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3

이식과 기생
: 봉준호의 <기생충>을 계기로 다시 읽는 임화의 영화론


(※ 아래 글은 반연간 문학전문지 《쓺》 제10호(2020.03.30)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만들고 있는 영화는 영화가 아니요, 영화 비슷한 장난감이다. 우리는 이 장난감을 영화라는 수준으로 끌어가야 된다.”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영화감독 나운규는 열악한 조선영화의 처지를 상술하며 이렇게 썼다. 1930년 5월 13일부터 19일까지 총 6회에 걸쳐 《중외일보》에 연재된 「현실을 망각한 영화 평자들에게 답함」이라는 글에서였다. 외국으로 보내기엔 “형식으로 불구의 것”에 지나지 않는 당대 조선영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몸뚱이를 열로 쪼개도 모자랄 만큼 다사多事하다”고 토로한 나운규가 굳이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1930년 초에 나운규가 주연을 맡은 <아리랑 후편>(연출은 이구영) 및 연출과 주연을 겸한 <철인도>가 개봉된 이후,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계열의 평론가들인 서광제와 윤기정 등은 이 영화들이 지극히 비현실적・반계급적・반동적이라며 맹공을 퍼부었는데, 이에 분노한 나머지 “작자 자신이 해석하여 대중이 공정한 판단을 내리도록 하려고” 나운규 자신이 직접 붓을 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시 《중외일보》를 통해 발표되었던 서광제와 윤기정의 글―각각 「원방각圓方角 작품 <철인도> 비판」과 「조선영화의 제작 경향: 일반 제작자에게 고함」이다―과 나운규의 글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사실 나운규는 그에게 가해진 비판의 논점을 슬며시 바꿔버리는 방식으로 반론을 전개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서광제와 윤기정은 나운규의 작품에서 무엇보다 내용적 측면, 즉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나운규는 그러한 내용의 표현을 가로막는 조선영화의 현실을 토로하면서, 이런 현실에서 나온 영화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영화 자체로만 논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식으로 답하고 있다. 나운규의 항변을 조금 고쳐서 말하자면, 영화의 내용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러한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이 갖춰져 있음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여러 사정상 이와는 거리가 먼 조선영화는 곧바로는 그러한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논쟁이라는 게임이 준수해야 할 규칙이라는 면에서만 보면 이처럼 논점을 바꿔 대응하는 항변은 순전히 반칙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세세히 나열하고 있는 조선영화의 현실, 즉 산업적 시스템의 부재(“조선에는 대大회사는 고사하고 (…) 영화로 다소간이라도 이익을 얻었다는 사람은 초기의 몇 사람밖에 없다.”), 기술적 설비의 미비(“사건은 꼭 밤에 있어야 될 사건인데 살인한 장소가 종로나 본정통本町通이라면, 종로나 본정통의 밤은 조선영화계에서는 비슷하게도 내기 어렵다.”), 검열의 문제(“처지가 다른 이 땅에서 검열의 수준을 일본과 동일시하는 것은 너무도 현실을 모르는 공상이다.”) 등을 도외시하면서 글의 문제점만을 짚기도 어려운 일이다.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19년, 봉준호의 7번째 장편영화 <기생충>은 한국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임권택의 <춘향뎐>(2000)이 한국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지 19년 만의 일이다. 연말에는 숱한 국내외 잡지들의 설문 조사에서 2019년의 베스트 영화 1위 혹은 상위권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세계 각국에서 여전히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이 영화는 한국에서만도 이미 10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고, CJ E&M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마케팅 비용을 제외한) 제작비인 135억원에 버금가는 비용을 캠페인 비용으로 투입하면서 작년 말부터 오스카(미국아카데미영화상) ‘레이스’에 합류했다. 그리고 올해 2월 9일(한국은 2월 10일)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외국영화로는 최초로 작품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감독상, 각본상 및 국제장편영화상 등 총 4개 부문을 석권하며 그야말로 역사를 다시 썼다. 시상식 결과가 나온 직후,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이 <기생충>의 수상을 축하하며 박수를 치는 것으로 회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한 것이 뉴스에 오르기도 했다.

