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6

프린시프 레알 공원

 

※ 이 글은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사진잡지 《보스토크》 35호(2022년 9월 발행)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리스본을 방문했을 때 굳이 이곳을 찾았던 것은 순전히 주앙 때문이었다. 오해가 없도록 정확히 말하자면, 두 명의 주앙 때문이었다. 하나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매일같이 이곳으로 산책을 나오곤 했던 주앙이고, 다른 하나는 리스본 여행 내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 주었던 주앙이다. 간단히 늙은 주앙과 젊은 주앙이라고 해 두자. 깡마른 주앙과 똥똥한 주앙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어쩐지 나이로 구분하는 편이 더 담백한 느낌을 준다. 늙은 주앙은 영화에서 보았을 뿐이지만 젊은 주앙은 오랜 친구다. 늙은 주앙은 영화감독이고 젊은 주앙은 비디오 아티스트다. 젊은 주앙의 성에는 딱히 뜻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늙은 주앙의 성에는 ‘사냥꾼’ 또는 ‘산림관’이라는 뜻이 있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역대와 현역을 막론하고 포르투갈 대통령들을 싫어하고 자신들이 만든 영화나 비디오 작품에 종종 직접 출연한다는 것이다. 리스본에는 영화를 만드는 주앙이라는 이름의 친구들이 두 명 더 있지만, 한집에서 사는 그들은 좀처럼 자신들의 영화에 얼굴을 비추는 일이 없다.

늙은 주앙의 영화를 보면 프린시프 레알 공원 근처에는 분명 버스 정류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떤 영문인지 젊은 주앙은 이렇게 말했다. 카몽이스 광장 근처에서 내려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 한참 올라가다 보면 네가 주앙의 영화에서 보았던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공원이 나올 거야. 나중에 거기 도착해서 확인해 보니 실제로 프린시프 레알 공원 바로 앞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대체 왜 저 아래서부터 걸어 올라오라고 한 거지? 구글맵 같은 것으로 경로를 미리 확인한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고 고리타분하게 지도 하나만 들고 돌아다니던 때라, 당시엔 여하간 젊은 주앙의 조언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종종 지도가 무용지물이 되는 알파마 지구의 한 카페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버스를 타러 가기 직전, 젊은 주앙에게 물었다. 혹시 그 나무 이름이 뭔지 알아? 리스본에 관한 것이라면 온갖 잡스러운 것들까지 꿰고 있는 그는 주저 없이 답한다. 멕시칸 사이프러스야. 하지만 학명을 알면 그 나무가 왜 거기 있는지 더 수긍이 되지. 학명이 뭔데? 쿠프레수스 루시타니카야. 너도 알다시피 루시타니아는 포르투갈을 가리키는 말이잖아? 그래서 포르투갈 사이프러스라고도 불러. 그러면서 늙은 주앙이 앉아 있던 나무 아래의 벤치에서 찍은 자기 사진을 보여준다(사진 1). 사진을 잠깐 들여다보고 인사를 한 뒤 버스를 탔다. 그리고 주앙의 조언대로 카몽이스 광장에서 내려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진 1


언덕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며 천천히 둘러보던 그때의 프린시프 레알 지구는 아직 관광객으로 붐비기 전이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이 영화화되어 전 세계적으로 개봉된 지 일 년쯤 지난 무렵이라, 분명 리스본을 찾는 관광객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던 때이기는 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 제로니무스 수도원 인근의 파스텔드나타 가게가 소개되면서 그 앞에 한국 관광객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기 시작한 것도 대략 이 무렵이다. 프린시프 레알 지구 초입에 자리한, 도시를 내려다보며 확 트여 있는 상 페드루 드 알칸타라 전망대에 드문드문 관광객들이 눈에 띄기는 했다. 하지만 프린시프 레알 공원을 찾는 관광객은 거의 없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5월의 태양을 피하기 안성맞춤인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로,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노인들이나 낮잠을 즐기는 청년들이 간간이 눈에 띄는 정도였다. 

한동안 다시 찾지 못했지만 여기저기서 들은 대로라면 지금의 프린시프 레알 공원은 그때와는 꽤 달라진 모양이다. 영화에서의 식물이라는 주제로 온라인에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는 파트릭 홀차펠이 2021년 4월에 쓴 글을 보면 이곳의 현재 모습은 예전과 적잖이 다르다. 그는 요즘 포르투갈의 수도를 방문하는 그 누구도 늙은 주앙이 140살 넘게 먹은 이 나무 아래 앉아 그토록 생생하고 부드럽게 포착해냈던 것과 같은 느낌을 찾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거지들, 연인들, 마약상들, 사기꾼들, 그리고 시네필들에게 인기 있는 만남의 장소였던 이 공원을 관광객들이 점령했다.” 이 문장이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은, 생전의 늙은 주앙은 자신의 영화 속에서 거지, 연인, 마약상, 사기꾼 같은 존재였으며 그의 영화는 이러한 불량한 존재를 생생하고 부드럽게 감싸는 진정한 시네필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홀차펠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쓴다. “하지만 당신이 일찌감치 그곳에 가서 잠시 앉아 눈을 감고 있으면, 진한 사이프러스 향기가, 우산 모양으로 드리워져 눈길을 끄는 수관(樹冠)에 스미는 시원한 산들바람이, 빛과 그림자의 유희가, 그 나뭇잎들의 속삭임이, 내세의 것인 만큼이나 현세의 것이기도 한 비밀들을 여전히 드러내보일 것이다.” 


