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4

터칭 스페이스: 스마트휴먼의 몸짓과 장소

 

※ 아래는 격월간 사진잡지 《보스토크》 45호(2024년 5월 20일 발행)에 실린 글이다.


<와일드 투어>


텔레비전, VCR, 캠코더, 컴퓨터, 그리고 스마트폰 등은 동적 이미지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장치로서 20세기에 뤼미에르적 시네마토그래프가 누리고 있던 특권을 서서히 잠식해 왔다. 이 대체 과정이 거의 완료된 지금, 시네마토그래프 장치는 그것을 대체한 장치들이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디자인적 요소로만, 심지어 어휘로만 남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와 관련된 활동, 프로그램, 어플리케이션 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곤 하는 퍼포레이션이 있는 필름 모양 아이콘이나, ‘홈시어터’, ‘아이무비’, ‘시네마(틱) 모드’라든지 여전히 영화 크레딧에 나타나는 ‘a film by’ 같은 어휘들을 떠올려보라. 여하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 또한 이처럼 전자적, 디지털적으로 변용된 동적 이미지의 특정한 양식을 예전에 쓰던 표현 그대로 영화라고 부르는 데 별반 거부감이 없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과연 스마트폰을 텔레비전, VCR, 캠코더, 컴퓨터 등과 같은 맥락에 두고 봐도 괜찮은 것일까? 역사적으로 영화는 그 맞수가 등장할 때마다 크게 이중의 방식으로 이에 대응해왔다. (다만, 경제적이고 산업적인 차원에서의 대응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첫째는 새로운 매체의 디스플레이 화면을 영화적 스크린으로 수용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는 영화적 스크린을 그러한 디스플레이에 적응시킬 방법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시도의 초기적 형태로는 주사선이나 픽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디스플레이 화면을 사실적 효과(페이크 다큐멘터리)나 미학적 효과(글리치 아트)를 얻기 위해 전면에 내세우는 사례들이 있다. 한때 영화 이론이나 비평이 주로 관심을 기울인 것도 바로 이쪽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새로운 매체를 다루는 사람의 몸짓과 그가 가로지르는 장소들이 스크린에 비치는 방식이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 캠코더를 들고 금지된 장소로 향하는 학생들, 무언가 비밀스러운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어두컴컴한 방의 컴퓨터 앞에서 씨름하는 해커 등은, 나란히 앉아 스크린에 비친 영화를 보는 커플만큼이나 한때 영화 스크린에 범람하던 익숙한 클리셰였다. 이렇게 말해도 좋겠다. 20세기의 영화는 이런 몸짓들을 스크린에 비추는 방식을 고안해냈다고. 다정하게, 우스꽝스럽게, 위태롭게, 무시무시하게, 끔찍하게, 긴장되게, 행복하게, 쓸쓸하게, 그리고 온갖 방식으로.

그런데 스마트폰은 어떤가? 이것은 앞서 사례로 든 여러 몸짓을 매우 단조로운 몸짓으로 축소한다. 이를테면 한 손 또는 두 손으로 스마트폰을 잡고 다소 구부정하게 머리를 숙인 채 디스플레이 화면을 들여다보는 그런 몸짓처럼. 사람들이 이처럼 단조로운 몸짓으로 모든 장소를 가로지를 때, 과연 영화는 이것을 어떻게 포착해야 할까? 

이런 영화적 상황을 가정해보자. 때는 20세기 말의 언젠가, 외국의 어느 도시 공항에 막 도착한 한 남자가 있다. 숙소로 예약해 둔 호텔에 가려고 택시를 잡으려는데 녹록지 않다. 이래저래 씨름하다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에 도착한다. 프론트데스크에 가서 체크인을 하는데 아내에게서 전보가 하나 와 있다. 그는 로비의 공중전화 부스에 가서 집에 전화를 건다… 유능한 감독이라면 영화에서 대여섯 개 정도의 장면으로 전개될 이 상황에서 각양각색의 흥미로운 몸짓과 움직임을 연출해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면? 공항에 도착해서 스마트폰으로 예약한 우버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한다. 택시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정보를 살펴보고 메일과 문자를 확인한다. 그의 스마트폰으로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와서 한동안 통화한다. 호텔에 도착해 스마트 체크인을 한다… 장면은 바뀌어도 거의 모든 몸짓이 스마트폰과 결부되다 보니 상당히 유능한 감독이어도 시각적으로 매력적인 화면의 연쇄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몸짓이 장소의 성격과 별다른 관계가 없다 보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남자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다 이따금 뭔가를 보곤 반응하는 그의 얼굴 클로즈업을 교차시키는 정도가 고작일 수밖에 없다. 영화적 장소는 비가시적인 배경이 되어 물러나게 된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 시대의 영화작가들은 스마트폰을 다루는 몸짓을 영화적으로 수용하고 그러한 몸짓이 펼쳐지는 장소를 재창안한다는 문제를 어떻게 직면하거나, 우회하거나, 또는 회피하고 있는 것일까? 흡연이라고 하는 지독히 단순한 몸짓마저 20세기의 영화를 대표하는 몸짓들 가운데 하나로 전환해낸 그 탁월한 역량─스크린에 등장했던 그 숱한 매력적인 흡연가들을 떠올려보라─을 영화가 스마트폰에 대해서도 다시 발휘할 수 있을까?


