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6

감추는 것과 지켜보는 것: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아래는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 열린 하마구치 류스케 특별전(2024.5.18~26)에 맞춰 발간된 소책자에 실린 짧은 글이다. 이 글의 일부는 격월간 사진잡지 《보스토크》 제45호(2024년 5월 20일 발간)에 실은 보다 긴 글 「터칭 스페이스: 스마트휴먼의 몸짓과 장소」에 활용되었으며 주제적으로 두 글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너무 위험한 제목이 아닌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곧바로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로, 이것은 주제를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진술이어서, 이것이 실제로 영화의 주제인지와는 상관없이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안의 모든 요소를 이 진술에 비추어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것은 종종 선의 (모순개념까지는 아니어도) 반대개념으로 파악되는 악의 존재를 부정하는 진술이어서, 그 진술과 호응하는 이런저런 의문들을 거듭해서 불러내기 마련이다. 그럼 선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인가? 이런 진술을 자연의 풍광이 전면화된 자못 생태주의적인 소재의 영화 제목으로 내걸었으니 과연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제목이 주는 ‘형이상학적’ 부담을 어떻게 떨쳐낼 것인가? 과연 그는 이 영화를 ‘자연에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진부한 사춘기적 교훈과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져갈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물음을 품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상영되는 스크린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관 출입구를 나설 때쯤이면, 우리는 이 제목이 일종의 눈속임 내지는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정말이지 이 영화는 악의 형이상학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우리는 제목에는 별 뜻이 없다는 하마구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한다. 그는 관객들이 사춘기적 교훈의 세계에서 배회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실은 다른 영화적 도전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어떤 주제 같은 것을 감지했다면 그것이 무엇이건 그냥 기각해버리는 편이 낫다. 또한, 이 제목은 악의 존재를 부정하는 진술이 아니라 기이할 정도로 이 영화에 결핍되어 있거나 부재하는 것에 관객이 시선을 돌리지 못하도록 하는 유인의 진술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짐짓 ‘자연에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형이상학적 교훈을 말하는 척하면서 ‘타쿠미의 스마트폰은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소하지만 번연한 사실을 감춘다.

사소한 것부터 살펴보자. 영화의 주인공으로 하라사와 마을의 ‘심부름꾼(べんりや)’임을 자처하는 타쿠미는 하교 시간에 맞춰 외동딸인 하나를 데리러 가는 것을 깜빡하곤 한다. 그때마다 하나는 마을의 숲을 가로질러 혼자 귀가하곤 하는 것 같다. 대체 그는 학교 교사들에게 왜 미리 전화해두지 않는 것일까? 어느 날 하나가 실종되어 부랴부랴 찾아 나설 때도 그가 경찰서든 어디든 서둘러 전화해 알리는 모습 같은 것은 화면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 스마트폰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마을에 설립 예정인 글램핑장 설명회 차 도쿄에서 온 두 사람 중 하나인 마유즈미의 스마트폰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해 주기도 하고, 나중에 그들이 다시 마을로 찾아올 때 만날 장소의 위치를 그녀의 스마트폰으로 공유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쿠미의 스마트폰은 결코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스마트기기나 디지털 디스플레이가 화면에 보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그때마다 어김없이 부정성과 연관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부정성과 연관된다 해서 악은 아니다. 그저 하마구치가 거북하게 느끼는 것일 뿐이다. 글램핑장 설립을 추진하는 플레이모드사(社)가 컨설턴트와 진행하는 치졸한 온라인 회의의 모니터 디스플레이, 이 회사의 두 직원인 마유즈미와 다카하시가 하라사와를 다시 찾을 때 자동차에 내비게이션용으로 거치해 둔 다카하시의 스마트폰에 뜨는 데이팅 앱의 알림(“축하드립니다! 모카 씨와의 매칭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을의 다혈질 청년이 플레이모드라는 회사가 어떤 곳인지를 검색해 저녁 식사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태블릿 PC의 디스플레이처럼 말이다. 이런 것들을 다룰 때면 하마구치의 연출은 이따금 어색하고 불안정하다. 따라서, 긴 시간 동안 아무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일 없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객석에서 발언을 경청하고 있는 글램핑장 계획 설명회 장면만큼이나 하마구치의 영화적 세계가 어떤 부재 내지는 배제 위에 성립된 부자연스러운 세계인지 분명히 드러나는 곳도 없을 것이다. 그의 연출은 이런 상황에서 때로 비범한 힘을 발한다.

