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4

시네마레나, 스캔들을 위한 경기장
: 알베르트 세라의 <고독의 오후들>

 

※ 아래 글은 사진 잡지 《보스토크》 51호(2025년 가을호)에 실린 것이다.


투우를 다룬 영화의 제목이 ‘고독의 오후들’이라고 하면 곧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세 개의 텍스트가 있다. 당연히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오후의 죽음』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헤밍웨이의 제목을 빌려온 두 프랑스 영화평론가의 텍스트, 즉 앙드레 바쟁의 「매일 오후의 죽음」과 세르주 다네의 「오후의 슬픈 죽음들」이 뒤를 따른다. 헤밍웨이는 투우에 열광했고, 바쟁은 저 글을 쓰기 전까지 투우를 본 적이 없으며, 다네는 일찍부터 스페인에 투우를 보러 다녔다. 이들의 글에서 감각의 인간과 두뇌의 인간을 가르는 차이를 감지할 수 있을까? 생리적인 것과 문체적인 것을 연결하는 상투적 가정에는 어쩐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께름칙한 구석이 있다. 이를테면, ‘공감을 일으키는 섬세한 여성적 문체’ 같은 진부한 표현이 그렇다. 어린 시절 이후 삼십 년 가까이 보지 않았던 투우에 이런저런 텍스트를 통해 다시 다가갔다는 이가 만든 투우 영화인 <고독의 오후들>은 공감과 반감을 넘어선 아연실색을 유발하고, 섬세한 동시에 거칠기 짝이 없고,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경계를 무심히 교란한다. 

영화와 투우의 관계는 흥미진진한 주제다. 특히 요즘에는 투우가 점점 더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금지되기도 하는 터라 더욱 그렇다. 범죄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의 바타유적 친연성을, 이제는 점점 희박해지고 있는 이 지독히도 난처한 결탁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어떤 예술적 활동을 다른 활동에 빗대어 고찰하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투우는 두 가지 점에서 아주 특별하다. 투우에서는 경기와 연기가, 예측불허의 승부와 주도면밀한 의식(儀式)이, 돌발성과 치밀함이 이중나선을 그리며 상승한다. 그거야 프로레슬링 같은 스포츠도 마찬가지 아닌가?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이 들었다면 투우의 경우 저 이중나선이 죽음으로 향한다는, 아니 반드시 향해야 한다는 필살의 규칙을 잠시 잊은 것이겠다. 



스페인에서 열리는 산세바스티안영화제에서 작년에 처음 공개한 <고독의 오후들>에서 알베르트 세라가 투우와 영화를 빗대어 보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담하고 난폭한 동시에 엄정하고 차분한 이 작품에서 영화적 이미지의 내부와 외부를 구획하는 프레임에 대한 세라의 집착은 놀랄 만한 강도로까지 상승한다. 세라의 프레임은 투우사 안드레스 로카 레이가 소와 싸우는 경기장의 모습을 담아낸다기보다 그 자체로 일종의 경기장이 된다. 여기서 그는 집요하게 하나의 표적에 매달린다. 그 표적은 안드레스도 아니고 그와 겨루는 소도 아니다. 일정한 복장과 장구를 갖추고 모종의 절차를 따라 필살의 의례를 수행하는 안드레스의 치밀함, 그런 것들 따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순수한 분노로 내달리는 소의 돌발성, 그리고 이들이 격렬하게 뒤얽히며 예정된 죽음에 다가가는 매 순간을 결코 반복되지 않을 뜻밖의 순간처럼 느끼게 만드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세라의 프레임이 집요하게 좇는 이 표적을 간단히 스캔들이라고 부르자. 스캔들은 이중나선을 그리며 상승하는 돌발성과 치밀함이 치명적 아름다움에 이르는 시간을 필요로 하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스캔들의 독특한 사건성은 그것이 반복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영화적 프레임으로 스캔들을 포착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광기나 다름없다.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영화는 원리상 무한히 반복 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일함의 반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분명 광기다. 바쟁이라면 이를 형이상학적 외설성이라고 불렀을 터다. 반복 불가능한 스캔들의 체험을 스크린에 비치는 반복 가능한 이미지로 사로잡아 우리에게 전하겠다는 세라의 시도는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라는 스크린상에서 실제의 죽음을 묘사하는 것이 반복 가능성을 통해 죽음에 엄숙함과 영원성을 부여하기에 감동적이라는 바쟁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반복 가능성이 아니라 반복 자체를 통해 죽음의 스캔들을 다루려 든다. 세라에게 프레임이 경기장이라면 반복은 투우사의 카포테나 물레타와도 같다.