*

곧바로 최근의 영화들을 살펴보는 대신, 20세기의 끝자락에 만들어진 계시적인 작품 하나를 기억에서 잠시 끄집어내 보자. 소재의 성격을 지나치게 충실히 좇은 결과 미학적으로 파국을 맞은 빔 벤더스의 로드무비 <이 세상 끝까지>(1991)─원제 ‘Until the End of the World’를 영화의 내용을 고려해 새기면 ‘세상의 종말까지’나 ‘세상이 끝날 때까지’가 더 적절해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국내 개봉 당시의 제목을 따르기로 한다─가 그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대학 3학년 때인 1994년 봄에 처음 보았다. 갓 일본에서 출시된 레이저디스크를 누군가 구해와 학생회관 1층에 있던 음악감상실에서 이 영화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해 마지막 날 연강홀(현 두산아트센터)에서 이 영화가 정식 개봉되었을 때 다시 보았다. 일본판은 상영시간이 3시간에 달했지만, 당시엔 으레 그러했듯 국내 개봉판은 심하게 단축되어 2시간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사실 그 해에 벤더스는 거의 5시간에 이르는 감독판을 내놓기도 했었지만, 실제로 이 판본을 접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이 영화는 어떤 측면에서 봐도, 그리고 어떤 판본으로 봐도 성공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다만 감독판에서는 벤더스가 그의 작업에서 요체가 되는 강박을 그것이 급기야 소진되기에 이르는 지점까지 밀고 가는 과정이 지치도록 오롯이 감지되기는 한다. 일찍이 철학자 질 들뢰즈는 이 벤더스적 강박을 간결하게 짚어낸 바 있다. 그것은 두 계열의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을 가지고 혼합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런 시도를 처음 제안한 이는 프란츠 카프카이다.) 두 계열의 한쪽에는 이동-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translation)의 수단들이 있는데, 바로 선박, 자동차, 기차, 비행기 등이다. 다른 한쪽에 있는 것은 표현-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expression)의 수단들로, 편지, 전화, 라디오 및 상상 가능한 모든 ‘인터폰’과 시네마토그래프 장치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두 계열의 혼합은 이동 수단 위에 표현 수단을 얹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기차 안의 전화, 배 위의 우편함, 비행기 안의 영화 등등.

아무래도 벤더스는 <이 세상 끝까지>를 촬영하기 전에 영화에 대한 들뢰즈의 저서를 읽은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그 책에서 자신에 대해 들뢰즈가 기술한 부분은 읽은 것 같다. 영화가 제작된 때를 기준으로 근미래인 1999년을 배경으로 삼은 이 영화는 들뢰즈가 카프카적 제안을 벤더스가 이어받은 것이라고 본 두 계열의 “상상 가능한” 온갖 혼합물들이 등장한다. 벤더스는 이 영화가 SF 장르에 속함을 구실 삼아 오늘날 우리에게는 익숙한 것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거나 상용화되지 않았던 장치들까지 마음껏 끌어들였다. 보트 위의 캠코더, 자동차 안의 캠코더, 버스 안의 캠코더, 자동차 안의 대시보드 모니터와 내비게이션 프로그램, 기차 안의 화상전화, 비행기 안의 개인 모니터… 그러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면 우주선에 탄 주인공이 지구의 친구들과 화상으로 그룹 통화를 하는 모습까지 보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 끝까지>의 인물들은 어쩐지 오늘날 유튜브의 ‘여행 크리에이터’들을 꼭 빼닮은 것 같기도 하다. 기묘한 것은, SF적 상상이 가미된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이 SF적 상상이 가미된 디자인과 더불어 화면에 들어오게 되자, <도시의 알리스>(1974)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1976) 같은 영화에서 그토록 멋지게 발휘되었던 벤더스의 능력이 사라져 버린다는 점이다. 커뮤니케이션 수단들과 그 혼합물들을 다루는 인간의 몸짓을 영화적으로 포착하는 능력 말이다.


사진 1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은 벤더스가 표현-커뮤니케이션 수단에 대한 상상을 밀고 나가 무언가를 보는 사람의 시지각 정보만이 아니라 두뇌 반응까지 동시에 기록하고 이를 맹인도 볼 수 있게 두뇌로 직접 전송하는 장치를 끌어들이면서다. 오늘날의 VR 기기와 의료용 MRI 기기를 접속한 형태에 가까운 이 장치는 나중에는 인간이 꾸는 꿈마저도 생화학적 정보로 기록해 재생하게끔 개량된다. 어쩌면 <이 세상 끝까지>에서 미적으로 흥미를 끄는 유일한 것은 글머리에서 언급한 바 새로운 매체의 디스플레이 화면을 영화적 스크린으로 수용했다는 점이겠다. 이 영화가 등장하는 꿈의 이미지들은 일종의 글리치 아트를 떠올리게 하는데, 영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이 회화적 이미지들은 초기 아날로그 HD 비디오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정작 저 미래적 장치를 다루는 인간의 몸짓은 그야말로 완전한 마비 상태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린다. 꿈을 기록하기 위해 취해야 할 몸짓은 그저 자는 것이다. 이렇게 기록된 자신의 꿈 이미지들에 매혹된 사람들은 꿈의 기록이 이루어지고 나면 동굴에 틀어박혀 그 이미지들이 재생되는 휴대용 소형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사진 1). 마치 오늘날의 우리가 애플리케이션들을 가로지르며 우리의 욕망이 연신 디스플레이되는 스마트폰 화면을 종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진 2


