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19

정치적인 것의 장소


 ※ 이 글은 계간 사진잡지 《보스토크》에 연재하고 있는 '영화의 장소' 칼럼을 위해 쓴 것이다. (2026년 3월에 발간한 제53호에 수록.)


2025년 하반기에 전 세계 평단을 일제히 들뜨게 한 폴 토머스 앤더슨의 ‘블록버스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처음 보고 나서, 나는 오래전에 그의 다른 영화에 관해 썼던 글을 다시 찾아보았다. 이런 구절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번 놓치면 영영 따라잡지 못하리라.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스크린에 시선을 집중할라치면 어느새 영화는 끝나버리고 (…) 그 속도에 몸을 내맡긴 채 함께 달려가거나 혹은 도중에 뛰어내리면 그만인 것을. (…) 이 영화의 사운드는 마치 최면술사처럼 관객을 홀리는가 하면, 심장을 직접 가격하는 보이지 않는 망치가 되기도 한다.’ 2002년에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로맨틱 코미디 <펀치 드렁크 러브>를 보고 쓴 이 구절들은 어쩐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보고 쓴 것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정말이지, 앤더슨이 20년 동안 내놓은 열 편의 장편극영화 가운데 이 두 작품만큼 서로 닮아 있는 것도 없다.

하지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펀치 드렁크 러브>를 볼 때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하나의 물음을 영화가 상영되는 162분 동안 줄곧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이 물음은 동시대의 아무리 뛰어난 연출자라도 쉬이 육박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신 솜씨로 조형된 이 의욕적인 액션물의 영화적 박력을 주기적으로 약화하는 성가신 장애물이 되어 갔다. 대체 영화에서 정치적인 것의 자리는 어디(여야 마땅한 것)인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상식을 뛰어넘는 난폭한 집행으로 요즘 전 세계적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ICE(이민세관단속국)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 등 분명 트럼프 시대 미국의 정치적 풍경을 환기하는 설정들이 있기는 하지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딱히 정치적인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정치적인 영화가 정치적 소재를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다룬 영화라는 뜻이 아니라면 말이다. 정치적인 영화는 정치적 소재를 정치적이게끔 하는 (사르트르적 개념을 빌리자면) ‘상황’의 짜임을 구체적으로 감지하게 하는 영화다. 그런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앤더슨이 인종주의의 포스트-파시즘적 양상이라는 상황에 대해 갖는 관심은 <매드 맥스> 시리즈의 조지 밀러가 자원을 둘러싼 현대의 지정학적 상황에 대해 갖는 관심, 혹은 <바쿠라우>의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가 글로벌 사우스의 불균형 개발이라는 상황에 대해 갖는 관심만큼이나 추상적이다. 하지만 이들이 만든 영화는 동시대에 나올 수 있는 그야말로 최상급의 액션물이다.

사실, 구체적 상황의 추상화는 액션영화의 필수적 조건이다. 본질적으로 액션영화는 심리적이기보다 생리적인 장르다. 상황의 구체성에 관객의 지적인 관심이 지나치게 쏠리게 되면 정작 생리적으로 그를 강타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종종 이 교훈을 망각하고 간헐적으로 마비 증세를 보이는 액션 연출에 대책 없이 빠져들곤 한다. <테넷>을 떠올려 보라.) 효과적인 액션영화의 서사가 종종 동화에 가까운 단순한 형태를 띠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서사에 지나치게 가중치를 두는 지적인 관객에게 액션영화의 정치성은 한심한 수준이거나 터무니없이 보수적이고 기껏해야 진보적인 풍미를 가미한 것으로 비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복합적이면서 생리적으로 박력 있는 액션영화는 불가능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한때 액션영화의 거장들은 정치적인 것의 자리를 직접적으로 영화 내부에 두지 않으면서도 정치적인 것을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하게 활성화하곤 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영화의 가능성 또한 배제하지 않는다. 별다른 정치성을 띠지 않은 서사로 전개되는 영화가, 혹은 대단히 보수적이거나 심지어 파시즘적인 서사로 전개되는 영화가 놀랄 만큼 상황의 짜임을 복합적으로 환기하는 정치적 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다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영화에서 정치적인 것의 자리는 작품 내부에 있지 않고 스크린과 객석 사이에 있다. 이때 스크린은 정치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기호가 되는 대신 그 앞에 앉아 있는 관객을 정치적으로 자극하는 공명기가 된다. 이 경우, 상황의 짜임은 스크린 내부가 아니라 그 바깥에서 감지될 수도 있다. 1960년대에 일본 청년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남성적 액션물인 임협영화가 좌파와 우파 양쪽에서 자신들의 정동을 표명하는 대리물로 동시에 수용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는 마키노 마사히로의 걸작 <일본협객전>의 서사를 꼼꼼히 따져보거나 다카쿠라 켄의 스타 이미지를 분석한다고 해서 말끔히 해명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일본협객전>


