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1

바스러진 세계의 차가운 피부: 이민지의 사진들


※ 아래는 2025년 고양레지던시 입주작가 비평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쓴 글이다.


<빛의 파노라마>(2025)


이민지 자신에 따르면, 그는 본 것과 못 본 것을 찍는 사진작가다. 종종 이민지의 말은 그가 찍은 사진만큼이나 혼란스러운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그와 긴밀하게 작업한 이들조차 이 말의 의미를 두고 씨름하곤 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그의 개인전을 기획하고 사진 책을 편집하기도 한 박지수는 “그의 작업은 보이는 것보다 바라보다가 끝내 보지 못한 것, 보여주는 것보다 보여주려다 결국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짚은 적이 있다. 정확한 지적이다. 여기에 굳이 말을 덧붙이자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결국 작업의 결과물로서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지수는 이민지의 사진은 보이는 것을 통해 그가 염두에 두고 있(지만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환기하는 작업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물론 ‘본 것’이라는 표현에 모호한 구석은 없다. 문제는 ‘못 본 것’이라는 표현이다. 이것이 사진을 찍는 동안 보지 못한 것을 뜻하는 것인지, 보이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볼 수 없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가 애매하다. 이민지는 어떤 뜻을 염두에 두었을까. ‘못 본 것’이란 가시적임에도 간과한 것일까, 비가시적인 것일까, 아니면 볼 수 없도록 은폐되거나 금지된 것일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못 본 것’은 분명 가시적인데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지나친 것을 뜻한다. 그런데 작가가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지나쳤다 해도 가시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진에 찍힐 수 있고 실제로 찍힌다. 이런 해석을 따를 경우, 본 것과 못 본 것을 찍는 사진작가라는 이민지의 자기규정은 그저 상식적인 말이 된다. 왜냐하면 사진에는 언제나 작가가 본 것과 못 본 것이 함께 찍히는 법이기 때문이다. 관심의 인간인 작가는 보지 못하는 것을 무심한 카메라는 무차별적으로 본다. ‘여기 이런 게 있었네!’라는 감탄과 결부되는 뒤늦은 발견은 사진을 구석구석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이에게 무척이나 친숙한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민지는 이런 뜻으로 말한 것일까. 이러면 어떨까. 이민지의 자기규정을 그의 사진처럼 대한다면 말이다. 그것의 뜻을 파악하려 들기보다 그것이 유발하는 혼란을 오롯이 받아들여 보자. 자신은 본 것과 못 본 것을 찍는다는 말, 지나치게 애매하다면 애매하고, 지나치게 투명하다면 투명한 이 말은 의미적으로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그의 사진과 닮았다. 일차적으로 이민지의 사진은 구체시를 이루는 시어詩語와 유사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사진작가인 그에게는 시인과는 달리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관습적 어휘의 목록이 없다. 그가 구사하는 것은 세계로부터 찍어낸 이미지들이다. 여기서 찍어낸다고 할 때 무엇보다 그것은 카메라로 촬영하는 행위를 뜻하지만, <실버 라이닝>(2023)의 경우처럼 프로타주 기법을 통해 대상을 본뜨는 행위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 결과물은 지나치게 애매하다면 애매하고, 지나치게 투명하다면 투명하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그가 초기에 찍은 한 사진에서 우리는 텅 빈 냉장고 안에 놓인 파인애플 하나를 본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에 찍은 한 사진에서는 줄에 매달린 심벌 위에 돌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본다. 최근에 발표한 한 사진에서는 나무판 위에 올려진 커다란 돌덩이와 그것을 버티고 있는 누군가의 손을 본다. 이 이미지들은 더할 나위 없이 즉물적인 투명함으로 다가오지만,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애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처럼 애매한 느낌이 드는 것이 작가가 보지 못하고 지나쳤거나, 보이지 않거나, 은폐된 무엇을 사진이 지시하기 때문은 딱히 아닌 듯싶다. 이민지의 사진들 가운데 즉물적인 유형의 사진들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시각적으로는 아예 포착 불가능한 감각을 맹목적으로 환기하려 든다. 냉장고 안에 든 파인애플은 냉기라는 촉각적 자극을, 심벌 위에 놓인 돌들은 소리라는 청각적 자극을 예기하며 조용히 멎어 있다. 커다란 돌덩이를 지탱하고 있는 손은 한없이 그러고 있지는 못할 터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이민지의 사진에 감도는 고요하고 서늘한 감각적 예기의 정취 혹은 기분은 그의 사진을 결정적인 것이라기보다 잠정적인 것에 가까운 것으로 만든다. 이를 단순하게 ‘순간’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시간의 피부를 살짝 떼어낸 얇고 차가운 조각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겠다. 그래야 이민지의 사진에 은은히 서린 촉각성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그의 사진은 눈을 이끄는 동시에 몸을 건드리려 든다. 