<이 세상 끝까지>에서 벤더스는 자신의 강박을 밀고 나가면 논리적으로 어떻게 귀결되는지를 보았다. 두 커뮤니케이션 계열의 혼합이란 각각의 계열이 아직 극단적이지 않을 때나 가능하다. 우리가 온갖 표현 수단들을 동원해 자기의 내면을 가시화하고 향유하는 일에만 몰두할 때 우리의 움직임은 중단된다. 벤더스는 이 영화를 치유의 이야기로 끝맺고 있지만, 언젠가 도래할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극단적 스펙터클과 결부된 몸짓을 구원하는 데는 실패한다. 그가 치유의 이동 수단으로 제시하는 것은 의미심장하게도 우주선이다. 우주선에서 화상으로 이루어지는 그룹 통화는 극단에 이른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에 어울리는 궁극의 혼합물인 걸까(사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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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더스가 그의 야심적인 실패작을 내놓은 지도 30여 년이 흐른 지금, 오늘날의 극단적 스펙터클 장치는 그가 상상했던 것만큼 번잡하지는 않다. 당신이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는 스마트폰을 보라. 그런데 이 기기를 조작하는 몸짓을 영화적으로 포착하는 일은 보기보다 쉽지 않다. 그래서 상당수의 영화 예술가들은 스마트폰을 가능한 화면에 보여주지 않으면서, 심지어 스마트폰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세계인 양 시침 뚝 떼고 영화를 만드는 편을 택하기도 한다. 이런 은폐와 배제는 때로 독특하게 매력적인 영화적 세계를 낳기도 한다.

홍상수의 <여행자의 필요>(2024)에는 스마트폰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상당히 부자연스럽다고 해야 할 정도인데 신기하게도 영화를 보는 동안 이 사실을 깨닫기는 쉽지 않다. 설령 자각하더라도 이내 잊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런 배제가 없었더라면 이 영화의 많은 장면은 지금과 다른 것이 되거나 아예 사라져야 했을 터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한국 사람들에게 프랑스어 개인 교습을 하는 이리스는 암기해야 할 문장을 굳이 그때그때 수첩에 펜으로 적어 건넨다. 그녀는 한국 남자 인국의 집에서 동거하고 있는데,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집에 불쑥 찾아와 곤란한 상황이 된다. 어머니가 돌아가고 나자 인국은 잠시 집을 나가 있던 이리스를 찾아 동네를 배회한다. 만일 홍상수가 등장인물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이리스는 수첩에 펜으로 문장을 적는 대신 문자나 메일로 보낼 것이고, 집에 들르겠다는 어머니의 문자나 전화를 받은 인국은 곤란한 상황을 미리 피할 수 있게 되고, 나중에 그는 이리스에게 이제 집에 돌아와도 좋다고 또 문자나 전화를 할 것이다. 이런저런 몸짓이 모두 스마트폰을 만지는 몸짓으로 통합되고, 어떤 사물들은 화면에서 사라지고, 배회의 장소들은 화면에 끼어들 틈이 없게 될 터다. 

홍상수의 영화적 세계는 스마트폰의 부재를 통해서만 가장 근사하게 활성화되는 그런 세계다. 물론 이 영화에 스마트폰이 아예 부재하지는 않는다. 이리스가 만난 사람들이 윤동주의 시 번역문을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찾아 그녀에게 건네는 장면들이 있다. 검색에 의존하지 않고 시를 곧바로 그 자리에서 번역해 말로 들려준다는 건 정말이지 너무 무리한 설정이라 생각했던 탓일까? 여하튼, 이렇게 해서 커뮤니케이션에 지연을 도입하는 시어(詩語)의 역량이 드러난다. 홍상수의 세계에 잠시 모습을 비춘 스마트폰 덕분에.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3)에서 하라사와 마을의 ‘심부름꾼(べんりや)’임을 자처하는 타쿠미는 하교 시간에 맞춰 외동딸인 하나를 데리러 가는 것을 깜빡하곤 한다. 그때마다 하나는 마을의 숲을 가로질러 혼자 귀가하곤 하는 것 같다. 대체 그는 학교 교사들에게 왜 미리 전화해두지 않는 것일까? 어느 날 하나가 실종되어 부랴부랴 찾아 나설 때도 그가 경찰서든 어디든 서둘러 전화해 알리는 모습 같은 것은 화면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 스마트폰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마을에 설립 예정인 글램핑장 설명회 차 도쿄에서 온 두 사람 중 하나인 마유즈미의 스마트폰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해 주기도 하고, 나중에 그들이 다시 마을로 찾아올 때 만날 장소의 위치를 그녀의 스마트폰으로 공유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쿠미의 스마트폰은 결코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스마트기기나 디지털 디스플레이가 화면에 보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그때마다 어김없이 부정성과 연관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마구치는 이것들을 좀 거북하게 느끼는 것 같다. 글램핑장 설립을 추진하는 플레이모드사(社)가 컨설턴트와 진행하는 치졸한 온라인 회의의 모니터 디스플레이, 이 회사의 두 직원인 마유즈미와 다카하시가 하라사와를 다시 찾을 때 자동차에 내비게이션용으로 거치해 둔 다카하시의 스마트폰에 뜨는 데이팅 앱의 알림(“축하드립니다! 모카 씨와의 매칭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을의 다혈질 청년이 플레이모드라는 회사가 어떤 곳인지를 검색해 저녁 식사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태블릿 PC의 디스플레이어 등등. 이런 것들을 다룰 때면 하마구치의 연출은 어색하고 불안정하다. 따라서, 긴 시간 동안 아무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일 없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객석에서 발언을 경청하고 있는 글램핑장 계획 설명회 장면만큼이나 하마구치의 영화적 세계가 어떤 부재 내지는 배제 위에 성립된 부자연스러운 세계인지 분명히 드러나는 곳도 없을 것이다. 그의 연출은 이런 상황에서 때로 비범한 힘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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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회나 회피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일까? 스마트폰을 자연스럽게 화면에 노출하면서도 그것을 다루는 몸짓을 단조롭지 않게 포착하고, 스마트폰 사용으로 인해 스크린에 나타날 가능성이 사라진 장소들을 어떻게든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이정홍의 장편 데뷔작 <괴인>(2023)에는 이 문제와 관련해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꺼내 들며, 이정홍은 종종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화면 자체를 스크린에 끌어들이기도 한다. 이런 부분의 연출에서 <괴인>에 유별나게 특이하거나 비범한 구석은 없다. 게다가 주인공 기홍이 방이나 벤치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릴 때면 어쩔 수 없이 몸짓의 마비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부자연스러운 장면에 속한다. 그런데 이 부자연스러움은 홍상수나 하마구치의 그것과는 다르다. 스마트폰의 부재가 아니라 존재로 인한 부자연스러움이기 때문이다. 