식민지 시기의 영화인인 나운규가 토로했던 조선영화를 둘러싼 사정들은 <기생충>과 오늘날의 한국영화와는 무관한 외계의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이제 나운규가 제기한 조선영화의 문제들은 어느샌가 하나둘씩 모두 해결되어 버렸다고 보아도 될까? 대형 배급사와 멀티플렉스 체인에 기반을 둔 와이드 릴리스 방식이 일반화된 이후 21세기의 한국영화 산업이 어떻게 부정적으로 재편되어 왔는지, 이명박과 박근혜 집권기를 거치는 동안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어떤 식으로 영화인들을 옭아매었는지, 투자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부 배우들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영화 현장에서 기존의 작업 방식에 비추어보면 얼마나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영화가 제작되고 있는지 등에 관한 분석이나 증언은 적지 않다. <기생충>이 오늘날 한국영화의 잠재력을 보여준 영화라기보다는 봉준호라는 개인에게만 가능했던 여건의 소산이며, 그의 출세작이 된 두 번째 장편영화 <살인의 추억>(2003) 같은 작품의 기획안을 지금의 신진 감독이나 제작자가 투자자에게 제시하는 일은 언감생심이리라는 지적도 타당한 구석이 없지 않다. (게다가 <살인의 추억> 제작에 착수하기 전까지 봉준호는 서울 관객 5만명 수준에 그친 상업적 실패작 <플란다스의 개>(2000)를 연출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동시대 한국영화계에 대한 진단을 내리기보다는 영화 <기생충>이 나운규가 제기한 조선영화의 형식이라는 문제와 어떤 식으로 대면하고 있는지만을 간략히 살필 것이다. 이 대면의 결과가 낳은 것은 해결일까, 극복일까, 그도 아니면 우회일까?




이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기 전에 식민지 시기에 발표된 글 하나를 더 살펴보기로 하자. 시인이자 평론가이며 배우로도 활동했던 임화가 《춘추》 제10호(1941년 11월호)에 발표한 「조선영화론」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임화는 “조선영화는 조선의 다른 모든 근대문화와 같이 수입된 외래문화의 일종”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외래의 것을 수입하면서 동시에 제작하기 시작한 문학・음악・연극・미술과는 달리 영화의 경우 제작은 하지 않고 외래의 것을 감상만 하는 시기가 꽤 오래 지속되었음을 지적한다. 다만 외래문화의 이식移植이라는 점에서는 근대 조선의 영화와 다른 예술들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임화는 문학・음악・연극・미술은 “제작하면서 그것을 모방함으로써 이식할 수 있었던 대신 영화는 단지 감상하는 것만으로 활동사진을 이식한 것”이라는 문제적인 주장을 제출하기도 한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임화가 결핍이나 부재를 극복해야 할 장애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조선영화를 성립시키는 구성요소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가 “영화의 제1기를 밑받치는 토대”라고 본 연극적 전통이 조선에서 그 역사가 가장 빈약했다는 점이나, “자본의 유력한 원호를 받지 못했다는 것” 또한 조선영화를 성립시키는 구성요소가 된다. 이처럼 연극적 전통이, 제작이, 자본이 결핍되고 부재함으로 인해 조선영화는 “자기의 자립을 위하여 가장 많이 문학에 원조를 구하였으며”, “조선의 문학이나 그 타他의 예술에 의지한 것 이상으로 외국영화에 의존하고”, “자본의 은혜를 몽하지 못한 대신에 그 폐해를 받지 아니했다.” 

언뜻 보면 임화의 진단은 모든 것이 부족한 조선영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미 지적했듯이 분명히 그는 당대 조선영화의 근본 성격을 규정하는 결핍과 부재를 도래할 조선영화를 위한 구성요소로 삼고 있다. 「조선영화론」에서 임화가 던진 가장 논쟁적인 화두라 해도 좋을 다음의 주장을 보자.

