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10

<두 개의 문>(2011)


(* 가을이 지나기 전에, 상반기에 본 한국영화들 가운데 이런저런 생각을 불러일으킨 영화들에 대해 짧게라도 글을 써서 올리려 한다. 현재까지 본 영화들만 놓고 보자면 장건재의 <잠 못 드는 밤>(2012, 미개봉)과 김경만의 <미국의 바람과 불>(2011, 인디스페이스와 인디플러스에서 1일 1회 상영중)이 최고라 하겠다. 더불어 홍상수의 <다른 나라에서>(2012)의 유준상의 연기(그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를 꼽고 싶다. 더할 나위 없이 홍상수적인 세계에 불쑥 칩입한 이 '이방인'(나는 지금 이자벨 위페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은 이질적인 천연덕스러움으로 기분좋은 불협화음을 만들어냄으로써 그 세계에 풍성함을 더하고 있다. 혹은 사람들에 의해 흔히 홍상수적이라 간주되곤 하는 세계를 짐짓 그럴싸하게 만들어놓고 그 편견에 통쾌한 일격을 가하려 한 홍상수의 계산에 따른 것이었을까? 어느 쪽이건 <다른 나라에서>의 영화적 조바꿈(modulation)은 유준상이라는 배우의 존재 없이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9월 말까지 <인문예술잡지 F> 제7호(가을호)에 게재할 원고들을 마무리해야 하는 탓에, 이상 언급한 영화들에 대한 단상은 10월 중순 이후로 미룰 수밖에 없다. 아래는 인천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격월간지 <플랫폼>(9/10월호, vol.35)에 기고했던 <두 개의 문>(2011)에 관한 글을 옮긴 것이다.)


부재의 구조화와 분리의 전략
: <두 개의 문>(김일란 & 홍지유 감독, 2011)


<두 개의 문>(2011)이 용산참사를 다룬 여타의 다큐멘터리들과 다른 점에 대해서는,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정영신 씨가 『참세상』에 기고한 글에서 이미 다음과 같이 짚어낸 바 있다. “용산참사를 다룬 대부분의 다큐멘터리들이 철거민이 주인공이거나, 355일간 지속된 유가족들의 장례투쟁이 주된 이야기거리였다면 <두 개의 문>은 다른 관점으로 용산참사에 접근한다. 철거민들의 목소리가 하나 없고, 유가족들의 목소리도 하나도 없다. 또한 재개발의 문제라든가, 투쟁을 말하고 있지도 않다.” 응당 있으리라 기대한 것 대부분이 없다는 점, 이 부재의 과잉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고는 <두 개의 문>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다른 목소리들이 존재한다. 인터뷰를 위해 카메라 앞에 앉은 저널리스트, 활동가와 변호사의 목소리, 참사현장에 투입되었던 경찰특공대원의 진술서를 읽는 목소리, 법정 증언 시 녹취된 특공대원의 목소리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발화자의 몸이 가시적인지 비가시적인지, 발화의 순간 직접 채록된 것인지 이후 간접적으로 낭독된 것인지에 따라 각각의 목소리의 영화적 층위는 다소 다르다. 비가시적인 발화자의 목소리들과 결부되는 것으로는 비디오 클립들(칼라TV와 사자후TV같은 인터넷 방송 저널리스트들이 촬영한 것에서부터 경찰의 채증영상까지), 진술서나 신문보도기사 같은 문서자료, 그리고 철거민들의 투쟁 현장으로 출동 중인 경찰특공대 버스 내부의 광경을 재연한 장면 등이 있다. (이상한 것은 이 재연 장면이 허구를 동원해서라도 채워 넣어야 할 만큼 긴급한 결여가 있어서 요청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시각적 잉여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즉 고유의 목적을 지닌 이미지라기보다는 목소리를 보조하기 위해 덧댄 비주얼이다.) 

사태의 ‘주인공’으로서의 철거민들과 그들의 입장이 부재하는 가운데 <두 개의 문>이 관객에게 제시하는 이 모든 것들은, ‘참사(용산 남일당 건물 망루의 화재)는 왜 일어났으며 누구의 책임인가’라는 물음과 ‘명령에 따라 사지로 내몰린 경찰특공대원들 또한 희생자’라고 하는 판단을 (직접 제시하기보다는) ‘둘러싸고’ 꼼꼼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 영화가 유별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용산참사와 관련해 실제 열렸던 재판을 관통하는 물음과 판단 주위를 맴돌다가는 결국은 그 모든 배치가 쓸모없는 것임을 자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진술(참사의 그날 망루 안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따지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철거민들의 투쟁을 그런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압하려 한 결정 자체가 문제라는 칼라TV 박성훈 피디의 말)로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논리적으로는 자기지시적 역설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 <두 개의 문>이 “한쪽을 성급히 편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다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된 것은 약간 기이한 일이다. 그 자기지시적 역설의 구조가 “철거민이 망루로 내몰린 것인지, 망루를 선택한 것인지 영화는 따져 묻지 않았다”(신광영,『동아일보』)는 식의 역겹고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불평까지도 허용하게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철거민과 경찰특공대원 모두를 공히 피해자로 규정하면서 ‘진짜’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쪽으로 관객을 인도한다고 보는 이들이 더 많아 보인다. “영화가 가해자의 존재를 숨기는 것은 아니다. 영화 도입부에 ‘무관용’을 강조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뉴스 보도 영상이나 참사 직전 김석기 경찰청장 임명 뉴스 보도 영상을 배치한 것은 누가 이 참사를 책임져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명확한 지표”(정원식,『주간경향』)라는 것이다.  