기홍이 그의 자동차 지붕을 찌그러뜨린 하나와 함께 카센터에 들렀을 때 그가 정비사와 함께 흡연구역으로 가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 여기에는 의자가 두 개 놓여 있고 둘은 거기에 앉는다. 이때 하나가 흡연구역으로 들어온다. 정비사는 담배 피우실 거냐며 자리를 내주려 하는데 하나는 자기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면서 계단 쪽에 가서 앉는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는 이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이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담배도 피우지 않는 하나가 대체 왜 흡연구역으로 와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부자연스러운 설정을 통해 이정홍은 스마트폰이 담배와 유사하게 다룰 수 있는 영화적 사물일 수 있음을, 흡연구역이 그것의 영화적 장소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스마트폰을 다루는 몸짓은 대부분 담배를 피우는 몸짓과 교환가능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디서나 담배를 피울 수 있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나갔지만, 스마트폰은 (적어도 아직은) 어디서나 만지작거릴 수 있으니까.

최근 국내 개봉된 영화들 가운데 스마트폰을 다루는 몸짓을 영화적으로 포착하는 문제와 관련해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미야케 쇼의 <와일드 투어>(2018)다. 이 영화는 스마트폰으로 찍은 영상을 직접 스크린에 수용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노라면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몸짓들도 피하지 않으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영화적으로 흥미롭게 재구성될 수 있을지 여러 사례들을 통해 보여준다. 그 가운데 하나를 떠올려보자. 문화센터의 바이오리서치 프로그램 조력자를 맡고 있는 남자 대학생이 중학생들과 산에 올라 답사하다가 혼자 스마트폰으로 주변을 촬영하고 있는데 나뭇가지에 버섯 같은 게 있다면서 다가와 앉는 여학생이 있다.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지퍼백을 하나 꺼내 건네주고 그녀가 나뭇가지에서 버섯을 따는 동안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얼마 후 여학생은 그에게 여자친구랑 문자질하냐고 물어보고, 그는 아니라고 하면서 추위를 느끼는지 입으로 손을 후후 불며 또 스마트폰을 보고, 그의 이런 모습을 여학생이 슬쩍 바라보고… 이런 사소한 말과 몸짓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 장면에선 가히 서부극적인 긴장감이 넘쳐난다.


사진 3
사진 4


이 긴장감이 실로 서부극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나중에 드러난다. 미야케는 짐짓 스마트폰이 스크린에 범람하는 것을 내버려 두는 척하면서 실은 스마트폰으로는 어쩐지 꺼림칙한 표현-커뮤니케이션의 순간을 찾아낸다. 그것은 바로 고백의 순간이다. 이 순간 스마트폰은 자취를 감춘다. 중학교 3학년인 타케가 그의 문화센터 프로그램 조력자인 대학생 우메에게 손편지를 써서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그녀는 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그리고 어색한 분위기를 털어내고자 뭔가 함께 마실 음료수를 사 오겠다고 말하며 타케의 왼쪽 팔을 살짝 만진 후에 자리를 떠난다. 그녀가 떠난 후 타케는 그녀가 만진 자리를 오른손으로 가볍게 만져 본다(사진 3).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야말로 기습적으로, 우리는 미야케가 여기서 존 포드의 무성영화 <단지 친구일 뿐(Just Pals)>(1920)의 한 장면을 영화의 제목과 더불어 은밀하게 불러내는 광경을 보게 된다. 이 영화에서 마을의 백수인 빔은 빌이라는 떠돌이 소년을 보살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여교사 메리가 빔을 찾아와 빌을 학교에 보내라고 권유한다. 그녀는 빔의 왼쪽 팔을 살짝 만진 후에 자리를 떠난다. 그녀가 떠난 후 빔은 그녀가 만진 자리를 오른손으로 가볍게 만져 본다(사진 4).

언젠가 고백의 순간마저도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해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으로 대체되는 날이 올까? 아니면 그런 날은 이미 와 있는데도 나만 모르고 있는 것일까? 고백의 순간마저도 그렇게 대체된다면 아무리 미야케라 해도 그런 세계를 사는 스마트휴먼의 몸짓과 장소를 영화적으로 포착하기는 정말이지 어려울 터다.


2024-07-04

폐허와 역사

 

※ 아래는 격월간 사진잡지 《보스토크》 43호와 44호에 실렸던 두 편의 글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왕빙의 사진 <이름 없는 남자>


엔데믹 이후 맞이하는 첫 신년을 기다리면서 왕빙의 데뷔작 <철서구>를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상영시간이 554분에 달하는 터라 자정 무렵부터 보기 시작해 1부(‘공장’)와 2부(‘얀펀 거리’)를 보고 눈을 좀 붙였다 일어나 점심을 먹고 3부(‘철로’)를 내처 보고 나니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 영화에 곧바로 이어서 보려고 준비해 둔 블루레이도 하나 있었지만 잠시 미루었다 몇 시간 뒤 자정 지나 신년에 보기로 했다.