내지內地의 어떤 작가는 조선소설을 내지의 그것에 비하면 서구적인 데 가깝다고 한 일이 있거니와 영화의 영역에서도 이 점은 통용될 듯하다. 이것은 물론 그 소박한데 있어 진실하고 치졸함에 있어 독자적이나 이것은 시정해야 할 결함이면서 성육되어야 할 장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이러한 제점諸點은 여러 가지의 조선영화의 근본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 이것은 발전여하로서 장래 조선영화의 가장 독자적인 성격 내지는 가치있는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여기서 임화가 ‘제점’이라 한 것은 연극적 전통과 제작과 자본이 결핍되고 부재함으로 인해 조선영화가 띠게 된 특징들을 말한다. 그런데 ‘시정해야 할 결함’이 어떻게 해서 ‘성육되어야 할 장점’이 되는가? 명백하게, 이는 모순적인 주장이다. 모두에서 인용했던 나운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영화가 아닌 ‘영화 비슷한 장난감’ 같은 조선영화의 특징이야말로 결함이자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조금 더 밀고 나가자면, 임화는 나운규가 형식조차 갖추지 못한 장난감이라고 부른 것이야말로 조선영화의 독자적 형식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임화는 「조선영화론」에서 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 글이 발표되고 나서 4년 뒤 식민지 조선은 해방을 맞게 되었고 조선영화의 형식이라는 문제는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채로 해방공간의 ‘대한민국’ 영화인들에게 던져졌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자. 나의 가설을 미리 밝혀두자면 다음과 같다. 봉준호의 <기생충>은, 나운규와 임화와 같은 식민지 시기의 조선영화인들을 옭아매었고 해방공간과 오랜 군부독재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확대재생산되었던 한국영화의 형식이라는 문제에 대해, 그와 관련된 모순을 해결하거나 극복하거나 우회하는 대신 아예 모순 자체를 형식화해 버리는 방법으로 답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도래할 한국영화의 독자성과 가치에 대한 임화의 ‘예언’은 <기생충>을 통해 실현된 셈이다. 한국영화의 형식이라는 문제를 둘러싼 모순 자체를 형식화한 이 영화를 보고 어느 외국의 평자가 “봉준호는 독자적으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Bong Joon Ho has become a genre unto himself”고 한 말이 널리 회자되기도 했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이 말을 형식화된 모순으로서의 한국영화가 <기생충>이라는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마침내 독자적이고 가치 있는 장르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최초의 한국영화로 꼽히는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가 나오고 나서 7년 뒤인 1926년에 임화가 《매일신보》에 발표한 글에서 “날로 왕성하여가는 일본이나 구미영화와 경쟁커녕은 한자리에 서도 못할 형편”(「위기에 임한 조선영화계」)이라 진단하며 탄식했던 한국영화가 바야흐로 유럽과 미국의 주요 영화상을 휩쓸고 일본에서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진풍경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기생충>은 나운규나 임화가 지적한 결핍과 부재의 조건들 속에서 제작된 영화가 결코 아니다. 다소 과장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검열이 없었다면 (…) 봉준호 감독이 50년 전에 나왔을 것”이라고 한 김수용 감독의 발언에는 분명 저 결핍과 부재의 조건들을 오롯이 체험한 세대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억한이 담겨 있다. 따라서 21세기의 영화인인 봉준호가 만든 <기생충>이 그러한 조건들과 직접 대면하여 한국영화를 둘러싼 모순을 형식화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봉준호는 오랫동안 불가피하게 결핍과 부재의 조건들과 대면한 상태에서밖에는 영화를 내놓을 수 없었던 한국영화사史의 기형적 산물들을 참조한다. 철저한 결핍과 부재의 상황에서 한국영화의 형식을 어떻게 정립시킬 것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싼 모순에 거듭 대면하다 못해 결국 그 모순을 형식(혹은 장르)으로 삼기에 이른 감독들의 영화들―봉준호 스스로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들로 꼽기도 한 김기영, 이만희, 그리고 이장호가 연출한 영화들―을 말이다. (이처럼 모순적 형식 내지는 장르로서의 한국영화의 기묘한 이력을 참조한다는 것이야말로 1980년대 이전의 한국영화사와 거의 혹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해도 무방한 형식을 시도하는 홍상수, 박찬욱, 이창동 등과 봉준호의 커다란 차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봉준호가 꼽은 한국영화들 가운데 하나이자 1980년대 한국영화계가 낳은 가장 걸출한 괴작怪作이라 해도 좋을 <바보선언>(1983)의 제작과 관련해 연출자인 이장호와 후배 감독인 김홍준이 나눈 대화의 일부를 살펴보자. 우리는 이 영화의 아방가르드적 형식이 주류 영화의 형식에 대한 비판으로서 나온 대안적 형식이 아니라 형식화의 불가능성(의 조건) 자체를 형식으로 수용한 결과라는 생생한 증언을 듣게 된다.

