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19

사라짐의 즐거움

 

※ 아래 글은 대전창작센터에서 열린 전시 《메신저의 신비한 결속》(한주옥 기획, 2024.3.26~5.19)에 대한 것으로, 전시 종료 이후에 출간된 동명의 도록에 수록되었다. 참고용 도판이나 사진 없이 읽힐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횔덜린 시의 해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가 비밀을 안다는 것은 그것의 베일을 벗기거나 해체함으로써가 아니라 오로지 비밀을 비밀로 수호함으로써 아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역설이다. 대부분의 그럴듯한 역설처럼 이 역설 또한 철저히 논리적인 생각의 소산이다. 비밀은 정의상 무언가를 감춘 것이다. 감춘 것이 드러나 버리는 순간 비밀은 더는 비밀일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처럼 감춘 것이 드러날 때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곤 한다. 여기서 앎의 대상은 바로 그 ‘것’이다. 감춰지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는 무엇이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비밀에 대해서라면 앎의 대상은 감춤이라는 행위 자체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즉, 비밀을 안다는 것은 감춤을 아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하이데거에게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감추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감추는 이도 있을 수 있는 것인가요? 만일 하이데거가 대답을 망설인다면 미셸 세르의 『천사들의 전설』을 참고해 보라. 세르의 천사들이야말로 바로 그런 존재들이니 말이다.


2024년 어느 봄날, 대전창작센터에서 열린 전시 《메신저의 신비한 결속》을 보고 돌아온 후, 한동안 나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근사한 도판이 하나씩 나오는 세르의 큼직한 책을 읽으며 전시의 이모저모를 곱씹어보곤 했다. 일단 이 전시의 기획자인 한주옥 스스로가 이 전시에 가장 큰 영감을 준 책으로 꼽기도 했고, 전시장에 비치된 리플릿에 수록된 기획의 말에서도 이 책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싼 자연이 발신하는 미묘한 메시지들을 “그토록 정확하고 정교하고 더없이 훌륭하게 코드화된 언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한편으로는, 전시에 초청된 서로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을 느슨하게 잇는 모종의 연상적 단서들이 세르의 책을 가로지르는 핵심적 모티브들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는 데도 생각이 미쳤다. 이때 리플릿에 실린 전시 안내도는 일종의 암호화된 지도로, 세르의 책은 암호를 푸는 데 꼭 필요한 키워드 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즉, 이 전시는 실제로 관람하면서 얻는 경험만큼이나 관람 이후의 세심한 탐색을 중요하게 고려하고 또 필수적으로 요청하는 꾀까다로운 기획자의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나는 지금 1층 전시실 벽에 걸려 있던 이빈소연의 그림 <들켰다>를 떠올린다. 그리고 작가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이 그림을 다시 본다.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림 아래쪽의 문어 한 마리, 중앙의 열린 스티로폼 상자에서 튀어나와 흡사 이중나선처럼 꼬여 위로 솟아 있는 두 개의 문어 다리, 그리고 그 사이로 노란색 밴딩끈 같은 것이 위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는 모습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다소 깔끄러운 느낌을 주었던 자신의 고모가 이따금 보내주는 해산물 택배 스티로폼 상자에 들어 있는 문어를 떠올리며 이 그림을 그렸다고 밝혀 두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전시 전체의 맥락 속에서 세르의 책을 지침 삼아 들여다보면 그림 위쪽 스티로폼 뚜껑 부분에 그려진 날개 모양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더불어, 이 스티로폼 상자는 무언가를 배달하기 위한 것이라는 데도 생각이 미친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이 그림의 영어 제목은 한글 제목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카두세우스(Caduceus)’인데, 이는 사실 헤르메스가 들고 다니는 지팡이의 이름이다. 두 마리의 뱀이 감겨 올라가는 형상의 이 지팡이 끝에는 날개 모양 장식이 있다. 즉, 그림의 밴딩끈과 두 개의 문어 다리, 그리고 스티로폼 상자에 그려진 날개를 조합하면 이 지팡이와 유사한 형상이 떠오르는 식이다. (들켰다!)

이빈소연의 그림과 같은 공간에 놓인 이유경의 <자화상> 연작은 작가 앞으로 온 송장이 붙은 택배를 전시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연질 PVC와 글리터 같은 재료로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을 형상화한 <사랑의 단상: 파편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 인공 털을 소재로 제작해 설치한 날개깃 형상의 <커넥팅...(2)>까지, 나는 이빈소연의 그림에서 제시된 모티브들이 이유경의 설치 작업에서 연상적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헤르메스는 문어 다리와 밴딩끈으로 세속화된 카두세우스로 암시되거나,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이라는 장치를 형상화한 버블 랩 속으로 녹아든다. 한주옥이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제목에서 빌려와 전시 제목으로 활용한 ‘신비한 결속’은 바로 이런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지 싶다.

