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6

밤과 잠과 꿈 ─ 가상의 태양 아래서 (혹은 안에서)
: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태양과의 대화>


※ 아래 글은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2024 《우주 엘리베이터》 리뷰북에 수록된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대단히 정중한 사람이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벌써 십수 년 전이다. <엉클 분미>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그는 상대방의 이야기가 그다지 자신의 흥미를 끄는 것이 아니어도 주의 깊게 듣는다. 나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상대방에게 그런 느낌을 준다. 그러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의견을 구하면 차분하게 답하곤 한다. 

물론 그의 인내심에 한계가 없지는 않다. 이런 일이 떠오른다. 공동 기자회견이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일군의 기자들이 기어이 그와 단독으로 만나야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답게도 몇 시간을 할애해 그들 각각과 차례로 인터뷰를 한 다음이었다. 그가 대담 장소를 나와 한숨을 쉬고 넌더리를 치며, 하지만 예의 그 미소를 띠고 “정글! 정글! 또 정글!”이라고 내뱉는 것을 나는 보았다.

위라세타쿤에게 정글이라는 장소의 의미를 묻는 것은 서부극을 만드는 감독에게 사막이나 황야 같은 장소의 의미를 묻는 것만큼이나 열없는 일이다. 그에게 정글은 관념적 형상이 아니라 실재적 질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 질료가 어디 정글뿐일까? 밤과 잠, 그리고 꿈 또한 그런 질료에 속한다. 그러니 그에게 굳이 장소의 의미를 묻겠다면 차라리 침대의 의미를 묻는 편이 낫다. 그가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는 것, 영원한 것이 아니라 덧없는 것, 날숨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들숨에 작용하는 것, 이런 질료들을 따라 우리가 배회하게 되는 세계는 그가 창조한 예술적 세계라기보다 그를 매개 삼아 예술로 드러난 세계에 가깝다. 여기엔 “시인이 끊임없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그를 생각한다”고 말했던 호프만슈탈의 태도에 한없이 가까운 시학이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관능적으로 충만한 행복한 수동성의 감각이 있다. 간단히 규정하기 힘든 이 수동성은 작품마다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렇기는 해도 위라세타쿤의 경력 초기부터 어떤 식으로든 뚜렷이 감지되었던 것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정오의 낯선 물체>나 <아시아의 유령>에서처럼 영화의 진행을 타인들의 우발적 발화에 기꺼이 유희적으로 의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친애하는 당신>에서처럼 한낮의 태양 아래 느긋하게 몸을 내맡긴 인물들의 시간 속에 영화 자체가 한껏 잠겨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아이언 푸시의 모험>이나 <세계의 욕망>에서처럼 공동 연출의 방식으로 작가적 권한을 나누어 행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건, 수동성의 양상이 다를 뿐 관능적 행복의 강도는 언제나 최대로 치솟는다. 위라세타쿤의 퀴어 시네마는 정체성의 정치보다는 수동성의 경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태양과의 대화》(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태양과의 대화. 이 표현이 가리키는 대상은 복수이며 확정적이지 않다. 그 가운데 내가 아는 것은 다음의 셋이다. 

첫 번째 대상은 전시다. 이것은 2022년 5월 28일부터 7월 10일까지 태국 방콕 시티시티 갤러리에서 열린 위라세타쿤의 개인전 제목이다. 나는 이 전시를 보지 못했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짧은 공식 기록물을 보았을 뿐이다. 그가 몇 년 동안 직접 촬영해 모아둔 영상들을 가지고 “그의 개인적 기억이 없는 존재의 가능성을 탐문”한다는 다소 모호한 전시 소개문이 어쩐지 눈길을 끌었다. 분명 위라세타쿤이라는 개인에게서 연유한 것이지만 그에게 귀속되지 않는 존재라니, 어쩐지 그 특유의 수동성에 너무나도 잘 부합하는 표현처럼 다가왔다. 저런 탐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창작자보다는 매개자다.

두 번째 대상은 책이다. 방콕에서 열린 전시에 맞춰 발간된 이 동명의 책에는 GPT-3 플랫폼을 통해 구성한 대화들이 담겨 있다. 이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미디어버스에서 출간되었다. 대화 참여자들 가운데는 위라세타쿤 자신을 비롯해 살바도르 달리, 크리슈나무르티, 아서 C. 클라크, 틸타 스윈튼, 올리버 색스 같은 실존 인물도 있지만 이름 모를 인도 소녀도 있고, 늑대 그리고 블랙홀과 태양 같은 비인간 존재들까지도 있다. 이들의 모든 대화는 위라세타쿤과 공학자인 팻 파타라누타폰이 입력한 프롬프트를 따라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이 작업이 배우들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알려주지 않은 채 그들 주위를 서성이며 영화를 연출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정오의 낯선 물체>에서 효과적으로 운용해 성공을 거두었던 ‘우미한 시체’라 불리는 초현실주의적 방법을 인공지능 플랫폼에 적용해본 수동성의 사례랄까?