김홍준 (…) 1983년이면 사실 아직 본격적인 독립영화나 이런 것도 없었지만 뭐 작은 영화, 열린 영화, 저도 잠시 몸담았던 서울대학교의 ‘얄라셩’이랄지 또 각 대학의 영화서클들이 생기면서… 70년대에 있었던 예술 지향적이고 실험영화 중심의 대학 영화가 아닌, 영화운동을 지향하는 그런 영화들이 조금씩 지하영화 비슷하게 나오던 때인데, 혹시 이 영화를 만드실 때 그런 영화들의 존재를 아셨거나 영향을 받으신 건지 아니면 <바보선언>이 오히려 그런 영화들에 영향을 미쳤는지요.

이장호 아니죠. 이건 내가 직업 영화인으로서 만든 게 아니라 일부러 망치려고 했던, 거의 대학생 수준의 그런 영화였기 때문에 아마 모방을 하지 않아도 그냥 8미리 들고 나가면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실제로 영화가 1억 5천이 들던 시절에 이건 5천만 원밖에 안 들었으니까 1/3 아닙니까? 1/3의 제작비를 들여서 만들었고, 이 영화가 처음 시사회를 하던 날이 생각이 나는데 사람들이 모두 당황한 것은 영화 시작한 지 20~30분 지났는데도 대사가 없었다는 것. (…) 나는 시나리오를 쓸 때면 항상 대사 쓰기가 제일 힘들어서, 저절로 이 영화의 대사를 기피하게 됐어요. (…) 나는 가슴에 있는 말을 숨기지를 못하는데 그때 내가 잊히지 않는 게, 그거 사실 내가 만든 영화가 아니다. 나는 영화를 포기하고 자살하는 심정으로 만들었는데 이 영화를 만든 에너지는 전두환 정권하고 영화 정책에서 나왔다. 그것이 영화를 만드는 힘이 되었다고 솔직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 재밌는 점은, 데모나 농성이 있을 수 없는 시대에 데모가 국회의사당 돔 앞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학생들은 그걸 다 발견하는데 신통하게도 영화검열하는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이 대담에서 김홍준이 언급하고 있는 1980년대 한국의 영화운동은 부분적으로는 식민지 시기에 카프 계열의 영화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정치적인 조선영화 제작의 시도―임화는 이 가운데 <유랑>(1928), <혼가>(1929), 그리고 카프 1차 검거의 빌미가 된 <지하촌>(1931) 등의 주연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서울영화집단, 노동자뉴스제작단, 민족영화연구소, 장산곶매 등의 집단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1980년대의 영화운동은 식민지 시기나 (이장호가 증언하고 있는) 당대의 주류 영화계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실은 그보다 더 열악한 결핍과 부재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 영화운동 세대의 구성원 대부분이 청년기를 보낸 1970년대와 1980년대는, <바보선언>과 같은 드문 예외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는 한국영화가 질적으로 가장 후퇴했던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과거 한국영화의 전통으로부터는 전적으로 단절된 상태에서, 당대의 한국영화는 전적으로 부정해야 하는 대상이 된 상태에서, 실제로는 거의 보지 못한 외국의 대안적 영화들에 대한 글들에 의존해서, 산업적 자본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로 한국영화의 형식이란 문제와 대면해야 했다.

