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27

파괴의 연대기: 배윤환의 회화와 애니메이션

 

※ 2025년 8월 14일부터 11월 9일까지 스페이스K 서울에서 열린 배윤환 작가의 전시 《딥 다이버 Deep Diver》를 전시가 끝날 무렵에야 보고 왔다.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입주 작가로 있던 재작년에 서울과 인천의 작업실에 찾아가 진행 중인 작업들을 보기도 했고, 작업실을 제주로 옮긴 이후 작년 봄에 또 찾아가 새로 작업한 것들을 보기도 했지만, 이번 전시에는 올해 완성한 신작들이 적잖이 나와 있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업에서 영감을 얻은 삼면화 <서커스>(2025) 등 대형의 '검은 그림'들이 눈길을 끌었다.



인천아트플랫폼에서 보고 무척 마음에 들어했던 목판 작업 <어찌됐든 그 줄은 짧다>(2023) 등이 빠져 있는 것은 아쉬웠지만, 전시장에 한참 있으면서 그림들을 보고 또 보았다. 아래 글은 이번 전시에 대한 것은 아니고 인천아트플랫폼 2023년 레지던시 프로그램 카탈로그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배윤환이 만든 애니메이션들을 그의 회화 작업과 연계해 살펴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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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한다. 우리집은 파괴되었지만. 
그가 만든다. 우리집은 끝장났지만.
─배윤환의 <파쇄기>(2019)

대학 시절부터 현재까지 줄곧 화가로 활동해 온 배윤환은 수작업으로 제작한 단편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2013년 무렵부터 기회가 닿을 때마다 꾸준히 만들어왔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는 “딴짓”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제법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시퀀스”가 되었다. 다만 이런 애니메이션들은 주로 그의 회화 작품들을 선보이는 갤러리 전시에서 부수적인 영상 설치 형태로 소개되곤 했고 미술계 바깥에는 거의 알려질 기회가 없었다. 그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영화계에 포괄적으로 소개된 것은 2021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서였는데, 여기서는 그가 만든 여덟 편의 애니메이션이 ‘헛발질’이라는 제목으로 한데 묶여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같은 해, 인디애니페스트에서는 그의 <파쇄기>(2019)가 상영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이 있다 해서 배윤환을 애니메이션(을 겸업으로 하는) 작가라고 부르는 것은 어쩐지 적절치 못한 일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그것들을 애니메이션이라고 부르기도 적잖이 망설여진다. 그것들이 목탄과 클레이 그리고 인형 등을 활용해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말이다. 왜 그럴까?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들을 보고 있노라면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에서 발견되는 지극히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충동이 거의 감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운동 충동이다. 애니메이션(animation)이라는 용어의 어원과 맞닿아 있는 충동, 본질적으로 정지해 있는 대상에 기술적으로 활력을 부여해 어떻게든 움직임을 끌어내고자 하는 충동 말이다. 오히려 배윤환의 애니메이션들은 화면에 떠올랐다 이내 사라지고 마는 매 순간의 그림들, 형상들 또는 몸짓들 자체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이런 특성을 기술적, 시간적, 경제적 여건 때문에─가령, 비용과 시간 문제로 충분히 많은 수의 원화(原畫)를 그려 활용하지도 못하고 컴퓨터 그래픽을 보조적 수단으로 활용하지도 못해서라는 식으로─생겨난 부수적 효과라고 치부한다면 대단한 오해가 아닐 수 없다. 그보다는, 배윤환에게 카메라는 무엇보다 오래 지속되지 못할 그림들과 형상들과 몸짓들을 기록하는 수단이며, 이렇게 기록된 것들의 잇따른 연쇄가 부수적으로 애니메이션 비슷한 것이 된다고 보는 편이 옳다. 즉 그에게 있어 애니메이션은 운동 충동보다는 기록 충동과 결부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배윤환은 애니메이션 작업에 임할 때도 언제나 충실하게 화가인 채로 머물러 있는 셈이다. 그에게는 그림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일이 그림을 움직이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에서 원화는 움직임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구성요소에 지나지 않는 반면, 배윤환의 애니메이션에서 그것은 기록의 궁극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능구렁이같이 들개같이>(2015, 애니메이션, 5분)


