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21

2014년 10월 셋째 주: "Deep Red?"


한 주 동안, 공산주의 국가 혹은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영화들 몇 편을 나란히 보게 되었다.


사막의 태양 White Sun of the Desert (1969)
(dir. 블라디미르 모틸 / 소련(USSR) / 1969년 / 84분)
* 2014년 10월 25일(토) 13:00 상영예정 (서울아트시네마)



2011년 로테르담영화제에서 마련한 여러 특별전 가운데 하나는 "레드 웨스턴: 아메리칸 웨스턴에 대한 공산주의의 응답"(Red Westerns: The Communist Answer to the American Western)이었다. 레프 쿨레쇼프의 <볼셰비키의 땅에서 웨스트 씨의 기묘한 모험 The Extraordinary Adventures of Mr. West in the Land of the Bolsheviks>(1924)에서부터 미르치아 베로이우의 <여배우, 달러 그리고 트랜실바니아인 The Actress, the Dollars and the Transylvanians>(1979)에 이르기까지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동독, 불가리아, 루마니아에서 만들어진 '레드 웨스턴' 16편이 상영되었다. 당시 나는 영화제 일로 출장 중이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 전체를 볼 수는 없었고 간간히 짬을 내어 3편만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마침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고 있는 "모스필름 90주년 특별전"(2014.10.10~26) 프로그램에, 로테르담에서 놓쳤던 작품 가운데 한 편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블라디미르 모틸의 <사막의 태양>이다. (이 작품은 모스필름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전편을 감상[이곳을 클릭]할 수 있으며 영어자막도 제공된다. 하지만 이 시기 소련영화 특유의 색감을 만끽하려면 역시 영화관에서 복원판으로 보거나 러시아에서 출시된 블루레이로 봐야 한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10월 25일 토요일 오후 1시에 다시 상영될 예정이다.) 나는 이 영화를 지난 10월 17일에 관람했는데, 10월 12일 상영 시에는 '레드 웨스턴' 프로그램의 기획자였던 세르게이 라브렌티에프의 강연이 있었으나 (다음달 소식지에 실을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원고를 마무리하느라) 놓치고 말았다. 아쉬운 대로 2011년 로테르담 특별전 당시 발간된 소책자에 실린 글들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있는 중이다. 

라브렌티에프에 따르면, 흐루시초프가 미국을 방문했던 1962년, 소련에서는 존 스터지스의 <황야의 7인 The Magnificent Seven>(1960)이 개봉되어 입장권을 구하기가 힘들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1960년대에 자라난 소련의 아이들은 '선량한 공산주의의 개척자들'에 대해선 깡그리 잊어버리고 스터지스 영화의 주인공인 율 브리너의 제스처, 걸음걸이, 카우보이 복장 등을 따라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 차원에서 자국의 신문과 잡지 등을 동원하여 이 영화에 대한 비판운동을 전개했는데 박스오피스 결과를 실제보다 적게 조작하는 일도 포함되었다. 결국 정부는 <황야의 7인>의 상영을 중단시켰고 이 영화에 대한 '공산주의적' 응답이 될 영화들을 직접 제작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나온 '레드 웨스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리투아니아 출신) 비타우타스 잘라키아비추스의 <죽기를 바란 자는 없다 No One Wanted to Die>(1966), 에드몬 케오사얀의 <도피한 복수자 The Elusive Avengers>(1967) 그리고 블라디미르 모틸의 <사막의 태양>이다. 모틸의 이 작품은 소련 내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흥미로운 것은, 아직 소련 내 연방국가들 간의 형제애가 여전히 강조되고 있던 시절에 제작된 이 영화가 "소련과 중앙아시아 문화의 양립불가능성은 물론이고 동방에서의 연방정책의 실패를 강조하고 있음이 분명"(에밀리 힐하우스)해 보인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제작되기 일 년 전, 소련은 체코의 프라하를 침공해 강압적인 방식으로 공산주의 개혁의 움직임을 잠재웠다.)