흥미롭게도, 1980년대 후반 무렵부터 ‘정치의 계절’이 지나간 후인 1990년대에 영화운동 세대의 구성원들 상당수는 충무로 영화계의 감독이나 제작자로, 영화잡지의 편집진이나 기자나 영화비평가로, 대학교 영화과의 교수나 강사로, 갓 생겨나기 시작한 영화제의 프로그래머 등으로 진출하면서 한국영화계의 산업적・문화적 재편을 이끄는 주역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김홍준이 언급한 얄라셩(1979년 창립)을 시초로 1983년 이후 여러 대학에서 영화서클이 생겨났고 1984년에 설립된 한국영화아카데미와 같은 국립영화교육기관 또한 1990년대에는 완전히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1969년생으로 1988년에 대학에 입학해 영화서클을 만들어 활동하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교육받은 뒤 2000년에 장편영화로 데뷔한 봉준호는 이처럼 영화운동 세대가 (1980년대에 만든 영화들 자체가 아니라) 1990년대에 재편한 제도적 영향 속에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이른바 ‘시네필 문화’가 형성된 시기에 말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인터뷰나 글 들을 통해 그에게 가장 영감을 준 한국감독이라고 꼽곤 하는 김기영은 이러한 시네필 문화의 한가운데에서 1990년대의 영화광들을 통해 (주로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재발견된 인물이었다. 봉준호가 <기생충>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2019년은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이었을 뿐 아니라 김기영 탄생 100주년이기도 했다.

나는 김기영의 스타일이라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여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조건들에 의해 뒤틀린 한국영화, 한동안 ‘충무로 영화’라 불려 왔던 한국영화의 부정교합 자체가 도착적인 미학으로 승화된 것이라고 생각해 왔으며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형식화에 실패한 결과이자 순전히 모순에 지나지 않는 이러한 부정교합을 그와 동시대의 몇몇 한국감독들은 외래의 미학이나 장르와 한국영화를 이종교배(1950년대와 60년대의 한형모・신상옥・유현목, 1970년대의 하길종)함으로써 해결하거나 극복하거나 우회하고자 했던 반면, 김기영은 부정교합 자체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 미학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장르를 만들었다. 이로써 김기영의 영화는 충무로 영화라는 모순적 비형식 자체의 형식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한편, 임화가 진단했던 조선영화의 결핍과 부재는 <기생충>의 봉준호에게는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것이 되었는데, 그는 투자와 배급에서 CJ E&M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지녔음은 물론이고 외국영화나 여타의 예술만이 아니라 김기영 같은 감독을 통해 그 모순 자체가 육화embodiment된 한국영화를 참조점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기묘하게 비대칭적인 데칼코마니 구조를 현대적 공포영화의 플롯으로 성공적으로 형식화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사이코>(1960)를 비롯한 여러 외국영화에서 빌려온 연장들로 비형식의 균열들을 꼼꼼히 보수(혹은 은폐?)하면서 말이다. <기생충>은 <하녀>(1960)의 계단을 뜯어낸 자리를 <사이코>를 비롯한 여러 참조물의 계단‘들’로 대체한 자리에서 펼쳐지는 부조리한 희비극이다. 