반복 가능성이 아니라 반복 자체를 통해 반복 불가능한 것의 체험을 가능케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고독의 오후들>에서 소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이 영화가 언제 어디서든 거듭 상영될 수도 있다는 점과는 무관하다.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스크린상의 죽음이 반복되리라는 것, 즉 지금 상영 중인 영화의 외부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매일 오후의 죽음’은 세라의 관심사가 아니다. 바로 지금 상영 중인 영화의 내부에서 반복 자체를 통해 매 순간 스캔들의 체험을 야기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목표다. 반복은 크게 세 곳의 장소(투우 경기장, 자동차 안, 호텔 객실)만을 오가다시피 하면서 유사한 절차로 진행되는 다섯 차례의 투우 경기를 보여주는 이 영화의 내부에 있다. 세라는 반복의 장소들에 속하지 않는 두 개의 장소 가운데 하나를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주위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어둠 속에서, 검은 소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그리고 자동차 조수석에 탄 안드레스의 얼굴을 정면에서 포착한 쇼트가 이어진다.



경기장으로서의 프레임 속에서, 스캔들은 성난 소가 카포테나 물레타에 달려들듯 반복에 달려든다. 이때 엄습의 강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프레임의 견고함이 요구된다. 실로 <고독의 오후들>을 이루는 각각의 쇼트들은 절대적인 독립성을 지니고 있다. 롱테이크에만 기대기보다는 여러 다양한 쇼트들을 구사해 장면을 구축하는 데쿠파주의 영화이기도 한데 말이다. 이것은 개별적인 쇼트 하나하나가 ‘매일 오후의 죽음’에 해당하는, 그야말로 ‘고독의 오후들’로 이루어진 영화다. 이 쇼트들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서로 다른 시점에 촬영한 것인데도 집요한 반복의 감각을 준다. 우리는 어떤 영화의 쇼트들을 글로 묘사할 때 종종 그것들 내부의 상황 및 전후 관계에 의존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고독의 오후들>의 쇼트들을 적절히 구분해 묘사하는 일은 꽤 어렵다. 동시대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강고한 형식주의자인 세라의 쇼트들이 이처럼 식별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는 것은 어째서일까? 유사한 상황(‘안드레스가 소를 노려보고, 소가 그의 카포테나 물레타를 노려보고, 그가 카포테나 물레타를 흔들고, 소가 그것을 향해 돌진하고……’)이 거듭되기 때문일까? 그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실은 무엇보다 세라의 프레임이 거의 철저하다 할 만큼 시선의 벡터를 통제하고 있어서다.

투우 경기장 장면들에서 우리는 관중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카메라는 좀처럼 관중석 쪽을 향하지도 않고 관중이 보일 만큼 고개를 들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펜스 바로 뒤에 모여 있는 관계자들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심지어 투우사와 소와 그들을 둘러싼 모래만이 보이는 부감 쇼트들도 있다. 우리는 소리를 통해서만 관중의 존재를 떠올리는데, 그러다 보니 때로 그 존재 여부 및 함성이나 야유의 사실성이 미심쩍게 느껴지는 때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매개할 어떤 존재도 없이 각각의 쇼트와 맨눈으로 대면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안드레스의 일상적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경기장 밖의 삶은 호텔 객실과 자동차 내부에서 묘사되는 것이 전부다. 그가 투우 경기를 위한 의상을 입고 벗는 호텔 객실에서 우리는 거울은 볼 수 있지만 창문은 볼 수 없다. 안드레스와 동료 투우사들이 타고 이동하는 자동차 내부는 조수석 쪽에 고정된 카메라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처럼 촬영했다. 우리는 안드레스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영화가 반쯤 지났을 무렵에 나오는, 차창 밖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대응하는, 밤거리 풍경이 보이는 단 하나의 시점 쇼트가 있을 뿐이다. <고독의 오후들>에서 이 풍경은 저 반복의 장소들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하나다. 자동차 조수석에 탄 안드레스의 얼굴을 포착한 쇼트는 이 시점 쇼트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 영화 도입부의 검은 소와 마찬가지로, 이 밤거리 풍경은 프레임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스캔들의 지표다. 