사진 2


홀차펠의 글과 함께 수록된 이바나 밀로스의 그림(사진 2)은 흥미롭다. 밀로스의 그림 제목은 ‘부부 루시타니카’다. ‘부부’는 생전의 주앙이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성이다. 언제부턴가 그는 알파마 지구 테주강 인근의 허름한 하숙집에 기거하던 시절부터 사용하던 불경하기 짝이 없는 (포르투갈어로 신을 뜻하는) ‘데우스’라는 성은 더이상 쓰지 않았다. 이런저런 범죄와 결부된 과거를 감추고 살아가기엔 그렇게 하는 편이 나았을 터다. 또한, 자신이 노스페라투를 닮았다는 점에 착안해 그 흡혈귀를 연기했던 배우의 이름을 따서 자신을 막스라고 부르는 것도 언제부턴가 그만두었다. 여하간 밀로스를 통해 주앙은 그 스스로가 부부 루시타니카라는 하나의 나무가 되었다. 

사실 시네필에게 있어서라면 프린시프 레알 공원은 곧 늙은 주앙의 공원이다. 그의 유작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가 하나의 공원을 이토록 완벽하게 하나의 천국처럼 그려낸 적이 또 있었던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일찍이 페르난두 페소아도 이곳을 리스본 최고의 공원 가운데 하나로 꼽은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페소아는 이곳을 프린시프 레알 공원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리우데자네이루 광장에 있는 또 다른 공원”이라고 썼을 뿐이다. (그런데 2017년에 출간된 한국어 번역판 『페소아의 리스본』에서는 ‘또 다른 공원’을 프린시프 레알 공원으로 아예 풀어서 옮겨 놓았다.) 이 공원의 공식적 이름은 유명한 언론인 프란사 보르제스를 기려 붙여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리우데자네이루 광장은 오늘날 프린시프 레알 광장이라 불리고, 프란사 보르제스 공원은 프린시프 레알 공원이라고 불린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에겐 주앙의 공원과 페소아의 공원을 별개의 것으로 간주할 명분이 있는 셈이다. 이름의 마력 덕분이다.


사진 3


젊은 주앙이 일러준 대로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서 본 프린시프 레알 공원은 늙은 주앙의 영화에서 보고 상상했던 것만큼 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놀라거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의 영화가 공간감을 교란하는 일은 아주 흔하기 때문이다. 다만 영화를 볼 때 이 공원을 실제보다 크게 느낀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주앙의 유작에는 산책을 나간 그가 나무를 등지고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이 거듭 나온다(사진 3). 이 영화에 보이는 프린시프 레알 공원의 모습은 이처럼 나무줄기를 화면의 중심에 두고 각도와 크기를 달리해 가며 찍은 쇼트들을 통해 제시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따금 우리는 그가 아이들의 놀이 상대가 되어 주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같은 자리를 맴도는 소녀를 쫓아 달려가기도 하는 모습을 본다. 하지만 언제나 나무 아래서다. 우리는 프레임 바깥의 풍경은 어떠한지, 즉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주앙이 보고 있는 풍경은 어떠한지 전혀 알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나무 쪽을 보게 될 뿐 나무 쪽에서는 볼 수 없다. 우리는 주앙이 등지고 있는 나무 저편으로 멀리 보이는 배경을 통해 매우 제한적으로만 공원의 경계와 모양새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 모호함이 오히려 공원의 규모를 상상적으로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그리고 보이는 것을 대신해 생생하게 바깥의 감각을 전달하는 소리의 농밀함에 힘입어 공원은 어엿한 하나의 세계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까지 확장된다.


사진 4~사진 6


당연한 말이지만, 늙은 주앙의 프린시프 레알 공원은 어디까지나 영화에만 존재하는 그런 곳이다. 하지만 그가 보고 있던 풍경이 여전히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가 앉았던 벤치에 앉아 그가 보았을 법한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사진 4~사진 6). 이렇게 해서, 자신의 영화에서라면 그가 절대 구사하지 않았을 시점 쇼트들을 만들어 본다. 그리고 잠시 생각해 본다. 이런 쇼트들이 영화에 함께 제시되어 버리면 늙은 주앙이 즐겨 찾았던 프린시프 레알 공원이라는 영화적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진정 우리를 전율케 하는 것은 그의 유작이 바로 이러한 세계가 소멸하는 순간을 연출하면서 종결된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앙은 시선을 나무 쪽으로 두고 벤치에 앉아 있다(사진 7). 그의 등 뒤로 쿠프레수스 루시타니카가 보이지 않는 이유다. 그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다프네라는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이 나무 쪽에서 공원을 보게 된다. 밀로스가 그린 부부 루시타니카의 모습은 이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밀로스의 그림에는 공원이 보이지 않는다. 주앙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댓글 1개:

  1. 안녕하세요? 혹시 한국 영화와 ‘네이션적인 것’ : 『비교의 항해술: 보편과 특수 사이의 영화들』 를 블로그에 올려주실 계획은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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