<철서구>의 최종 편집본이 처음 발표된 해는 2003년이다. 2002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선보였던 5시간짜리 중간 편집본은 국내에서는 ‘틱시지구’라는 제목으로 같은 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나는 이 편집본을 복사한 비디오로 이 영화와 처음 만났다. ‘틱시지구’는 이 다큐멘터리의 주요 무대인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톄시구(铁西区)의 영어식 표기인 ‘Tiexi Qu’를 우리말로 어색하게 옮긴 듯한 제목이다. 그런가 하면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는 기묘하게도 최종 편집본에서 3부만을 따로 떼어 ‘티에시구(3): 철로’라는 제목으로 상영했었다. 서구에서는 ‘铁西’라는 한자를 ‘철로의 서쪽’으로 풀어 옮긴 ‘West of the Tracks’라는 제목이 통용되고 있다. 여하간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 이 영화는 ‘틱시지구’도 아니고 ‘티에시구’나 ‘톄시구’도 아닌 ‘철서구’라는 제목으로 익숙하게 불리고 있다.


<철서구>


집에서 볼 연말 영화로 굳이 이 다큐멘터리를 고른 것은 발표 20주년을 기념한다거나 하는 따위의 형식적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그런 기념은 시네마테크나 영화제의 몫이(지만 안타깝게도 종종 방기된)다. 3년 동안의 팬데믹은 정말이지 20세기가 흔적과 잔향으로서도 완전히 끝나버렸다고 느끼게 할 정도였지만 짜장 21세기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분명치 않았으며, 그래서 이번 연말에는 20세기적인 것의 소멸 과정과 잔존 양식을 생생히 구체적으로 담아낸 영화를 보면서 이것저것 생각해보고 싶었다. 이때, 중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공업지구였던 선양 톄시구의 해체 과정을 1999년 10월부터 2001년 4월까지 기록한 왕빙의 <철서구>는 세밑 종일의 영화로 더할 나위 없었다. 


폐허의 프롤레타리아


20세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을 무렵,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베이징에서 TV용 영상물들을 만들던 왕빙은 친구에게서 빌린 디지털카메라(아마추어 홈비디오용이라 할 3CCD 파나소닉 Mini-DV)를 들고 선양시로 향했다. 그에게 선양이 낯선 곳은 아니었다. 베이징전영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하기 전 그는 선양에 있는 루쉰미술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하며 거기서 3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졸업 후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온 그는 한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이제는 낙후되어 여러 국영기업이 도산하고 수많은 노동자를 해고하며 변화를 겪고 있는 톄시구를 구석구석 기록하며 2년을 보낸다. 그 와중에 새로운 밀레니엄이 도래한다.

톄시구는 제국주의 일본이 괴뢰국인 만주국을 설립한 직후인 1934년에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조성한 공업지구로, 선양시를 가로질러 이곳과 중국의 다른 지역을 잇는 화물 운송용 철로 또한 당시 일본에 의해 처음 놓인 것이다. 톄시구가 전성기를 맞은 것은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이후인 1980년대로, 문화혁명 시기에 농촌으로 하방되었던 이들이 돌아와 이곳의 공장들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급기야 지구 내 거주민 수가 한때 백만 명이 넘기도 했다. 톄시구의 노동자 거주 구역인 얀편 거리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 군수품 공장에서 일하러 온 이들이나 국공내전을 피해 도망쳐 온 이들이 모여 살면서 조성된 곳이었으나, 왕빙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미 재개발을 앞둔 터라 거주민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집들은 무너지면서 점점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퇴적물이 역사적으로 어지러이 교착된 톄시구라는 장소는 어떤 면에선 20세기 자체를 품은 대단히 중국적인 지층이다. 분명 왕빙의 관심은 이 장소의 역사적 지층 주변에서 맴돌지만, 그의 영화는 이곳과 관련된 어떤 역사적 기록물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톄시구에서 운행하는 열차를, 가까스로 운영 중인 제련 공장과 도금 공장과 판금 공장을, 얀펀 거리의 집들과 가게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닐 뿐이다. (몇 년 전 파리에서 열렸던 왕빙의 전시 제목이 ‘걸어 다니는 눈’이었던 것을 떠올려 본다.) 이렇다 할 촬영팀도 없이 혼자서 말이다. 공장과 열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얀펀 거리를 일없이 배회하는 청년들, 해고된 또는 퇴직한 노동자들, 이런저런 잡일을 하며 빌붙어 사는 넝마주이 등의 행위와 몸짓을, 그리고 그들이 토해내는 이야기를 왕빙은 별다른 장비 없이 비디오카메라와 거기 내장된 마이크로 담아냈다. 이렇게 기록된 것들을 아홉 시간이 넘는 분량으로 편집하면서, 그는 장소가 일종의 인물처럼 비치고 인간성이 장소성과 불가분하게 얽히는 지점까지 밀고 나간다.

