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04

폐허와 역사

 

※ 아래는 격월간 사진잡지 《보스토크》 43호와 44호에 실렸던 두 편의 글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왕빙의 사진 <이름 없는 남자>


엔데믹 이후 맞이하는 첫 신년을 기다리면서 왕빙의 데뷔작 <철서구>를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상영시간이 554분에 달하는 터라 자정 무렵부터 보기 시작해 1부(‘공장’)와 2부(‘얀펀 거리’)를 보고 눈을 좀 붙였다 일어나 점심을 먹고 3부(‘철로’)를 내처 보고 나니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 영화에 곧바로 이어서 보려고 준비해 둔 블루레이도 하나 있었지만 잠시 미루었다 몇 시간 뒤 자정 지나 신년에 보기로 했다.

<철서구>의 최종 편집본이 처음 발표된 해는 2003년이다. 2002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선보였던 5시간짜리 중간 편집본은 국내에서는 ‘틱시지구’라는 제목으로 같은 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나는 이 편집본을 복사한 비디오로 이 영화와 처음 만났다. ‘틱시지구’는 이 다큐멘터리의 주요 무대인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톄시구(铁西区)의 영어식 표기인 ‘Tiexi Qu’를 우리말로 어색하게 옮긴 듯한 제목이다. 그런가 하면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는 기묘하게도 최종 편집본에서 3부만을 따로 떼어 ‘티에시구(3): 철로’라는 제목으로 상영했었다. 서구에서는 ‘铁西’라는 한자를 ‘철로의 서쪽’으로 풀어 옮긴 ‘West of the Tracks’라는 제목이 통용되고 있다. 여하간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 이 영화는 ‘틱시지구’도 아니고 ‘티에시구’나 ‘톄시구’도 아닌 ‘철서구’라는 제목으로 익숙하게 불리고 있다.


<철서구>


집에서 볼 연말 영화로 굳이 이 다큐멘터리를 고른 것은 발표 20주년을 기념한다거나 하는 따위의 형식적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그런 기념은 시네마테크나 영화제의 몫이(지만 안타깝게도 종종 방기된)다. 3년 동안의 팬데믹은 정말이지 20세기가 흔적과 잔향으로서도 완전히 끝나버렸다고 느끼게 할 정도였지만 짜장 21세기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분명치 않았으며, 그래서 이번 연말에는 20세기적인 것의 소멸 과정과 잔존 양식을 생생히 구체적으로 담아낸 영화를 보면서 이것저것 생각해보고 싶었다. 이때, 중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공업지구였던 선양 톄시구의 해체 과정을 1999년 10월부터 2001년 4월까지 기록한 왕빙의 <철서구>는 세밑 종일의 영화로 더할 나위 없었다. 


폐허의 프롤레타리아


20세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을 무렵,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베이징에서 TV용 영상물들을 만들던 왕빙은 친구에게서 빌린 디지털카메라(아마추어 홈비디오용이라 할 3CCD 파나소닉 Mini-DV)를 들고 선양시로 향했다. 그에게 선양이 낯선 곳은 아니었다. 베이징전영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하기 전 그는 선양에 있는 루쉰미술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하며 거기서 3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졸업 후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온 그는 한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이제는 낙후되어 여러 국영기업이 도산하고 수많은 노동자를 해고하며 변화를 겪고 있는 톄시구를 구석구석 기록하며 2년을 보낸다. 그 와중에 새로운 밀레니엄이 도래한다.

톄시구는 제국주의 일본이 괴뢰국인 만주국을 설립한 직후인 1934년에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조성한 공업지구로, 선양시를 가로질러 이곳과 중국의 다른 지역을 잇는 화물 운송용 철로 또한 당시 일본에 의해 처음 놓인 것이다. 톄시구가 전성기를 맞은 것은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이후인 1980년대로, 문화혁명 시기에 농촌으로 하방되었던 이들이 돌아와 이곳의 공장들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급기야 지구 내 거주민 수가 한때 백만 명이 넘기도 했다. 톄시구의 노동자 거주 구역인 얀편 거리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 군수품 공장에서 일하러 온 이들이나 국공내전을 피해 도망쳐 온 이들이 모여 살면서 조성된 곳이었으나, 왕빙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미 재개발을 앞둔 터라 거주민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집들은 무너지면서 점점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퇴적물이 역사적으로 어지러이 교착된 톄시구라는 장소는 어떤 면에선 20세기 자체를 품은 대단히 중국적인 지층이다. 분명 왕빙의 관심은 이 장소의 역사적 지층 주변에서 맴돌지만, 그의 영화는 이곳과 관련된 어떤 역사적 기록물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톄시구에서 운행하는 열차를, 가까스로 운영 중인 제련 공장과 도금 공장과 판금 공장을, 얀펀 거리의 집들과 가게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닐 뿐이다. (몇 년 전 파리에서 열렸던 왕빙의 전시 제목이 ‘걸어 다니는 눈’이었던 것을 떠올려 본다.) 이렇다 할 촬영팀도 없이 혼자서 말이다. 공장과 열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얀펀 거리를 일없이 배회하는 청년들, 해고된 또는 퇴직한 노동자들, 이런저런 잡일을 하며 빌붙어 사는 넝마주이 등의 행위와 몸짓을, 그리고 그들이 토해내는 이야기를 왕빙은 별다른 장비 없이 비디오카메라와 거기 내장된 마이크로 담아냈다. 이렇게 기록된 것들을 아홉 시간이 넘는 분량으로 편집하면서, 그는 장소가 일종의 인물처럼 비치고 인간성이 장소성과 불가분하게 얽히는 지점까지 밀고 나간다.