모순적인 것의 경합이 없는 정치적 무대란 없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적 상황의 짜임을 환기하는 액션영화의 정치적 효과는 어떻게 가능해지는 것일까? 비밀은 부정적인 것의 미적 과잉에 있다. 이 과잉의 일반적 도식은 다음과 같다. 권위주의, 여성 혐오, 배타적 인종주의 등의 부정성이 내면화된 단순한 인물을 설정한다. 그의 내면화된 부정적 성향은 일견 긍정적인 모럴로 전도되어 외면화하는데, 권위주의는 명예와 의리와 충성과 성실로, 여성 혐오는 순수함의 추구로, 배타적 인종주의는 악에 대한 증오로 나타나는 식이다. 그런데 그의 모럴에 도전을 가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는 이를 고스란히 지켜내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액션의 계기는 마련되었다. 중요한 건 여기서부터다. 그의 행동이 아무리 극단적일지라도 감독은 줄곧 그의 편에 머물러야 하는데, 다만 어디까지나 이 동행은 심정적인 공감이 아니라 시각적인 공모의 형태를 띤다. 그의 위엄을 강조하고, 그의 행위에 웅장함을 부여하며, 그의 주변을 빛과 어둠, 각양각색의 색채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하는 공간으로 채워 나간다. 이러한 미적 과잉이 어느 순간 인물의 행동과 묘하게 어긋나며 생기는 지극히 도착적인 감각, 정말이지 영화적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 감각이야말로 관객을 자극하는 공명기의 핵심이다. 다만, 서투른 연출자가 이런 미적 과잉을 자신의 방법으로 택할 때, 그 결과는 우스꽝스러운 일차원적 패러디처럼 비치기 십상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영화적 참조물로 알려진 작품들 가운데 존 포드가 1956년에 내놓은 서부극 <수색자>는 이러한 미적 과잉이 정치적으로 작동하는 가장 탁월한 사례다. 이 영화는 서사적인 수준에서 거의 노골적으로 서부극의 영웅 신화를 비판하고 있는 <아파치 요새>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와 같은 방식으로 정치적이지는 않다. (포드 자신은 이들 영화가 영웅 신화 비판이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정치적인 것이 영화 내적으로 서사화되어 버린 데 대한 자기-부정은 아니었을까? 그가 추구한 이상적 서부극은 <웨건 마스터>처럼 그야말로 동화에 가까운 것이었다.) <수색자>는 서사적으로는 아주 단순한 복수극이다. 인디언에게 자신의 동생 부부를 잃고 어린 조카를 납치당한 주인공은 복수를 하고 조카를 찾기 위해 사막을 헤매고 다닌다. 피의 불순성을 참지 못하는 철저한 인종주의자인 그가 조카를 찾는 이유는 놀랍게도 죽이기 위해서다. 인디언과 몸을 섞고 사느니 그편이 낫다고 믿기 때문이다. 주인공을 연기한 존 웨인은 이 영화에서만큼 불길한 광기가 깃든 눈빛을 보여준 적이 없다. 혹은, 포드는 웨인의 눈빛을 이런 식으로 보여준 적이 없다. 영화에서 그가 저지르는 모든 행동의 극단성은 바로 이 눈빛에 응축되어 있다. 하지만 포드의 영화는 전도된 모럴에 사로잡힌 인간의 수직적 위엄을 광활한 대지와 청명한 하늘의 수평적 엄정함으로 강조하고 부각하는 공모적 미적 과잉의 극치다. 나는 <수색자>가 특별히 정치적으로 올바른 (또는 그릇된)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전도된 모럴의 도착성을 미적 과잉을 통해 강렬하게 체험케 하는 정치적으로 불길한 영화라고는 생각한다.