 <철서구>를 관장하는 장소의 생물학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영화가 자본주의 도입 이후 동시대의 다른 중국영화들이 여간해선 진입하지 못했던 영역에 발을 들이게 한다. 중국인의 삶에 구체적으로 천착하면서도 종족적 형상으로 쉬이 응집되지 않는 진정 계급적인 형상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어떻게 종족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프롤레타리아의 보편적 존재 증명이 될 수 있는지의 문제다. 『공산당 선언』 말미에 등장하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호명, 여기서 독일어로 ‘aller Länder’에 해당하는 ‘만국의’라는 표현은 모든 대지와 모든 나라에 동시에 속하면서 결코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지극히 제한된 대지에 머물면서도 모든 나라를 (초월하지 않고) 가로지르며 솟아오르는 프롤레타리아의 형상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소비에트 시기 러시아영화는 에이젠슈테인이나 베르토프의 작업을 통해 주저 없이 이 문제로 돌진했던 반면, 중국영화는 <황토지>(1984)의 천카이거나 <붉은 수수밭>(1988)의 장이머우에 이르기까지도 농민-대지-중국의 강고한 결속을 이어갔다. <소무>(1997)의 지아장커로 대표되는 1990년대 이후 등장한 독립영화 감독들은 농민을 인민으로 확장하고 대지를 도시로 연장하면서도 중국이라는 항을 만국적 보편성으로 가로지르는 일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철서구>에서 왕빙은 톄시구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급기야 한 퇴직 노동자의 입에서 나온 다음과 같은 놀라운 발언을 포착하기에 이른다. 이 노동자는 중국인으로서는 무척이나 수치스러운 존재일지 모르지만 더할 나위 없이 계급적인 존재로서 명확히 자기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 프롤레타리아적이다.


나한텐 해고당한 아들이 셋이고 해고당한 며느리가 둘이야. 걔들이 다니던 공장들은 다 파산했어. (…) 난 열여섯 살 때 여기로 왔는데 올해 일흔셋이야. 원래는 허베이성 출신이지. 전쟁 때문에 고향을 떠났어. 일본인들이 일찌감치 그 지역을 점령해서 손에 닿는 사람이면 아무나 징집하고 있었거든. 여기는 훨씬 안전했어. 난 이리로 도망쳐 와서 일본 공장에서 일했어.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




<철서구>


주지하다시피, 공장과 철로는 영화의 기원과 맞닿아 있는 소재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초기 영화들 가운데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1895)은 대중적으로 상영된 최초의 영화로 알려져 있고 <열차의 도착>(1896)은 진정 현대의 신화라고 해도 좋을 위치에 있는 작품이다. 왕빙의 영화 도입부는 톄시구의 공장들 사이로 지나가는 열차의 맨 앞에서 찍은 쇼트들로 이루어져 있다. 뤼미에르의 영화와는 달리,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도, 공장에서 나오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인민의 형상을 대신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은 길게 이어진 철로, 그리고 그 양옆에 늘어선 휑한 건물들과 벽들의 거무튀튀한 형상뿐이다. 사방이 온통 눈으로 뒤덮인 이곳은 분명 중국의 한 특정한 장소이지만 따로 주어진 정보가 없다면 그 특정성을 감지하기란 쉽지 않다. 열차 맨 앞에서 왕빙이 들고 있는 카메라 렌즈에 이따금 눈이 날아와 달라붙는다. 

이처럼 그는 영화의 기원을 불러들이면서 그것을 지우고,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꿈이 어지러이 교착된 중국의 구체적 장소를 관통하면서 인민을 지우고 대지를 지우고 국가를 지운다. 하지만 거기 남는 것은 공백이 아니라 폐허다. 공백과는 달리 폐허에는 여전히 흔적과 잔향이 있다. <철서구>에서, 그리고 이후 이어진 여러 작업에서 왕빙은 20세기의 폐허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형상을 탐색하는 일에 천착한다. 다만 그 형상은 지금 당장은 역사 바깥에 있다. 이를 “근원적 절제”라고 부르는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어떤 폐허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에 오롯이 집중한 왕빙의 <이름 없는 남자>(2009)가 “물론 중국의 민중들일 테지만, 분명 그것을 넘어서는” 민중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본다(『민중들의 이미지』, 여문주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3).

그런데 이러한 탐색이 여전히 유효할까? 이름 없는 프롤레타리아는 어떻게 호명(이름 부르기)할 수 있을까? 엔데믹 이후 맞이하는 첫 신년을 기다리며 오랜만에 다시 본 <철서구>는 이런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어느새 자정이 지나 신년이다. 감상을 잠시 미뤄두었던 블루레이 디스크를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뤼미에르 형제와 그들의 촬영기사들이 세계 곳곳에서 이름 없는 존재들을 찍은 영화들이 모니터에서 빛난다. 


역사를 노래하는 부기우기


왕빙의 <철서구>가 처음 공개되고 나서 1년여가 지난 2004년 6월, 칼아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영화를 만들어온 미국 영화작가 제임스 베닝은 1975년에 손에 넣은 후 30년 가까이 써 온 볼렉스 16mm EBM 카메라를 들고 고향인 위스콘신주 밀워키로 향한다. 27년 전에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 <원 웨이 부기우기>에 나오는 장소들을 찾아가 카메라를 그때 그 자리에 정확히 다시 세우고 모든 쇼트를 다시 촬영할 계획이었다. 

1970년대 후반이면 주로 철강업과 광산업으로 한때 호황을 누렸던 밀워키가 침체기로 접어들던 무렵이다. 베닝이 이 영화를 촬영한 이듬해인 1978년부터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밀워키 같은 도시의 성장을 이끌었던 산업은 이후 점차 중국 경제를 견인하는 자리로 이동하게 될 터였다. 공장들은 빠져나가고 가축 사육장은 거의 문을 닫은 밀워키의 공업지구에서 베닝은 “그곳의 쇠퇴를 기록하고자 했다”. 영화의 기원과 맞닿아 있는 두 가지 소재, 즉 공장과 철로는 세기 전환기에 촬영된 왕빙의 영화와 1977년에 촬영된 베닝의 영화를 공평하게 가로지르는 몰락의 기호이기도 하다.