 <철서구>를 관장하는 장소의 생물학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영화가 자본주의 도입 이후 동시대의 다른 중국영화들이 여간해선 진입하지 못했던 영역에 발을 들이게 한다. 중국인의 삶에 구체적으로 천착하면서도 종족적 형상으로 쉬이 응집되지 않는 진정 계급적인 형상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어떻게 종족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프롤레타리아의 보편적 존재 증명이 될 수 있는지의 문제다. 『공산당 선언』 말미에 등장하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호명, 여기서 독일어로 ‘aller Länder’에 해당하는 ‘만국의’라는 표현은 모든 대지와 모든 나라에 동시에 속하면서 결코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지극히 제한된 대지에 머물면서도 모든 나라를 (초월하지 않고) 가로지르며 솟아오르는 프롤레타리아의 형상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소비에트 시기 러시아영화는 에이젠슈테인이나 베르토프의 작업을 통해 주저 없이 이 문제로 돌진했던 반면, 중국영화는 <황토지>(1984)의 천카이거나 <붉은 수수밭>(1988)의 장이머우에 이르기까지도 농민-대지-중국의 강고한 결속을 이어갔다. <소무>(1997)의 지아장커로 대표되는 1990년대 이후 등장한 독립영화 감독들은 농민을 인민으로 확장하고 대지를 도시로 연장하면서도 중국이라는 항을 만국적 보편성으로 가로지르는 일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철서구>에서 왕빙은 톄시구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급기야 한 퇴직 노동자의 입에서 나온 다음과 같은 놀라운 발언을 포착하기에 이른다. 이 노동자는 중국인으로서는 무척이나 수치스러운 존재일지 모르지만 더할 나위 없이 계급적인 존재로서 명확히 자기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 프롤레타리아적이다.


나한텐 해고당한 아들이 셋이고 해고당한 며느리가 둘이야. 걔들이 다니던 공장들은 다 파산했어. (…) 난 열여섯 살 때 여기로 왔는데 올해 일흔셋이야. 원래는 허베이성 출신이지. 전쟁 때문에 고향을 떠났어. 일본인들이 일찌감치 그 지역을 점령해서 손에 닿는 사람이면 아무나 징집하고 있었거든. 여기는 훨씬 안전했어. 난 이리로 도망쳐 와서 일본 공장에서 일했어.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




<철서구>


주지하다시피, 공장과 철로는 영화의 기원과 맞닿아 있는 소재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초기 영화들 가운데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1895)은 대중적으로 상영된 최초의 영화로 알려져 있고 <열차의 도착>(1896)은 진정 현대의 신화라고 해도 좋을 위치에 있는 작품이다. 왕빙의 영화 도입부는 톄시구의 공장들 사이로 지나가는 열차의 맨 앞에서 찍은 쇼트들로 이루어져 있다. 뤼미에르의 영화와는 달리,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도, 공장에서 나오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인민의 형상을 대신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은 길게 이어진 철로, 그리고 그 양옆에 늘어선 휑한 건물들과 벽들의 거무튀튀한 형상뿐이다. 사방이 온통 눈으로 뒤덮인 이곳은 분명 중국의 한 특정한 장소이지만 따로 주어진 정보가 없다면 그 특정성을 감지하기란 쉽지 않다. 열차 맨 앞에서 왕빙이 들고 있는 카메라 렌즈에 이따금 눈이 날아와 달라붙는다. 