<능구렁이같이 들개같이>(2015)는 배윤환의 애니메이션에서 움직임이란 이런저런 그림들을 부지런히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산출되는 부수적 효과임을 더할 나위 없이 잘 보여준다. 사실상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더는 남아 있지 않은 배윤환의 예전 작업실 벽면(에 붙은 그림들) 자체다. 종이 위에 목탄으로 그린 그림의 일부를 지우고 조금 변형해 다시 그리는 방식을 누차 거듭해 만든 <검게 칠하시오>(2017)나 <밭의 주인은 누구인가?>(2015) 등의 작업에서, 한 번 지워진 그림들은 종이 위에 흔적으로만 남게 된다. 클레이 애니메이션 기법이 활용된 <스튜디오 B로 가는 길>(2019)이나 <랍스터 쿼드릴>(2020)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여기서도 작가의 손놀림으로 거푸 변형되는 일련의 형상들은 그것들의 잇따른 연속을 통해 생성되는 움직임보다 중요하다. 이런 작품들에서 배윤환은 화가로서보다 조각가로서 작업한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여하튼 한 명의 애니메이터로서는 결코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배윤환은 움직이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기록하는 사람으로, 창작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파괴하는 사람으로 비치곤 한다. 파괴의 수행 자체가 창작의 수행이 되는 작업에 전념한다는 점에서 그를 탈창작가(decreator)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그는 머지않아 이내 파괴될 것을 만들고 기록하는 사람이며 그의 애니메이션은 이렇게 기록된 이미지들의 잇따른 연속이다. 그림은 지워지고 그 위에 다시 그려지고, 일시적으로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던 조형물은 이내 일그러지거나 다른 형태로 변화한다. 쉬이 지워지거나 변형되는 목탄이나 클레이 대신 아상블라주(assemblage) 기법으로 제작된 인형 캐릭터들을 활용한 영상인 <파쇄기>가 각종 문서를 잘라 조각내 버리는 기계를 주요 제재로 삼고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작가 자신이 만든 이미지나 조형물 자체를 줄곧 수정하고 변형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해도, 그의 작업에서 파괴가 주요한 모티브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의 영상 작업인 <키득대는 빙하들>(2023)과 <일요신간도서>(2023)는 역시 인형을 활용해 만든 것이지만, 지구 온난화로 인해 서식지를 (그리고 정신을) 잃을 위기에 처한 북극곰들을 둘러싼 상황이 파괴의 모티브와 맺는 관계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터다. 배윤환의 영상 작업을 분명하게 가로지르는 파괴 지향성은 기후 위기라는 동시대의 시급한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이들 작품에서조차 주제를 압도하는 강박으로 나타난다. 그가 2023년에 인천아트플랫폼에 입주 작가로 머물면서 만든 일련의 종이 조형물 작품들은 영상의 형태를 띠고 있지는 않지만 탈창작가로서 그의 면모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너무나도 쉽게 손상될 수밖에 없는 종이 상자를 자르거나 찢어서 만든 이 취약한 형상들은 공간의 한 부분에 영원의 자리를 각인하는 조각의 이념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다. 오히려 이것들은 베어먹은 사과로 된 몸통에 클레이로 된 얼굴을 지닌 <랍스터 쿼드릴>의 주인공 캐릭터에 가까이 있다.

배윤환은 너무나도 자주 작업실을 옮기며 이사를 다녀야 했던 경험이 자신의 작업에 영향을 주었다고 고백한다. 내용과 주제를 고민하기보다는 처리와 운반이 수월한 것을, 나아가 “파기”를 염두에 두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 당분간은 지속되리라는 믿음을 견지하는 일이 더는 불가능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뿐이라는 점을 그의 고백은 정확히 짚고 있다. 그런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 어떻게든 둘 모두를 취하는 방법은 없을까? 잇따라 파기되는 일련의 이미지와 조형물을 기록해 연이어 붙인 단출한 애니메이션 영상 파일이야말로 그에게 최적의 방법으로 비쳤던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영상 작품들이 극장용 디지털 영화 표준 포맷인 묵직한 DCP로 비로소 변환된 것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서다.)

하지만 우리는 화가로서 배윤환의 궁극적인 강박이 무엇보다 중첩(superposition)에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강박 또한 현재라는 표면의 불안정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는 곧 사라지거나 변형될 표면들을 잇따라 연속시키는 대신 한꺼번에 겹쳐 놓는 방법으로, 말하자면 “모든 그림들이 하나로 반죽된 그림”(<능구렁이같이 들개같이>)에 가까운 것을 산출한다. 때로 그는 자신의 유사-우화적 작업이 환기하는 이야기마저도 내용과 주제보다는 무수한 소리의 중첩으로 우리에게 다가가길 바라는 것 같다. “이야기가, 아니 소리가 개미처럼 우글거”리는 식으로 말이다(<자화상>(2017)). 하지만 회화에서 이러한 중첩은 결국 도달 불가능한 궁극의 이념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배윤환이 애니메이션적 잇따름과 회화적 이념으로서의 중첩 사이에 있는 일종의 중간 단계라 할 병치(juxtaposition)에 끌리곤 하는 것은? 아주 무작위적이지는 않지만 연상적으로 희미한 관련만 맺고 있는 이미지들을 나란히 두는 이 방식은, 길이가 50미터에 달해 작가 자신조차도 전체를 조망하며 그릴 수 없었던 두루마리 그림 <내가 본 게 고양이인가?>(2014)부터, 그가 구성한 이야기와 스케치가 함께 수록된 책자 『랍스터 쿼드릴』에 실린 그림(특히 281쪽) 및 여러 개의 판각된 목판들로 이루어진 <어찌됐든 그 줄은 짧다> 같은 격자형 작업으로까지 이어진다. 군데군데 목판 대신 종이로 때운 곳도 있고 여기저기 모서리가 흐트러져 있는 <어찌됐든 그 줄은 짧다>(2023)를 전시장에서 보고 있노라면 무심결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오른쪽 상단 벽에 붙은 종이 농구공이 목판 하나를 가볍게 때려 떨어뜨리는 듯한 연출이 배윤환의 파괴적 강박을 자못 부드럽게, 혹은 연약하게 드러내고 있어서다.


<어찌됐든 그 줄은 짧다>(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