 격식을 갖춘 복장으로 똑같이 맞춰 입은 오상택의 모델들 대신 송석우는 캐주얼한 옷차림의 모델(그런데 정말 모델일까?) 하나만을 카메라 앞에 세웠다. 그 앞에서 넘실대는 파도 저편의 풍경은 온통 암흑이라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 결과, 연출의 지표들이 뚜렷이 나타나는 오상택의 사진과 달리 송석우의 사진은 연출과 발견 사이에서 흔들리는 불확정적인 것이 된다. 인물의 앞쪽에서 환하게 빛나는 비현실적인 조명도 이 불확정성을 없애기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어느새 우리는 송석우가 염두에 둔 사회적 주제에서는 훌쩍 멀리 벗어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탈은 그의 사진 자체가 촉발하는 것이다. “공간 안에서 대상들을 배치하고 구성하는 사진들”에 대한 그의 오랜 관심은 결국 배치와 구성이라는 연출적 조작이 발견의 행위와 만나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 이처럼 두 개의 선이 교차하는 곳을 우리는 사진적 (초)현실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