이처럼 그는 영화의 기원을 불러들이면서 그것을 지우고,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꿈이 어지러이 교착된 중국의 구체적 장소를 관통하면서 인민을 지우고 대지를 지우고 국가를 지운다. 하지만 거기 남는 것은 공백이 아니라 폐허다. 공백과는 달리 폐허에는 여전히 흔적과 잔향이 있다. <철서구>에서, 그리고 이후 이어진 여러 작업에서 왕빙은 20세기의 폐허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형상을 탐색하는 일에 천착한다. 다만 그 형상은 지금 당장은 역사 바깥에 있다. 이를 “근원적 절제”라고 부르는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어떤 폐허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에 오롯이 집중한 왕빙의 <이름 없는 남자>(2009)가 “물론 중국의 민중들일 테지만, 분명 그것을 넘어서는” 민중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본다(『민중들의 이미지』, 여문주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3).

그런데 이러한 탐색이 여전히 유효할까? 이름 없는 프롤레타리아는 어떻게 호명(이름 부르기)할 수 있을까? 엔데믹 이후 맞이하는 첫 신년을 기다리며 오랜만에 다시 본 <철서구>는 이런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어느새 자정이 지나 신년이다. 감상을 잠시 미뤄두었던 블루레이 디스크를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뤼미에르 형제와 그들의 촬영기사들이 세계 곳곳에서 이름 없는 존재들을 찍은 영화들이 모니터에서 빛난다. 


역사를 노래하는 부기우기


왕빙의 <철서구>가 처음 공개되고 나서 1년여가 지난 2004년 6월, 칼아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영화를 만들어온 미국 영화작가 제임스 베닝은 1975년에 손에 넣은 후 30년 가까이 써 온 볼렉스 16mm EBM 카메라를 들고 고향인 위스콘신주 밀워키로 향한다. 27년 전에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 <원 웨이 부기우기>에 나오는 장소들을 찾아가 카메라를 그때 그 자리에 정확히 다시 세우고 모든 쇼트를 다시 촬영할 계획이었다. 

1970년대 후반이면 주로 철강업과 광산업으로 한때 호황을 누렸던 밀워키가 침체기로 접어들던 무렵이다. 베닝이 이 영화를 촬영한 이듬해인 1978년부터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밀워키 같은 도시의 성장을 이끌었던 산업은 이후 점차 중국 경제를 견인하는 자리로 이동하게 될 터였다. 공장들은 빠져나가고 가축 사육장은 거의 문을 닫은 밀워키의 공업지구에서 베닝은 “그곳의 쇠퇴를 기록하고자 했다”. 영화의 기원과 맞닿아 있는 두 가지 소재, 즉 공장과 철로는 세기 전환기에 촬영된 왕빙의 영화와 1977년에 촬영된 베닝의 영화를 공평하게 가로지르는 몰락의 기호이기도 하다.


<원 웨이 부기우기>(위)와 <27년 후>(아래)


<원 웨이 부기우기>는 각각 1분 길이의 쇼트 60개로 이루어진 영화인 만큼, 거기에 새로 ‘리메이크’한 것을 이어서 덧붙이면 꼭 2시간짜리 영화가 될 것이었다. 다만 새로 촬영한 60개의 쇼트에도 사운드트랙은 27년 전의 것을 그대로 입힐 계획이었다. 예전에 각각의 쇼트에 모습을 비췄던 베닝의 가족과 친구들이 이번에도 그대로 나올 것이지만, 그 사이에 세상을 떠서 출연할 수 없는 경우에는 대체할 사람을 찾는 대신 그의 부재를 그대로 드러낼 작정이었다. 풍경이 완전히 바뀐 경우에도 유사한 풍경을 찾는 대신 예전의 그 자리에 놓인 카메라에 포착된바 지금 그대로를 보여줄 터였다. <27년 후>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런데 ‘다큐멘터리적’인 왕빙의 영화와 달리 ‘구조적’인 베닝의 영화는 우리가 흔히 역사라고 부르는 것과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인다. 역사란 무엇인가? 그것을 사실이나 사건, 정보나 이야기 등의 체계적 집적으로 간주한다면 베닝의 영화는 역사와는 아예 무관하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27년의 차이를 철저히 공백으로 두고 병치된 이중적 구성물을 보면서 이것이 기억과 시간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밀워키 태생으로 이 도시가 호황을 누리던 시절 거기서 유년기를 보냈던 베닝 자신의 개인적 기억 같은 것은 영화에 없다. 여기서 기억이란 이 영화의 구조에 호기심을 느낀 관객이 저마다 마음에 나름의 방식으로 그려가는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무늬일 터다. 