1960년대 소련영화들 가운데 연방정책 - 특히 중앙아시아의 통합 - 과 관련된 함의가 담긴 것으로 (이 시기의 소련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내게 얼른 떠오르는 것은 보리스 바르넷의 활기와 냉소, 멜랑콜리가 뒤섞인 스피디한 걸작 <알룐카 Alyonka>(1961)와 (이번 "모스필름 90주년 특별전"에도 포함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진중한 예술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다. 전자는 일견 낙관적인 전망을 내비치는 듯하면서 실은 통합의 불가능성을 암시하는 반면, 후자는 예술가 영화의 외견을 빌려 문제에 우회적으로 접근하면서 - 시간적 배경 또한 몽골-타타르족의 침입이 있던 15세기다 - '러시아적인 것'을 보편과 통합의 가능성으로 재발견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사진 1] <사막의 태양>. 내전 참전 후 귀향 중인 군인의 몽상
Counter Shot
+
Shot
[사진 2] 타르코프스키의 <거울 The Mirror>(1975). 전쟁에 나간 남편의 귀향을 기다리는 여인

<사막의 태양>에서, 게릴라 압둘라의 아홉 명의 아내들을 호송하는 임무를 졸지에 떠맡게 된 주인공 슈호프는 여정 도중 고향에 두고 온 자신의 아내와 이 아홉 여인들에 행복하게 둘러싸이는 몽상에 잠긴다. (각각이 '러시아적인 것'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상징하는 것임은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사진 1] 혹은 모스필름 유튜브 채널 <사막의 태양> 영상의 45:24~46:32를 볼 것.) 통합 혹은 연방(제국)이란 사실 형제애나 우애가 아니라 일부다처의 하렘 - 공산당의 '본처'인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라는 '첩들'을 관리하는 - 이 아니고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인데, 이 짖궃은 농담의 강도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슈호프의 아내의 자리에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러시아적 모성의 이미지([사진 2])를 슬쩍 겹쳐놓고 생각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실, <사막의 태양>의 그 꿈 장면이 아주 효과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영화 초반부터 슈호프의 아내 카테리나를 과도하게 성적으로 이미지화한 탓이 크다. 영상의 00:22~01:30을 볼 것.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장면은 거의 부뉴엘적인 뉘앙스를 띠게 되었을 것이다.) 


[사진 3]

+ Parallel

[사진 4]

아홉 명의 중앙 아시아 여인들에 둘러싸인 슈호프의 모습([사진 3])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우애를 강조하는 선전용 포스터의 스탈린([사진 4])과 비교해 보라. 슈호프는 자신의 몽상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것임을 안다. 그런데 이 몽상은 기묘하게도 스탈린의 몽상을 닮아 있지 않은가? 그것은 도착적인 것의 이상화이며 금지된 것의 프로파간다이다.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정신분열증. 이러한 정신분열증이 낳은 긴장의 텍스트인 <사막의 태양>은 당대 소비에트의 이상과 그와 관련된 도상들을 일그러뜨리고 얼룩지게 한다. 



액트 오브 킬링 The Act of Killing (2012)
(dir. 조슈아 오펜하이머 / 덴마크, 노르웨이, 영국 / 2012년 / 159분 *director's cut)
* 2014년 11월 국내 개봉 예정

이 역겹기 짝이 없는 다큐멘터리는 "미디어시티서울 2014"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되었다.  『뉴 스테이츠맨 New Statesman』 에 기고한 글(2013.7.12)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각 개인들의 가차없는 이기주의를 공적 부의 원천으로 삼는 자본주의 - "개인들이 협소한 사적 이익을 희생하고 직접적으로 공공의 선을 위해 일하려 할 때 [오히려] 공공의 선이 위축되는 패러독스" - 에 대한 언급을 거쳐, 이러한 자본주의가 초래한 공적 공간의 사유화(privatising the public space)가 <액트 오브 킬링>의 인도네시아 학살자들의 행위 - 자신들이 50여 년 전에 저지른 학살의 광경을 거리낌 없이 '영화화'하려 드는 - 와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액트 오브 킬링>의 감독이 이들을 데리고 영화를 위해 벌인 일들을 여기 시시콜콜 옮기고 싶지 않다. 궁금한 이들은 인터넷에 넘쳐나는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참조하면 될 것이다.) 