세 번째 대상은 가상현실 퍼포먼스다. 이것은 2022년 7월 30일부터 10월 10일까지 열린 아이치트리엔날레의 커미션을 받아 제작되었다. 큐레이터 소마 치아키와의 인터뷰에서, 위라세타쿤은 “다른 미디어를 탐구하면서도 시네마로 되돌아온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퐁피두센터에서 이 작품을 선보일 때는 이렇게 말했다. “VR은 무언가 다르다. 그건 전혀 시네마가 아니다. (…) 나는 VR이 꿈에 가깝다는 것을 발견했다.” 꿈은 분명 꿈꾸는 자의 기억에서 연유하는 것이지만 꿈꾸는 자의 의지로 결코 통어할 수 없는 수동적 창조력의 극치다. VR에 관한 위라세타쿤의 언급에는 모호한 구석이 없지 않다. 그의 말은 VR이 관람자에게 꿈과 유사한 체험을 선사한다는 뜻일까? 하지만 그의 말은 그것을 다루는 작가에게 VR은 꿈과 기능적으로 닮은 장치이자 도구라는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은가?


<메모리아>(아피찻퐁 위라세타쿤, 2021)


이제 우리는 위라세타쿤에게 정글에 관해 묻기보다는 태양에 관해 물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자면, 그에게 정글은 실재적 질료다. 하지만 태양은 더는 그렇지 않다. 태양은 여러 실재적 질료들을 통해 그가 드러내려 하는 어떤 관념적 형상이다. 물론 그는 VR이 우리를 태양으로부터 떼어놓는 매체인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태양은 지구가 그 주위를 도는 천체를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무심한 말에 오도되어서는 안 된다. 그가 제공하는 가상현실 이미지는 컴퓨터로 만들어낸 시뮬레이션이고, 거기 등장하는 태양은 진짜 태양의 모사물일 뿐이라는 상식적인 발언에 자칫 길을 잃어서도 안 된다. 대화의 상대로서 태양은 현실의 천체와 무관한 형상이다. 이 태양은 천체가 아니라 매체다. 이 태양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태양과의 대화라고 명명된 전시와 책과 퍼포먼스는 하나의 태양과 나눈 세 개의 다른 대화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서로 다른 ‘태양들’을 드러내기 위한 세 번의 다른 시도처럼 보인다. 내가 실제로 접할 수 있었던 두 개의 시도만을 고려한다 해도, 위라세타쿤의 첫 VR 작업은 GPT-3가 생성한 대화를 엮은 책과는 전혀 무관한 퍼포먼스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로 하여금 창조적 수동성의 열락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장치, 그의 기억을 소재로 삼되 그의 통어에서 풀려난 세계를 만들어내는 장치, 달리 말하자면 꿈의 기제를 기술적으로 전유한 비개인적 또는 탈개인적 장치의 고안이라는 점에서는 놀랄 만큼 닮았다. 태양은 이런 장치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위라세타쿤의 영화는 그 자체로 이런 장치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는 이런 장치의 특성을 띤 인물이 종종 등장한다. 의인화된 장치라고 해도 좋겠다. 그의 영화에서 곧잘 마주치게 되는 잠자는 사람들 가운데 <메모리아>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에르난은 이런 장치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주 특별한 존재다. 그는 꿈조차 꾸지 않고 잠에 푹 빠져드는 존재다. 영화의 주인공인 제시카는 이런 상태를 죽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잠재적으로 세계의 모든 기억을 저장하는 ‘하드 디스크’임을 자처하는 에르난은 접촉을 통해 제시카에게 진정 수동성의 창조적 열락이란 어떤 것인지를 체험케 한다. 여기에는 <열대병>에서 보았던 인간과 비인간의 조우를 둘러싼 애니미즘적 신비 대신 오토마티즘적 경이가 있다. 그것과 대화하고 접촉하는 이를 이런 경이로 이끄는 인격적 비인격이야말로 오늘날 위라세타쿤을 매혹하는 가상적 태양이다. 즉, 에르난은 이런 태양의 형상이다.