신비는 어떤 대상 자체에 내재한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들이 은밀히 서로 결속되는 과정에서 감지되는 것이기에 언제나 대상들에 외재적이다. 특히 그 대상들이 범속한 것일수록 결속의 신비함은 배가된다. 이를테면 이빈소연의 <따르르릉>과 이유경의 <핑크 매터>에 공통적으로 활용된 (인조) 머리카락 같은 소재처럼 말이다. 여기엔 신비의 유물론이 있다. 

 

문득, 『신비한 결속』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키냐르가 소설의 주인공 클레르를 우편집배원과 정신적 친연 관계에 있는 존재로 두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우편집배원은 그녀의 친구였다. 집배원은 맞바람을 무릅쓰며 모랫길과 황야의 진창에서 [자전거] 페달 밟기가 너무 힘들면, 마지막 편지 배달을 그녀에게 일임했다.” 기획자 한주옥이 동등하게 전시의 중요한 참조물로 삼고 있는 두 권의 책, 키냐르의 소설과 세르의 철학적 대화집을 신비롭게 결속하는 은밀한 모티브가 있다면 바로 배달(부)이다. 키냐르의 소설 도입부에서, 결혼식 참석차 브르타뉴의 바닷가 고향을 찾은 클레르가 과거 연인이었던 시몽의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은 마을의 우편집배원으로 일하고 있는 옛 친구 파비엔을 통해서다.

그렇다면 우편집배원은 어떤 형상인가? 그는 세르의 책이 오롯이 헌사된 특권적 존재인 천사의 세속적 형상이다. 세르에게 천사는 무엇보다 소식을 전하는 존재, 즉 마리아에게 수태를 고지하는 가브리엘이나 헤르메스적 메신저로 현현하는 존재다. 천사는 어떻게 이동하는가? 물론 날개로 이동한다. 세르는 자크 타티의 영화 <축제일>을 떠올리면서 세속적 천사인 우편집배원의 날개는 바로 자전거라고 말한다. 클레르에게 시몽의 소식을 고지한 파비엔 역시 자전거를 타고 떠난다. 이처럼 소식을 전하고 정작 자신은 사라지는 것, 그럼으로써 오롯이 소식 자체가 육화─마리아의 수태, 클레르와 시몽의 결속─의 시간에 터를 잡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말의 대리인으로서 메신저의 속성이다. 그는 자신이 전하는 소식이 무엇인지 전혀 모를 수도 있다. 아니,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서는 안 된다. 자신이 배달하는 편지를 열어보는 우편집배원은 타락한 천사임이 분명하니 말이다.

세르는 말의 대리인이자 메신저로서 천사의 형상을 예시하기 위해 ‘préposé’라는 프랑스어 단어에서 온갖 가능한 함의들을 끌어낸다. 누군가에게 어떤 임무를 맡기거나 누군가를 직책에 임명한다는 뜻을 지닌 동사 ‘préposer’로부터 나온 이 말은 임무나 직책을 맡은 사람, 즉 담당자라는 뜻을 지니지만 한편으로는 대리인 그리고 우편집배원이라는 뜻도 된다. 그런가 하면, ‘préposé’라는 단어를 이루는 의미소를 곧이곧대로 따라가 보면 무언가의 앞에(pré) 놓인(posé) 것이 되는데, 이로부터 세르는 천사란 전치사(préposition)적 존재라는 판단을 끌어내기도 한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이렇게 생각해본다. 천사는 주체의 지위를 띠는 명사적 존재도 아니고 특정한 활동과 결부된 동사적 존재도 아니며 어떤 특성이나 성질을 띠는 형용사적 또는 부사적 존재도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다른 존재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만 가까스로 존재하는 일종의 (허구적) 매질로서의 에테르와 다르지 않다.


다시, 대전창작센터에서 전시를 보았던 시간을 떠올린다. 그날 전시장을 나온 이후 지금까지 이것저것 읽어보고 반추하며 얻은 일말의 생각 조각들을 들고 그 시간으로 가만히 돌아가 보는 것이다. 날개깃 형상의 설치물이 벽면에 부착된 계단을 천천히 밟으며 전시장 2층으로 올라가면 정면과 좌우로 각기 다른 전시실로 통하는 세 개의 입구가 보인다. 어디로 들어갈까? 