지젝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데, (1) 지젝의 '자본주의적 개인' 개념은 기껏해야 신고전주의 경제학파의 개인 개념을 현실적인 것으로 단정지은 것에 불과하고 (2) 오늘날 점점 범람하는 '퍼블릭 섹스 비디오' - 공공장소에서의 섹스 포르노 비디오, 개인들이 웹상에 올리는 누드나 포르노 이미지 - 들과 같은 방식으로 공적 공간을 (뻔뻔스럽게!) 사유화하고 있는 것은 지젝이 지목한 인도네시아 학살자들이 아니라 <액트 오브 킬링>의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이기 때문이다. (글의 말미에 지젝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출증자들은 공적 공간에 침입하는 반면, 웹상에 자신들의 누드 이미지를 게시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사적 공간에 머물면서 다른 공간들을 포괄하기 위해 그것을 확장시키고 있다  <액트 오브 킬링>의 안와르와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공적 공간을 사유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 학살자들은 '공적 공간을 사유화'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지젝이 그에 대비시켜 말한 '공적 공간에 침입하는 노출증자들'에 가깝다. <액트 오브 킬링>의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작업은 야외섹스를 즐기는 한 커플의 비디오를 '합의 하에' 촬영해 주기로 한 뒤, 이런 행태에 대한 고발이랍시고 촬영 영상을 정리해 웹상에 게시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정리하자면, 여기서 지젝의 논의는 이론적 구성물('자본주의적 개인')의 자명성과 영화적 구성물(다큐멘터리의 '캐릭터')의 투명성을 가정함으로써만 성립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가장 간명하고 솔직하며 적확한 언급은 조너선 로젠봄의 그것이다. "기본적으로 <액트 오브 킬링>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 하는 것이 인도네시아 암살단의 잔학행위라고 하는 단순한 사실이라면, 나는 이러한 정보를 얻기 위한 보다 효과적이고 유용한 다른 방식이 있을 거라고 본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가 제공하는 것이 그러한 정보에 대한 시적, 심리적 혹은 정치적 통찰 같은 거라면, 그러한 통찰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를 내게 제공할 평론가들이 있는지 보고 싶다. 이 영화에 그런 게 있지만 내가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지금으로서는) 여기에 덧붙일 말이 별로 없다. 다만 약간의 치유제가 필요할 뿐이다. 일요일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본 리티 판의 <잃어버린 사진 The Missing Picture>(2013)처럼. 이 작품 역시 '미디어시티서울 2014'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다. 혹시 올해 '미디어시티서울'의 주제는 '파르마콘'(pharmakon)이었던가? 


 [사진 5] <액트 오브 킬링>. 50여 년 전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영화화하는 가해자 [Shooting]
(카메라 뒤의 인물은 '빨갱이 학살'의 주범이었던 안와르 콩고)

[사진 6] <잃어버린 사진>. 40여 년 전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피해자의 기억 [Projection]
(수용소에서 크메르 루즈의 선전영화를 보았던 기억을 클레이 인형과 모형을 통해 재현한 장면) 


(2014.10.22 추가) 위의 글을 포스팅한 후, 페이스북 코멘트를 통해 정승훈 교수가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적어 보내주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 격식 없이 편하게 쓰신 거라는 걸 감안하고 읽어주길 바란다.) 