이 유일한 시점 쇼트는 우리에게 이 영화의 쇼트들이 누구의 시점에도 귀속되지 않는 것임을 확실히 일러준다. 투우 경기의 경우, 관중석의 특정한 위치에서 경기장을 전후좌우로 둘러보는 시점을 기준으로 편집하는 스포츠 방송과 달리, 어떤 기준점도 가정하지 않는 여러 대의 카메라로 촬영된 쇼트들의 조합으로 구성되었다. 그럼에도 연속적인 인상을 준다는 점이 놀랍다. 프랑스 개봉 당시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세라가 쓴 표현을 옮기자면, 그는 어떤 직관이나 선입견도 없이 사물들을 포착하는 “두뇌가 없는” 카메라의 역량을 데쿠파주를 통해 강화하고 있다. (카메라의 이런 역량을 믿기에 그는 촬영 현장에서 카메라 오퍼레이터들이 포착하는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모니터를 쓰지 않는다.) 물론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문제 삼을 수도 있다. 세라는 프레임의 견고함을 추구하지만, 쇼트들의 일관성에 매달리는 법은 없다. 문득, 일관성이란 지극히 비인간적인 것으로 진지함과 더불어 광신적인 수도사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 했던 파졸리니의 말이 떠오른다. 생각해 보라. <고독의 오후들>을 만든 이 작가는 리베르탱들이 한밤의 숲에서 벌이는 난교를 묘사한 <리베르테>의 작가다. 그는 진지함과 일관성을 불문율로 삼는 미스터리물을 기분 좋게 농락한 <퍼시픽션>의 작가기도 하다. 견고한 프레임과 집요한 반복을 통해 스캔들의 경험에 다가간다는 언뜻 모순적인 시도를 떠받치는 그의 신조는 무엇일까? 



2022년에 세라는 자신의 고향인 스페인 북동부의 바뇰레스에서 열리는 축제에 연사로 초청받아 즉흥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이 연설은 이듬해에 『성 마르티리아를 위해 건배』라는 제목의 책자로 발간되었다. 여기서 그는 프레임을 비단 영화가 아니라 삶의 전 국면에서 의미심장한 개념으로 확장해 쓰고 있다. 왜냐하면 우연은 “잘 구조화된 프레임 내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가 한없이 사랑하는 카니발적 ‘축제(festa)’는 어쩐지 스캔들과 일맥상통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형태의 축제도 정의상 통제 불가능하다. 그것을 실행하고 조직화된 방식으로 관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너무나도 역설적인 도구를 사용하는 것, 즉 혼돈을 만들어내는 것뿐이다.”

지금 왜 세라는 이런 시도에 몰두하는가? 픽션영화에서의 죽음은 언제라도 평행우주에서 초기화할 수 있는 진부한 것이 되고, 다큐영화에서의 죽음은 스마트폰으로 기록되어 온라인에 유포되는 찰나의 충격을 빌려오거나 모방한 것이 된 지금, 거듭되는 실제적 죽음을 통해 영화적 이미지의 육감(肉感)을 되찾기 위해서일까? 하지만, 이 영화에서 소의 죽음은 스캔들이 아니다. 지나치게 우아한 의식과 절차를 따라 거행되는 투우라는 경기 자체의 난폭함만이 아니라, 세라가 프레임의 엄정함과 쇼트의 집요한 반복을 통해 역설적으로 활성화하려 드는 형식의 혼돈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러면 이 영화를 아무리 거듭 본다고 해도 결코 말끔히 가시지 않을 스캔들이 강렬하게 다가올 터다. 그것은 두뇌 없는 카메라가 그야말로 가차 없이 줄기차게 포착해 내는 안드레스의 표정이다. 불안, 안도, 긴장, 공포가 뒤섞인 이 현존하는 최고 투우사의 얼굴에는 스크린상에 아직 실현되지 않은 죽음의 스캔들이 시종일관 어른거린다. 내부 시사 자리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본 안드레스가 충격을 받았던 것도 이 때문은 아니었을까? 두뇌 없는 카메라는 당신이 바라는 대로 당신을 보지 않는다. 모두가 각자의 손에 카메라를 들고 각자의 이미지를 만드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이처럼 무심한 시각이야말로 진정한 스캔들이다. 

2025-09-11

바스러진 세계의 차가운 피부: 이민지의 사진들


※ 아래는 2025년 고양레지던시 입주작가 비평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쓴 글이다.