하마구치는 대화 상황의 연출에 능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거의 말의 교환에 집중하고 있는 <해피 아워>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말 이외의 요소들을 보다 빈번히 대화 상황에 끌어들이려 해 온 작가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배제에서 포함으로 향하는 모험이다. 그 모험이 한 편의 영화에서 종종 부분적으로만 시도될 뿐이라 해도 말이다. <해피 아워>의 중심 잡기 워크숍 장면에서,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 그리고 <우연과 상상>의 몇몇 빛나는 장면들에서, 우리는 그가 말과 몸짓을, 그리고 말과 움직임을 한층 복합적으로 함께 다루는 식으로 대화 상황의 역동성을 끌어올리려 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는 오늘날 우리의 소통과 몸짓과 움직임을 비롯해 우리를 둘러싼 장소의 성격까지도 변모시키고 있는 디지털 디스플레이 장치들을 대화와 토론 상황에서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 부분적으로나마 조심스레 건드려본다. 여기에 하마구치의 첫 번째 영화적 도전이 있다. 이 영화를 시각적으로 특징짓는 자연의 범람은,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부재의 부자연스러움을 쉬이 감지하지 못하게 하는 환경으로서의 미장센이다.

하마구치의 두 번째 영화적 도전은 한층 야심적이다. 첫 번째 도전이 동시대적 성격을 띤다면 이 도전은 역사적 성격을 띤다. 그것은 바로 비인칭적 시점을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것이다. 물론 비인칭적 시점을 내러티브 영화에서 오롯이 밀고 나가는 작업이라면 일본영화에는 이미 미조구치 겐지와 오즈 야스지로라는 두 명의 거장이 있다. 미조구치의 우주적 냉혹함의 시점과 오즈의 사물적 냉정함의 시점에 필적하는 비인칭적 시점을 과연 오늘날의 일본영화가 회복할 수 있을까? 분명 등장인물의 움직임과 조응하는 것이지만 결코 그의 시점이라고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숲의 나무들을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극단적인 앙각 트래킹숏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이 영화는 예사롭지 않다. 이는 하마구치가 거기에 깃든 역사적 야심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동차의 시점’이 구사된 세 개의 롱테이크다. 하나를 데리러 학교로 찾아간 타쿠미가 교사에게 딸이 이미 하교했다는 말을 듣고 차를 몰고 떠나는 동안, 카메라는 자동차의 후방에서 멀어져 가는 도로를 계속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오프닝에서 보았던 앙각 트래킹숏과 유사한 방식으로 숲의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찍은 숏이 뒤따른다.) 마유즈미와 다카하시가 숲속에 있는 타쿠미의 집을 찾아갈 때, 카메라는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는 타쿠미의 모습을 다카하시가 모는 자동차 측방에서 계속 응시하고 있다. 언뜻 이것은 다카하시의 시점숏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차가 멈추고 프레임 내부로 마유즈미를 뒤따라 그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면서 이내 그것은 어느 인간 주체에게도 귀속되지 않는 숏이 된다. 하나를 찾아 나선 우동집 부부의 자동차 후방에서 초저녁의 어스름 속에 멀어져 가는 도로를 응시하던 카메라는, 그들이 차를 멈추고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갈 때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의 방향을 돌리기도 한다.



이런 롱테이크들은 기묘한 비인칭적 시선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영화 전반에 걸쳐 적용된, 파란색을 주조로 삼으면서 이와 대조를 이루는 붉은색과 주황색을 이따금 화면에 침입시키는 색채 설계만큼이나 인위적인 느낌도 없지 않다. 기법 자체가 눈길을 끄는 스타일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확실히 이것은 거장의 영화라기보다는 야심가의 영화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영화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를 모험으로 이끄는 소수의 거장보다는 모험의 결과를 우리에게 알리는 야심가 여럿인지도 모른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마구치가 그러한 필요에 가장 걸맞은 우리 시대의 시네아스트 가운데 하나임을 다시금 수긍케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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