"난 지젝 의견에 좀 공감했는데, 이때 사유화되는 공적 공간은 사회적으로 준수되는 어떤 윤리적 문턱 위에 자리잡는 정치적 공공역과 같다고 봤습니다. 킬러들은 그 문턱을 넘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노출하려는 듯하지만 실은 그런 문턱은 아랑곳 않고, 그걸 파괴하듯, 문턱 밑으로 관람자들을 끌어내려 자신들의 안방으로 초대해놓고 왕년의 업적을 떠벌립니다. 회사에서 하지 못하는 성희롱을 술자리에선 재미로 하듯 학살을 정당화하는 거죠. 정치적 커밍아웃 같은 진지함이 아니라 과시적 퍼포먼스 같은 뻐김이 그래서 가능한 거고, 그게 더 섬뜩한 거고. TV 토크쇼 장면은 이 사적 비공식적 뒷담화가 공적 영역을 잠식하는 과정을 시사하는데, 그 범위가 점점 넓어질 때 공공의 윤리적 문턱은 어디 있는가 하는 게 이 영화의 질문이라고 봅니다. (가령 5.18 조롱 같은 걸 온라인이 지들 안방인 양 배설하고 공유하는 일베 무리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고, 그래서 공공역의 사유화는 정치든 섹스든 가장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이 별 저항 없이 우발적으로 도처에서 유통 소비 심지어 향유되는 글로벌한 경향과 닿아있는 듯합니다.) 오펜하이머는 이 점을 문제적으로 드러내려 했지, 자신의 비윤리적 욕망으로 공공역을 사유화하는 걸로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후속작인 <침묵의 시선>은 희생자 편에서 계속 질문을 이어가고 있고.."

정승훈 교수의 반론에 대한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1) "킬러들은 ~ 관람자들을 끌어내려 자신들의 안방으로 초대해놓고 왕년의 업적을 떠벌립니다. 회사에서 하지 못하는 성희롱을 술자리에선 재미로 하듯 학살을 정당화하는 거죠."

: 비유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액트 오브 킬링>의 킬러들이 과시적인 건 사실이지만, 이 영화는 그들이 마련한 자리에 우리나 감독이 초대받아 간 것으로 생각될 수 없어요. 킬러들에게 안방을 내어주고 술판을 벌이게끔 한 것은 다름아닌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죠.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관객)는 그 안방의 술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펜하이머가 촬영하고 편집하여 영화제에 출품한 영화를 통해 그 안방의 술판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대부분은 킬러들의 퍼포밍(performing)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 물론 인도네시아 판차실라 청년단(Pancasila Youth)의 집회 장면처럼 시네마베리테적 관찰이라 할 수 있는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 - 킬러들의 퍼포밍을 퍼포밍한 기록입니다. 정승훈 교수는 지젝과 마찬가지로 킬러들의 과시성에 놀란 나머지 불현듯 영화라는 매체를 뒤로 물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위에서 "<액트 오브 킬링>의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작업은 야외섹스를 즐기는 한 커플의 비디오를 '합의 하에' 촬영해 주기로 한 뒤, 이런 행태에 대한 고발이랍시고 촬영 영상을 정리해 웹상에 게시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지요. 포르노그래피를 보는 관람자들은 가능한 매체의 존재를 지워버리려 노력하기 마련인데, 그러고 보면 지젝과 정승훈 교수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액트 오브 킬링>이 실은 포르노그래피에 가깝다는 걸 인정하고 있는 셈인데요. 영화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안와르 콩고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카메라 앞에 (때로는 뒤에) 선' 안와르 콩고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2) "TV 토크쇼 장면은 ~ 공공의 윤리적 문턱은 어디 있는가 하는 게 이 영화의 질문이라고 봅니다."