<원 웨이 부기우기>(위)와 <27년 후>(아래)


<원 웨이 부기우기>는 각각 1분 길이의 쇼트 60개로 이루어진 영화인 만큼, 거기에 새로 ‘리메이크’한 것을 이어서 덧붙이면 꼭 2시간짜리 영화가 될 것이었다. 다만 새로 촬영한 60개의 쇼트에도 사운드트랙은 27년 전의 것을 그대로 입힐 계획이었다. 예전에 각각의 쇼트에 모습을 비췄던 베닝의 가족과 친구들이 이번에도 그대로 나올 것이지만, 그 사이에 세상을 떠서 출연할 수 없는 경우에는 대체할 사람을 찾는 대신 그의 부재를 그대로 드러낼 작정이었다. 풍경이 완전히 바뀐 경우에도 유사한 풍경을 찾는 대신 예전의 그 자리에 놓인 카메라에 포착된바 지금 그대로를 보여줄 터였다. <27년 후>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런데 ‘다큐멘터리적’인 왕빙의 영화와 달리 ‘구조적’인 베닝의 영화는 우리가 흔히 역사라고 부르는 것과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인다. 역사란 무엇인가? 그것을 사실이나 사건, 정보나 이야기 등의 체계적 집적으로 간주한다면 베닝의 영화는 역사와는 아예 무관하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27년의 차이를 철저히 공백으로 두고 병치된 이중적 구성물을 보면서 이것이 기억과 시간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밀워키 태생으로 이 도시가 호황을 누리던 시절 거기서 유년기를 보냈던 베닝 자신의 개인적 기억 같은 것은 영화에 없다. 여기서 기억이란 이 영화의 구조에 호기심을 느낀 관객이 저마다 마음에 나름의 방식으로 그려가는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무늬일 터다. 

하지만 나는 베닝의 영화에 대해 말하면서 기억이나 시간보다는 역사라는 단어를 사용하길 고집하겠다. 그 이유는 우선 그것이 낡고 고리타분하며 볼품없고 거추장스러운 단어, 즉 우리의 일상적 어휘 목록에서 사라져가는 다분히 ‘인간적’ 흔적을 간직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이나 시간 개념을 얼마든지 비인격적으로 고찰할 수 있지만 역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더불어, 베닝의 영화는 역사 개념을 지나치게 크고 넓고 보편적이고 포괄적이며 대의에 사로잡힌 과대망상증적 용법에서 해방시켜 그것이 영화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고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때 영화와 역사에 대한 물음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형태를 띠게 된다. (이미지라는 개념을 작게는 하나의 쇼트에서 크게는 한 편의 영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때) 역사는 이미지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미지 사이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가? 그렇게 출현한 역사는 얼마나 지속되는가? 역사영화의 진정한 작가로서의 제임스 베닝, 얼마나 근사한가!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기술적 이미지와 역사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고찰한 선구자들 가운데 하나다. 미국에서 지낸 말년에 쓴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12)에서, 그는 역사적 현실과 사진적 현실은 모두 정해진 탐구 방법이 없음을 지적하며 사진을 통해 우리는 “사물을 넘어서는 사유가 아닌 사물을 관통하는 사유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외부 세계의 찰나적 현상을 망각에서 구원하는 사진의 능력에 빗대어 역사 개념을 재고해본다. 그가 역사 개념을 이른바 역사주의라 불리는 과대망상증적 용법에서 해방할 가능성을 숙고하는 것은 바로 사진을 통해서다. 

분명 그의 역사 개념에는 대단히 유연한 데가 있다. 그렇지만 무차별적으로 카메라 앞에 놓인 모든 대상을 받아들여 기록하는 기술적 이미지의 특성(발터 벤야민이 광학적 무의식이라고 부른 특성)에 크라카우어는 어쩐지 불편하고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사진이 제시하는 “모든 경험 연관에서 떨어져 나온 (…) 대상의 불친절한 추상”(「사진 속 베를린」)에, 카메라 앞에서 벌어진 모든 현상들을 모조리 담아내는 사진의 “공허한 공간”(「사진」)에 의혹을 품곤 했던 독일 시절의 그가 말년의 글 어딘가에도 여전히 잠복해 있는 것 같다. 사실 그는 구원의 역량이 사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몫이라고 보았던 것은 아닐까? 사유가 관통하지 않은 사진은 의미화되지 않은, 즉 역사화되지 않은 사물들로 가득한 공허한 공간으로 남지 않겠는가? 크라카우어의 역사에는 어딘가 주지주의적인 기미가 있다.


<오페라의 밤>


선집 『과거의 문턱: 사진에 관한 에세이』(김남시 옮김, 열화당, 2022)에는 독일 시절의 크라카우어가 1920~30년대에 쓴 사진에 관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가 사진에 느낀 불안을 고스란히 노출한 구절들을 읽고 있노라면, 내겐 막스 형제(그루초, 하포, 치코)의 영화 <오페라의 밤>(1935)의 유명한 선실 장면이 떠오른다. 밀항자들, 룸메이드들, 난방 기술자들, 네일리스트, 전화를 쓰러 온 승객, 대걸레질을 하러 온 청소부, 그리고 음식을 가져온 승무원들이 차례로 선실에 들어와 뒤섞이면서 초래된 대혼란의 장면 말이다. 이처럼 영화적 장소가 공허한 축적물이 되는 순간만큼이나 크라카우어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없을 터다. 하지만 그는 ‘여하튼’ 혹은 ‘기어이’ 그것을 긍정한다. 어떻게? 바로 역설을 통해서다. 『영화의 이론』(김태환・이경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4)에서 그는 “이 영화에서 막스 형제는 주어진 우주의 결속 관계를 과격하게 파괴함으로써 역으로 그것을 증명한다”고 썼다. 무언가가 파괴된다는 것은 바로 그 무언가가 있다는 증거라는 식이다. 여기서 ‘주어진 우주의 결속 관계’라는 표현을 ‘역사’로 바꿔 읽어보면 크라카우어의 문장에 잠복해 있는 불안이 더 잘 감지된다.