나이 든 부모를 산에 버리는 고대적 풍습을 소재로 한 김기영의 <고려장>(1963)을 이보다 조금 앞서 유사한 소재를 가지고 일본의 기노시타 게이스케가 영화화한 <나라야마 부시코>(1958)와 비교해 보자. (김기영이 기노시타의 영화를 직접은 아니더라도 각본 정도는 참조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다 해도 번안의 여부를 논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후카자와 시치로가 쓴 동명의 원작을 토대로 일본 고유의 극적 전통을 한껏 활용해 전체를 세트에서 촬영한 기노시타의 영화는, 영화적 기예의 총화로서의 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진정 ‘완력腕力’의 영화라 할 만하다. 반면, <나라야마 부시코>에 비하면 규모는 다소 작지만 영화의 대부분을 세트에서 촬영한 <고려장>은, 고려장이라는 풍습을 지닌 마을 공동체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인습과 탐욕에 얽매인 빈자貧者들의 투쟁에 대한 동물학적 묘사, 전근대적 무속인의 모습으로 그려진 상징적 권력에 대한 저항의 신화, 성적인 도착성으로 넘쳐나는 인정과 욕망의 멜로드라마, 그리고 심지어 액션영화에 이르기까지를 형식의 균열을 감수하고라도 기어이 묶어 놓고야 마는 ‘괴력怪力’의 영화이다. (전체가 10권의 필름으로 이루어진 영화이나 오늘날에는 두 권이 분실된 채 남아 있는 상태라서 이 균열의 느낌은 더욱 강화된다.) 후대의 사람들을 들뜨게 하는 것은 언제나 괴력의 영화 쪽인데, 이는 물론 그것의 (불가해함보다는) 부조리함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임권택 같은 전혀 다른 사례를 떠올려 볼 수도 있다. 임화는 1941년에 《삼천리》에 기고한 「조선영화발달소사」에서 “『춘향전』이라는 소설이 무성, 유성을 물론하고, 매양 조선영화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쓴 적이 있다. 여기서 임화가 언급하고 있는 <춘향전>은 1923년에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가 연출한 무성영화 <춘향전>과 1935년에 제작된 한국 최초의 유성영화인 이명우의 <춘향전>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임권택의 <춘향뎐>은 한국영화로서는 최초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작품이다. 여기서 임권택은 『춘향전』이라는 고소설을 토대로 한 판소리를 임화의 말대로라면 연극적 전통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출발했던 한국영화에 끌어들이고, 어떤 외국영화나 여타 예술에도 거의 의존하지 않으면서 한국영화의 형식이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실험한다. 이는 그 자체로 한국영화사에서 희유한 사건이었지만 임권택의 실험은 이후의 한국영화계에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한 편의 걸출한 한국영화가 동시대나 후대와 아무런 연결고리도 지니지 못한 채로 이처럼 단독적으로 고립되어 버린 사례는 이 영화를 제외하면 배용균의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1995)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배용균과 임권택의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바야흐로 한국영화의 산업적 재편이 본격화되고 있던 시기다. 바로 <쉬리>(1999)로 대표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통해 외국영화의 형식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할리우드라는 제도 자체를 충무로에 이식하고자 하는 열망이 극에 달했던 무렵이다. 서울관객 100만명을 동원한 임권택의 <서편제>(1993)가 충무로라는 구체제에서 가능했던 예술과 사업business 간 조우의 최대치를 상징한다면,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맥락 안에 있는 봉준호의 <괴물>(2006)은 ‘K-시네마’라는 신체제가 떠오를 무렵에 나온 예술과 산업industry 간 조우의 최대치를 상징한다. 봉준호가 처음으로 칸에 초청된 것은 ‘숙주The Host’라는 영어 제목을 지닌 이 작품을 통해서였다. 

칸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이후 지금까지 <기생충>에 대한 수많은 기사와 리뷰와 인터뷰와 비평 등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외국의 평자들에 의해 쓰인 글을 읽고 있노라면 이 영화가 다양한 장르를 거침없이 오간다는 점에 감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에서 제작되는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드라마나 TV 프로그램 및 유튜브 등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런 반응이 다소 의아하게 비칠 수밖에 없는데, 장르적 혼종성은 한국 대중문화 양식의 기본값default으로 설정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경멸적인 의미에서 충무로 영화라고 불린 한국영화에서 장르를 무작위로 넘나드는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작품에서 발견될 만큼 아주 뿌리 깊은 것이며, 심지어 오늘날 이는 한국영화가 관객에게 소구하는 데 있어 이점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 (2019년 벽두에 개봉해 16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극한직업>을 떠올려 보라.) 물론 많은 경우 그것은 당대의 관객들에게 소구하면서도 정합적인 서사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 결과다. 