하지만 나는 베닝의 영화에 대해 말하면서 기억이나 시간보다는 역사라는 단어를 사용하길 고집하겠다. 그 이유는 우선 그것이 낡고 고리타분하며 볼품없고 거추장스러운 단어, 즉 우리의 일상적 어휘 목록에서 사라져가는 다분히 ‘인간적’ 흔적을 간직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이나 시간 개념을 얼마든지 비인격적으로 고찰할 수 있지만 역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더불어, 베닝의 영화는 역사 개념을 지나치게 크고 넓고 보편적이고 포괄적이며 대의에 사로잡힌 과대망상증적 용법에서 해방시켜 그것이 영화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고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때 영화와 역사에 대한 물음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형태를 띠게 된다. (이미지라는 개념을 작게는 하나의 쇼트에서 크게는 한 편의 영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때) 역사는 이미지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미지 사이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가? 그렇게 출현한 역사는 얼마나 지속되는가? 역사영화의 진정한 작가로서의 제임스 베닝, 얼마나 근사한가!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기술적 이미지와 역사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고찰한 선구자들 가운데 하나다. 미국에서 지낸 말년에 쓴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12)에서, 그는 역사적 현실과 사진적 현실은 모두 정해진 탐구 방법이 없음을 지적하며 사진을 통해 우리는 “사물을 넘어서는 사유가 아닌 사물을 관통하는 사유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외부 세계의 찰나적 현상을 망각에서 구원하는 사진의 능력에 빗대어 역사 개념을 재고해본다. 그가 역사 개념을 이른바 역사주의라 불리는 과대망상증적 용법에서 해방할 가능성을 숙고하는 것은 바로 사진을 통해서다. 

분명 그의 역사 개념에는 대단히 유연한 데가 있다. 그렇지만 무차별적으로 카메라 앞에 놓인 모든 대상을 받아들여 기록하는 기술적 이미지의 특성(발터 벤야민이 광학적 무의식이라고 부른 특성)에 크라카우어는 어쩐지 불편하고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사진이 제시하는 “모든 경험 연관에서 떨어져 나온 (…) 대상의 불친절한 추상”(「사진 속 베를린」)에, 카메라 앞에서 벌어진 모든 현상들을 모조리 담아내는 사진의 “공허한 공간”(「사진」)에 의혹을 품곤 했던 독일 시절의 그가 말년의 글 어딘가에도 여전히 잠복해 있는 것 같다. 사실 그는 구원의 역량이 사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몫이라고 보았던 것은 아닐까? 사유가 관통하지 않은 사진은 의미화되지 않은, 즉 역사화되지 않은 사물들로 가득한 공허한 공간으로 남지 않겠는가? 크라카우어의 역사에는 어딘가 주지주의적인 기미가 있다.


<오페라의 밤>


선집 『과거의 문턱: 사진에 관한 에세이』(김남시 옮김, 열화당, 2022)에는 독일 시절의 크라카우어가 1920~30년대에 쓴 사진에 관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가 사진에 느낀 불안을 고스란히 노출한 구절들을 읽고 있노라면, 내겐 막스 형제(그루초, 하포, 치코)의 영화 <오페라의 밤>(1935)의 유명한 선실 장면이 떠오른다. 밀항자들, 룸메이드들, 난방 기술자들, 네일리스트, 전화를 쓰러 온 승객, 대걸레질을 하러 온 청소부, 그리고 음식을 가져온 승무원들이 차례로 선실에 들어와 뒤섞이면서 초래된 대혼란의 장면 말이다. 이처럼 영화적 장소가 공허한 축적물이 되는 순간만큼이나 크라카우어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없을 터다. 하지만 그는 ‘여하튼’ 혹은 ‘기어이’ 그것을 긍정한다. 어떻게? 바로 역설을 통해서다. 『영화의 이론』(김태환・이경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4)에서 그는 “이 영화에서 막스 형제는 주어진 우주의 결속 관계를 과격하게 파괴함으로써 역으로 그것을 증명한다”고 썼다. 무언가가 파괴된다는 것은 바로 그 무언가가 있다는 증거라는 식이다. 여기서 ‘주어진 우주의 결속 관계’라는 표현을 ‘역사’로 바꿔 읽어보면 크라카우어의 문장에 잠복해 있는 불안이 더 잘 감지된다.

막스 형제의 영화에는 사진과 영화의 파편적 특성에서 실재나 역사나 우주를 감지하고자 하는 크라카우어의 역설적 정신이 없다. 그들은 사물을 넘어서려 하지도 않고 관통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사물과 함께 뒹군다. 이렇게 해서 막스 형제는 앞서 제시한 물음을 한층 과격하게 바꾼다. 이처럼 사물화한 이미지 내에서(도), 그리고 사이에서(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면 역사란 대체 무엇인가요? 그렇게 발생한 역사가 꼭 지속될 필요가 있나요? 유머가 없는 역사가 무슨 소용인가요? 