막스 형제의 영화에는 사진과 영화의 파편적 특성에서 실재나 역사나 우주를 감지하고자 하는 크라카우어의 역설적 정신이 없다. 그들은 사물을 넘어서려 하지도 않고 관통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사물과 함께 뒹군다. 이렇게 해서 막스 형제는 앞서 제시한 물음을 한층 과격하게 바꾼다. 이처럼 사물화한 이미지 내에서(도), 그리고 사이에서(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면 역사란 대체 무엇인가요? 그렇게 발생한 역사가 꼭 지속될 필요가 있나요? 유머가 없는 역사가 무슨 소용인가요? 

히틀러가 집권하자 크라카우어가 망명길에 오른 1933년, 하포는 소비에트 러시아 투어 공연 후 (미국 정부에 건넬 기밀문서를 품에 넣고) 유럽을 거쳐 오는 동안 독일을 휩쓸고 있는 반유대주의의 부상을 목격했다. 그해에 개봉된 걸작 <오리 수프>에서 그루초는 전쟁마저도 그 특유의 화법으로 사물화해 버린다. 그의 발언은 니힐리즘의 극에 달한 유머로서의 역사 개념과 맞닿아 있다. “전쟁 계획은 이래요. 그건 당신 목숨만큼 값진 거죠. 너무 싸게 대하면 안 되죠. 그건 새끼들을 돌보는 고양이처럼 돌봐야 해요. 새끼 고양이 들어봤어요? 물론 아니겠죠. 브리지 게임을 하느라 바쁘니까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어요? 사랑해요.”


<원 웨이 부기우기>(위)와 <27년 후>(아래)


크라카우어의 주지주의적 역설과 막스 형제의 니힐리즘적 유머 사이에서 베닝의 영화와 역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자. 베닝의 쇼트는 막스 형제의 그것만큼이나 유머러스하고 무의미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니힐리즘적이지는 않다. <원 웨이 부기우기>를 이루는 60개의 쇼트는 순차적으로 전개되어 전체적으로 어떤 내러티브를 구성하거나 암시하지도 않는다. 베닝은 쇼트 각각이 “1분짜리 내러티브”라고 말했다. 다만 매 쇼트를 꼭 1분 동안 촬영했다는 뜻은 아니다. 촬영분을 중간중간 조금씩 잘라내고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점프컷’으로 이어 붙여 만든 쇼트도 있으니 말이다. 매 쇼트에 소리(음향, 음성, 음악 등)가 있지만 그것이 해당 쇼트를 촬영하는 동안 실제로 녹음한 것인지는 종종 확실치 않다. 그저 풍경만 보이기도 하고, 사람이나 동물이 등장하기도 하고, 자동차나 트럭이나 기차가 멈춰 있거나 지나가기도 하지만 통상적 의미에서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숨김없이 분명하게 조율된 베닝의 쇼트가 크라카우어를 불안케 하는 과적된 공허함으로 향하는 경우는 없다. 나란히 선 쌍둥이가 전화와 기적 소리에 맞춰 음료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동작을 반복하고, 손발은 뒤로 묶이고 입에는 재갈이 물린 한 사람이 텅 빈 거리에서 뒹굴고 있을 때, 돌연 모종의 수수께끼가 저 쇠락해가는 도시에 내러티브화되지 않은 역사의 감각을 불러오니 말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건 망설임 가운데서 어떻게든 영화를 긍정하려 했던 크라카우어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모든 영역에서 결단적 대결을 불러내야 한다. 이것이 모든 판돈을 건 역사 과정의 도박이다. 자연의 이미지는 그 요소들로 분해된 의식이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내맡겨진다. 그 요소들의 근원적 질서는 사라진 지 오래다. (…) 따라서 의식에는, 자연의 올바른 질서에 대한 예감을 일깨우는 건 아니더라도, 모든 주어진 배열의 임시성을 증명하는 임무가 맡겨진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는 해방된 의식이 이 의무를 수행한다. 그 의식은 자연적 현실을 산산조각내고 부서진 조각들을 서로 바꾸어 놓는다. 사진에 반영되는 이 잔여물의 무질서는 자연요소들 사이의 익숙한 모든 관계를 지양함으로써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그를 수행하는 것이 영화의 가능성 중 하나다. 영화는 잘라낸 부분들을 낯선 형성물로 연결할 때마다 그 가능성을 실현한다. (「사진」 중에서)


크라카우어 식으로 말하자면, <원 웨이 부기우기>에서 베닝이 수행한 작업은 쇼트의 익숙한 연결을 지양하면서 낯선 형성물을 만들어내는 대항-역사(주의)적 전략이겠다. 그처럼 낯선 것이 어느덧 익숙한 것이 되었을 때, 또 다른 부기우기가 시작된다. 물론 이는 <27년 후>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베닝과 왕빙의 영화를 함께, 그리고 또 다른 무수한 영화들을 끊임없이 거듭해서 낯선 연결 속에 두어야 하는 임무를 띤 우리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