: 저는 <액트 오브 킬링>이라는 다큐멘터리 자체가 이미, 정승훈 교수가 언급한 TV 토크쇼와 마찬가지로 "사적 비공식적 뒷담화가 공적 영역을 잠식하는 과정" 속에 있다고 봅니다. 사실 그 TV 토크쇼와 <액트 오브 킬링>은 다른 영역에 있지 않고 - 제게 이 영화는 그 토크쇼보다도 훨씬 역겨웠습니다 - 나아가 킬러들의 '사적 비공식적[이기 마련인데 과시적으로 떠벌려지는] 뒷담화'가 인도네시아 방송의 국지성을 넘어 보다 광범하게 공적영역을 잠식할 수 있었던 것은 2013년 영화제 서킷(과 웹상의 각종 토렌트사이트들)을 휩쓴 이 영화 덕택이었죠. 그 잠식의 "범위가 점점 넓어질 때 공공의 윤리적 문턱은 어디 있는가 하는" 질문은 이 영화가 (안에서) 제기하고 있는 질문이 아니라 이 영화로 인해 (바깥에서) 우리가 제기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만일 실제로 이 영화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저는 그에 대한 증거를 보고 싶습니다. 

(3) "오펜하이머는 이 점을 문제적으로 드러내려 했지, 자신의 비윤리적 욕망으로 공공역을 사유화하는 걸로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 그 느낌의 이유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액트 오브 킬링>의 후속작인 <침묵의 시선>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다루었다는 이 후속작의 존재가 <액트 오브 킬링>을 위한 '증거'는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액트 오브 킬링>과 유사한 혹은 비교될 수 있는 소재를 다루되, 보다 사려깊은 접근으로 성공을 거둔 것처럼 여겨지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9.11 테러범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진 함부르크 이슬람사원의 이맘(Imam) 모하메드 파자지의 강연 오디오 기록물을 텍스트로 옮긴 후, 이를 단순한 배경 앞에 앉은 배우로 하여금 낭독케 하면서 원래의 강연을 분석적으로 해체해 버린 로무알트 카마카의 <함부르크 강연 Hamburger Lektionen>(2006),  수백 명의 사람들을 납치, 고문, 살해한 멕시코 청부살인업자가 자신의 이력을 구술하는 광경을 담아내되, 어떤 자료 화면이나 재연도 없이, 비좁은 호텔 방에서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냉담하게 포착하는 것으로 비판적 거리를 취하고 있는 지안프랑코 로시의 <엘 시카리오: 164호실 El Sicario: Room 164>(2010) 등이 그것입니다. 위의 글에서 언급한 <잃어버린 사진>의 리티 판이 2003년에 발표한 <S21: 크메르 루즈 킬링 머신 S21: The Khmer Rouge Killing Machine>(2003)도 떠오릅니다.



댓글 2개:

  1. 이렇게 자세한 응답을 바란 건 아닌데 고맙습니다. 몇몇 표현이 정교하지 못했던 듯하지만 가령 안방으로의 "초대”의 주체와 객체를 따지기보다 공적 영역의 안방화라는 전반적 문제를 거론해본 겁니다. 영화 내 TV쇼와 이 영화의 차이는 바로 그 안방화된 공공역에 우리는 토쿄쇼의 관객처럼 맞장구치고 웃어재낄 수 없다는 것 아닐까요? 로컬 관객이 이미 학살자들의 무용담을 포르노마냥 즐기게 됐단 것을, 소수의 욕망이 더 이상 금기를 위반하듯 노출증적으로 다수를 침해하는 게 아니라 금기 자체를 무화하듯 파쇼적으로 다수와 공모하게 됐다는 것을 영화의 글로벌 관객은 경악까진 아니더라도 문제시하게 된다는 거죠. 이는 포르노적 카메라를 들이대는 이 영화에 그 대상에 대한 외부적 거리가 자극/혐오의 이분법 이상으로 내재화돼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안 느끼셨다면 제가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 거리가 좀 더 래디컬하지 못했다 해서 우리가 킬러들의 회고적 스너프 필름을 온라인 포르노 혹은 포르노적 고발 영상처럼 즐기거나 말거나의 관점에서 보도록 초대된 건 아니라는 거죠. 막상 멍석을 깔아주니 킬러들 내면과 방어 메커니즘의 복잡성이 감지되는 것도, 믿을 만한 참회까진 아니어도 그들 또한 트라우마의 심층과 의도치 않게 직면하는 것도, 그리고 과거의 폭력은 냉전기 할리웃 키드로서 보고배운 스크린 위의 미국의 원주민 학살처럼 건국적 행위였고 세상 어디든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이들이 강변할 때 이 조악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심판을 정당화할 글로벌 윤리의 토대가 진정 존재하는지 묻게되는 것도 이 영화가 수행적으로 끌어내는 문제들이라 봅니다. 이것들이 영화의 형식에 전적으로 명백히 담지돼있어야만 논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게, 그리고 그런 미학적 평가로 영화를 재단하고싶진 않다는 게 저의 다소 덜 영화/매체주의적인 입장입니다. 저의 궁극적 관심사는 (말씀하신 대로 지젝처럼) 영화를 넘어, 카메라 앞/뒤의 킬러들을 넘어, 폭력과 법, 정의와 정당화 사이의 정치철학적 뒤얽힘인데, 이 영화는 적어도 그런 생각을 촉발시켰습니다. 을 보면 더 나을 거라는 건 아니지만(솔직히 영화적으론 더 무뎠습니다) 두 영화가 연작으로 기획된 거니 제 관심사는 연장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급하신 영화들은 찾아보고 싶군요. 생각을 불리는 데 많은 도움 될 것 같습니다.