이를테면 현재까지 두 편이 만들어져 둘 모두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신과 함께> 연작은 <기생충>이나 <고려장>만큼이나 다기한 장르들을 오간다. 다만 여기에는 봉준호가 빌린 연장들이 없을뿐더러 김기영의 괴력 같은 것은 더더욱 없어 그저 ‘버라이어티’하고 무규정적인 무엇으로 남을 뿐이다. <신과 함께>가 충무로 영화라고 불리는 한국영화의 모순적 비형식 자체가 현재에도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김기영의 영화는 그것을 과잉으로 밀고나가 ‘로컬’하게 형식화해 버린 것이고, 봉준호의 <기생충>은 그처럼 형식화된 비형식을 동시대에 ‘국제적’으로 수용 가능한 ‘장르’로 만든 것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외국의 평자들에게는 온갖 부정교합들을 처리하기 위해 <기생충>이 수행하고 있는 연장질이 아니라 그 연장질의 대상이 되는 온갖 장르들과 그 작업을 통해 나온 형식으로서의 장르(봉준호라는 장르)가 더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한국의 우리에게 그 점이 잘 체감되지 않는 것은 한국영화라는 숙주와의 주기적인 접촉을 통해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비형식들에 ‘면역’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부자와 빈자 가족의 공생이란 것이 불가능하듯, <기생충>에서 도무지 연결될 법하지 않은 것들을 한데 엮는 두 가지 중요한 매개들 또한 마찬가지다. 두 가지 매개란 다름 아닌 물과 돌이다. 이 영화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부분을 떠올려보자. 불과 이틀 사이에 믿기 힘들 만큼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는데, 봉준호의 영화에서 낯설지 않은 폭우라고 하는 설정이 이것들을 모두 인과적으로 통합해낸다. 반면, 기택(송강호)의 아들 기우(최우식)가 영화 초반 친구에게서 선물로 받은 수석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영화 후반부에 물난리가 난 기택의 집에서 기이하게 물 위로 떠오른 이 수석이 별다른 이유나 동기도 없이 하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해가는 과정은 가히 노골적이라 할 만큼 의도적으로 부조리하게 ‘방치’되어 있다. 영화 초반에 기우는 선물로 받은 수석을 바라보며 “야, 이거 진짜 상징적인 거네”라고 말한다. 이는 <기생충>이라는 영화에 봉준호가 태연자약하게 기입해 넣은 부조리를 반어적으로 가리키는 유머의 말일 것이다. 사실 수석에는 아무런 상징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무지 연결될 법하지 않은 사건 혹은 장소들을 한데 엮거나 잇는 두 가지 매개의 성격은 확연히 다르다. 이들은 함께 어울리지 못하지만 <기생충>이라는 영화 속에서 여하간 공존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여기서 물이 한국영화가 오랜 이식의 노력을 거쳐 ‘봉준호라는 장르’를 통해 얻은 형식이라면, 돌은 봉준호가 그 형식 안에 어떻게든 기어이 기생하게끔 풀어둔 모순적 비형식의 징표라고 말이다. <기생충>을 21세기 한국영화의 ‘상징적’ 작품이라 부를 수 있다면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괴물>이 공개되었을 당시 프랑스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인터뷰 기사 제목으로 삼은 이후 봉준호 스스로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삑사리의 예술L’art du Piksari’이라는 표현은 이처럼 확장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기생충>에서 박 사장을 맡아 연기한 배우 이선균은 지난 1월에 열린 미국배우조합상 시상식에서 “우리가 할리우드의 기생충인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문득 1929년에 임화가 《조선지광》에 발표했던 「최근 세계영화의 동향」의 몇몇 구절들이 떠오른다. 그는 영화란 “모든 예술의 영역에서 그 기능을 탈취하고 있다고 해도 좋은 문화사의 사생아”라고 부르면서 특히 미국영화가 지닌 근거 “즉 내재적인 발전의 원소原素는 지구의 다른 지방에서 성생成生하였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식을 통해 결핍과 부재를 보완하려 하는 한편 그러한 보완의 노력을 종종 좌절시키는 모순들의 숙주가 되었던 한국영화가 마침내 할리우드를 경유하여 세계영화가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기택네 가족이 박 사장 가족에 대해 그러한 것처럼 상호적인 기식자parasite로서일까, 아니면 지하 방공호와 같은 부속된 장소para-site로서일까? 이러한 물음과 더불어 새로운 100년의 한국영화는 시작되었다. 

-----

※ 여기서 인용한 식민지 시기 영화인들의 글은 다음의 책들을 참고하였다. 인용할 때는 현대어에 맞게 수정된 판본을 따랐다. 나운규 지음 『<아리랑>을 만들 때』(문화부 1991); 나운규 지음 『조선 영화의 길―나의 삶 나의 영화』(가갸날 2018); 정재형 엮음 『한국 초창기의 영화이론』(집문당 1997); 백문임・이화진・김상민・유승진 엮음 『조선영화란 하何오』(창비 2016); 백문임 지음 『임화의 영화』(소명출판 2015). 이장호 감독과 김홍준 감독의 대담은 다음의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장호・김홍준 지음 『이장호 감독의 마스터클래스』(도서출판 작가 2013).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