<수색자>


1970년대 미국영화에 새 기운을 불어넣으며 이른바 ‘새로운 할리우드’에 대한 기대로 들뜨게 했던 당대의 젊은 감독들 가운데 상당수가 <수색자>의 열광적인 팬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비평가, 각본가, 그리고 감독이기도 한 폴 슈레이더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1970년대에 그는 명백히 <수색자>에서 모티브를 차용한 각본을 무려 네 편이나 집필했다. (흥미롭게도 다카쿠라 켄이 등장하는) 시드니 폴락의 <암흑가의 결투>, 마틴 스코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 존 플린의 <롤링 썬더>, 그리고 슈레이더 자신이 직접 연출한 <하드코어>가 그것이다. 이들 영화에서 주인공은 야쿠자에게 납치당한 친구의 딸을 구하러 일본으로 가거나(<암흑가의 결투>), 십 대의 매춘부를 구하기 위해 매춘굴로 쳐들어가 갱들과 총격전을 벌이거나(<택시 드라이버>), 아내와 아들을 살해한 강도들을 찾아 복수하러 멕시코로 가거나(<롤링 썬더>), 실종된 후 포르노 업계로 흘러간 딸을 찾아 나선다(<하드코어>). 무엇보다, 슈레이더의 주인공들은 권위주의, 여성 혐오, 배타적 인종주의 등이 내면화된 단순한 인물들이며, 그들의 부정적 성향은 조금씩 다르게 긍정적으로 전도되어 외면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인물과 시각적으로 공모하면서 부정적인 것의 미적 과잉을 감행하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변혁의 기운이 감돌았던 1960년대를 지나 영화를 만들면서, 그것도 보수적이고 파시즘적이라는 혐의를 받는 온갖 영화적 복수극이 넘쳐나던 시기에, 연출자들이 포드적 대담함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다. 그래서 <택시 드라이버>의 경우처럼 브레송의 소매치기나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생활자를 모델로 삼아 (포드라면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일인칭 내레이션까지 동원해 가며) 심리적 복합성을 추구하기도 했던 것일 터다. 이제 동화는 없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액션의 박력은 불가능하게 된다. 인물은 위엄을 잃고 그저 위험한 존재로만 비치게 된다. 그럼에도 정치적인 것의 자리는 여전히 스크린 바깥에 놓인다.


<롤링 썬더>

<야쿠자>


바야흐로 트럼프 시대에 만들어진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포드의 영화를 그토록 매혹적인 것으로 만들었던 유형의 인물은 아예 주인공의 자리를 잃는다. 이 영화에서 ICE의 대령인 숀 펜은 권위주의, 여성 혐오, 배타적 인종주의를 아무런 전도도 없이 고스란히 외면화하고 있다. 파워 엘리트들의 조직인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에 가입하는 데 문제가 될 과거를 없애기 위해, 십수 년 전 흑인 여성과 관계해 생긴 딸을 찾아 죽이려 드는 그는 그저 풍자적 웃음거리로 비칠 뿐이다. 그는 앤더슨에게 시각적으로는 반감의 대상이고 심리적으로는 무지의 대상이다. 주인공의 자리를 대신하는 건 무장 투쟁 혁명 조직의 일원이었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로, 대령의 딸을 자신의 딸이라 믿고 살아온 그는 애타게 그녀를 찾아 나선다. 그가 지닌 부정성(마약 중독)은 모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포드나 슈레이더의 영화에서라면 그는 대령이 찾아다니는 복수의 대상인 악한에 불과했을 터다. 앤더슨의 각본은 액션영화에 최적화된 동화적 단순함을 띠고 있지만, 부정적 성향을 긍정적으로 전도해 외면화한 인물은 더는 거기에 없다. 보는 이를 홀리는 영화의 속도는 이제 정치적 올바름이 모순 없이 질주하는 속도가 된다. 그리고 정치적인 것은 스크린 내부로 들어가 동화의 교훈이 된다.

슈레이더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보고 나서 페이스북에 짧은 코멘트를 남겼다. “만듦새는 A+급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나 숀 펜에게 일말의 공감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죽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이 영화에서 감지되는 “영화 만들기의 즐거움” 때문에 끝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슈레이더의 말에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이처럼 인물에 대한 공감이나 공모를 배제하지 않고서는 정치적 액션영화를 만드는 건 이제 정말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고. 스크린 바깥에 정치적인 것의 자리를 두고 관객을 얼떨떨하게 만들면서 내기를 거는 것은 트럼프 시대의 미국에선 너무 사치스러운 일이겠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동화 말고는 이제 액션영화의 정치적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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