    답글삭제
  2. 목표가 인식의 영역에 속한다면, 목표를 미리 결정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목표에 수단들을 합리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그 인식을 비난에 맞서 옹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독의 목표가 그들의 성찰에 있다면 안와르 콩고 일당들에게 영화화를 제의한 것은 그러한 기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했을 땐 감독을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나선 로젠봄은 작품 의도를 자신의 감상으로 단순화시켜 잔학 행위 전달로 상정하고는 그것에 관한 통찰 (시적, 심리적, 정치적)이 있다면 가치를 달리할 수 있다 했지만, 이 작품은 잔학 행위 고발이 아니라 그들이 마지막에 흘릴 눈물로, 그걸 달리 말해 과연 그들이 조금이라도 참회가 가능한가에 관한 실험에 있다면 이 작품을 마주하는 게 관객의 입장에서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왜 이 영화가 목표로 한 게 분명해보이는 그 점에 대해선 아무도 언급을 안하는 걸까요? 전 이 영화를 거울로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그건 과연 내가 저들 같은 환경과 풍토, 그 나라에 한 남자로서 태어났다면 정말 저런 악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을까란 자문을 했기 때문이죠. 포르노 비디오의 비유는 그래서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합의해서 찍고 그걸 고발하는 목적으로 찍었다. 그건 합리적인 수단일까요? 그런 문제는 기만으로 야기되는 역효과가 크고 기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말이죠. 더군다나 그들이 섹스를 통해 우린 정말 잘못했어라는 과정으로 이끈다는 동일한 전제가 이 비유에는 없잖아요? 그리고 야외섹스는 과연 윤리적 가치를 잣대로, 잔학한 살인만큼 죄악이 될 수 있을까요?
    위에 적힌 이 작품에 관한 분석은 영화란 매체의 통찰을 비윤리적으로 다가간 것처럼 느껴집니다. 괴상한 말이 됐네요. 하지만 제가 이분석에 느낀 인상을 전달할 순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그 통찰의 탁월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하여간 좀 복잡합니다. 액트 오브 킬링이란 역설적인 제목도 분명 성찰과 참회의 단계를 역설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연극치료처럼요.
    그리고 예를 드신 작품들을 개괄하신 것으로만 봤을 땐 이 영화와는 궤가 다르다는 느낌이 듭니다. 거기엔 인륜적인 성찰보다 미학적인 함의가 그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앞선 듯한 느낌을 받아서요. 또한 제 생각에 그들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형식적 감각보단 불교의 일화를 듣는 것처럼 그 내용의 현실적 상황에 관해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여지를 줘야 할 것 같습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