나는 왼쪽의 전시실로 들어갔다. 두 구역으로 나뉜 이곳에서는 배인숙의 사운드 설치 작품이 하나씩 전시되고 있었다. 작가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녹음한 새소리들을 여덟 개의 스피커로 들려주는 <혼자 부르는 합창 (8)>, 나무로 만든 직사각형 틀에 20개의 줄이 수직으로 팽팽하게 달려 있어 하프 모양을 띤 <줄인사>가 그것이다. 줄에 손을 가까이 가져가면 무언가 소리가 들리는데 정확히 식별되지는 않는다. (각각의 줄이 작가의 육성 인사말 녹음을 재생하게끔 되어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날개를 지닌 존재로서의 새와 하프라는 천상의 악기. 다시 천사다. 여기서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여간해선 의미를 식별하기 힘든 (목)소리 자체다. 이유경의 <핑크 매터>를 이루는 커다란 핑크색 기둥 하단에 조그맣게 붙은 QR코드를 스캔하면 들을 수 있었던, 요령부득의 한국어로 말하는 베트남 노동자의 목소리처럼. 천사가 무언가를 고지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해독하지 못한 채로 듣는다.

걸음을 옮겨 맞은편의 전시실로 들어선다. 이곳에서 유리의 회화와 조각 들을 보다가 문득 계단을 올라와 멀리서 잠깐 보았던 중앙 전시실의 몇몇 작품들을 떠올리곤 그쪽으로 서둘러 발길을 옮긴다. 다시 회화와 조각 작품들. 이번엔 고산금과 이산오의 것이다. 복합 매체 작품들이 곳곳에 놓여 있던 아래층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여기엔 전통적인 미술의 범주에 속하는 형태의 작품들이 사뭇 단정하게 배치되어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물론 여기에도 천사의 기호들은 넘쳐나고 매우 뚜렷하다. 유리의 회화에서 날개 달린 천사의 형상을 식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깃털 펜을 쥐고 있는 손을 형상화하고 거기에 ‘편지’라는 제목을 붙인 조각, 새나 천사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 날개를 뜻하는 프랑스어 ‘엘(aile)’이라는 제목을 붙인 연작 회화 등 이산오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천사는 도처에서 보인다. 하지만 그가 고지하는 바의 의미는 여간해선 붙들 수 없다.

다시 유리의 작업들이 전시된 방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벽면에 걸린 회화들에 둘러싸인 네 점의 나무 조각, 혹은 ‘조각적 아티스트북’인 <고작 한 장의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두툼한 서책 모양으로 자른 나무에 선을 새기고 채색한 작품이다. 어떤 메시지가 고지된 것은 분명하나 그것의 의미에는 아직 가닿지 못한 데서 초래되는 불안을 고요하지만 힘겨운 수행(修行)으로 극복하려는 시도. 한주옥은 이를 “지각할 수 있다는 믿음,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기대”에 의존해 “수많은 수신자와 발신자 간의 간극을 연결”해 나가려는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수행은 고산금의 <메모리 보드> 연작의 그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신체적 힘을 가한 볼펜질을 거듭해서 빼곡히 채워지고 여기저기 울은 커다란 화면 위에 수많은 진주알을 흩뿌린 후, 그것들이 무작위적으로 형성한 모양을 접착제로 고정한 것이다. 사뭇 기술적인 제목을 내건 이 작업은 어떤 면에선 갑골점 같은 고대적 주술의 현대적 변형처럼 비치기도 한다. 다만, 우리에게 해독의 단서가 되는 텍스트는 볼펜이라는 필기구가 남긴 흔적 속에서 좀처럼 감지되지 않는다. 이미지만이 출렁인다. 이때의 곤혹스러운 느낌은 텍스트와 이미지 간의 조응과 간격을 섬세하게 가늠해보는 이산오의 드로잉 연작이 불러일으키는 감정과 멀리서 공명한다.


해명하는 대신 소식을 전하고 연결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천사의 기능. 한편으로 이는 비평가-큐레이터의 기능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능을 소명으로 삼은 이의 마지막 임무는 사라지는 것이다. 횔덜린의 시에 대해 논하던 하이데거가 어느 순간 “해명은 그 자신이 무용한 것이 되려고 노력해야만” 하며 모든 해석에서 최후의, 그러나 가장 어려운 단계는 (…) 해명과 함께 사라지는 경지에 있다”고 충고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라짐의 즐거움.

대전창작센터 입구에서는 이빈소연의 <페어리 모빌리티 투자유치설명회 비디오: 고아를 만드는 기계>가 스크리닝되고 있었다. 천사의 또 다른 변양일 요정의 성공적인 사업 수행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모근을 살린 채로 우리의 머리카락을 뽑아 보내면 된다고 한다. 당연히,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전시장을 나와 어떤 기분으로 길을 걸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서로 무척이나 다른 작품들 간의 신비한 결속을 바라면서도 기묘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듯한 기획자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이 전시를 보고 난 이후라는 것만 확신할 따름이다. 세르에 따르면, 가장 나쁜 천사들은 눈에 보이고, 가장 좋은 천사들은 사라지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