2019년에 발간된 사진 책에 수록된 작가 노트에서, 쪼개지고 떠밀려 해변까지 온 빙하를 떠올리며 이민지가 “조각난 뼛조각 같은 얼음들”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곧바로 자신의 사진들을 가리키는 말처럼 들린다. 이로부터 2년 후에 쓴 ‘몸-눈 일지’에서는 “사진은 뼈, 화석, 단단한 것인 동시에 투명한 허물일지 모른다”고 적는다. 그런데 그가 화석을 언급했다 해서 사진의 지표성이라는 익숙한 이론적 개념을 떠올려선 안 된다. 이민지의 말에서 화석은 뼈와 더불어 사진의 단단함을 환기하는 은유다. 그가 “허물을 벗듯 떨어진 사진들”이 “점차 굳어가, 뼛조각 혹은 화석처럼 단단해”진다고 말하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럼 혹시 그가 말하는 단단함이란 애매함의 다른 표현일까. 그렇다면 사진이라는 허물 내지는 뼛조각은 어떻게 얼음이면서 한편으론 화석일 수 있을까. 얼음의 연약한 투명성과 화석의 단단한 애매함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그가 쓴 텍스트들은 이런 물음들 곁에서 서성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민지의 사진은 가능한 답변을 찾아 움직이는 여행이다. 암석 표면을 촬영한 이미지들을 그야말로 조각난 허물 내지는 뼛조각처럼 평면에 배치해 만든 작업인 <걷기 시퀀스>(2021), 혹은 2017년에 작가가 실제로 방문했던 아이슬란드의 빙하 지대를 맵스미MAPS.ME에 남겨둔 좌표값을 통해 구글어스로 ‘필드 트립’하며 갈무리한 일련의 사진들을 떠올려 본다. 이런 작업의 의의는 카메라를 통해 포착할 수 있는 실제의 장소만이 아니라 디스플레이라는 가상의 장소 역시 이민지가 사진이라는 피부의 이중성을 답사하는 중요한 장소로 삼고 있음을 일러준다는 데 있다. 구글어스처럼 네트워크로 연결된 디스플레이를 누빌 때 우리가 느끼는 바스러진 세계의 감각은 그의 사진에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 장소에 천착해 찍은 것이라 해도, 그의 사진은 지극히 즉물적이고 투명하게 다가오면서도 그것이 딱히 무언가를 가리키는 흔적은 아니라는 점에서 애매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본 것과 못 본 것을 사진 찍는다는 말은 스스로의 사진에 깃든 바로 이런 특성을 염두에 둔 (투명한 동시에 애매한) 언급이다.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낫겠다. 그의 사진은 무언가의 흔적일 때조차 그것이 가리키는 것을 지우고 얇고 차갑고 단단한 존재로만 남는 (투명한 동시에 애매한) 순수 흔적, 즉 몸체 없는 허물이자 속살 없는 피부다.

등대가 없던 시절에 달빛을 반사해 바다를 지나는 이들의 길잡이가 되었던 인천 소청도의 석회암 지대를 기록한 <빛의 파노라마>(2024) 연작 가운데 하나를 나는 고양레지던시에 있는 이민지의 작업실에서 보았다. 전시라는 맥락에 자리할 경우라면 몰라도 이 사진은 그 자체로는 소청도의 석회암 지대와 관련된 어떤 이야기와도 무관하다. 이 사진은 그저 실제의 장소에서 떨어져나온 하나의 순수 허물이자 피부일 뿐이다. 심지어 이 사진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암석의 표면은 가히 무시간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추상적 형상으로까지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자칫 사진이 이끌리기 쉬운 무시간적 추상성의 아름다움이야말로 꺼림칙한 것이다. 이민지의 사진이 여기서 멈추는 법은 없다. 수직의 암석 평면 위아래로 줄지어 뻗어 있는 옛 채석 작업의 자국들은 가까스로 이 사진을 투명성과 애매함이 엇물리고 ‘본 것’과 ‘못 본 것’이 넘나드는 자리로 돌려놓는다. 주인을 잃은 기억은 거기로 스며든다. 사진은 이런 기억을 붙들려 드는 무모한 시도다.


부기附記

본문에서 “나무판 위에 올려진 커다란 돌덩이”를 찍은 사진이라고 언급한 것은 <빛과 물질>(2025)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 사진에 보이는 것은 사실 돌덩이를 닮은 종이로, 돌가루와 종이죽 및 기타 재료들을 섞어 임선구 작가가 제작한 얇은 조각이다. 나는 이 글을 쓰고 난 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침 집에 배달되어 온 사진 잡지 《보스토크》 2025년 가을호에도 이 사진이 수록되어 있어 나는 유심히 다시 그것을 들여다보았는데 사진만 보아서는 도무지 감지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오해 내지는 착오가 이 글의 논지와 관련해 무척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투명성과 애매함을 동시에 간직한 이민지 사진의 특성 말이다. 또한 이 ‘얇은 조각’은 그야말로 피부이자 허물 같기도 하다. 그는 <빛의 파노라마>의 소재가 된 소청도의 바위, 빛을 반사하는 돌덩이를 떠올리며 <빛과 물질>을 찍었다고 한다. 


<빛과 물질>(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