<두 개의 문>에서 부재하는 것을 ‘구조화하는 부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실은 이 부재가 아무 것도 구조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영화는 부재 자체를 구조화한다. 『씨네 21』의 정한석이 “무언가 없는 상태의 구조화” 혹은 “공백의 구조화”라고 지칭한 이 특징으로 인해, <두 개의 문>은 부재를 통해 구조를 드러내는 영화가 아니라 그 구조를 통해 반복적으로 부재의 자리를 지시하는 영화가 된다. 하지만 그 공백 혹은 부재는 정한석이 염두에 두고 있는 바와는 달리 불붙은 망루 안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나 일부가 삭제된 경찰의 채증영상 같은 것들과는 무관한 것이다. 참사가 일어난 그 순간 망루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실을 공백으로 자리매김하고 그 내부에서 싸우도록 내몰렸던 이들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보고 있는 그의 견해 - “용산 참사의 현장에서 죽은 고인들은 마치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모두 죽어나간 유태인들처럼, 감독들의 증언자가 될 수 없었다”(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프레시안』)는 말에서 얻은 암시를 과도하게 밀고 나간 - 는, 용산의 망루가 수용소가 아니라 진지, 보루, 바리케이드라는 간단한 사실로 인해 다소 미심쩍은 것이 된다. 사실 <두 개의 문>이 구조화하고 있는 부재와 관련된 것은 망루가 아니라 법정의 배심원석이다. 이 영화는 국민참여재판(용산 사건의 국민참여재판 신청은 2009년 3월 26일 기각되었다)이 실제로 열렸더라면 마련되었을 그 자리에 관객을 초대하고 있다.   

관객을 부재의 자리로 불러들여 진행되는 이 가상의 재판은 그 재판의 의의를 무력화시키는 진술(중요한 것은 6명의 죽음을 초래한 결정과 그것을 뒷받침한 권력이지 죽음과 그 원인에 대한 증언이나 증거가 아니라는 것)과 함께 끝난다. <두 개의 문> 연출자들은 “철거민들이 무리한 요구를 했든 불법 행위를 했든, 문제는 국가가 국민을 어떻게 대했는지, 억울함을 호소하며 저항하는 국민에게 특공대를 투입시켜 진압한 것이 문제의 초점이다”(여성주의 저널『일다』)라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배심원의 자리를 부재로서 구조화하고 이를 통해 각각의 관객을 호명한 뒤 철거민 진압과정을 재구성해 그들 앞에 펼쳐 놓는 이 영화는, 사실 의도적으로 그 ‘초점’에서 빗나가 있다. 물론 관객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 빗나감을 감수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개의 문>을 본 적지 않은 이들이 망루에서 일어난 화재의 진실을 다시 따져봐야 한다고 말하거나, 그 진실을 밝힐 증인과 증거의 부재를 아쉬워하거나, 나아가 그 증인과 증거의 부재로부터 이론적인 해석을 끌어내려 할 때마다, 나는 혹시 이 영화가 법의 바깥을 가리키면서도 본의 아니게 관객을 자꾸만 법 안에 머물도록 유도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진다. 망루의 ‘진실’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권력의 책임을 묻는 것은 법정에서 다룰 수 없는 윤리적 정의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사법적 정의만을 문제 삼는 법은 살아남은 철거민들을 거듭 망루 안으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다. 투쟁의 거점이었던 망루를 법적 판단의 거점으로 뒤바꿔 놓으면서, 그 판단과 관련해 유일하게 가능한 법적 물음, 즉 망루에서 일어난 화재의 원인과 책임에 대한 물음만을 되풀이하는 식으로 말이다. 실정법을 놓고 말하자면,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과 관련해 정의를 주장하는 것은 오직 법 바깥에서만 가능하고, 법 안에 머무는 한 저항은 언제나 유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용산은 이런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한 비극적 참사와 그에 잇따른 일련의 사건들을 포괄하는 고유명이 되었다.) 그런데 <두 개의 문>은 법적으로 물을 수 없는 것을 묻기 위해 그 스스로를 법정으로 만들고 나서 관객을 배심원으로 불러들인다. 영화 말미에 삽입된 박성훈 피디의 말은 흡사 이에 대한 항의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한편, 부재와 더불어 이 영화의 구조가 겨냥하고 있는 ‘분리’의 전략을 살펴봐야 한다. “경찰특공대 자체를 (명령을 내린 자와) 분리해내고, 대원들을 상급자와 분리해내고, 그렇게 철거민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드러내기 때문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동참하게 되는 것 아닐까 싶다”(『일다』)고 한 연출자들의 말은, 이 분리를 통해 ‘진짜’ 책임자 혹은 가해자를 적시할 수 있으리라는 단순한 믿음과 만나는 순간 위험해진다. 이처럼 분리과정을 반복해 공권력의 중심을 부정적으로 확인하는 방식은, 진압경찰 개개인을 구체적으로 호명해냄으로써 관객이 그들에게 감정이입하게끔 한 연출자들의 의도에는 걸맞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론 이명박이나 김석기 같은 개인을 추상화된 국가권력의 ‘라벨’(거짓 구체성)로 삼게 되는 함정을 피하지 못한다. ‘폭력의 책임자를 위해 복무한 피해자들’(경찰특공대원들, 그리고 영화에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철거용역들)을 책임자와의 연관에서 ‘분리’해내는 매 순간마다, 권력 또한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짓으로 구체화된 권력의 아바타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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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안녕하세요 '두 개의 문' 배급사 시네마달입니다.
    좋은 리뷰를 보다 많은 분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두 개의 문' 공식블로그 (http://blog.naver.com/2_doors) 로 담아가도 괜찮을까요? 허락해주시면 정확한 출처표기와 함께 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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