<빛의 파노라마>(2025)


이민지 자신에 따르면, 그는 본 것과 못 본 것을 찍는 사진작가다. 종종 이민지의 말은 그가 찍은 사진만큼이나 혼란스러운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그와 긴밀하게 작업한 이들조차 이 말의 의미를 두고 씨름하곤 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그의 개인전을 기획하고 사진 책을 편집하기도 한 박지수는 “그의 작업은 보이는 것보다 바라보다가 끝내 보지 못한 것, 보여주는 것보다 보여주려다 결국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짚은 적이 있다. 정확한 지적이다. 여기에 굳이 말을 덧붙이자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결국 작업의 결과물로서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지수는 이민지의 사진은 보이는 것을 통해 그가 염두에 두고 있(지만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환기하는 작업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물론 ‘본 것’이라는 표현에 모호한 구석은 없다. 문제는 ‘못 본 것’이라는 표현이다. 이것이 사진을 찍는 동안 보지 못한 것을 뜻하는 것인지, 보이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볼 수 없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가 애매하다. 이민지는 어떤 뜻을 염두에 두었을까. ‘못 본 것’이란 가시적임에도 간과한 것일까, 비가시적인 것일까, 아니면 볼 수 없도록 은폐되거나 금지된 것일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못 본 것’은 분명 가시적인데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지나친 것을 뜻한다. 그런데 작가가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지나쳤다 해도 가시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진에 찍힐 수 있고 실제로 찍힌다. 이런 해석을 따를 경우, 본 것과 못 본 것을 찍는 사진작가라는 이민지의 자기규정은 그저 상식적인 말이 된다. 왜냐하면 사진에는 언제나 작가가 본 것과 못 본 것이 함께 찍히는 법이기 때문이다. 관심의 인간인 작가는 보지 못하는 것을 무심한 카메라는 무차별적으로 본다. ‘여기 이런 게 있었네!’라는 감탄과 결부되는 뒤늦은 발견은 사진을 구석구석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이에게 무척이나 친숙한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민지는 이런 뜻으로 말한 것일까. 이러면 어떨까. 이민지의 자기규정을 그의 사진처럼 대한다면 말이다. 그것의 뜻을 파악하려 들기보다 그것이 유발하는 혼란을 오롯이 받아들여 보자. 자신은 본 것과 못 본 것을 찍는다는 말, 지나치게 애매하다면 애매하고, 지나치게 투명하다면 투명한 이 말은 의미적으로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그의 사진과 닮았다. 일차적으로 이민지의 사진은 구체시를 이루는 시어詩語와 유사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사진작가인 그에게는 시인과는 달리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관습적 어휘의 목록이 없다. 그가 구사하는 것은 세계로부터 찍어낸 이미지들이다. 여기서 찍어낸다고 할 때 무엇보다 그것은 카메라로 촬영하는 행위를 뜻하지만, <실버 라이닝>(2023)의 경우처럼 프로타주 기법을 통해 대상을 본뜨는 행위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 결과물은 지나치게 애매하다면 애매하고, 지나치게 투명하다면 투명하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그가 초기에 찍은 한 사진에서 우리는 텅 빈 냉장고 안에 놓인 파인애플 하나를 본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에 찍은 한 사진에서는 줄에 매달린 심벌 위에 돌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본다. 최근에 발표한 한 사진에서는 나무판 위에 올려진 커다란 돌덩이와 그것을 버티고 있는 누군가의 손을 본다. 이 이미지들은 더할 나위 없이 즉물적인 투명함으로 다가오지만,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애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처럼 애매한 느낌이 드는 것이 작가가 보지 못하고 지나쳤거나, 보이지 않거나, 은폐된 무엇을 사진이 지시하기 때문은 딱히 아닌 듯싶다. 이민지의 사진들 가운데 즉물적인 유형의 사진들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시각적으로는 아예 포착 불가능한 감각을 맹목적으로 환기하려 든다. 냉장고 안에 든 파인애플은 냉기라는 촉각적 자극을, 심벌 위에 놓인 돌들은 소리라는 청각적 자극을 예기하며 조용히 멎어 있다. 커다란 돌덩이를 지탱하고 있는 손은 한없이 그러고 있지는 못할 터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이민지의 사진에 감도는 고요하고 서늘한 감각적 예기의 정취 혹은 기분은 그의 사진을 결정적인 것이라기보다 잠정적인 것에 가까운 것으로 만든다. 이를 단순하게 ‘순간’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시간의 피부를 살짝 떼어낸 얇고 차가운 조각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겠다. 그래야 이민지의 사진에 은은히 서린 촉각성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그의 사진은 눈을 이끄는 동시에 몸을 건드리려 든다. 