<태양과의 대화>(아피찻퐁 위라세타쿤, VR 퍼포먼스)


위라세타쿤의 VR 퍼포먼스를 체험하는 공연장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한가운데 커다란 양면 스크린이 설치된 공간에서 헤드셋을 착용하고 이리저리 느리게 배회하는 일군의 관람자들을 보게 된다. 우리보다 앞서 입장한 이들이 보고 있는 가상현실 속 풍경은 어떠한지 당장은 알 수 없다. 공연장 가운데 놓인 커다란 스크린 양편에는 서로 다른 영상이 프로젝션되고 있지만 그 둘을 동시에 보기는 어렵다. 이처럼 동시적 관람을 어렵게 하는 더블 프로젝션 방식은 위라세타쿤이 초기 설치 작업인 <홍콩에서의 두 번째 사랑>에서부터 이미 사용했던 터다. 먼저 입장해 헤드셋을 쓰고 배회하는 관람자들의 몸짓을 나중에 입장한 관람자들이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보게 하는 방식도 오늘날의 VR 작업에서 낯선 것은 아니다. 

이 작업에서 진정 흥미를 끄는 것은 스크린에 프로젝션되는 두 개의 영상과 헤드셋에 재생되는 가상현실 영상을 위라세타쿤이 흡사 생성형 AI의 작동을 활성화하는 프롬프트처럼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 이때 생성형 AI에 해당하는 장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휴먼 러닝’의 역량을 갖춘 관람자 각각을 유닛으로 삼아 일종의 신경망처럼 기능하는 공연장 자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또 다른 가상적 태양을 마주하게 된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여기서 우리는 아예 그 태양 속에, 태양의 일부로 있다.

스크린에 비치던 두 개의 영상이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우리는 앞서 입장한 관람자들이 벗어둔 헤드셋을 착용한다. 이 체험형 퍼포먼스에서 헤드셋을 쓴다는 것은 눈을 감고 잠에 빠져 꿈을 꾸는 상태와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잠들어 있되 서서 배회하는 몽유의 상태라고 해야 옳겠다. 헤드셋을 쓴 다른 관람자들은 허공에서 떠도는 하얗게 빛나는 조그만 점의 형상으로 보인다. 우리보다 늦게 입장해 아직 헤드셋을 쓰지 않은 관람자들은 알아서 조심스레 우리를 피해 다닐 것이다. 두 부류의 관람자는 스크린이나 디스플레이에 비치는, 러닝타임이 정확히 맞춰진, 이따금 확실히 시선을 유도하는 시각적 요소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영상을 보며 각자의 움직임을 그린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향은 청각적인 수준을 넘어 종종 촉각적으로 다가온다. 

이 퍼포먼스를 관통하는 원리는 단순하고 강력하다. 모두가 다른 것을 보면서도 하나의 응시 안에 놓여야 한다. 이것은 장치의 명령이고 장치적 명령이다. 헤드셋을 쓰고 나면 곧바로 보이는 것은 공연장 전체가 모델링된 증강 현실이다. 공연장 가운데는 여전히 커다란 양면 스크린이 있다. 그런데 공연장 사면의 벽 위쪽으로 더 많은 스크린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 스크린은 이내 하나둘씩 사라지고 하나의 강력한 형상, 하얗게 빛나는 태양의 형상이 떠오른다. 이 태양은 이 퍼포먼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스펙터클한 형상이다. 여기서 위라세타쿤이 이처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된 태양의 형상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왜일까? 소마 치아키에게 말하길, 그는 이 작업을 진행할 때 “스크린을 축복하는 동시에 스크린과 작별을 고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헤드셋을 쓰지 않고 공연장을 배회하는 관람자들이 성물로서의 스크린에 경의를 표하는 자리에 놓인다면, 헤드셋을 쓴 관람자들은 스크린에 작별을 고하면서 태양을 환대하는 자리에 놓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태양의 응시 가운데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심해의 구덩이 같은 곳에서 부유하고 있다. 어쩐지 이건 위라세타쿤이 자신의 아득한 기억에서 끄집어낸 무언가를 시뮬레이션한 것 같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 게임을 즐겼고, 아타리가 1982년에 출시한 <E.T.>는 유년기의 그를 사로잡은 게임 가운데 하나였다. 그야말로 배회하는 일이 전부라 할 이 악명 높은 게임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역사상 최악의 컴퓨터 게임으로도 꼽히곤 한다. 어린 시절 이 게임을 플레이해본 이라면 (위라세타쿤이나 나와 동년배라는 뜻이겠지만) 태양과의 대화라 명명된 가상현실 퍼포먼스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움직임의 감각이 <E.T>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문득 깨닫게 될 터다. 배회하고, 구덩이에 빠지고, 때로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 게임의 플레이어는 과연 누구일까? 행복은 누구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