히틀러가 집권하자 크라카우어가 망명길에 오른 1933년, 하포는 소비에트 러시아 투어 공연 후 (미국 정부에 건넬 기밀문서를 품에 넣고) 유럽을 거쳐 오는 동안 독일을 휩쓸고 있는 반유대주의의 부상을 목격했다. 그해에 개봉된 걸작 <오리 수프>에서 그루초는 전쟁마저도 그 특유의 화법으로 사물화해 버린다. 그의 발언은 니힐리즘의 극에 달한 유머로서의 역사 개념과 맞닿아 있다. “전쟁 계획은 이래요. 그건 당신 목숨만큼 값진 거죠. 너무 싸게 대하면 안 되죠. 그건 새끼들을 돌보는 고양이처럼 돌봐야 해요. 새끼 고양이 들어봤어요? 물론 아니겠죠. 브리지 게임을 하느라 바쁘니까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어요? 사랑해요.”


<원 웨이 부기우기>(위)와 <27년 후>(아래)


크라카우어의 주지주의적 역설과 막스 형제의 니힐리즘적 유머 사이에서 베닝의 영화와 역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자. 베닝의 쇼트는 막스 형제의 그것만큼이나 유머러스하고 무의미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니힐리즘적이지는 않다. <원 웨이 부기우기>를 이루는 60개의 쇼트는 순차적으로 전개되어 전체적으로 어떤 내러티브를 구성하거나 암시하지도 않는다. 베닝은 쇼트 각각이 “1분짜리 내러티브”라고 말했다. 다만 매 쇼트를 꼭 1분 동안 촬영했다는 뜻은 아니다. 촬영분을 중간중간 조금씩 잘라내고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점프컷’으로 이어 붙여 만든 쇼트도 있으니 말이다. 매 쇼트에 소리(음향, 음성, 음악 등)가 있지만 그것이 해당 쇼트를 촬영하는 동안 실제로 녹음한 것인지는 종종 확실치 않다. 그저 풍경만 보이기도 하고, 사람이나 동물이 등장하기도 하고, 자동차나 트럭이나 기차가 멈춰 있거나 지나가기도 하지만 통상적 의미에서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숨김없이 분명하게 조율된 베닝의 쇼트가 크라카우어를 불안케 하는 과적된 공허함으로 향하는 경우는 없다. 나란히 선 쌍둥이가 전화와 기적 소리에 맞춰 음료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동작을 반복하고, 손발은 뒤로 묶이고 입에는 재갈이 물린 한 사람이 텅 빈 거리에서 뒹굴고 있을 때, 돌연 모종의 수수께끼가 저 쇠락해가는 도시에 내러티브화되지 않은 역사의 감각을 불러오니 말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건 망설임 가운데서 어떻게든 영화를 긍정하려 했던 크라카우어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모든 영역에서 결단적 대결을 불러내야 한다. 이것이 모든 판돈을 건 역사 과정의 도박이다. 자연의 이미지는 그 요소들로 분해된 의식이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내맡겨진다. 그 요소들의 근원적 질서는 사라진 지 오래다. (…) 따라서 의식에는, 자연의 올바른 질서에 대한 예감을 일깨우는 건 아니더라도, 모든 주어진 배열의 임시성을 증명하는 임무가 맡겨진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는 해방된 의식이 이 의무를 수행한다. 그 의식은 자연적 현실을 산산조각내고 부서진 조각들을 서로 바꾸어 놓는다. 사진에 반영되는 이 잔여물의 무질서는 자연요소들 사이의 익숙한 모든 관계를 지양함으로써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그를 수행하는 것이 영화의 가능성 중 하나다. 영화는 잘라낸 부분들을 낯선 형성물로 연결할 때마다 그 가능성을 실현한다. (「사진」 중에서)


크라카우어 식으로 말하자면, <원 웨이 부기우기>에서 베닝이 수행한 작업은 쇼트의 익숙한 연결을 지양하면서 낯선 형성물을 만들어내는 대항-역사(주의)적 전략이겠다. 그처럼 낯선 것이 어느덧 익숙한 것이 되었을 때, 또 다른 부기우기가 시작된다. 물론 이는 <27년 후>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베닝과 왕빙의 영화를 함께, 그리고 또 다른 무수한 영화들을 끊임없이 거듭해서 낯선 연결 속에 두어야 하는 임무를 띤 우리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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