2019년에 발간된 사진 책에 수록된 작가 노트에서, 쪼개지고 떠밀려 해변까지 온 빙하를 떠올리며 이민지가 “조각난 뼛조각 같은 얼음들”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곧바로 자신의 사진들을 가리키는 말처럼 들린다. 이로부터 2년 후에 쓴 ‘몸-눈 일지’에서는 “사진은 뼈, 화석, 단단한 것인 동시에 투명한 허물일지 모른다”고 적는다. 그런데 그가 화석을 언급했다 해서 사진의 지표성이라는 익숙한 이론적 개념을 떠올려선 안 된다. 이민지의 말에서 화석은 뼈와 더불어 사진의 단단함을 환기하는 은유다. 그가 “허물을 벗듯 떨어진 사진들”이 “점차 굳어가, 뼛조각 혹은 화석처럼 단단해”진다고 말하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럼 혹시 그가 말하는 단단함이란 애매함의 다른 표현일까. 그렇다면 사진이라는 허물 내지는 뼛조각은 어떻게 얼음이면서 한편으론 화석일 수 있을까. 얼음의 연약한 투명성과 화석의 단단한 애매함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그가 쓴 텍스트들은 이런 물음들 곁에서 서성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민지의 사진은 가능한 답변을 찾아 움직이는 여행이다. 암석 표면을 촬영한 이미지들을 그야말로 조각난 허물 내지는 뼛조각처럼 평면에 배치해 만든 작업인 <걷기 시퀀스>(2021), 혹은 2017년에 작가가 실제로 방문했던 아이슬란드의 빙하 지대를 맵스미MAPS.ME에 남겨둔 좌표값을 통해 구글어스로 ‘필드 트립’하며 갈무리한 일련의 사진들을 떠올려 본다. 이런 작업의 의의는 카메라를 통해 포착할 수 있는 실제의 장소만이 아니라 디스플레이라는 가상의 장소 역시 이민지가 사진이라는 피부의 이중성을 답사하는 중요한 장소로 삼고 있음을 일러준다는 데 있다. 구글어스처럼 네트워크로 연결된 디스플레이를 누빌 때 우리가 느끼는 바스러진 세계의 감각은 그의 사진에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 장소에 천착해 찍은 것이라 해도, 그의 사진은 지극히 즉물적이고 투명하게 다가오면서도 그것이 딱히 무언가를 가리키는 흔적은 아니라는 점에서 애매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본 것과 못 본 것을 사진 찍는다는 말은 스스로의 사진에 깃든 바로 이런 특성을 염두에 둔 (투명한 동시에 애매한) 언급이다.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낫겠다. 그의 사진은 무언가의 흔적일 때조차 그것이 가리키는 것을 지우고 얇고 차갑고 단단한 존재로만 남는 (투명한 동시에 애매한) 순수 흔적, 즉 몸체 없는 허물이자 속살 없는 피부다.

등대가 없던 시절에 달빛을 반사해 바다를 지나는 이들의 길잡이가 되었던 인천 소청도의 석회암 지대를 기록한 <빛의 파노라마>(2024) 연작 가운데 하나를 나는 고양레지던시에 있는 이민지의 작업실에서 보았다. 전시라는 맥락에 자리할 경우라면 몰라도 이 사진은 그 자체로는 소청도의 석회암 지대와 관련된 어떤 이야기와도 무관하다. 이 사진은 그저 실제의 장소에서 떨어져나온 하나의 순수 허물이자 피부일 뿐이다. 심지어 이 사진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암석의 표면은 가히 무시간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추상적 형상으로까지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자칫 사진이 이끌리기 쉬운 무시간적 추상성의 아름다움이야말로 꺼림칙한 것이다. 이민지의 사진이 여기서 멈추는 법은 없다. 수직의 암석 평면 위아래로 줄지어 뻗어 있는 옛 채석 작업의 자국들은 가까스로 이 사진을 투명성과 애매함이 엇물리고 ‘본 것’과 ‘못 본 것’이 넘나드는 자리로 돌려놓는다. 주인을 잃은 기억은 거기로 스며든다. 사진은 이런 기억을 붙들려 드는 무모한 시도다.


부기附記

본문에서 “나무판 위에 올려진 커다란 돌덩이”를 찍은 사진이라고 언급한 것은 <빛과 물질>(2025)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 사진에 보이는 것은 사실 돌덩이를 닮은 종이로, 돌가루와 종이죽 및 기타 재료들을 섞어 임선구 작가가 제작한 얇은 조각이다. 나는 이 글을 쓰고 난 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침 집에 배달되어 온 사진 잡지 《보스토크》 2025년 가을호에도 이 사진이 수록되어 있어 나는 유심히 다시 그것을 들여다보았는데 사진만 보아서는 도무지 감지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오해 내지는 착오가 이 글의 논지와 관련해 무척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투명성과 애매함을 동시에 간직한 이민지 사진의 특성 말이다. 또한 이 ‘얇은 조각’은 그야말로 피부이자 허물 같기도 하다. 그는 <빛의 파노라마>의 소재가 된 소청도의 바위, 빛을 반사하는 돌덩이를 떠올리며 <빛과 물질>을 찍었다고 한다. 


<빛과 물질>(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